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불멸의 편지
루드비히 판 베토벤 지음, 김주영 옮김 / 예담 / 2000년 2월
평점 :
품절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고 강렬한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 이 책의 제목만 보고 덥석 손에 넣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책의 반이상을 읽으면서도 흥미보다는 그저 관성에 의해 책장만 무심히 넘겨지고 있었다.  편지에서 베토벤 본인이 밝히듯, 그는 서신 왕래에 있어 부지런하지도 않았고, 글을 쓰는 것을 즐기지도 않았던 듯하다.  궁정합창단의 음악감독에까지 올랐던 할아버지와 궁정합창단의 테너 가수였던 아버지 등 어려서부터 음악과 친숙한 분위기에서 자랐지만 할아버지의 사후 알콜 의존증 증세를 보였던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찍부터 가정을 부양해야 했던 불운한 삶은 그의 평생을 쫓아다녔던 듯하다.  그런 탓인지 음악 외에는 한눈을 팔 시간도 관심을 두지도 않았던 듯 보인다.

그러나 1,000 여 곡이 넘는 작품을 작곡한 바흐나 600 여 곡이 넘는 작품을 남긴 모차르트에 비해 베토벤의 작품 수는 방대하지 않지만 그의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음악사의 커다란 유산으로 남겨지기에 충분하며, 베토벤 사후의 음악은 모두 베토벤의 아류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다음 세대에 큰 영향을 미쳤던 악성 베토벤의 사적인 편지들은 위대한 예술가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나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다.  뜨거운 피는 나의 분노이고, 나의 비행은 젊음이다.  나쁜 건 내가 아니다.  진짜로 나쁘지 않다.  가끔 거친 분노를 일으키지만 그건 내 마음의 호소이지, 내 마음은 선하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자유를 사랑하고 왕 앞에서조차 절대로 진실을 속이지 않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P.24)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평생 동안 여러 명의 여자를 사귀었고, 괴테와 같은 당대의 유명 예술가들과 교류가 있었지만 그의 삶은 그닥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30세가 되던 해 귓병을 앓기 시작했던 베토벤은 귓병 치료 차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로 요양을 떠났지만 차도를 보이지 않는 병세로 인해 유서를 작성하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모두 표현해낼 때까진 세상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 비참한, 정말로 비참안 삶을 참아내고 있다.  내 육체는 아주 사소한 변화에도 나를 최상의 상태에서 최악의 상태로 전락시킬 만큼 예민하다.  인내.  그것을 내 지침으로 삼아야 했다.  그렇게 참아왔고, 운명의 여신이 내 생명의 밧줄을 끊을 때까지 저항의지를 간직하길 바라왔다.  스물여덟 살에 이미 모든 것을 달관한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예술가에게는 더욱 그렇다."  (P.68)

1827년 3월 26일 베토벤은 천둥번개가 치는 가운데 간경변증으로 삶을 마감했다.
사흘 뒤 3월 29일에 치러진 장레식에는 조문객이 2만여 명이나 참석했으며,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극작가 프란츠 그랄파르처는 추도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베토벤은 사랑이 넘치는 자신의 본성으로 세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하고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혼자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제2의 '자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나 생애의 끝까지 그의 가슴은 만인을 향해 뜨겁게 고동쳤습니다..." (P.238)

연꽃이 가장 더러운 곳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듯, 가장 절망적인 삶 속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이 탄생한다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이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한줄기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거장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 진실을 밝히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예술작품은 그 자체로 빛나지 않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