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사회에서의 개인은 정보의 무차별적인 공습에 의해 쉽게 상처받고 그 상처받은 개인이 자신도 모르게 정형화된 어떤 보편적인 틀(또는 룰)에서 벗어난 행동을 할 때 자신이 속한 사회로부터 방치되고 소외되는 것은 주변에서 너무도 흔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현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시큰둥하고 뜨뜨미지근할 뿐이다. 같은 일을 되풀이하여 목격함으로써 우리가 처음에는 충격으로 받아들였던 한 사건은 점차 퇴색하여 희미해져가고 사회로부터 도태되거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알 수 없는 죄책감이나 서글픔은 먼 옛날의 신화처럼 산화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것은, 아직은 도태되지 않은 나 자신도 언젠가는 사회로부터 추방된 무리 속에 속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그것이 현실로 일어날 가능성은 백 퍼센트에 가깝다.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거나, 어떤 사고로 인하여 장애를 입거나 하는 피할 수 없는 육체적 손실로 인하여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소외되었을 때 '나만 아니면 돼.'하는 식의 차디찬 눈길을 받는다면 그 기분은 어떨지.

 

오늘은 세월호 승무원들에 대한 항소심 재판이 있었던 날이다. 선장과 나머지 14명의 승무원에 대한 판결이 있었고 그것으로서 세월호 사건은 일단락이 된 것으로 치부될지 모른다. 진실도 밝혀진 게 하나도 없는 이 마당에 세월호 유가족들은 어쩌면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영원히 잊혀질지도 모르고 사회에 편입되어 평범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그들의 필사적인 노력은 사회를 위협하는 적대적 행위로 인식될 수도 있다. 물대포와 최루액을 뿌린 경찰의 행태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오죽하면 국제엠네스티도 “평화적인 집회와 행진을 진압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그 유가족 모두에 대한 모욕적인 처사”라고 비판했겠는가.

 

세간에 떠돌고 있는 '성완종 리스트'도 따지고 보면 어느 한 개인의 욕심에 의한 뇌물 수수 사건이 아니고 현 정부의 정권 획득 시기에 있었던 비열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이나 대중은 거론된 인물들만 하루 빨리 도태되기를, 그렇게 됨으로써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드러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듯하다. 대중으로부터 추방된 한 개인은 상처받기 쉽고, 그 상처받은 개인은 대중으로부터의 개별적인 관심을 받지 않는 한 치유되기 어렵다. 잊는 것과 잊혀진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야누스의 두 얼굴'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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