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산행길의 풍경은 낯설고 생경했습니다. 산벚나무의 흰 꽃잎들이 등산로에 가득하고 강한 봄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키 큰 나무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이따금 서로의 몸에 부딪혀 '끽, 끽' 소리를 내곤 했습니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에 나는 4월의 무르익었던 봄을 잠시 잊기로 했습니다. 의식적으로 잊으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봄답지 않은 날씨가 그렇게 만들었나 봅니다.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겨울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길을 걷고 걸어도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앉은 고민 하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내가 아픕니다. 아픈 아내와 철부지 아들을 연로하신 장모님께만 맡겨두었던 나는 가족과 주말을 보내고 다시 지방으로 내려올 때마다 밀려오는 부담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나는 설 명절을 보낸 후 지방의 내 숙소로 아내를 데려오고야 말았습니다. 일을 하고, 아내의 식사와 약을 챙기고, 빨래와 청소 등 집안일을 병행하느라 나의 하루는 빠르게 지나갑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는 아내를 위해 하루에 두 번 전신 마사지를 해주는 일도 거를 수 없는 일과 중 하나입니다. 동분서주하는 나에게 아내는 무척이나 미안해합니다. 그러나 어찌 알겠습니까. 전생에 내가 아내에게 큰 빚을 졌거나 지금 내가 하는 일보다 더 큰 은혜를 아내로부터 받았을지 말입니다.

 

개화를 준비하던 아파트 화단의 철쭉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화들짝 놀라 움츠러든 모습입니다. 봉오리를 꼭 닫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듯합니다. 계절의 추이에도, 우리의 인생에도 예측하지 못했던 이런 일들이 수시로 닥치곤 하지요.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저 운명처럼 벌어지는 이런 일들에 자책하거나 원망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저 담담히 시간을 견디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따뜻한 봄 날씨가 이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책도 잘 읽지 못합니다. 일주일에 한두 권을 겨우 읽을 뿐입니다. 어제는 전임 대통령의 1심 선고가 있었지요. 24년의 중형이 내려지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국민들은 다들 착잡한 심정이었던 듯합니다. 이러려고 대통령이 되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는 그분의 말씀처럼 자신의 깜냥이 직위에 미치지 못한 사람이 욕심만으로 그 자리에 올랐던 것에 대한 처벌 치고는 과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법 앞에 공평해야 함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보여주는 것도 후세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중 하나이겠지요. 불현듯 찾아온 추위처럼 우리네 인생에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이 이따금 찾아오는 법이지요. 그게 비켜갈 수 없는 운명이라면 주어진 시간을 담담히 견디는 것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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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4-08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내분 얼른 쾌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꼼쥐 2018-04-08 17:0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