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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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하루가 또 그렇게 아슬아슬한 시간 속으로 사라집니다. 문명의 역사를 살아간다는 것은 적과 아군,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뚜렷이 한다는 것이고, 그와 같은 경계를 높이 세울수록 우리 곁에서 평화는 멀어진다는 것이요, 생명에 대한 우리의 도덕성은 한없이 추락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문명의 공간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위태로운 시간들을 함구한 채 비겁의 시간을 견뎌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2003년 노밸문학상 수상 작가인 J.M. 쿳시의 대표작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문명의 역사를 쓰고 있는 우리들 각자의 뒷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입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영어권 소설가 중 가장 유명한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쿳시는 그의 다른 작품 <추락>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품위와 야만성을 가장 밑바닥까지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때로는 그의 묘사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참혹한 것이어서 질끈 눈을 감고 싶을 때도 더러 있지만 작가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습니다.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나는 문명에 반대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러한 입장에서 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지금은 야만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p.66)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어느 제국의 변경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소일하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입니다. 세금을 거둬들이고 공동 경작지를 관리하며, 주둔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고 변경의 하급 관리를 감독하며, 교역을 감시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법정업무를 주재하는 게 '나'의 주된 업무입니다.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살다 가는 것 이상을 바란 적 없는 소박한 야망의 소유자이기도 한 '나'는 야만인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변경의 치안판사로서 야만인들에 대한 경계보다는 상생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모든 피조물이 정의에 대한 원초적 기억을 갖고 세상에 태어난다.'고 믿는 '나'의 철학에 기초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가 누리던 평화는 야만인 부족들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야만인 부족들이 연합전선을 펼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징후와 함께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변경의 불안한 징후를 잠재우기 위해 수도에서 파견한 보안청 소속의 졸 대령과 경찰들은 변경의 유목민들이나 원부민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고, 특별한 죄목도 없이 고문을 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취조를 합니다. 졸 대령이 보고를 하기 위해 수도로 돌아간 후'나'는 졸 대령이 끌고 왔던 야만인 여자를 돌봐주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고문을 당해 눈이 멀고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비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나'는 야만인 여자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과 동정심, 남자로서의 성적 욕망을 동시에 느낍니다. 졸 대령이 수도로 떠난 후 겨울, '나'는 야만인 여자를 '나'의 숙소에 머물게 합니다. '나'는 예전처럼 고전을 읽고, 수집한 유물의 목록을 작성하고, 호숫가에서 영양을 사냥하는 등 평화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녀를 어루만지는 행위를 하다가 도끼로 찍힌 것처럼 잠에 압도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녀의 몸 위에 엎어진 채 망각 속으로 빠져들다가 한두 시간 후에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목이 마른 상태로 잠에서 깬다. 꿈조차 꾸지 않는 이 상태가 나에게는 죽음, 혹은 시간 밖에 존재하는 텅 빈 황홀경 같다." (p.54)

 

변경에서 삼 년간의 복무연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병사들을 대체할 징집병 파견부대가 도착을 했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나'는 야만인 여자를 그녀의 부족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두 명의 파견병과 사냥꾼 한 명을 대동하고 말이죠. 잔혹한 날씨와 험한 지형을 뚫고 마침내 '나'는 여자를 그녀의 부족에게 인계한 후 무사히 되돌아 옵니다. 그러나 보고도 없이 여러 날 자리를 비웠던 게 화근이 되어 '나'는 곧바로 수감됩니다.

 

"나는 처음 감방에 들어와 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채워질 때 웃었다. 일상적인 삶의 고독에서 감방의 고독으로 옮겨가는 건 큰 고통이 아닌 듯했다. 생각과 기억을 갖고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게 얼마나 기본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어떤 자유가 남았는가? 먹거나 배고플 자유, 침묵을 지키거나 혼자 지껄일 자유, 혹은 문을 두드리거나 비명을 지를 자유이리라. 그들이 나를 여기에 감금했을 때 내가 불의, 경미한 불의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피와 뼈와 고기가 뭉쳐진 불행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p.142)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나'는 잔인한 고문과 갖은 수모를 겪게 됩니다. 내가 수감되어 고초를 겪는 동안 졸 대령이 이끄는 정규 부대는 야만인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을 합니다. 마을에 남겨진 군인은 많지 않았습니다. 원정을 떠난 부대로부터는 연락이 없고 야만인들의 반격이 있은 후 마을에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게 됩니다. 야만인들의 공격으로 농사를 망친 까닭에 사람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서둘러 마을을 떠납니다. 간수들도 이제 '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떠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겨울을 대비합니다. '나'는 이제 치안 판사의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야만인들에게 패한 후 졸 대령 일행이 초라한 모습으로 복귀하는데...

 

"그들은 언젠가 자기들도 아버지처럼 강해지고 어머니처럼 아이들을 잘 낳을 것이며, 그들이 태어난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잘 살다가 늙어가리라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물속의 고기들이나 허공의 새들이나 아이들과 같은 시간 개념 속에 사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걸까? 그건 제국의 잘못이다! 제국은 역사의 시간을 만들어냈다. 제국은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이 아니라 흥망성쇠와 시작과 끝, 그리고 파국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p.219)

 

문명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우리는 언제나 '야만인'이라는 가상의 적을 상정하곤 합니다. 가까운 과거의 기록을 보더라도 우리는 이와 같은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이나 시리아 내전이 그러했고, 최근 뉴질랜드에서 발생한 총기 테러 사건이 그렇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의 남과 북 역시 각자의 마음 속에 가상의 야만인을 품은 채 서로에 대한 적대감만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쿳시는 소설 속 주인공인 '나'를 통해 말합니다. '우리는 타락한 존재이며, 정의에 대한 기억이 퇴색하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법을 지키는 것뿐'이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나는 문명에 반대한다'고.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작가는 우리에게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는 역사의 바다에 저마다의 부표를 띄운 채 영역 밖 야만인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역사의 바다를 항행하는 우리들의 불안한 하루가 아슬아슬한 시간 속으로 또 그렇게 무참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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