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사일런스
외이뒤르 아바 올라프스도티르 지음, 양영란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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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하찮은 인생이 꾸역꾸역 이어져나가는 걸 참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모든 걸 끝장내려는 사람들도 있고', 자신의 삶이 야금야금 줄어드는 걸 마냥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고 보면 삶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공기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게 분명하다. 침묵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작가 외이뒤르 아바 올라프스도티르의 소설 <호텔 사일런스>에 등장하는 주인공 요나스는 자신의 삶을 끝장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나는 늘 한 해의 다섯 번째 달이 나의 마지막 달이 될 것이며, 5라는 숫자는 가령 5월 5일, 5월 15일 또는 5월 25일, 이런 식으로, 나의 마지막이 될 그날에 반드시 한 번 이상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나의 생일 달이니까. 그때쯤이면 오리는 짝짓기를 끝냈을 테고, 오리 말고도 검은 머리물떼새와 주홍도요새도 연못에 드나들 것이다.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봄기운이 그득한 세상에 밤이 찾아오지 않을 그 무렵이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p.21~p22)

 

49세의 남성 요나스는 어느 날 아내로부터 "우리 딸은 사실 당신 자식이 아니다."라는 황당한 고백과 함께 이혼을 통보받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친딸이라고 굳게 믿었던 님페아가 그의 딸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치매에 걸린 노모는 엉뚱한 말만 반복한다. 모든 일에 무력해진 그는 자신의 삶이 남루하고 구차하게만 느껴진다. 친한 친구 스바누르에게 권총을 빌렸던 그는 권총 자살로 자신의 삶을 끝내보려 하지만 단 한 번도 총을 쏘아본 적 없던 그로서는 그마저도 힘들었다. 물론 탄알도 없는 권총이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갑자기 죽어도 누구 한 사람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장소를 물색하여 여행을 떠난다. 그가 찾아낸 장소는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이제 막 휴전이 성사된 위험한 나라였다. 그는 자신의 회사를 매각하고, 매각 대금을 님페아의 계좌에 입금하도록 조치하는 한편, 자신의 집안 곳곳을 정리한 후 간단한 공구함을 챙겨 마지막 여행길에 오른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용케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호텔 사일런스의 손님은 요나스를 포함해 단 세 명. 요나스와 여배우, 그리고 전쟁의 혼란기를 틈타 한몫 잡으려는 한 명의 남자. 요나스는 그가 계획했던 일주일 동안 하루 중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도대체 무엇을 하며 소일할 것인지 궁리한다. 그러던 중 요나스의 눈에 비친 호텔 곳곳은 당장 누군가의 수리가 필요한 듯 보였고, 요나스는 자신의 공구를 이용하여 간단히 손볼 수 있는 것들을 수리하기 시작한다. 여행이 목적이라는 요나스가 갑자기 수리를 하고 나서자 호텔을 관리하던 메이와 피피는 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님페아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메이는 어린 아들 아담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고, 그녀의 남동생 피피는 틈틈이 호텔 곳곳을 손보면서 손님들의 수발을 들고 있었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요나스는 점점 삶의 의욕을 되찾고 삶을 이어갈 용기를 회복한다.

 

"가진 거라곤 목숨밖에 없는 이 젊은 여자에게 차마 난 이미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게 아니면, 인생이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말해야 할까?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남들처럼 사랑도 하고, 울기도 하며, 괴로워하기도 한다고 말한다면, 어쩌면 그녀가 나를 이해해줄지도 모른다." (p.247)

 

요나스가 처음에 계획했던 체류 일정은 일주일에서 조금씩 늘어져만 간다. 그리고 메이와 한 팀이 되어 일하면서 끔찍했던 전쟁의 참화와 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애썼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모여 한 건물에서 함께 살기로 했다는 희망적인 소식도 듣는다. 요나스는 결국 생존자들이 함께 살기로 한 건물마저 수리하기에 이른다.

 

"그이는 사흘 만에 숨을 거두었어요. 나중엔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우리는 그이가 옷 속에서 차츰 해체되어가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죠. 그를 뒤로하고 피란길에 오를 때까지 말예요."

"미안합니다." 내가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전했다. 메이에게 나도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면 더 고약해질 테지. 메이는 의자에 앉아 있고, 나는 그녀 옆에 자리를 잡는다.

"슬픔은 마치 목 안에서 깨지는 유리잔 같은 거죠." (p.249)

 

세상이 온통 구질구질하고 하찮게만 보였던 요나스에게 폐허 속에서 어떻게든 삶을 개척하려는 호텔 사일런스의 식구들은 희망의 메신저와 다름없었다. 요나스는 자신의 삶에서 잠시 길을 잃고 헤맸을 뿐이다. 인생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길을 잃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의 인생은 제 자신만을 위해 쓰기에는 과분하게 긴 시간일지도 모른다. 요나스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세상의 흥미 있는 일을 모두 경험해봄으로써 삶이 마감되는 것이라면 49세라는 요나스의 나이는 꽤나 오래 산 축에 들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의 삶은 나뿐만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책임의식으로 꾸려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요나스를 통해 엿보게 된다.

 

타인에 대한 책임을 모두 내려놓고 절망 속에서 헤매던 요나스가 전쟁의 포화 속에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돌보면서 삶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되살릴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의 어깨가 가벼워진다는 건 죽음에 한발 다가섰다는 걸 의미한다. 선의에서 비롯된 누군가를 향한 책임감, 그것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자신의 삶을 기꺼이 지속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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