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탈한 오늘
문지안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평점 :
품절


저자의 일상이 고스란히 내게 옮아오는 책이 있다. 마치 내가 저자의 삶을, 그 흔한 일상을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책. 그런 책이라면 값싼 감동이나 교훈은 그닥 필요치 않다. 가슴을 짓누르는 눅진한 무언가가 흔한 감동을 아주 값어치 없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리니까 말이다. 오직 책에 실린 글과 사진만으로 자신의 익숙한 일상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남들에겐 없는 뭔가 특별한 능력을 작가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능력은 또한 누구에게나 있는, 분명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진심' 혹은 '공감'이라고 한다면 나는 작가의 능력을 1/n로 줄어들게 만드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진심이나 공감의 능력은 스스로 개발하는 것이지 태어날 때부터 누구에게는 많고 누구에게는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흔하다는 이유로 하찮게 여기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흔하기에 더욱 소중히 여기는 극소수의 사람이 존재하는 까닭에 그 차이는 더욱 크게 벌어지는 게 아닐까.

 

"이별은 늘 응집된 형태로 일상에 파장을 일으키기에 그 여파에 휩싸여 있을 때는 남은 것들이 하찮아 보이기도 하고 일상을 꾸려가는 작은 노력이 무의미해 보이기도 하지만 밥 한 그릇 퍼주는 아침, 머리 한 번 쓰다듬는 저녁, 아무 일 없다는 듯 곁에 머물러 있는 오늘이 언젠가 가슴 아리도록 그리워할 일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늘 당연하다고 여기는 평화, 그 평화를 지켜주는 존재들 위로 흐르는 비가역적인 시간. 그 시간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에 일상의 평화는 참으로 연약하고 당연하지 않다." (p.60~p.61)

 

이런 글은 작가에 대한 선입견 없이 읽는 게 좋다는 걸 잘 알면서도 책의 앞머리에 소개된 작가의 이력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스무 살에 대학에 입학해 스물두 살에 퇴학당하고 스물네 살에 다른 대학에 입학했다. 평온한 생활이 시작된 지 6개월,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술만으로 해결될 거라 생각해 3000cc에 육박하는 조직을 덜어내고 보니 다른 장기에 전이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작가 자신에 대한 소개글은 어쩌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선입견을 심어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돈이나 명예, 승진과 같은 보편적 가치가 아닌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간절히 원한다고 작가는 덧붙였다. '믿기 어렵겠지만 세상에는 안온한 일상을 갈망하는 이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작가는 반려견, 반려묘와 함께 하는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지만 이런저런 인연으로 함께 살게 되었던 반려견이나 반려묘와의 영원한 이별과 그로 인한 상실감을 아주 세심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털어놓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서 평범한 일상을 지켜주는 반려동물들에 대해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작가의 이야기는 이따금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회귀하다가 익숙한 듯 현재의 오늘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버릇처럼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향하는 생각의 섣부른 발길을 주저앉힌다.

 

"지나갈 것을 알지만

지나간 하루하루가 고될 때는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중에 웃으며 얘기할 거라는 사실도 알지만

당장 엷은 미소도 지을 수 없는 날들,

그 시기의 사람들은 대부분 몹시 외롭다." (p.192)

 

가슴이 따뜻해지는 사진과 짧은 글들 사이사이의 여백에서 나는 작가가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을 떠올려본다. 오늘처럼 흐리고 이따금 비가 내리는 주말 오후, 휴일을 계획하는 많은 사람들의 들뜬 기대 뒤에는 기척도 없이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시간 뒤편의 사람들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매일매일의 일상이 미래로 나아가는 하루가 되지 못하고 죽는 날까지 그저 묵묵히 견뎌야 하는 깨어 있는 시간에 불과하다고 느끼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어깨를 맞대고 자신의 체온을 조금쯤 나눌 듯한 작가의 진심이 느껴진다.

 

"순진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나는 몸으로 전하는 가치를 아직 믿고 있다. 손끝으로 전하는 온기, 소소한 것에 담긴 소소하지 않은 무엇, 그 엷은 온도를 느끼는 촉을 잃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적어도 몸은 머리만큼 간사하지 않기에, 사람들의 안쪽에는 말로 다 전하지 못하는 뜨끈한 물 주머니 같은 것이 있기에." (p.204)

 

웅숭깊은 사색이 돋보이는 글은 사람을 들뜨게 하지 않는다. 평소 경박하거나 진중하지 못한 사람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 날카롭기만 하던 표정도 어느 순간 온화하게 변하고, 옅은 미소만으로도 세상의 기온은 1도쯤 높아질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이들을 향해 무탈한 오늘을 비는 작가의 마음이 돋보였던, 금요일 오후의 여백 속으로 균질한 시간의 알갱이들이 안개처럼 스며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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