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을 쫓는 모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문학사상사 / 199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빅 브라더(big brother)'의 출현은 필연적인 듯 보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과거 7,80년대의 군부 독재 시절에 우리나라 국민의 인권은 그야말로 개의 밥그릇에 버려진 생선 가시보다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지하철역을 빠져 나올라치면 전경의 검문검색이 수시로 있었고, 어쩌다 조금 따분하고 지루해 하는 전경과 마주친 여대생이라면 어김없이 그들의 놀잇감이 되곤 했습니다.  검문을 한다는 핑계로 핸드백을 열어보는가 하면 그 안에서 혹시 담뱃갑이라도 발견되면 옳다구나 하고는 행인들에게 이것 좀 보라는 식으로 길바닥에 쏟아놓고 히히덕거리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담배를 피우는 여자를 거리에서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기에 그들의 눈에 비친 여대생은 소위 '날라리'로 오인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시절이 변하여 인권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도, 법과 정치 제도도 크게 변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들이 지닌 권력과 부를 지키려는 욕심은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약해졌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 국정원의 타겟이 된 유모 씨의 경우도 그런 것이겠지요.  어찌 보면 현실은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더 실제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권력과 부에 대한 욕심을 그린 소설은 많이 있지만 저는 오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양을 쫓는 모험>을 통하여 살펴보려 합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나'에게 어느 날 친구 '쥐'(별명)의 편지가 배달됩니다.  발신지도 밝히지 않은 의문의 편지였죠.  광고업을 하는 '나'는 P보험사의 PR광고에 우연히 그 친구의 편지에 동봉된 양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진이 발단이 되어 우익계의 거물로부터 압력을 받습니다.  사진에는 별의 문양이 찍힌 특별한 양이 포착되었던 것입니다.  그 양은 인간을 숙주로 삼아 자신이 의도하는 세계를 만들려는 그야말로 특별한 양이었죠.

 

사실 우익의 거물은 노쇠하여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었습니다.  후계자를 찾고 있던 중 그 사진이 눈에 띈 것입니다.  그 양은 죽어가는 우익계의 거물 머리 속에 기생하며 살다가 가치를 다한 그의 몸뚱아리로부터 빠져나왔기 때문에 양이 선택한 새로운 인물이 우익계의 거물을 대신할 후계자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우익계 거물의 비서실장은 '나'에게 한 달의 여유를 줄 테니 그 양을 찾으라고 합니다.  '나'는 친구 '쥐'의 행방을 찾아 삿포로로 향합니다.  '내'가 묵었던 돌핀 호텔에서 한때 양의 숙주였던 양 박사를 우연히 만나 사진 속의 장소를 알아냅니다.  그곳은 '쥐'의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쥐'의 별장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쥐'를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텅 빈 별장에서 무작정 기다리던 '나'는 양으로 변장한 한 사내를 만납니다.  그 사내는 죽은 '쥐'의 분신이었습니다.  언제나 나약하기만 했던 '쥐'는 자신의 몸 속에 양을 받아들임으로써 일본 전체를 지배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몸에 들어온 양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였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는 무기력한 삶을 단호히 거부한 것입니다.  죽은 '쥐'는 자신이 양에게 지배당했던 상태를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걸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  그건 마치 모든 것을 집어삼킨 도가니 같지.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악한 거야.  거기에 몸을 묻으면 모든 것이 사라져.  의식도 가치관도 감정도 고통도 모든 게 사라지는 거야.  우주의 한 지점에 모든 생명의 근원이 출현했을 때의 다이너미즘에 가깝지."    (p.422) 

 

어쩌면 나에게도 어렵고 힘든 상황,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면 영혼이라도 팔아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힐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나약하고 무기력한 인간에게는 또한 그런 유혹을 과감히 뿌리칠 수 있는 용기도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 책 속의 '쥐'처럼 말입니다.  책에서 주인공인 '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평범한 소시민일 뿐입니다.  '나'의 행보는 누군가의 각본에 의해 짜여진 그런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우연의 대지를 정처 없이 방황할 수도 있다.  마치 어떤 식물의 날개 달린 종자가 변덕스런 봄바람에 날려오듯이.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연성 같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명확하게 일어나 버린 일이며,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명확하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배후의 '모든 것'과 눈앞의 '제로' 사이에 끼인 순간적인 존재고, 거기에는 우연도 없고 가능성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두 가지 견해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것은(대개의 대립되는 견해가 그렇듯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 똑같은 요리 같은 것이다."    (p.101)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은 머리 속에 다들 욕심 많은 양을 한 마리씩 품고 있는 숙주와 같은 사람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여지는 사람이 사악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머리를 장악한 양이 나쁜 것이겠지요.  그런 까닭에 한 사람의 인권을 깔아뭉개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테구요.  인간의 감정과 가치관이 남아있다면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양의 탈을 쓴 인간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빅 브라더', 아니 우리나라에서는 '빅 시스터'인 탐욕스러운 양이 사라질 날은 언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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