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주는 레시피
공지영 지음, 이장미 그림 / 한겨레출판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말매미가 악을 쓰며 울었던 어느 해 여름은 몹시도 더웠다. 그 더위가 말매미의 울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더위 때문에 말매미가 더 크게 울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펄펄 끓는 더위를 속절없이 견뎌야만 했다. 이유도 모른 채 말이다. 하루 중 더위가 하염없이 쌓이는 오후 세 시의 길모퉁이에는 허공을 오가는 참새의 무리만 눈에 띌 뿐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인적이 끊긴 보도 위를 눈 부신 햇살만 가득했었다.

 

올해 여름도 다르지 않았다. 몹시도 무더웠던 그해 여름에 나는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를 읽었었다. 작가는 그때, 10대를 지나 이제 막 청년기에 접어들던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들을 자신의 책에 또각또각 적었었다. 수험생의 엄마였던 작가가 고등학교 3학년인 자신의 딸에게 보내는 무한 긍정의 메시지는 읽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눈시울이 젖게 했었다. 그 이후로 반복이 일상화된 나날들이 무수히 오고 갔으며 '위녕'이라는 이름은 몇 년의 긴 공백과 함께 잊혀졌다. 그래, 그녀의 딸 이름이 위녕이었지. 작가는 이제 20대 후반, 취업 준비를 하는 위녕에게 당부의 말을 전한다. 27개의 초간단 요리법과 함께 말이다. 공지영의 <딸에게 주는 레시피>를 읽은 요 며칠은 몹시도 더웠었다.

 

"위녕, 산다는 것도 그래. 걷는 것과 같아. 그냥 걸으면 돼. 그냥 이 순간을 살면 돼. 그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그 순간을 가장 의미 있게, 그 순간을 가장 어여쁘고 가장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만들면 돼. 평생을 의미 있고 어여쁘고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 수는 없어. 그러나 10분은 의미 있고 어여쁘고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 수 있다. 그래, 그 10분들이 바로 히말라야 산을 오르는 첫번째 걸음이고 그것이 수억 개 모인 게 인생이야. 그러니 그냥 그렇게 지금을 살면 되는 것." (p.27)

 

작가는 이제 딸 때문에 애면글면 하지 않는다. 그게 글에서도 보인다. 마치 오래 된 친구처럼, 언니처럼, 인생의 선배로서 다정할 뿐이다. 책은 세상을 사는 요령을 담은 '1부 - 걷는 것처럼 살아', 어떤 마음과 결심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를 담은 '2부 - 우리가 끝내 가지고 있을 것', 사람 사이의 관계와 사랑과 욕망과 집착 등 다분히 관조적인 이야기들을 담은 '3부 - 덜 행복하거나 더 행복하거나'에 이어 '작가의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작가는 삶의 단상들을 조곤조곤 들려주는가 하면 때로는 따끔한 충고와 함께 자신의 마음 속 상처를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기도 한다. 그리고 응원의 메시지도 잊지 않는다. 작가는 이제 자신의 굴곡진 삶으로 인해 받았던 젊은 시절의 상처와 가슴아팠던 기억들을 담담하게 풀어 놓는다. 그 경험들을 통해 배웠던 깨달음은 어쩌면 이제 위녕과 같은 젊은 청춘들에게 필요할 뿐, 자신의 몫으로 꽁꽁 간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결혼 생활 동안 마치 '누가 뒤에서 총이라도 겨누는 것처럼' 이 모든 것들을 죽도록 하고 비난을 받아왔어. 그 때는 참으로 펄쩍펄쩍 뛸 거 같더라고. 솔직히 지금은 내가 왜 그 때 더 열심히 음식을 하고 집안을 꾸미지 않았나, 후회를 하는 게 아니라. '대체 뭐한다고 그렇게 죽자고 음식을 만들고 집을 꾸몄나' 이런 후회가 든다니까." (p.291)

 

엄마와 딸이라는 특수한 관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생각할 때가 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다소 껄끄러운 사이는 아주 잠시일 뿐, 딸이 독립하는 그 순간부터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로 한동안 살면서 자신의 삶이 딸의 삶 속에 투영되고, 언젠가 자신의 사후에도 그 삶이 면면히 이어질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나는 언제나 부러움 속에서 바라보곤 한다. 인생의 후반기를 살고 있는 작가 자신의 입장에서 딸의 건강은 늘 걱정 1순위였을 터, 혹여라도 끼니를 굶어 자신처럼 기운이 떨어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을 작가는 딸을 위한 레시피를 정말 꼼꼼히도 적었다.

 

"물론 엄마도 가끔 질 낮은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들을 막 때우고 싶은 때가 있단다. 그게 특별히 먹고 싶어서라면 모르겠는데 그냥 귀찮아서 말이야. 잘 생각해보면 바로 그때가 실은 엄마의 생 전반의 기력이 떨어지는 때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알지. 음식은 그런 바로미터 역할을 하고 그럴 때 엄마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한단다. 이 식사가, 이 식사의 앞과 뒤가 내 인생의 많은 모자이크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야." (p.312)

 

추석이 코앞인데 한낮의 기온은 여름처럼 높다. 그러나 하늘은 어찌나 높고 푸르던지 한 입 베어 물면 투명한 얼음물이 입안 가득 고일 것만 같다. 상큼하다 못해 레몬처럼 신 하늘을 나는 잊지 않으려는 듯 이따금 올려본다. 그리고 더위가 켜켜이 쌓이는 오후의 어느 시간에 나는 그때처럼 공지영의 에세이를 읽었다. '위녕!', 하고 부르면 여름 한낮의 더위와 삶의 무게에 짓눌린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릴 것만 같다. 그런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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