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가락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읽을 책은 많지만 눈 앞에 놓인 어떤 책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이유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책의 내용이 어려워서, 문장이 딱딱해서, 별 의미도 없는 글들로 채워져서... 한마디로 책을 읽기 싫은 것이죠. 그런 날이면 이따금 찾아 읽게 되는 게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입니다. '잊어도 좋기 때문에 읽는 것이 추리소설이다.'라고 했던 장정일 작가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되는 순간입니다. '유용성'으로부터 멀어진 독서는 얼마나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것인지요. 게다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작가로 정평이 난 까닭에 언제 찾아도 내가 읽지 않은 작품들이 차고 넘친다는 점이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내가 읽은 책은 가가 형사 시리즈 제7탄인 <붉은 손가락>이었습니다. 47세의 중년 가장인 아키오는 18년째 결혼 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그의 아내 야에코와 중학생 아들 나오미를 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직장 상사의 주선으로 1년여의 연애 끝에 결혼한 나오키와 야에코는 아들 나오미가 태어나자 아들의 양육에 대한 견해차로 시댁과 결별합니다. 아들의 양육은 자연스레 전업주부였던 야에코에게 전적으로 위임되고 그럴수록 아키오의 발언권은 점점 약해져만 갑니다. 치매를 앓던 아키오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혼자 남겨진 어머니 마사에를 돌볼 방법이 없었던 아키오는 시댁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냐고 넌즈시 제안합니다. 경기 불황으로 몇 년째 월급이 오르지 않았던 아키오의 월급만으로는 내 집 마련의 꿈이 멀어져만 갔던 까닭에 야에코 역시 무작정 반대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야기의 축은 두 갈래로 이어집니다. 아버지도 없이 힘들게 성장한 마쓰미야는 어머니인 가츠코와 자신을 살뜰히 보살펴준 외삼촌 다카마사를 아버지처럼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경찰에서 은퇴한 다카마사는 현재 말기암 환자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입니다. 다카마사를 너무도 존경한 나머지 그를 따라 경찰관이 된 마쓰미야는 시간이 날 때마다 외삼촌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마쓰미야의 외사촌 형이자 다카마사의 아들인 가가 형사는 아버지의 병문안에 인색합니다. 마쓰미야는 그 사실이 못내 서운합니다. 다카마사와 가가 교이치로 사이에 알 수 없는 불화가 존재한다는 걸 어렴풋이 추측할 뿐입니다. 가정을 등한시했던 다카마사로 인해 가가의 어머니가 가출을 했고, 병을 앓던 그녀는 결국 혼자서 외롭게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마쓰미야는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들었습니다.

 

"음, 거기서 혼자 살았어. 그러다 곁에서 간병해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죽었어. 아버지는 그 일이 몹시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야. 임종하는 순간에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그걸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아버지도 결심하셨대. 자기도 혼자 죽을 거라고. 나한테 당부를 하더라. 자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절대로 곁에 오지 말라고." (p.284)

 

한편 아키오와 야에코가 어머니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한 후 아키오의 어머니마저 치매를 앓기 시작합니다. 근처에 사는 아키오의 여동생 하루미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매일 저녁 들르곤 했었는데 어느 날 저녁 아키오는 야에코로부터 걸려온 급한 전화를 받게 됩니다. 여동생 하루미의 방문도 미루고 급히 집으로 와달라는 주문이었습니다. 아내의 부탁으로 귀가를 서두른 아키오는 거실에 놓인 어린 소녀의 시신을 보게 됩니다. 응석받이로 자란 나오미가 한 짓이었습니다. 살인자가 된 아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던 아키오는 시신을 상자에 담아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근처의 공원 화장실에 유기합니다.

 

"어떻게 이런 어리석고 경솔한 범죄가 다 있는가. 아무리 제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늙은 어머니를 살인범으로 몰아세우다니, 마쓰미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그나마 마에하라 아키오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실토를 해준 게 유일한 구원이었다." (p.264)

 

마쓰미야와 가가 형사는 한 팀이 되어 사건을 조사합니다. 가가 형사의 뛰어난 추리력과 상황 판단으로 수사망은 점점 범인을 향해 좁혀집니다. 아들 나오미를 살인자로 내몰 수 없었던 아키오와 야에코는 치매에 걸린 마사에를 살인범으로 꾸며 자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독자의 허를 찌르는 반전은 그다음에 이어집니다. 아키오와 마사에, 다카마사와 가가 교이치로 형사는 어떤 결말로 끝나게 될지...

 

작가는 부모 세대를 나 몰라라 내팽개친 채 자식에게만 모든 열정을 쏟는 젊은 부부의 그릇된 사고방식과 양육 태도, 그 결과가 보여주는 참혹한 현실을 대비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결말 부분의 반전을 통해 희망의 불씨를 살리고 있습니다. 혈육의 정마저 시들해지는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을지 작가는 조심스레 묻고 있는 듯합니다. 태풍이 지나간 휴일 하늘은 가을빛으로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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