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이따금 시계열의 연속선상에서 누군가 한 부분만 뚝 떼어 들어낸 듯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 공란의 삶이 있게 마련입니다. 밤꽃이 피고 지던 지난 보름여의 시간 동안 나는 그야말로 목숨만 겨우 유지한 채 죽은 듯 지냈었나 봅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꼭 해야 할 일만 겨우 하면서. 마치 나는 내 삶이 아닌 누군가의 삶을 조용히 지켜보는 듯 그렇게 방관자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한낮의 더위도 아침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에 슬몃 씻겨 사라지고 바람을 벗 삼아 저녁 산책에 나선 날이면 하루의 기억도 바람결에 무심히 흩어지곤 했습니다.

 

아픈 아내를 돌보며 크게 달라지지 않는 일상을 살아내는 동안 6.13 지방선거가 있었고, 2018 러시아 월드컵이 개막했고, 연분홍 자귀나무 꽃이 만개했습니다. 슬쩍 스치기만 해도 금세 초록물이 들 것 같은 한여름의 시간들이 지금도 무심히 흘러가고 있습니다. 뉴스에서는 오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향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3김 시대로 통칭되던 민주화의 시기에 그도 어쩌면 자신의 지난 삶을 조금쯤 반성하며 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영욕의 삶을 살게 마련이니까요.

 

김형수가 쓴 <문익환 평전>을 읽고 있습니다. 손에 잡고 읽은 지 꽤나 오래되었는데 진도는 잘 나가지 않습니다. 멍하니 글자만 읽다가 처음 읽었던 부분으로 다시 되돌아가기를 여러 번, 온전히 책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날씨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햇살은 무척이나 따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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