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에서 살아남기
-2018.09.03-2018.09.04. 데시카가-

“한 사람에겐 다시 같은 문학상을 주지 않는다.”란 말은 이기호 소설가가 황순원 문학상 수상 작가의 서에도 적었던 문장이다. 이 말은 인생과도 상통한다. 한 사람에게 두 번 다시 같은 인생을 주지 않는다! 사흘째 되는 날의 니지베츠캠핑장은 이틀에 걸친 캠핑의 설렘과 신선함이 옅어져선지 혹은 흐린 날씨 탓이었는지 환호가 약해졌다. 어쩌면 캠핑카에서의 생활에 점점 지쳐가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유라 하여도 지금을 무감하게 흘려보낼 수 없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생의 순간이므로!!

이곳 어디든, 울창한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배경음을 깔아주고 있었다. 전날 먹다 남은 고기를 구우며 빈속에 들이키는 맥주가 흐린 저녁의 바람소리를 오케스트라 반주 삼아 노래를 흥얼거리게 한다. 심심해하는 아이들과 캠핑용 휴대 의자를 펼쳐놓고 의자뺏기 놀이도 하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며 웃음소리를 드높인다. 아이들 웃음소리는 홋카이도 숲속에 이는 바람과 환상의 하모니를 연출했다. 어른들은 환상의 하모니에 취하게 되니 사흘째 밤이 또 지나간다.

굿샤로호 호수는 엄청난 규모의 호수다. 이튿날, 데시카가마을에 자리한 스나유온천에서 아이들을 풀어놓았다. 검은모래자갈을 파면 뜨거운 온천물이 스며든다.그야말로 천연 노천 온천인 셈이다. 단조로운 해안선에 관광객이 많지 않아 노천 온천은 우리 것인 셈이다. 근교에서 생애처음 징기스칸 양고기를 먹었다. 징기스칸 요리가 몽골음식이 아니란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몽골인이 먹는 양고기를 일본인들 입맛에 맞게 퓨전한 음식이라고 어느 책에서 읽었다는 친우 남편분의 말. 점심 한끼에도 상식이 넓어지니 ‘알아두면 쓸데있는 잡학다식’ 여행을 우리가 몸소 실천한다.

오후 일정은 남편의 회사친구가 추천해준 카누체험이었다. 야마모토는 9월2일~ 9월5일의 일정으로 홋카이도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전날 시레토코 유람선 승선과 굿샤로호 카누체험이 간발의 차로 동선이 교차되는 지점이었는데 유람선 승선이 취소되어 크게 낙담하며 전화를 해왔었다. 다행히 이 곳 카누체험을 오전에 마치고 다음 여행지로 이동중이라는 야마모토의 전화를 끊고 카누 체험장으로 이동한다. “ぢぢ(지지)”란 이름의 조그만 사무실 사장님은 방금 떠난 야마모토상과 아는 사이란 말에 더 밝게 환영인사를 해준다.

그의 웃음은 진심이었다. 그걸 알 수 있던 단서들은 여러가지였다. 카누 체험 과정을 설명하는 흥분된 액션을 대비시켜주던 손수 그리고 직접 쓴 글들이 적힌 세상에 하나뿐인 카누책. 자수로 책표지를 꾸미고 배경을 색칠한 카누체험 책에 나무로 조각한 모형의 카누가 올려지고 쿠마인형들이 카누 승선 관광객으로 실현되어 4D형태의 카누책으로 탄생한다. 또 그곳을 떠나올 때 그가 보여준 한국어공부 책이라든지 마지막으로 손편지로 그날 찍은 사진을 인쇄해 보내주겠다며 직접 색칠한 편지봉투를 보여주는 모습. 적어놓은 수신지의 경기도 발음을 여러번 따라한다던지, 경기도가 어딘지 궁금해 물어보며 대한민국 지도책을 펼쳐 손으로 가리켜 보는 행동들이 그 증거였다.

어쩐지 설레는 카누체험일 것 같은 즐거움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 날씨마저 운치있게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카누를 타는 두시간 내내 곳곳에서 지루해질 즈음의 적당한 시간에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벤트를 공개하는 것은 영화의 줄거리를 알려주는 것보다 더 큰 스포가 될 것같아 말을 줄이고 싶지만 이것만은 적어두고 싶다. 굿샤로호 호수의 한 지점에서 강으로 넘어가는 지류에는 민물가재가 훤히 다 보일정도로 물이 맑다는 것과 그 맑고 투명한 강바닥을 내려다보며 민물가재잡기를 하는동안 수십마리를 낚을 수 있었다는것! 민물가재잡이 미끼가 다름 아닌......쓰래미였다는 것!!

홋카이도의 비를 맞으며 굿샤로호의 민물가재잡기의 짜릿한 손맛을 즐기는 동안 챙겨온 원두를 그 자리에서 갈아 보온병의 따뜻한 물로 커피를 내어주는 지지의 카누 가이드 선생님들. 이 넓은 세상에서 이렇게 좁은 카누를 나눠타고 얼마만큼의 높이에서 떨어지고 있는지 모를 홋카이도의 비를 맞으며 작은 머그잔의 서너모금의 커피를 마시면서 지구와 우주에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들과 그 온기를 느끼고 조금쯤은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체온을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호상’이란 말이 얼마나 생에 대해, 인간에 대해 아둔한 발언인지를 반문했던 적도 있다. ‘살만큼 살았다.’란 말을 곧이 듣지도 않는다. 그 모든 말들은 더 살아보고 싶다는 다른 말일지 모른다. 죽기에 알맞은 시기가 없듯이 죽음에 적당한 나이도 없다. 이르든 더디든 적합한 죽음의 시기와 나이가 정해져 있지 않다. 전환해보면 살기에 ‘딱’좋은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 될 수 있겠다. 살기에 딱 좋은 시기를 찾느라 살기에 딱 좋은 시간을 모른채 살고 그리하여 인생 앞을 살았던 많은 선배들이 얼마나 큰 한탄과 많은 후회를 했는지 알지 않는가? 젊든 늙었든 살기에 ‘딱’ 좋게 생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지금 이 순간이 살기에 딱 좋은 나이를 살고 있다. 내 나이를 탓하며 좋을 때 다 지났다고 원망하기에 나는 살기에 딱 좋아 본 젊음을 보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죽기전까지 인간은 저마다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귀한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이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의 것들을 귀하게 여기게 한다. 같이 있는 이들이 고맙고 낯선 곳에서 만나는 이들이 반갑고 지난 과거가 있어 내가 철이 들 수 있어서 다행이고 오늘을 즐기니 이 또한 행복이며 과거를 발판으로 딛고 오늘을 우뚝서서 내일을 향해 팔벌리는 자는 행복의 가치가 굳건해진다.

생애 처음 만난날 생애 마지막을 인사하는 이들의 심정으로 지지의 카누 가이드 선생님, 가족들과 인사한다. 3년전부터 한국인들이 조금씩 찾아오고 있다는 지지가족들을 만나볼 기쁨이 나의 동족에게 많아지길 소망하는 마음은 9월 6일 아침 변하게 될 거란 걸 모른 채. 몇번이고 인사말을 남긴다.
“건강하세요.”
건강만이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 줄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어디에도 터를 잡고 오래 머문 적이 없기에 떠나는 발걸음이 무겁지 않게 살아온 수십년. 사실 오랜 시간 터잡은 내집과 고향을 떠나는 일보다 잠깐 만났어도 커져버린 정을 떼어내는 것이 더 힘든 일이란 것쯤은 알게 된 나이. 익숙한 무심함처럼 손을 흔들었지만 아쉬움에 몇 시간 할 말을 잃었었다.

“수십마리나 잡은 민물게를 다시 방류하라니, 푸짐한 저녁거리로 입맛 다시며 잡은 거라 상실감에 언어 상실했다우.”
말이 없는 나를 감정이 상해 삐진 걸로 오해할까 싶어 한마디 던져 놓기는 했었다. 하늘 색이 바뀌고 빗줄기의 방향이 틀어지자 우리는 구시로쪽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죽으면 여한이 많을 것 같은 생. 죽기 직전까지 죽기 싫어 여한 많은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다짐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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