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조에 대한 헛된 기대를 버리니, 더 이상 티비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세월호 구조 장면보다 학기초 특유의 분주함속에서 섞여 있을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왁자지껄하고 떠들썩함이 사라진,  텅빈 이학년 교실과 복도을 짓누르는 어둠과 침묵의 이미지가 머리 속에 들러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다운된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하루종일 몸을 움직여 보지만, 심란한 마음은 정돈되지 않는다. 청소기를 돌리다가도, 뜨거운 가스불위의 후라이팬이 한참을 달궈지며 뜨거운 열기가 느껴져도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고 멍해진다. 제 삼자인 나야 시간이 지나면 극복되지겠지만, 세월호에 관련된 분들의 슬픔과 고통은 이제 시작이다란 생각에 축축 쳐지는 심란한 마음을 끌어오리는데엔 시간이 걸리지 싶다.

 

2. 오늘 아침에 존 폰 노이만을 검색하려  알라딘서재 들어왔다가 <바른 마음>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는 일요일 저녁에 딸과 잠깐 대화한 내용이 떠오르며 이 책이 궁금해졌다.

 

그제 저녁에 수백명의 학생이 바다속에 잠겨져 있어 실종처리된 상황에서 우리 딸은 <개그콘서트>를 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트리며, 애초에 단원고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안개가 짙게 끼였는데도 불구하고 수학여행을 강행했기에 일차적으로 단원고 학생들하고 선생님들이 잘 못한것이라는 볼멘 소리를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랬다.

 

수백명 학생의 죽음과 상실에 대한 공감을 못하는 딸에게 놀라, 너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었냐고 화를 누르며 물어보니, 본인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티비를 자주 듣는 아이라 혹 거기 비제이가 그런 말을 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아니라고 자신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13살이면 어느 정도는 공감 능력이 있을 나인데, 내가 자식을 잘 못 키웠나하는 생각이 한순간 들었다. 한편으론 저 나이가 뉴스 정보를 취합할 능력이 안 되고 삶의 경험치가 적어 전적으로 공감할수 있는 나이는 아니라고 속으론 다독여보지만, 예능프로 방영 안 해 준다고 툴툴거리는 딸에게 적잖이 실망한 것 사실이었다.

 

그래서 예은아, 너가 잘 못 생각한 것이라고, 우리 인생에는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선택앞에 놓일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데, 우연찮게 선택이 잘못했을 때, 그 것을 선택한 당사자들만을 비난할 수는 없는 거라고, 예를 들어 세월호를 타기로 선택해서 사고를 당하더라도 선장과 승무원의 신속한 구조 요청과 승객을 먼저 구할려고 했어야했고, 해경이나 해군은 빠른 시간에 와서 어떠한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승객을 구조했어야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배의 점검이나 안전장비나 구조장비를 철저히 점검하고 구비했더라면, 한번의 선택을 잘 못 했더라도 그 후 최선을 다 했더라면 최소한의 인명 피해만 났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더니,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긴 하지만 당장의 순간을 모면하려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타인의 슬픔과 아픔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딸아이에게 나는 어떤 식으로 말해줘야 할까. 가만히 지켜봐야 할까? 아니면 슬픔에의 강요를 해야 하나? 저 책의 목록을 잠깐 들여다보니, 아이들도 마땅히 지켜야할 것들을 알고 있다라는 챕터가 나온다. 아이들은 선천적으로 슬픔에 대한 공감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후천적으로 어른의 흉내를 내는 것인가?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어린 제 삼자의 입장이기에,  슬픔의 공감보단 일상의 재미와 반복적인 일상의 되풀이에 익숙해진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아이에게 실망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천천히 지켜보잔 생각이 든다. 아직 모를 나이니깐....

 

2. 한때 국민사위라는 함익병의 월간 조선의 인터뷰때문에 난리가 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기사 읽으면서 댓글중에 이런 베스트 댓글이 있었다. 공부는 잘했을지모르지만 전형적인 사유부재의 결과물이라고. 처음엔 그 댓글 읽고 공감이 되었는데, 한참 후에 곱씹으니, 사유와 바른 마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유는 사유일뿐 그 사람의 도덕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이다.

 

예를 들어, 나치에 동조한 독일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의 사유는 우리 일반인들의 사고나 사유와는 차원이 다르다. 과학자들이라해서 실험실에 쳐 박혀 실험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은 그 어떤 철학자들보다 더 많은 사유를 필요로 한다. 상당히 고차원의 추상적인 사고와 일반적인 상식이나 개념을 뛰어넘는 논리성과의 결합을 요하는 작업을 한 사람들이기에, 일반인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사유를 한 사람들이치고는 나치를 동조했다는 것이 수치스러울 정도이니 말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그렇고 과학분야에서 대표적인, 양자역학분야에서 불확정성의 원리를 확립한 하이젠베르그가 그렇다. 심지어 2차세계대전기간 독일의 대다수의 지식인들(철학자, 소설가나 과학자들 대부분)이 나치에 동조해서 자신과 함께 일하는 유대인 과학자들을 고발하고 감시한 것을 보면 사유부재가 문제가 아니고 편협이나 옳고 그름의 판단을 정하는 바른 마음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긴 뭐 우리나라도 일제식민지 기간동안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파였는가 말이다.

 

그러고보면 지식인들의 고상한 척, 있는 척하는 하는 사유는 옳고 그름을 구분 못하는 사유일 뿐이지, 多사유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 없음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함익병의 왕정정치 옹호나 여자 비하는 사유부재라기 보다는 사회를, 사물을, 상황을, 사건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자신의 이기적인 탐욕이 바른 마음보다 우선시하고 그렇게 교육받은 탓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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