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오다 - 다큐 피디 김현우의 출장 산문집
김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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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장면은 세월에 따라 세세한 풍경은 잊히지만 공간 깊숙이 스며들었던 소리는 더욱더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경우가 있다. 세월에 흐릿해진 공간이 소리에 묻혀버린 느낌이랄까. 어느 해 여름 남해의 해변에서 들었던 파도 소리도 세월에 역행하여 생생하게 되살아나곤 한다. 해변에는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파도에 깎여 그 크기며 모양도 제각각인 자갈들이 깔린 몽돌 해변이었다. 파도가 육지에서 물러갈 때마다 몽돌을 가볍게 스치며 내는 자글거림이 밤새 이어졌었다. 소리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나는 결국 해변으로 향했고, 그날 나는 잠을 포기한 채 밤새 해변을 서성였었다.

 

김현우 피디의 출장 산문집 <건너오다>를 읽으며 몽돌 해변의 파도 소리를 떠올렸던 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날 내가 보았던 몽돌은 어느 이름난 장인이 깎고 다듬어도 그와 같은 아름다움을 연출할 수는 없을 듯했다. 오랫동안 파도에 씻기고 다듬어지면서 둥글둥글해진 돌들이 물기를 머금고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는 모습은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쩌면 그것은 세월의 더께가 빚어낸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글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낱글자 하나하나에서 세월의 묵은 때가 묻어나는 그런 글이 좋다.

 

"처음 제의를 받은 지 사 년 만에 한 권의 책을 마쳤다. 책 한 권으로 묶일 만큼의 글을 써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쓰는 동안 뭔가가 정리되긴 했다. 글쓰기는 적어도 나에게는 도움이 되는 작업이었다. 대충 삼십대의 시기와 겹치는 십여 년을 이렇게 정리해보고 나니 뭔가 더 분명히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삶은 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그건 좀처럼 자신이 생기지 않는 일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p.253)

 

<건너오다>는 EBS <다큐프라임> <지식채널e>의 연출가이자 존 버거, 리베카 솔닛의 번역가이기도 한 저자가 출장을 갔던 17개국 38개 도시를 관통하며 자신이 느끼고 기록했던 것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여행기와는 크게 다르다. 도시를 방문하는 목적이 일반 여행객의 그것과는 다르기도 하지만 김현우 피디의 감성이나 지나온 삶이 달라서일 수도 있다.

 

"모든 시간들, 아니 순간들에 이유를 붙이고 싶은 것은 내가 어떤 '의미'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야 나의 과거와 미래가 '일관되게'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삶이란 그래야 한다고, 적어도 삼십대까지의 나는 생각했던 것 같다. 비어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어떻게든 그 시간에 이유를 붙이려 했다. 그렇게 피곤했다." (p.111)

 

<건너오다>가 다른 여행기에 비해 특별하다고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일반 여행객들이 잘 찾지 않는 특별한 곳을 다녀왔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피디라는 직업적 특성상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주제가 뚜렷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방문지에서 보여줄 필요가 있는 대상과 방문지의 역사와 그곳 사람들의 생각을 종합하다 보면 세계 곳곳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훑게 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개중에는 물론 일과 연관되지 않은 사적인 만남이나 관광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발칸의 지금을 보며 전쟁이라는 필터로만 보는 것도 선입견임을 안다. 다만 그렇게 열린 창을 통해서만 본 것들이 해준 이야기는, '소속되어 있음'이 지닌 폭력적인 가능성이었다. 발칸은 잘생긴 땅이었다. 산들은 위엄이 있고, 그 사이로 흐르는 강은 풍요롭고, 사이사이 보이는 평원은 기름지고, 아드리아 해는 눈부셨다. 그런 자연에 비해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풍경은 어두웠다. 짧은 여정이라 단정할 순 없겠지만, 나는 그 어두움이 '밖에서 주어진 정체성', 즉 소속이 지닌 어둠이 아닐까 생각했다." (p.154)

 

김현우 피디의 글이 유려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때로는 단조롭고 투박한 느낌마저 든다. 그럼에도 술술 읽힌다. 책을 읽는 도중에 급한 용무가 생겨도 좀처럼 책을 내려놓기 어렵다. 미려한 문장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중간중간 화려한 사진이 실린 것도 아니지만 깊은 사색에서 우러난 진솔한 문장들이 독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의 뒷모습을 힐끔거리며 쳐다보게 되는 듯도 하고, 누군가 내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는 온통 과거만을 향한 문장은 아닌 것이다. 그 마음도 여전히, 늘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미래를 향하고 있다. 사람은 '기대'가 없어도 다가올 날들을, 혹은 남은 날들을 그려볼 수밖에 없다. 그건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음을, 그렇게 환하기도 했고 어둡기도 했던 자신과 비로소 화해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마음일 것이다." (p.250)

 

우리가 하는 흔한 실수 중 하나는 세월의 가치를 은연중에 무시한다는 것이다. 시시하고 촌스럽다는 이유로. 그러나 내가 어느 해변에서 보았던 기나긴 세월의 흔적은 오롯이 내가 자연 속에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왔다 가는 존재임을, 그렇기에 어떤 인간도 자연과 세월이 빚은 작품을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던 것처럼 김현우 피디의 글이 독자들에게 특별했던 까닭은 글 속에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긴 시간을 두고 고치고 다듬었던 흔적들이 세월의 더께로 책의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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