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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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등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예전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고 느낄 것이다.  학생의 봉사활동 기록이며 수상기록뿐만 아니라 독서기록에 이르기까지 학생의 일 년 생활이 어떠했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품행이 방정하고 학급의 모범이 되며'로 시작되는 두어 줄짜리 학적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나는 이따금 나의 인생 기록부를 매년 작성해 줄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한다.  고등학생의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담임선생님처럼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은 자신의 운명에 이끌려가는 한 인간의 비극을 가감없이 다루고 있다.  "부끄럼 많은 인생을 보냈습니다."로 시작되는 주인공 '오바 요조'의 수기는 소심하고 겁 많았던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의 궤적을 그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아기 때부터 스물일곱 살로 죽기 전까지 한 인간의 심리적 궤적을 좇은 이 소설은 자신의 생각을 사회에 외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철저히 파멸시키는 쪽으로 이끌어갔던 다자이 오사무 자신의 삶이기도 했다.

 

오래전의 블로그 포스팅에서 나는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다.  "중독은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과 마주할 용기가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좋아하는 대상에 끌리는 현상을 중독이라 이해한다.  중독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과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하다."라고.  나는 중독현상에 대해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어떤 현상이나 대상에 대해 겁을 먹거나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중독 현상은 피할 수 없다.  <인간 실격>의 주인공 오바 요조도 그랬다.  인간에 대한 요조의 공포는 끔찍한 것이었다.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쨋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無)야. 바람이야. 텅 비어있어." (p.19)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p.27)

 

태어날 때부터 다른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요조는 그 인간 세계에 스스로 동화되기 위해 ‘익살꾼’을 자처해 가며 노력하지만 번번이 좌절한다.  중학교 시절 타인을 즐겁게 하기 위한 그의 익살이 일부러 지어낸 것, 즉 허위라는 사실이 친구 다케이치에 의해 밝혀지던 날 요조는 충격을 받는다.  도쿄의 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때 요조는 호리키와 교제한다.  그를 통하여 요조는 술과 여자를 알게 되고 그와 함께 방탕한 생활을 영위한다.  우연히 알게 된 사기범의 아내 쓰네코와 동거를 시작하고 결국에는 동반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여자만 죽고 그는 살아서 구속되었지만 기소 유예로 풀려난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저는 상처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어 안달하며 예의 익살로 연막을 쳤습니다."    (62p)

 

술과 여자를 전전하던 그는 결국 마약에 중독되고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거듭된 동반 자살 기도에서 여자만 죽고 혼자 살아남은 요조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본가로부터도 절연을 당한다. 그는 외딴 시골집에서 쓸쓸히 죽음만을 기다리는 ‘인간 실격자’가 되고 만다.  이해타산과 체면으로 영위되는 인간 세상과 사회 질서의 허위성, 잔혹성을 정면으로 다룬 <인간 실격>은 어떻게든 사회에 융화하고자 애쓰고 순수한 것, 더럽혀지지 않은 것에 꿈을 의탁하고, 인간에 대한 구애를 시도하던 주인공이 결국 모든 것에 배반당하고 인간 실격자가 돼가는 패배의 기록이다.

 

그러나 내가 읽은 <인간 실격>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주인공 요조가 현실도피의 일환으로 중독에 빠져드는 과정으로 읽혔다.  말하자면 요조는 허위에 가득찬 인간들과 제정신으로는 한시도 같이 살 수 없었던 까닭에 어려서는 익살로 자신을 숨기고, 조금 나이가 들어서는 술과 여자에, 최종적으로는 마약에, 그마저도 어려워지자 자살기도로 이어졌던 것이다.  결국 익살과 술,여자, 마약, 자살은 그 형태와 대상만 바뀌었을 뿐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한 인간의 처절한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다.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권하는데 거절하면 상대방 마음에도 제 마음에도 영원히 치유할 길 없는 생생한 금이 갈 것 같은 공포에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때 저는 그렇게 반미치광이처럼 원하던 모르핀을 실로 자연스럽게 거절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같은' 요시코의 무지에 감동한 것일까요.  저는 그 순간 이미 중독자가 아니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p.130)

 

자기 안으로 한없이 침잠해 결국 존재 자체를 세상에서 없애버린 오바 요조는 비록 패배자이긴 하지만 자신에게 가장 정직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소설의 구성은 ‘나’라는 화자가 서술하는 서문과 후기, 그리고 이 작품의 주인공 요조가 쓴 세 개의 수기로 이루어져 있지만 실은 요조의 수기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수기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씌어 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p.134)

 

고등학생의 생활기록부처럼 저마다의 인생기록부를 받아볼 수 없는 우리는 이따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잘못된 삶의 행로에 리셋 버튼을 눌러야 할 필요가  있다.  비록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는다 할지라도 인생의 방향이 잘못되었다 판단되면 과감하게 리셋 버튼을 누를 수 용기.  운명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작 필요한 것은 그것일지 모른다.  용기 하나만 있으면 다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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