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리얼 쇼크 - 이미지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
최효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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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뮬라크르의 이미지가 확대재생산되고 과잉 증식하면서 하이퍼리얼 속으로 빠져드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는 자본과 미디어, 관료제(국가, 정치권력)의 합작품이기도 하고 자본과 미디어의 합작품이기도 하다.  우리사회에는 이미 가짜 실재인 시뮬라크르가 자가증식해 온통 시뮬라시옹의 질서로 둘러싸여 있다."  (P.368)

 

말이 참 어렵다.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 먹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삶과 실존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지난 월요일에는 회사의 송년회가 있었다.  유난히 추운 날씨였다.  매섭게 몰아치는 칼바람을 뚫고 직원들은 독거 노인들의 난방을 위한 '사랑의 연탄 배달' 행사를 가졌었다.  다들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나서는 모습이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시커먼 연탄을 들고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난방이 잘 되는 사무실에서도 춥다고 난리인데 하루 종일 영하의 추위에 오들오들 떨 생각을 하니 지레 겁부터 나는 것이었다.

 

연탄을 나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 어귀에서 연탄을 리어카에 옮겨 싣고 끌고 당기며 비탈길을 오르는 일도, 몸조차 가누기 힘든 좁은 연탄광에 연탄을 쌓는 일도 우리 같은 도시내기들에겐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점심을 먹고 회사를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인원이 많으니 두어 시간이면 다 끝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던 사람들도 일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지쳐가는 눈치였다.  얼굴이고 옷이고 할 것 없이 시커먼 칠을 한 직원들이 길바닥에 널부러지기 직전에야 일이 마무리 되었다.  짧은 겨울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넘고 있었다.

 

우리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커피라도 대접하겠다는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

연탄 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방에 들어섰을 때, 발바닥에 시린 냉기가 전해졌다.  겨울 추위가 시작된 지 한참이나 지났건만 전기장판에 의지한 채 겨울을 나고 있는 모습이 짠하게 다가왔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하얀 입김이 방안 가득 퍼졌다.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집은 큰길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산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매년 겨울이면 땔감을 구하는 것이 우리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루 일과였고, 눈이라도 쌓여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에는 연탄을 배달시키곤 하였다.  꽁꽁 언 연탄을 큰길에서부터 집까지 나르는 일은 나무를 하러 산에 오르는 일보다 더 힘들었다.  연탄의 가운데 구멍에 새끼줄을 끼워 양손에 한 장 또는 두 장의 연탄을 들고 눈 쌓인 비탈길을 오르노라면 칼바람에 손과 볼이 얼어 감각이 무뎌지곤 했다.  연탄 백 장을 나르려면 미끄러운 산비탈을 수십 번 오가야 했으니...

 

우리는 언제부턴가 석탄과 석유를 매개로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지금의 아이들에게 겨울은 그저  긴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오래도록 기다렸던 스키 시즌 쯤으로 인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의식 속에 추위로 인한 삶의 고통은 없다.  현실이 복제된 과잉 현실(하이퍼 리얼)은 이제 원본마저 까맣게 잊혀지고 있다.  원본이 없는 실재는 더욱 더 실제적이다.  어른들이 자신이 겪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을 들려주어도 아이들은 믿지 않는다.  이러한 과잉 현실, 즉 하이퍼 리얼의 모습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의식의 사고',  즉 우리가 실재하는 어떤 대상과 맺는 관계는 사실상 심볼릭한 룰(구조- structure)이 상당부분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 구조주의 학파는 언어학자 소쉬르에서 비롯되었고, 프랑스의 사상가인 장 보드리야르는 구조주의 학파에서도 대표적인 비관론자에 속한다.  사유의 주체가 내가 아닌 구조(또는 이미지)가 지배하므로 현대인은 소비 행태와 어떤 사건을 대하는 반응에 있어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고 정형화 되는 경향이 있다.  미디어와 자본에 의해 형성된 가짜 현실의 영상 이미지는 현대인을 미디어에 종속된 로봇처럼 만들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견해를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 사회가 몰두하고 있는 11가지 뜨거운 이슈들을 통해 현실보다는 ‘만들어진 현실’을 믿기 원하는 대중의 속성과 이를 이용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자본과 미디어의 본모습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보드리야르에 의해 정립된 하이퍼리얼(hyper real)의 개념은 현대 철학에 있어 중요한 한 축이다.  그러나 구조주의 얼개와 구조주의 철학가의 사상을 모두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전통철학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독자가 과학과 철학이 융합된 구조주의 이론을 습득하여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하여, 이 책의 저자는 9·11 테러사건 이후 이슬람의 이미지, 광화문 촛불 시위, 타블로의 학력 위조 논란과 포르노그래피의 속성 등 우리사회를 뒤흔든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해, 우리 현실 깊숙이 침투해 있는 하이퍼리얼 개념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인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다.  사고와 행동의 주체가 내가 아닌, 타인에 의해 조종되는 현대인의 모습은 비극적이다.  그렇다면 자본과 미디어에 종속된 현대인이 아닌, 미디어에 조종당하지 않는 당당한 사고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미디어의 허구성을 제대로 간파할 수 있는 ‘미디어 독해력’을 조언한다.  외부의 구조와 룰에 지배되고 있는 현대인에게 보드리야르의 철학은 강한 울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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