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 운명조차 빼앗아가지 못한 '영혼의 기록'
위지안 지음, 이현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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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에는 저마다 '용량 무한정'의 상자가 하나씩 있다.  사람들은 의심없이 쓸어담을 수 있는 온갖 잡동사니의 지식을 값진 보물이라도 되는 양 늙어 죽을 때까지 그저 담기만 할 뿐 한번쯤 꺼내어 주름을 펴고, 필요없다 싶은 것은 버리고 하여 차곡차곡 정리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쌓인 지식의 상자를 곱게 포장하여 생각 날 때마다 다른 이에게 보여주며 으스대곤 한다. 이러한 상자에는 으레 '세상의 모든 지식' 또는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 등등의 꼬리표가 달리게 마련인데 이사를 가기 전에는 단 한 번도 정리를 하지 않는 아내의 손길처럼 특별한 날이 아니면 결코 이 상자의 내용물을 꺼내어 필요한 것인지 따져보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당연히 옳다'라거나 '지극히 필요하다'라고 믿는다.  내가 사는 곳의 맞은 편에 있는 'e - 편한 세상'이라는 아파트에 입주하하기만 하면 있던 불편도 한순간에 사라질 것 같이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상자에 담긴 내용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이 상자에 지배당한다는 데 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말이다.  참으로 우습게도 우리들 대부분은 이 상자의 위세에 눌려 단 한번의 항변도 하지 못한채 고분고분 하라는 대로 하며 평생을 사는 것이다.  하여 우리는 남들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이런저런 이유로 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조목조목 따져보았던 사람들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뭔가를 잡기 위해서는 아주 먼 곳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믿으며 십중팔구 그런 믿음이란 것이 '턱도 없는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끝끝내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야, 혹은 모든 게 끝난 뒤에야 그보다 훨씬 값진 일을 지나쳐버렸음을 후회하곤 한다.  이제부터 삶의 끝에 와서 내가 알게 된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할 생각이다.  어떤 이야기는 떠올리기도 싫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고통 덕분에 내가 더 많이 알게 된 것도 사실이니, 세상 일이란 게 원래 그런 모양이다."  (P.17)

   

'병(病)'이란 끝내 철들지 않는 사람을 위해 조물주가 준비한 마지막 선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내게 닥친 일이 아니니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에서건, 밖에서건 천둥벌거숭이처럼 제 분수도 모른채 날뛰던 사람도 일단 불치병에 걸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해짐은 물론이요, 저 사람의 본성 어디에 저런 모습이 숨겨져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저절로 들 정도로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이면 누구나 철인(哲人)이 된다.  그리고 이 한순간의 변화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진다. 

 

"나는 그동안 불투명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수많은 '오늘'을 희생하며 살았다.  저당 잡혔던 그 무수한 '오늘'들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이제 나는 오늘 하루에 모든 것을 바친다.  주어진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이제 알 것 같다.  나는 남들보다 더 즐거워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  살아갈 날들이 많지 않을 테니까."  (P.146)

 

작가는 서른 살, 최연소 나이로 세계 100대 대학, 중국 3대 명문대학으로 꼽히는 상하이 푸단대학 교수에 올랐다고 한다.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인생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이제 막 ‘엄마’ 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 1살배기 아들과 자상한 남편 그리고 성공을 향한 출발선에 섰던 교수로서의 새로운 삶… .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말기 암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온몸에 전이된 암세포 때문에 뼈가 녹아내리는 고통이 이어졌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소중한 가치들을 돌아보았고, ‘삶의 끝에 와서야 알게 된 것들’을 자신의 블로그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시한부 인생을 살았던 어느 환자의 병상일기가 아니다.  그녀의 글은 지금껏 진실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들, 아름답다고 여기던 것들, 익숙하고 편한 것들, 그러므로 더욱 의심하지 않았고, 가까이 가려고 했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의심이며, 그런 것들과의 과감한 결별을 부추기는 선언문이다.  그녀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삶의 끝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던 그녀의 용기와 감추어진 슬픔이 몇 번씩이나 나를 울게 했지만 어머니 손길처럼 담백하고 자상하게 전해준 그녀의 가르침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만일 나에게 허락된 생이 여기까지라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부모로부터, 남편으로부터,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랑을 오롯이 겨안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누렸으니까."  (P.300)

 

마침표를 향해 달려가는 말없음표의 슬픈 운명처럼 인간의 삶도 그러려니 했다.  그렇게 말없이 달리다 어느 순간 멈춰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의 이런 생각에 작가는 '아니오'라고 말한다.  그 수많은 말없음의 나날에 숨겨진 소중한 의미를 찾으라고 한다.  남들도 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하는 게으름의 변명으로 의심없이 쓸어담았던 내 지식의 상자를 정리할 생각이다.  깔끔하게 정리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한번쯤은 의심하며 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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