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 -상 (양장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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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는 안개가 짙었다.

이렇게 농무(霧)가 낀 날의 대기는 달착지근했던 지난 밤의 꿈을 생각나게 한다.  의식이 살짝 걷힌 듯한 틈새로 이치에 닿지 않는 무의식의 장난들이 활개를 치던...  어깨에 매달린 꿈의 무게는 아침운동을 나서는 내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더이상 확산되지 못한 채 안개 속에서 자맥질을 하는 역한 냄새들.  고무 타는 냄새와 화석연료가 불완전 연소를 할 때 내뿜던 역한 냄새가 비위를 거스르며 내 발길을 붙잡는다.  약간의 편두통이 있었고, 메슥메슥한 고약한 느낌이 있었다.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올 때에도 어둠은 채 걷히지 않았고, 그 희미한 어둠 속에서 농무는 더욱 짙어진 듯했다.  어느 만화영화의 배경처럼 안개가 낀 숲은 괴괴한 느낌마저 감돌았다.  나는 그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생각했다.  내 의식의 투명한 유리잔에 지문처럼 묻어나는 무의식의 저편.  뜬금없다.  인적이 끊긴 조용한 숲에서 나는 그렇게 <해변의 카프카>를 떠올렸고, 분주히 나무를 타는 청설모 한 쌍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해변의 카프카>를 처음 읽었던 것은 내가 처음부터 무모하게 시작했던 사업을 정리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막연히 소일하고 있었고, 다가올 미래는 마치 오늘의 안개처럼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불안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책을 읽고 있던 내가 남들 눈에는 태평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당시의 내 불안의 정도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식을 집중할 수 없을 만큼 심한 것이었다.  나는 내 의식을 옥죄어 오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순간순간의 기억마저 의도적으로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 소중한 것을 계속 잃고 있어."  전화벨이 그친 다음에 그는 말한다.  "소중한 기회와 가능성, 돌이킬 수 없는 감정, 그것이 살아가는 하나의 의미지.  하지만 우리 머릿속에는, 아마 머릿속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을 기억으로 남겨두기 위한 작은 방이 있어.  아마 이 도서관의 서가 같은 방일 거야.  그리고 우리는 자기 마음의 정확한 현주소를 알기 위해, 그 방을 위한 검색 카드를 계속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지.  청소를 하거나 공기를 바꿔 넣거나, 꽃의 물을 바꿔주거나 하는 일도 해야 하고.  바꿔 말하면, 넌 영원히 너 자신의 도서관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거야."    (하권 p.449)

 

<해변의 카프카>는 서로 관련도 없어 보이는 사건과 인물들이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오늘 아침 집 근처의 도서관에서 빌린 <해변의 카프카>를 만10년 만에 다시 읽는다.  그때의 불안했던 내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쨌든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고, 그간의 추억들이 비 오는 날 솔잎에 맺힌 작은 물방울처럼 조롱조롱하다.  내가 불러낸 기억들과 얼굴을 맞대고 함께 읽었다.  나는 그때 '왜 작가는 하필이면 오이디푸스 신화를 책으로 엮을 생각을 했을까?' 하고 궁금해 했으며, 시간의 비가역성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시공간을 넘나드는 소설의 전개 방식에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었다.

 

"다무라 군, 우리 인생에는 되돌아갈 수 없는 한계점이 있어.  그리고 훨씬 적기는 하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점도 있지.  그런 한계점에 이르면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들은 그저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거야."    (상권 p.315)

 

한참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나는 한 편의 소설을 매개로 그때의 나를 되돌아 본다.  나는 그때 상상력이 결여된 공허한 인간이었고, 오직 그 불안했던 현실의 한 순간이 훌쩍 다른 시간대로 옮겨지기를 간절히 원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는 그 고통의 순간순간을 한발짝도 뛰어넘지 못하고 주어진 시간들을 꼭꼭 눌러 밟으며 천천히, 아주 느리게 지나쳐 왔다. 

 

"차별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그것은 차별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아픔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그 뒤에는 개별적인 상처 자국이 남아.  그렇기 때문에 공평함이나 공정함을 추구하는 데에는 나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즉 쉽게 말하자면, 조금 전 도서관의 실태를 조사하러 온 두 여성 같은 인간들이라구."    (상권p.351)

 

15세의 소년 다무라 카프카를 통하여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10년 전의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입구의 돌'처럼 일본에는 혹시 시간여행을 가능케 하는 웜홀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또 다른 시간대로 훌쩍 떠나고도 싶었었다.  그러나 소설 속의 다무라 카프카가 판타지와 같은 환상의 세계를 경험한 후 현실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처럼 삶의 기억들은 아름다운 무늬로 누군가의 가슴 속에 새겨질 수 있음을 나는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결국 소중한 것은 내게 주어진 시간과 그 시간을 밟고 지나가는 나의 기억들임을 다시 읽은 한 편의 소설을 통하여 나는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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