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골든아워 1~2 세트 - 전2권 -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02-2018 골든아워
이국종 지음 / 흐름출판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산을 오르는 게 습관처럼 배어 있는 나로서는 등산로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고를 목격하는 일이 그리 낯설지가 않다. 발목이 삐거나 접질리는 일은 다반사, 그보다 훨씬 심한 부상을 입고 소방대원의 들것에 실려 산을 내려가는 모습도 이따금 보게 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분초를 다투는 치명적인 사고를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오르는 야트막한 동네 뒷산에서 그런 대형 사고가 발생한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등산객들이 몰리는 봄과 가을이면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걸 보면 무작정 안심할 일도 아닌 듯하다. 이를테면 사고는 우리의 시선 뒤편에서 이제나저제나 시기만 기다리는 유예된 위험이기 때문이다.

 

이국종의 <골든아워1, 2>를 읽었던 건 최근의 일이다. 언제부턴가 뉴스에 오르내릴 만한 굵직한 사건 사고가 있을 때마다 인터뷰에 응하던 그를 TV 화면에서 종종 보아왔었기에 나는 사실 그에 대한 이미지가 그닥 좋지 못했다. 말하자면 나는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책을 내는, 소위 깜냥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주제넘게 다른 분야를 넘보는 꼴을 너그럽게 바라볼 수도 없었고, 그런 까닭에 그와 같은 책을 볼라치면 더더욱 멀리했다. 예컨대 방송을 통해 유명해진 연예인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건 책을 내는 것과 같은... 그런 책을 볼 때마다 '아이고, 하던 일이나 잘하세요. 괜한 욕심부리지 말고.'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벌목을 하며 힘들게 돈을 버는 지인 한 분이 <골든아워>를 읽어보라며 적극 추천하는 게 아닌가. 그분 역시 벌목용 전기톱날에 다리를 다쳐 오랫동안 입원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게 벌써 수년 전의 일이다. 나도 그때 시간을 내어 병문안을 갔었는데 그분은 내게 이르길 조금만 지체했더라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거라며 삶과 죽음이 한순간에 갈리는 것이니 너무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다는 선문답식의 모호한 말을 했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그분은 내게 전화를 걸어와 다짜고짜 <골든아워>를 선물로 사주고 싶다며 주소를 불러달라고도 했었다. 결국 나는 한 인터넷 서점에서 <골든아워>를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그분의 강권 때문이었다.

 

"봄이 싫었다. 추위가 누그러지면 노동 현장에는 활기가 돌고 활기는 사고를 불러, 떨어지고 부딪혀 찢어지고 으깨진 몸들이 병원으로 실려왔다. 봄기운에 밖으로 이끌려 나온 사람들이 늘었고, 늘어난 사람만큼 사고도 잦아 붉은 피가 길바닥에 스몄다. 병원 밖이 형형색색 꽃으로 물들 때, 나는 무영등 아래 진득한 핏물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1권 p.17)

 

서문과 목차를 지나 본문의 시작은 위와 같았다. 김훈 작가를 흠모하여 그의 문장을 좇으려 애썼다는 저자의 고백처럼 간결하고 무심한 듯한 어투가 김훈의 <칼의 노래>를 닮아 있는 듯했다. 해군에서 군생활을 했다는 그의 특이한 이력과도 잘 어울리는 듯했고, 서서히 책에 빠져들면서 나는 처음에 가졌던 편견을 조금씩 지워나갔다. 책은 2002년부터 2013년의 기록을 담은 1권과 2013년부터 2018년을 기록한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합 16년의 방대한 기록이 지루함 없이 읽혔다.

 

그가 기록한 책의 내용은 비단 생명을 살리는 일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의사로서 응당 그러해야 옳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가 맡고 있는 중증외상센터는 국민적 편견과 부실한 제도, 부족한 예산과 인력 부족 등 의료계의 온갖 문제를 품고 있는 문제의 온상이자 발원지나 마찬가지였다.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만 집중해야 할 의사가 부실한 의료체계의 확립을 위해 분투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언론에 나가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간절히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의사로서 너무 나대는 거 아니야?' 생각했던 것이 순전히 나의 편견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상외과 의사로서 아픈 기억들은 켜를 이루며 쌓여간다. 많은 의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술적 치료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은 끊임없이 찾아오고, 뼈아픈 기억들은 의사에게 보수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변해가는 것이 틀리지 않다. 환자의 죽음과 보호자들이 쏟는 눈물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내 환자들이 숨을 거둘 때 나 또한 살이 베어나가듯 쓰렸고, 보호자들의 울음은 귓가에 잔향처럼 남았다." (1권 p.329)

 

간 재생 연구를 하던 외과 의사가 자리가 없어서 결국 신설 분과였던 '외상 외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 학비가 없어 휴학하고 군에 입대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 등 1권에서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면을 언뜻언뜻 보여준다. 그리고 의사로서 죽어가는 환자의 생명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많은 기억들을 이 책에 쓰고 있다.

 

저자는 책에서 그만두고 싶었던 심정을 여러 번 피력한다. 그도 그럴 것이 1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열악한 환경에서 사투를 벌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사로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부와 명예를 거머쥘 다른 기회가 얼마든지 주어지기 때문일 터였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중증외상센터에서 오직 자신의 사명을 위해 목숨을 거는 그의 모습이 오히려 고지식하고 답답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에게 맡겨지는 중증 외상 환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어쩌면 그도 중증 외상 환자의 대부분이 일용직 노동자이거나 소외계층인 까닭에 자신마저 그들을 버리면 이 땅에 그들을 돌볼 의사가 없어지지나 않을까 크게 염려했는지도 모른다.

 

"그냥 할 수 있는 데까지……. 나는 늘 내가 어디까지 해나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어디로,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답이 없는 물음 끝에 정경원이 서 있었다. 하는 데까지 한다. 가는 데까지 간다 ……. 나는 정경원이 서 있는 한 버텨갈 것이다. '정경원이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이끌고 나가는 때가 오면'이라는 생각을 나는 결국 버리지 못했다. 그때를 위해서 하는 데까지 해보아야 한다. 정경원이 나아갈 수 있는 길까지는 가야 한다……. 거기가 나의 종착지가 될 것이다." (2권 p.316)

 

이국종, 그에게 쏠린 대중적 관심과 유명세가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오히려 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책을 읽고 나서 그런 우려가 말끔히 사라지기는커녕 한층 더 깊어졌다. 나의 이런 오지랖은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본분에 투철한, 의사다운 의사를 제대로 만나본 적 없는 까닭에 그의 존재가 더 크게 느껴지는 데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제주도에서 영리 병원 개원이 허가되면서 대한민국의 의료 양극화가 촉발되는 게 아닌지 온 국민이 걱정하고 있는 요즘, 다른 어떠한 유혹에도 자신의 사명과 본분을 잊지 않는 의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이국종,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이유는 그는 대한민국의 의사이기 이전에 자신의 철학을 지키는 직업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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