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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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하게(vivid) 꿈을 꾸면(dream) 모두 이루어진다(realization)'고 주장함으로써 단숨에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랐던 책을 기억하는지요? 당시 무명의 시인이자 초등학교 선생이었던 작가는 그 책으로 인해 일약 유명인이 되기도 했었구요. 신드롬과 같았던 당시의 일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때 그 책을 읽었던 대한민국의 수많은 독자들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라도 정주영이나 이병철과 같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갑부의 반열에 쉽게 오를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단순히 상상만으로 그 모든 게 가능하다고 믿었던 순진한 독자들은 제 주위에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는 다수의 신도를 거느린 신흥종교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열기가 채 사그라들기도 전에 세계 금융위기로 촉발된 가혹한 현실은 화려한 상상의 세계에서 머물던 그들의 꿈을 실의와 낙담 속으로 내동댕이쳐버렸습니다.

 

우리가 신화와 SF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나마 엄혹한 현실을 잊고 상상의 세계에 머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신화와 SF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사는 짧은 시간대를 앞뒤로 길게 연장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SF영화의 고전처럼 받아들여지는 '스타워즈;만 하더라도 과거에는 영화 속 상상의 세계에서만 머물던 일들이 지금에 와서는 많은 것들이 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면 우리는 SF소설을 읽음으로써 생명을 유지한 채 결코 닿을 수 없는 미래를 상상 속에서나마 미리 살아보는 행운을 누리는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를 읽다 보면 줄곧 그런 상상에 빠지게 됩니다. 2015년 11월의 어느 날이 아닌, 먼 먼 미래의 어느 날, 예컨대 생명이 있는 모든 피조물이 사라진, 로봇이나 기계인간이 지배하는 지구의 일상을 그려본다거나, 타임머신을 타고 원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바캉스를 떠나는 나 자신을 그려보는 것입니다.

 

"나 역시 당신 심장과 똑같은 것을 내 가슴속에 감추고 있어. 지구상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유기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야. 우리는 모두 기계야.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그런 환상을 품도록 우리 뇌가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이야. 땅콩 자동판매기와 당신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당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뿐이야. 꿈에서 깨어나야 해." (p.29)

 

뛰어난 이야기꾼으로서의 작가는 현실에서 건져 올린 소재에 기발한 상상력을 더하여 독자가 읽고 저마다의 상상력을 더할 수 있는 18편의 이야기를 이 한 권의 책에 엮어 놓았습니다. 이 책의 표제작인 "가능성의 나무"는 작가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컴퓨터가 체스를 두면서 다음 수(手)를 모두 내다볼 수 있다면, 컴퓨터에 우리 인간의 모든 지식과 미래에 대한 모든 가정을 입력해서 인간 사회가 나아갈 길을 단기적으로, 중기적으로, 장기적으로 제시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가의 생각 말입니다.

 

책에는 단편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제법 긴 이야기도 있지만 단편소설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서너 쪽 길이의 아주 짧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 중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게 무슨 소설이야. 이런 거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라고 말입니다. 10 이상의 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어떤 사회에서 더 많은 수를 알고 싶어 하는 한 인간의 지적 욕구와 그의 삶을 다루고 있는 '수의 신비'를 읽을 때는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작가의 글에 대해 혹평하기보다는 '그는 자신의 생각을 모두 이야기 식으로 구성할 뿐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의 명제를 한 편의 이야기로 바꿀 수 있는 그의 능력이 놀라울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는 화살을 맞고 쓰러지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한 싸움에서는 천장을 높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바닥이 무너져 내리지 않게 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p.166)

 

눈치채셨겠지요? 작가는 단순히 이야기로서의 소설을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독자들이 읽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어떤 실마리를 제공한다거나, 작가의 생각이나 철학을 이야기 속에 교묘히 숨겨놓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또는 이 책에 나오는 단편소설이 나중에 작가가 쓴 장편소설로 재탄생하기도 합니다. 제가 특히 감탄하며 읽었던 이야기는 '완전한 은둔자'였습니다. 유명한 의사였던 주인공은 어느 날 자신의 뇌에 딸려 있는 여러 기관들을 절제해달라고 동료 의사들에게 부탁하여 진짜 뇌라고 할 만한 것만 남겨 놓습니다. 그 뇌는 영양액으로 가득찬 표본병 속에 담겨 일정한 온도로 보존되는데 육체와 연결되어 일반인과 같은 삶을 살았던 아내와 자식들은 수명을 다하여 죽게 되지만 뇌만 남은 주인공은 몇 대에 걸쳐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탐구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으로 떠났던 한 남자의 깊디깊은 사유는' 아이들의 장난에 의해 개의 먹이가 되는 신세로 끝이 납니다.

 

" 죽음을 맞기 직전에 귀스타브는 깊은 내면세계의 밑바닥에 닿았다. 하지만 명상을 끝내면서 그가 발견한 것은 하나의 심연뿐이었다. 그 심연을 보고 그는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자 문득 죽음이야말로 진정으로 흥미진진한 마지막 모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평온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개는 식사를 끝내고 가볍게 트림을 하였다. 그리하여 귀스타브 루블레의 사유 중에서 아직 남아 있던 것들이 모두 저녁 공기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p.185~p.186)

 

미국의 유명한 SF소설 작가이며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교의 창시자인 엘 론 허바드(L. Ron Hubbard)는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인간이 5초 이후의 미래만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삶은 달라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면접이나 미팅에서 상대방을 판단하는 시간, 손에 들려진 전단 광고를 읽을까 말까 결정하는 시간 등 5초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5초 후의 미래를 100% 정확하게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의 정신 확장 및 인류 문제 해결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이언톨로지 교가 톰 크루즈를 비롯한 유명 연예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였던 이유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허바드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은 미래의 예측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젬병이기 때문입니다. SF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도 미래를 볼 수 없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가능의 영역으로 이끌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실이 아닌 판타지의 세계는 언제나 매력적입니다. 그것이 꿈이든 미래든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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