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어떤 소설은 마치 1980년대의 대학가에 나붙은 대자보처럼 읽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격해지고 자기도 모르게 울컥 분노가 솟구치기도 한다. 예컨대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글도 그랬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묘사하는' 이를테면 개인의 단편적인 일상을 콜라주 형태로 이어 붙여 궁극적으로는 한 시대의 모습을 합창 형식으로 완성하는, '개인 목소리의 합창'은 사실이 주는 울림과 같은 문제를 각기 다른 모습으로 피력하는 개개인의 목소리를 한 곳에 모아 더 큰 목소리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독자가 느끼는 감동은 일반적인 소설과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부당한 사회 문제에 대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일시에 고함을 치는 것과 비슷하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 '소리 없는 아우성'은 이런 경우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문자로 외치는 많은 사람들의 함성, 그 조용한 고함 소리.

 

"아홉 살 어린이부터 예순아홉 할머니까지 육십여 명의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목소리에서 이 소설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상기된 얼굴, 자꾸만 끊기던 목소리, 가득 고였지만 끝내 흘러내리지 않던 눈물을 잊지 않겠습니다." (p.6 '작가의 말' 중에서)

 

'82년생 김지영'을 쓴 작가 조남주의 신작 <그녀 이름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작가가 인터뷰한 이야기는 신문 지면에 르포 형식의 기사로 연재되었고, 작가는 그 기사를 모아 28편의 짧은 소설들로 재구성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작가의 첫 소설집인 셈이다. 네 개의 장에 나뉘어 담긴 28편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이 땅에 사는 다양한 연령층의 여성들을 일일이 불러낸다. 차별과 폭력 앞에서 여전히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여성들, 때로는 폭력에 저항하는 피해 여성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2차 피해와 그 실체를 작가는 아주 담담한 필체로 기록한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독자는 작가의 담담함이 오히려 분노할 수 없는 더 큰 분노라는 걸 이내 감지하게 된다.

 

"나는 그래도 가벼운 부상에 속했다. 많은 학생들이 탈진했고, 넘어지고 부딪히며 멍들고 부러졌다. 깨진 유리 조각에 찔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가장 아프게 했던 것은 표정들이다. 끌려 나가는 제자를 팔짱 끼고 쳐다보던 교수들의 덤덤한 표정, 아무렇지 않게 자기들끼리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경찰들의 표정, 그리고 그 많은 경찰병력을 보냈을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표정." (p.231 '다시 만난 세계' 중에서)

 

약자의 인내가 오래되면 될수록 약자의 저항은 오히려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려워진다. 그것은 일종의 돌발행동이거나 사회 부적응자의 돌출 행동쯤으로 이해된다. 같은 처지에 있는 약자의 시각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부당한 처우에 대한 저항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용기에 대한 보상은 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비난, 조롱, 그리고 법적 처벌이 전부일 때가 많다. 사회 부조리도 일종의 사회적 관습으로 이해하는 사회 구성원들은 변화를 통한 혼란을 결코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우리들의 인식이 아닐까.

 

"나이를 먹으니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싶다. 따박따박 따지기도 귀찮고 손해 좀 보는 게 그렇게 아깝지도 않다. 그런데 핸들만 잡으면 깐깐한 기사가 된다. 이만큼 경력이 쌓였으니 스스로를 위해서도, 후배 여성 기사들을 위해서도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p.169 '운전의 달인' 중에서)

 

오늘 나는 6.13 지방선거 사전투표를 했다. 선거는 어쩌면 약자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연대가 아닐까 싶다. 헌법으로 익명이 보장되는 유일한 연대, 선거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미세먼지 가득한 초여름의 더위 속에서도 그 연대의 대열은 길게 이어졌다. 정의와 평화, 소수자의 인권과 공정한 대우를 바라는 약자들의 연대, 나도 오늘 그 대열에 동참했었다. 기꺼운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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