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사랑을 만나다 - 섬 순례자 강제윤의 제주 올레길 여행
강제윤 지음 / 예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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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윤 작가를 처음 알게된 것은 가볍게 스치는 우연이었다.

법정 스님의 추천 도서를 열심히 찾아 읽던 시절, 그 중 한 권의 책이 강제윤 시인을 만나게 했다.  허균의 <한정록>을 김원우 작가가 우리말로 옮긴 <숨어사는 즐거움>.  근처의 도서관에서 제목만 검색하여 빌렸었다.  당연히 허균의 책이겠거니 안심하고 빌린 책의 표지에는 '아뿔사!', 허균이 아닌 '강제윤'이라는 낯선 이름이 씌어 있었다.  빌린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서둘러 반납하기도 머쓱하여 부득불 읽게 되었다.  그렇게 우연처럼 만난 작가의 책은 좋았다.  기대 이상이었다.  오죽하면 작가의 홈페이지 '동천다려'를 방문하여 그가 쓴 글을 모두 읽었을까.

 

작가의 삶은 그야말로 유목민의 삶이었다.  1988년 '문화와 비평'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한동안 인권 활동가로 살다가 고향인 보길도로 귀향했다.  찻집 '동천다려'를 운영하며 고향의 자연을 지키는 일에 헌신하던 그는 이번에는 홀연히 청도 한옥학교 한옥 목수 과정을 졸업한 뒤 티베트 유랑을 하고 2006년 가을 완도군 덕우도를 시작으로 섬 순례에 나선 작가는 10년 계획으로 사람이 사는 한국의 모든 섬 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한곳에서 열흘 이상을 머무르지 않던 그가 제주에서 1년 남짓을 살았던 것은 제주의 사람들과 자연 풍광이 그의 발길을 붙잡았기 때문이리라.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는 가급적 숨기고 올레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제주의 아픈 역사와 약간의 풍경 스케치를 아주 담담한 필체로 수채화처럼 펼쳐 보이고 있다.  올레길의 소개를 목적으로 쓴 까닭에 주관적 사색을 삼간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내면적 성숙이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인지 나는 작가의 의중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깅제윤 시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풍기는 담백함에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작가는 책에서 폭풍의 화가 변시지를 비롯하여, 청도 운문사 진광과 현우 스님, 산전수전 다 겪은 15세 선장 출신의 김성일, 끈질긴 집념으로 원수 집안의 여자와 결혼한 가파도 이장 김동욱, 올레 교감 선생님 한산도, 집시적 삶의 종착지로 제주도를 선택한 연예인 출신 화가 유퉁, 올레길 이방인 데럴 쿠드와 트레이시 베럿, 5.18 시민군 출신 민주화 운동가 진희종, 허름한 30년 국수집 춘자싸롱의 아낙네 그리고 제주 올레 이사장 서명숙과 조폭 보스 출신의 올레 탐사대장 서동철 등 작가가 만났거나 인연이 닿은 사람들과 역사 속의 인물 홍윤애 등을 그리고 있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던 인물은 제주를 사랑하여 평생 제주의 풍광을 사진에 담았던 김영갑 사진작가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작가는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처럼 홀홀 단신 떠돌았던 김영갑 작가의 갤러리를 들르면 자신도 영영 제주의 산천을 벗어나지 못할까봐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지에서의 사랑은 불가능이 없다. 어떠한 조건이나 난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이건 토착민이건 누구나 여행자다. 여행지에서의 사랑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이지만 그것은 또한 사랑의 본성에 가장 충실한 것이기도 하다. 조건에 대한 사랑이 아닌 사람 자체에 대한 사랑. 사내의 순정이 사랑을 완성했다. 하지만 사랑의 시작은 여행자와의 만남이었기에 가능했다. ―여행자의 사랑은 불가능이 없다."    (p.97)

  

내가 요즘 아침, 저녁으로 지나치는 길은 쌀밥처럼 하얗게 꽃이 핀 이팝나무 가로수길이다.  그 길을 지날 때면 배고팠던 시절의 하얀 쌀밥 냄새가 나곤 한다.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그 아름다운 풍경이 무슨 소용이랴.  길을 걸으며 떠올릴 추억이 없다면 꽃 피는 계절인들 무슨 소용이랴.  올레길은 저마다의 추억을 안고 모르는 사람에게 가슴을 여는 길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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