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사람의 의식의 세계, 말하자면 생각의 영역인 그곳은 오롯이 그 사람만의 고유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른 누군가의 영역과 중첩되거나 공유될 만한 그런 공간은 없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사람은 근본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겠군요.  고성능 카메라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그곳은 결국 '촬영 불가'의 견고한 딱지를 붙인 채 굳게 잠겨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나는 오늘 의식의 영역과 현실의 영역, 두 곳 모두를 촬영할 수 있는 카메라를 둘러 메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예컨대 <어둠의 저편>을 보여주려는 것이죠.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어둠의 저편>을 소재로 말입니다.  핼리캠을 타고 하늘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거대한 의식의 총합은 현실에서의 거대 도시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주 멀리서 바라볼 때, 개개인의 영역은 너무도 희미하고 작은 것이기에 부분으로서의 개인적 영역은 눈에 띄지도, 주목을 받지도 못합니다. 

 

"시간을 가지고, 자기의 세계 같은 것을 조금씩 만들어왔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런 세계에 혼자 있으면, 어느 정도 안도감이 생기거든요.  하지만 그런 세계를 일부러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 자체가, 나 자신이 상처받기 쉬운 약한 인간이라는 뜻 아닐까요?  그리고 그 세계란 것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세계에 불과하잖아요.  골판지 상자로 만든 집처럼,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듯한......"     (p.231)

 

이 소설의 주인공인 '마리'의 목소리가 들리는군요.  지금 시각은 오후 11시 56분입니다.  마리는 지금 도시의 어느 골목에 위치한 패밀리 레스토랑 '데니스'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  사건은 '마리'의 언니 '에리'의 동창이며, 한때 언니와 함께 더블 데이트를 하기도 했던 '다카하시'를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때마침 아버지는 교도소에 복역하는 바람에 고아 아닌 고아의 경험을 하게 되었던 '다카하시'는 우연히 만난 '마리'가 그저 반갑기만 합니다.  '다카하시'는 지금 트럼본 연습을 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사실 '다카하시'는 음대생이 아닌 법률을 공부하는 법학도이지만 트럼본의 매력에 빠져 공부는 뒷전이고 악기에 빠져 지내는 중입니다.

 

그 시각 언니 '에리'는 잠에 빠져 있습니다.  사실 '에리'는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행위만 하면서 두 달째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침대에 누워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에리'의 방에는 텔레비전이 한 대 있습니다.  텔레비전의 화면에는 '에리'만의 생각의 영역, 그 무의식의 세계가 중계되고 있습니다.  '마리'보다 두 살 위인 언니 '에리'는 어려서부터 빼어난 외모와 약한 체질로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에리'는 잡지 모델로 활동하며 TV에도 출연하였죠.

 

"하지만 에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  어렸을 때부터 주어진 역할을 잘 소화하고, 주위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처럼 돼버렸으니까.  마리의 말을 빌리면, 어엿한 백설공주가 되려고 애써 노력해 왔던 거지.  확실히 남들이 잘한다 하고 떠받들어 주었다고 해도, 그건 때로는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자기라는 개성을 확립해 나갈 수가 없었을 테니까."    (p.179)

 

'다카하시'의 말입니다.  '에리'에 대한 '다카하시'의 분석인 셈이죠.  때로는 가까이 있는 가족보다 멀리 있는 타인이 그 사람을 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데니스'에서 책을 읽던 '마리'는 러브호텔 '알파빌'의 매니저인 '카오루'를 만나게 됩니다.  '다카하시'는 이미 지하 연습실로 떠난 뒤였죠.  '알파빌'에서는 그날 밤 중국인 매춘부를 폭행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던 중 '알파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다카하시'가 '카오루'에게  '마리'를 소개한 것입니다.

 

'에리'는 여전히 잠에 빠져있습니다.  미동도 없이 말입니다.  어느 순간 '에리'는 침대와 함께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이동합니다.  그곳은 어떤 풍경도 없는 폐쇄된 공간입니다.  '에리'는 그 공간에서 잠이 깹니다.  그러나 이곳, 즉 현실의 영역으로 넘어올 수는 없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들리지 않는 외침만 보일 뿐이죠.

 

'마리'는 중국인 매춘부를 무사히 보냈습니다.  '알파빌'에는 '카오루'와 같이 일하는 '고오로기'가 있습니다.  귀뚜라미라는 뜻의 그녀 이름은 본명이 아닙니다.    회사원이었던 '고오로기'는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러브호텔이라는 익명의 공간을 전전하며 몸을 숨기고 있는 상태죠.  '마리'에게 고마움을 느낀 '카오루'는 스카이락'에서 음료를 대접합니다.  중국인 매춘부를 때리고 옷과 소지품을 탈취한 범인은 평범한 회사원인 사리가와입니다.  그는 텅 빈 사무실에서 야간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언니 '에리'는 다시 현실 속의 자신의 방으로 이동한 상태입니다.  '다카하시'는 잠깐의 휴식 시간에 '마리'가 있는 '스카이락'으로 찾아옵니다.  그들은 공원으로 이동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헤어집니다.  '마리'는 다시 '알파빌'로 자리를 옮겨 '고오로기'와 대화를 합니다.  '고오로기'로부터 들었던 인상깊은 말이 있군요.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  신문의 광고 전단지나, 철학책이나, 에로틱한 잡지 화보나,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나, 불에 태울 때면 똑같은 종이조각일 뿐이지.  불이 '오, 이건 칸트로군'이라든가, '이건 요미우리신문의 석간이군'이라든가, 또는 '아, 이 여자 젖통 하나 멋있네'라든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타고 있는 건 아니잖아."    (235)

 

연습을 마친 '다카하시'는 '마리'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역으로 향합니다.  이제 어둠은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데이트 요청을 하는 '다카하시'에게 '마리'는 다음 주에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카하시'는 '마리'에게 긴 편지를 쓰겠노라고, 그리고 느긋하게 기다리겠노라고 말합니다.  집에 돌아온 '마리'는 언니 '에리'의 방으로 들어갑니다.  '에리'는 여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고장난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을 꼭 안아주고 위로해주던 어린 시절의 언니 '에리'는 '마리'의 의식에서도 이미 멀어진 상태라는 걸 자각합니다.  '마리'는 언니의 침대에 같이 누워 눈물로 호소합니다. '제발, 돌아오라'고.  오전 6시 52분입니다.

 

하루키 데뷔 25주년 기념작인 <어둠의 저편>은 그동안 선보였던 작품과는 다소 이질적인 면을 갖고 있습니다.  가족의 문제를 깊이 파고든 점도 그렇고, 카메라의 영상이 바뀌는 것과 같은 화면 전환도 그렇습니다.  작가는 그 속에서 인간 의식의 단절과 개개인의 고독을 무미건조한 문체로 냉철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카하시'와 '마리'의 만남을 통하여 개별적 인간의 의식의 공유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길고 긴 편지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어둠이 다 끝나기 전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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