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 21 : 러시아 1 - 시즌 2 지역.주제편 먼나라 이웃나라 21
이원복 글.그림, 그림떼 그림진행 / 김영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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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러시아 전근대편 리뷰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는 내가 어린 시절 열심히 읽었던 책 중 하나다. 이원복 특유의 설명은 읽는이의 흥미를 상당히 유발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다. ‘먼나라 이웃나라‘ 러시아편이 등장했다는걸 알게된 것은 아마 코로나 초기였을 것이다.

러시아편이 나왔을 당시 읽어보고 싶긴 했지만, 이원복이 뉴라이트라는 사실 때문에 한동안 이 사람 책에 거리를 뒀다. 2년 전 동남아시아 편을 읽었는데, 재밌게 읽긴 했으나 필리핀 역사를 설명한 부분에서 ˝필리핀인들이 미국의 식민지배에 크게 저항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해서 어이없던 적이 있었다.

그런 문제를 뒤로하고 ‘먼나라 이웃나라‘ 러시아 전근대 편을 오랜만에 읽었다. 확실히 만화다보니 읽는 재미는 있다. 그리고 러시아 역사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이들이 읽기엔 비교적 러시아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몇몇 사례들을 한국 역사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것도 재밌었다. 예를 들어, 예카테리나 여제 2세 때 일어난 푸가초프의 농민 봉기를 1894년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에 비유한다던지 뭐 그런 것을 들 수 있다. 비록 책에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해방 이후 김일성이 고국으로 귀국할 때 타고온 소련군 함선 이름이 푸가초프호다.

사실 이번 장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에피소드는 가짜 드미트리 사건이다. 이반뇌제 사후 일어난 일인데, 그의 혈통을 이었다는 이가 나타난 사건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이반 뇌제 사후 그의 4번째 아내인 표도로브나 나가야는 어린 아들 드미트리가 죽고 이반 뇌제에 불만을 품었던 신하들에 의해 수도원으로 쫓겨났다.

그가 나은 아들이 죽었음에도 아들이 살아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1600년 대 초 드미트리를 참칭하는 이가 기아와 굶주림 속에 빠져 있던 상황에 등장하여 정권을 잡은 것이다. 물론 그 드미트리는 가짜였고, 자신의 사적 권력욕을 채우다 1년 만에 목숨을 잃었다. 이후에도 그 드미트리의 이름을 이용한 이가 두번이나 더 등장했다. 물론 이들 모두 기회주의자였다고 한다.

나폴레옹 관련한 얘기도 흥미롭다. 사실 8~9년 전 러시아사를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폴레옹의 조국전쟁에 대해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는데, 만화로 보니 더 쉽게 이해가 되는 느낌이다. 그 외에도 책은 차이코프스키나 푸쉬킨 등 러시아사의 유명한 인물들도 다수 소개한다.

물론 이번 편에서도 내용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볼셰비키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견지하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 솔직히 이원복 작가가 아프리카인을 묘사할 때, 과거 서구의 내러티브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사 지식이 전혀 없는 이가 접근하기에는 여러모로 유용할 것이다. 다음에 현대편을 읽고 리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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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50년
김수지 지음, 윤철기.안중철 옮김 / 후마니타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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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비록 새해에는 옆 나라의 쓰나미와 국내에서의 백색테러라는 암울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지만, 이런 일 말고 많은 이들에게 기쁜 일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코로나바이러스가 한참이던 2020년 말이었을 것이다. 이 책을 우연히 인터넷 상에서 오프라인으로 만나게 된 지인을 통해서 알게 됐다. 지인은 나에게 이 책이 브루스 커밍스의 제자가 쓴 책이며, 북조선 초기 역사에 대한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고 했다. 이 책을 사게 된 나는 몇 년 후 영문판으로 일부분만 읽어봤다. 예를 들어, 토지개혁이나, 선거 그리고 젠더 관련한 부분을 조금 읽었는데, 일반적인 책들에서 찾기 힘든 내용이라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러던 20238월 초 드디어 이 책이 국내에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참으로 기뻤고, 따라서 인터넷을 통해 바로 책을 구매했다. 책을 읽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요즘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읽고 싶은 책을 읽는 독서시간이 부족했다. 그래도 새해를 맞이하며 완독하니 상당히 기쁘다. 브루스 커밍스 선생이 가르치고 키운 수제자의 책을 이리 한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제자이기도 한 김수지(영어로 Suzy Kim)는 루트거스 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북한사를 연구한 인물이며, 통일운동가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정전 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글쓴이는 평화운동 국제연대 차원에서 작년 여름에 미국에 갔다왔었다. 그때 워싱턴 D.C에서 접촉한 여성주의 성향의 평화운동 단체가 있었는데, 그 단체가 바로 Women Cross DMZ이며, 이 책의 저자가 몸을 담고 있는 조직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단체는 사실 국내 언론사에도 많이 실렸는데, 구글이나 네이버에 우먼 크로스 DMZ’ 혹은 위민 크로스 DMZ’로 검색하면 여러 기사들이 나올 것이다. 물론 미래한국같은 우익 언론사에선 종북단체 혹은 북한의 꼭두각시라 욕하며 혹평 일색이다. 이번에 읽은 책 혁명과 일상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2013년 그녀가 쓴 책인 “Everyday Life In The North Korean Revolution 1945~1950”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사실 북한사는 역사학 분야에 있어서 아직은 연구가 많이 되지 않은 주제 및 분야이며, 또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자 주제다. 물론 우리가 이에 대해 연구를 하지 못하는 것은 북한 사회에 접근하기 힘들다는 점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북한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을 내려놓지 못하는 한국 그리고 미국 자신의 책임도 크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폐지되지 않은 국가보안법의 존재도 한몫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북한사는 자료의 접근이 많이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북한사 연구의 경우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전까지는 비교적 연구가 축적됐다. 이는 소련 해체로 인한 냉전의 영향도 한몫한다. 이에 따라 러시아측 문서고가 열리고, 한중수교가 성사되면서 중국 측 자료도 비교적 열람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미국에서 북한사 연구를 어떻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미국 안에 있는 문서고를 통해 가능했다. 이와 같은 연구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다. 1980년대에 완성된 커밍스의 연구는 미국 워싱턴 근처에 있는 NARA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노획문서를 통해 진행됐다. 한국전쟁 당시 북진을 한 미군은 점령한 북한 지역에서 무수히 많은 문서를 확보하여 미국으로 가지고 갔다. 그리고 여기 담겨 있는 문서들 중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자료들도 많다. 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연구하는 이들이 이 곳을 방문하는데, NARA국립문서보관소에는 그만큼 자료가 많이 있다.

 

NARA국립문서보관소에는 전쟁 시기 북한에 대한 자료 뿐만 아니라, 1945년부터 1950년 전쟁 이전까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정권 하에서 진행되고 수행된 많은 것들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많이 있다. 이 중에는 1946년 북한에서 실행된 토지개혁에 관한 것도 있고, 당시 여성들의 일상을 볼 수 있는 자술서를 비롯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과거에는 북한 땅이었다가 현재는 남한 땅인 인제군이나 양양 그리고 속초 등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권 시기 강원도 지역의 모습을 담은 자료들도 NARA국립문서보관소에 많이 있다.

 

김수지의 책 혁명과 일상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은 과거 미국이 노획한 북한 측 1차 사료를 바탕으로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 나온 한국 사학계 측 연구자료들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김수지는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권 하에서 나타나는 인민들의 일상에 주목했다. 또한, 김수지는 2010년대부터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젠더의 문제도 북조선의 역사를 통해 접근하고자 했다. 사실 젠더 부분에 대해선 많이 모르는 글쓴이 입장에선 책을 통해 많이 배우는 느낌이었다. 책에서 현재 대한민국 영토인 강원도 인제군에 집중한 것도 상당히 흥미롭다. 예를 들어, 김수지는 1945년 해방 이전 일제 하에서 여성의 문맹률이 90%였는데, 해방 이후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실질적으로 나타난 문맹퇴치의 성과를 언급한다.

 

“1945년 당시 여성의 90%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문맹은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큰 문제였다. 이 점에서 문맹 퇴치 운동은 여성들에게 많은 혜택을 제공했는데, 실제로 [문맹 퇴치] 학교의 학생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1948년 인제군 졸업생을 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3~4배가 더 많았다(<3.11>참조). 글을 읽지 못하는 인제군 주민들[대체로 만 12세 이상 50세 미만 남녀]은 거의 모두 한글학교에 다녔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겨울철 농한기에 이루어지는] 4개월 과정이 끝난 후 치러진 최종 시험을 통과했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162~163.

 

인용문을 보면 북조선에서 실행한 문맹퇴치운동이 실질적인 성과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고, 그 혜택을 여성들이 많이 보았음을 알 수 있다. , 이러한 근거를 통해, 김수지는 북조선에서 진행된 혁명의 성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김수지가 북조선 혁명에서 나타난 여성상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어머니상을 내세우면서 정권 초기에 나타난 육아와 보육의 부재나, 일부 여성 지도자들이 북조선 정권 하에서 쓴 자서전 및 책에서 나타난 맥락 생략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북조선 혁명 하에서 진행된 여성 혁명의 성과들 또한 많이 보여줬다. 예를 들어,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의 가입 비율이나 조직화 등에 대한 묘사를 보면 알 수 있다.

 

“19451118,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 (이하 '여맹으로 약칭)의 결성과 더불어 여성은 가장 먼저 조직된 단위 가운데 하나였다. 중앙집권화되기 전 마을 단위에서 자발적으로 결성된 인민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여성 단체 역시 여맹의 우산 아래 모이기 전까지 전국적으로 홑어진 형태로 조직되어 있었다. 1946510일 첫 번째 총회를 개최할 무렵 여맹은 12개 도시 89개군 616개 면에 지부를 두고 총 8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1946년 말까지 여맹 회원은 103만 명으로 확대되어 18~61(은퇴 연령) 성인 여성 인구의 3분의 1을 조직한 상태였다. 1947년 무렵 여맹의 회원 수는 150만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농민이 73퍼센트를 차지했다. 노동자는 5.3퍼센트 사무원은 1퍼센트 미만이었으며, 나머지 20퍼센트는 '기타로 분류되었는데 대부분 주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187.

 

여성 관련한 얘기들 중 글쓴이가 상당히 흥미롭게 읽은 지점을 뽑자면, 빨치산 운동에 참가한 여성의 기억이다. 흥미롭게도 남한에서 빨치산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의 경우, 자신들이 빨치산 운동에 참가한 것을 보람있게 생각했으며, 그 이유 중 하나가 남녀평등이었다.

 

여성들 역시 민족 해방 문제를 우선시했다. 예를 들어, 박선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라가 없으면 여성 권리도 필요가 없는 것이고 ……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 여성들이 더 이렇게 학대를 받고 이렇게 한단 말이야.” 민족 해방 투쟁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의 해방 곧 여성해방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수많은 빨치산 여성들이 산에서 보냈던 시간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해방감을 느꼈던 시간으로 설명했다. 누군가의 아내 또는 딸이 아니라 남성 동지들과 동등하게 혁명가가 되는 꿈을 꿀 수 있었다. 빨치산 시절 한쪽 팔을 잃었음에도 변숙현은 산에서 보냈던 삶에 대해 내 생애에서 젤로 보람 있게 산 시간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 큰 포부를 갖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녔으니까라고 말하며, “보람 있게살았다고 단언했다. 박선애도 다음과 같이 동의했다. “여자이기 때문에 힘들다는 것은 없었어요. 왜냐면 너무 우리가 억압당하고 살았잖아. 긍께 이제야말로 우리가 말할 수 있고, 맘대로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할수 있다, 우리도 여성이지만 인간으로 살 수 있다.”

 

두 여성의 감정에서 공통적인 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할수 있다.”는 해방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결정하는 전통적인 가족(그것이 친정이든 시댁이든)과 연계된 그 어떤 의무나 책임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그녀들은 살면서 처음으로 가족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규정하지 않아도 되는해방공간을 경험했던 것이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346~348.

 

이와 같은 김수지의 여성 관련 서술들을 글쓴이에게 젠더적 관점에서 본 북조선 혁명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줬다. 이 부분에 대한 글쓴이의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글쓴이는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혁명에서 여성들에게 미친 영향은 부정적인 것 보다 긍정적인 것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책에서 언급한 부분대로 일정부분에서의 한계나 미흡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과거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통치시절과 비교해보자면, 여성이 혁명과 일상의 주체로서 나설 수 있는 길이 보다 열리게 된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김수지가 결론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이후 북조선에서 여성은 남성과 함께 일하고 공부하며, 군대에서 복무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의무교육이 전적으로 무상화됐고, 마찬가지로 의료도 무상화됐다. 북한의 김일성은 1964년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결국은 전체 인민의 행복한 생활을 보장하며 그들의 부단히 높아 가는 물질적문화적 수요를 더욱 더 완전히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라고 선언했는데, 이와 같은 사회적 변화와 복지의 제공은 북한이 실제로 그걸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본다.

 

김수지의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본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북한의 친일파 청산이다. 일각에서는 남한의 부재한 친일청산 역사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오류가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책의 5장인 자서전, 혁명의 내러티브파트를 보면, 출신성분이 부르주아였거나 부유층으로서 소극적 혹은 적극적 친일에 가담한 이가 어떻게 해방 후 혁명 속에서 자신의 친일 행각에 대해 표현하는지가 나와 있다. 흥미롭게도 학교에서 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칭송했던 한 인물의 경우, 혁명 정권이 들어선 뒤 쓴 자서전에서 이를 부끄럽게 간주하는 얘기들을 하고 있으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북한 사회가 친일한 이들의 친일행각에 대해 사회적으로 반성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한의 경우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친일행각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이것과는 상당히 대조된다고 할 수 있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그러나 이런 기만적인 사실을 이해 못하고 그 교육 이념과 그 정책을 옳다고 인정한 나의 친일적인 사상을 해방된 오늘에 반성하여 볼 때, 너무나 양심의 가책과 무익한 인간 생활을 한 것이 원통하다고 뉘우친 것처럼, 해방은 큰 전환점이 되었다. 자신의 죄책감을 표현하면서 리원갑은 해방 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전향을 상세히 설명한다.

 

“1945815일 우리 조국과 민족의 해방의 날이 우리 조국을 찾아왔다. 소련 군대의 영웅적 투쟁으로우리 민족은 일제의 기반에서 해방되었다. 해방 이후 우리는 소련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못가지고, 우리 북조선에 진주한 후에도 적극적으로 이 소련 군대에 대한 친절을 도모하지 못하였다. 물론, 로어를 이해하지 못한 점이 …… 큰 원인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지방 인민들의 요청으로 다시 나의 모교인 동상인민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 일제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나는 인제야 나의 과거의 과오와 이제부터의 나갈 방향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어린이들에게 조선 민족의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하여 힘써 나갈 것을 교육했다. 이 동안에 상부에서의 지시, 각종 회의, 북조선에서 발간하는 신문, 잡지 등을 통하여 우리 조선 민족이 나갈 길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465월부터 19471월 사이 평안북도 교육국의 추천으로 그에게 북조선로어학교에 입학할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매달 500원의 장학금을 비롯해 모든 필수품과 기본 용품을 제공받았다 일제가 주도한 식민지 근대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해 왔던 사람들에게 해방 후의 상황은 훨씬 더 열악했을 것이기에, 이 같은 상황은 확실히 그에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255~256.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무엇보다 1946년에 단행된 토지개혁에 있다.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부는 혁명정부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고 농민들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이하 토지개혁법)’194635일 공표했다. 이 법령에서는 일본 정부 일본 국민과 기관 그리고 일본인에 협력한 조선인 반역자들이 소유한 토지를 몰수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했다. 5정보 이상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조선인 지주들의 토지 역시 무상으로 몰수됐으며, 지주들이 계속해서 소작을 주고 있던 토지는 면적과 상관없이 몰수됐다.

 

토지개혁으로 전체 105만 정보가 몰수되었고 25일 만에 98만 정보가 모두 71만 농민 가구에 무상으로 재분배되었다. 토지개혁은 지주의 권력을 무너뜨렸으며, 지주들 가운데 대다수는 일제 부역자로 규탄받던 이들이었다. 이들이 규탄 받으며 토지가 몰수된 반면에, 북조선 전체 농민 가구의 70% 이상이 혜택을 받았다. 1946년 북조선의 토지개혁은 토지가 없는 다수의 농민과 빈농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일제 식민지 시기 친일을 했던 지주들은 쓴 약을 삼켜야만 했다. 일제 시대 당시 지주였던 한 사람이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한 것을 보도록 하자.

 

새로 들어선 공산주의 정부는 우리의 토지를 모두 하룻밤에 빼앗아 소작농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들은 그것을 토지개혁 제1조라고 불렀다. 토지는 인민들의 것이 되어야만한다고 말했다. 갑자기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토지를 잃었다. 그들은 우리를 집에 머물게하고, 우리 집과교회 사이에 있는세 개의 논을 남겨 놓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논 내가 거머리 밭이라고 부르던 에 발을 담갔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134~135.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보자면,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토지개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해방 이후 남한에 있던 친일파들이 미군정 하에서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과는 분명히 대조된다. 따라서 북한의 친일파 청산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오히려 친일파 청산을 전혀 하지 않은 집단은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던 이남 정부다. 앞서 인용 및 언급한 토지개혁에 관한 내용 또한 김수지가 쓴 책을 통해 보다 심층적으로 그 진싱을 알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상당한 지적 희열을 느꼈다.

 

그 외에도 김수지의 책들은 북한의 선거 제도와 인민위원회 및 각종 단체들의 결성과 과거 일제시기 억압받던 계층들의 참여를 통해, 혁명 하에서 나타난 북조선의 일상들을 보여줬다. 그런 점도 상당히 좋았다. 과거, 억압과 외압으로만 봐왔던 북조선 혁명의 또 다른 부분을 일상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김수지의 말대로 북조선 혁명은 그 자체로 20세기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경험이었고,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대중 선거와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시행된 급진적 토지개혁을 통해 전례 없이 많은 농민들이 지도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을 만큼 매우 폭넓은 대중에 기반을 두었으면서도 매우 급진적인 혁명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은 인민들의 참여다.

 

책을 읽으면 알겠지만, 북조선 혁명에서 주체가 되었던 것은 일반적인 인민들이었고, 정권 초기 이들이 아주 광범위하게 혁명적 일상에 반체제적 감정을 품었다는 근거는 없다. 일부 지주 및 기독교 계층의 반발이 있었던 것은 맞으나, 이것을 일반 민중들의 심각한 불만으로 등치 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런 편견에 대한 반박과 교정작업이라는 생각도 든다. 따라서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책이며, 특히 북한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는 적극 추천하는 역작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그것은 바로 소련에 대한 얘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책은 북한 사람들이 당시 소련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한 얘기가 많지 않다. 물론 일반 민중들이 인민민주주의 정권에서 교육받는 커리큘럼을 통해, 이들이 소련에 대해 긍정적으로 배웠다는 점을 알 수는 있었지만, 실제로 이들이 어떻게 소련을 인식했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아무래도 찾아봐야 할 것 같지만, 글쓴이가 아는 바에 따르면 김수지의 경우 당시 대다수 북한 주민들이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생각했고, 또 환영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 고 있다. 이 부분은 보충적으로 찾아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와 세계가 가지는 북한에 대한 편견에 대해 얘기하겠다. 사실 아직까지도 전 사회적 영역에서 북한을 보는 시선은 큰 틀에서 보자면, 왜곡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 들어, 세계 최대의 자본가인 일론 머스크가 한반도의 위성 사진을 트위터에 공개했다. 일론 머스크가 공개한 사진을 보면, 남한은 불빛이 많이 있고, 북한은 평양이나 일부 지방도시들 빼고는 어둡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과 주장들은 역사학자인 김수지가 자주 반론을 제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이 사진의 경우 사진을 여러 장 겹쳐서 만든 것이다. 거기다 김수지에 따르면, 북조선은 한국이나 일본보다 야간 조도가 낮은 유일한 국가가 아니며,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국으로 이어지는 광범위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1인당 전력 소비량은 미국과 유럽에 미치지 못한다.” , 이 점에서 프로파간다와 서구식 발전주의의 프레임이 사회에 편향 및 선전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우리는 이런 시각으로 북한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김수지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의문을 던지고 있다. 아래 김수지가 책에 쓴 내용을 언급하며 긴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동아시아의 위성사진을 보면 한반도 이남은 그 주변 지역과 함께 빛으로 둘러싸여 있는 반면, 이북 지역은 수도인 평양을 제외하고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이 사진은 20021223일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뉴스 브리핑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이후 북조선의 후진성을 보여 주는 이미지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밤에 찍은 한반도 위성사진을 보면, 한반도 남쪽이 빛과 에너지 그리고 활력과 경제 호황으로 가득 차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한반도 북쪽은 그저 어둡기만 합니다.” 뒤이어 그는 무미건조하게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비극입니다.” 분명 북조선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그런데 이 비극의 정확한 본질은 무엇인가?

 

위에서 언급된 위성사진이 제작되는 과정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사진을 여러 장 겹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현대 기술의 산물인 위성사진은 지구궤도에서 다각도로 촬영한(정확하게 말하자면, 236개 궤도에서 촬영한) 다중 이미지를 합성해 화재나 번개 같은 이상 현상을 보정하는 정교한 알고리즘을 거쳐 완성된다. , 럼스펠드의 말처럼 위성사진은 하늘에서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실제 모습이 아닐뿐더러 그 사진 자체가 원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낸다고 할 수도 없다. 이 점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조선으로 약칭]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들 역시 북조선에 대한 어떤 일정한 전제들에 맞춰 사용되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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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에 대한 강력한 비판 내지는 비난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소수민족 문제 중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문제고 다른 하나는 티베트 자치구 문제다. 티베트 문제는 서구에서 가장 많이 내세우는 달라이 라마와 이를 지지하는 서구 세력에 의해 전 세계적으로 공론화 됐다. 이들이 항상 얘기하는 것은 결론적으로 항상 다음과 같다. 티베트는 평화로웠지만,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이 점령했고, 수많은 티베트인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나 또한 티베트 문제에 대해 단편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서방의 악선전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오늘은 서구가 외면하는 티베트 근현대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티베트 민족의 등장은 기원전 1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냐트리첸포가 40세대에 걸친 왕정의 시조가 됐고, 거의 1000년 후에 중국과 티베트의 전쟁이 8세기 트르디축텐(36대 왕) 통치 기간에 일어나, 티베트가 중국의 여러 지방을 점령하기도 했다. 참고로 티베트의 승리를 기념하는 돌기둥이 20세기 말까지 포탈라 궁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티베트는 네팔이나 인도에 비해 불교가 상대적으로 늦게 전파됐다. 몽골 군대가 티베트에 도달했을 때, 몽골인들은 티베트의 라마교를 종교로 채택했고, 이에 따라 원 왕조와 만주족의 청 왕조 동안 티베트 불교는 중국의 공식 종교였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시점에, 모든 티베트인의 10% 가량이 남려 승려였다고 한다. 사회체제는 봉건적이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에 따르면, 티베트는 종교적 중심지로서 자치와 평화를 누렸지만, 1896년 청나라 군대가 침공했다. 처음에는 티베트가 이를 격퇴했으나, 1903년 중국 장군 도살자 팽과 그의 군대가 가는 길마다 사람들을 도륙하면서 티베트의 심장부로 밀고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잔혹함의 문제가 청나라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17세기 초에서 18세기까지 티베트 불교 종파들은 서로 무력충돌을 벌였고, 즉결처형도 빈번히 일어났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인도로 도망쳤던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로 돌아왔다. 그 이유는 신해혁명으로 티베트가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됐기 때문이다.

 

이후 티베트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달라이 라마와 불교도들이 통치하는 봉건사회였다. 적어도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에 들어가기 전까지 말이다. 티베트가 해방되기 10년 전인 1939년 전국에 약 6,000개의 수도원이 있었고, 소년 4명 중 1명이 승려였다는 얘기도 있다. 달라이 라마가 마지막으로 티베트를 통치했던 1959년까지 대부분의 티베트 농경지는 여전히 농노들이 관리했으며, 승려와 라마 개개인이 무역과 사업 그리고 사채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사회였다.

 

그 중 드래풍(Drepung) 사원은 세계에서 가장 큰 토지 소유주의 하나로 무려 185개의 영지와 25천명의 농노, 300개의 거대한 목장과 16천명의 목동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찰의 재산은 대부분 상위 계급의 라마승에게 귀속 되었으며 이들 대다수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세속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티베트 군사령관은 4천 평방 킬로미터의 땅과 35백 명의 농노를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그는 달라이 라마 내각의 회원이었다.

 

티베트에는 규모는 작았으나 정규 군대가 있었다. 이 군대는 일종의 헌병대로 지주를 위한 질서유지와 도망간 농노를 붙잡는 일을 하였다. 티베트의 어린 소년들은 대게 부모로부터 떨어져 사원에서 승려로 양성됐다. 그 시기 승려 타시 세링은 소작농의 자녀가 사원에서 성폭행 당하는 일은 흔했으며 자신도 9세부터 상습적으로 강간을 당해왔다고 말했을 정도다. 또한, 사원은 빈곤에 시달리는 농부의 아이들을 징집하여 일생 동안 집안의 노예나 춤꾼, 사병으로 일하게 했다.

 

달라이 라마 통치 시기의 티베트에서는 도망친 농노와 절도행위자에 눈알 파내기, 혀 뽑기, 근육, 수족 절단 등의 고문과 사지절단 등의 처벌이 성행했다. 1959년 안나 루이스 스트롱(Anna Louise Strong)은 티베트 권력자들이 사용한 고문기구 전시회에 가본 적이 있었다. 이곳에는 모든 사이즈의 수갑이 있었는데, 아동용도 있었다. 코와 귀를 자르는 기구, 눈을 파내는 기구, 손목을 자르는 기구를 비롯해 무릎, 종아리, 다리 분쇄기, 불도장 집게, 채찍, 심지어 내장을 파내는 특수 기구도 있었다. 이러한 기구들만 보더라도 티베트 봉건 계급의 통치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이와 같던 티베트의 상황은 급반전됐다. 1949년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말이다. 중국 공산당이 처음부터 티베트에 군대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195110월까지는 그러했다. 티베트의 지배계급들은 혁명이 성공한 중국에서 지주의 재산이 몰수되고, 빈농들에게 분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를 포함한 지배층들은 이를 막기 위해 농노들에게 폭력과 협박을 자행했다. 결국, 중국 공산당은 티베트에서 이들에게 탄압받는 이들을 돕기 위해 인민해방군을 보냈다. 중국 공산당은 1959년 이후로 노예제와 무급 농노제를 철폐했으며, 과거 티베트 지배계급이 일삼던 채찍질, 사지 절단 등의 극단적인 처벌도 없앴다. 마찬가지로 앞서 말한 온갖 고문 및 가혹행위들이 금지됐다. 중국 공산당은 살인적인 세금제도를 없앴고, 직업 장려정책을 실시했으며, 이 영향으로 실업률과 노숙자가 크게 감소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대중 교육을 실시하여 사찰의 교육 독점을 없앴으며, 라싸 지역에 하수도와 전기시설을 만들었다.

 

당연히 이에 저항하는 세력들도 있었다. 나치 친위대 출신이자 티베트에서의 경험을 책으로 펴냈으며, 영화화되기도 했던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썼다.

 

중국에 반항했던 티베트인들은 귀족, 유사 귀족 그리고 라마승들이었으며. 이들 귀족과 라마승들은 도로나 다리에서 노동하는 최하층 임무를 맡게 되는 처벌을 받았다. 그들은 관광객 도착 전에 도시 청소를 하게 되어 더욱 모멸감을 느꼈다.”

 

중국 공산당은 1961년에 이르러 지주와 라마승들이 소유한 재산을 압수하고 농민들을 수백 개 자치구역으로 재배속했다. 중국은 수십만 에크르에 달하는 토지를 소작인들과 토지 없는 농민들에게 분배하였다. 귀족 소유의 가축도 가난한 목동들의 집산농장으로 보내졌다. 가축사육이 개선되었고 새롭고 다양한 야채와 새로운 품종의 밀과 보리가 도입되었다. 배수시설도 좋아졌다. 이 모든 개선을 통해 자연히 농업생산이 증가하였다. 중국의 티베트 점령에 대해 일각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인들을 무차별 탄압하고 학살했으며, 그 숫자가 120만 명이라고 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100~120만 명이 죽었다는 출처는 어디일까? 아래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달라이 라마의 막내 동생이자 측근이었던 텐진 체걀중국점령으로 인해 120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사망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대대적인 탄압 6년 전인 1953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서 티베트의 인구는 1274천 명이었다. 다른 인구 조사에서도 티베트의 인구는 약 2백 만 명 정도였다. 만약 중국이 1960년 초에 120만 명의 티베트인을 죽였다면 도시 전체와 대부분 시골지역의 거의 모든 티베트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어야하고, 티베트 땅은 집단 처형장과 공동묘지가 널려 있는 도살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티베트를 공격한 중국 군대는 매우 소규모였으며,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처형만 한다더라도 부족한 숫자였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인 100만 명을 학살했다는 주장은 말 그대로 거짓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 공산당은 문화대혁명 이후 티베트에 대한 통제를 좀 더 유연하게 했고, 피해를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1980년 중국정부는 티베트에 보다 높은 수준의 자율과 자치를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개혁을 실시하였다. 현재 티베트인들은 토지를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으며, 잔여 수확물을 팔수도 있고, 곡식 재배와 들소와 양의 사육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외부 세계와의 소통이 허용되었고 국경 통제가 완화되어 티베트인들이 인도와 네팔에 망명한 친척을 만나는 일도 가능해졌다. 이것은 중국 공산당의 정책에 따른 결과였다.

 

냉전 시기 미국의 세계전략은 중국을 포위하여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수백만을 희생시켰다. 미국의 전선은 단순히 한반도와 베트남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티베트에도 있었다. 1950년대 중반 CIA는 수십 명의 반중국 티베트 투사를 무기와 통신 훈련을 위해 태평양의 사이판 섬으로 보내, 그들이 다시 티베트로 침투하도록 도왔다. 이는 미국이 동유럽과 소련에서 했던 행위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협력자인 스테판 반데라의 극우주의 무장 단체가 냉전 시기 소련에 침투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보면 된다.

 

마찬가지로 달라이라마와 티베트 봉건 지배계급들은 타국으로 망명했다. 미국 CIA는 달라이 라마의 비행자금을 지원했다. 1998년 미 국무부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1960년대를 통틀어 CIA가 티베트 망명 단체에 비밀리에 지원한 액수는 년 170만 달러다. 이런 사실이 공개되자 달라이 라마의 조직은 자체적으로 성명을 내고 자신들이 1960년대에 미국 CIA로부터 수백만 달러를 지원받아 중국의 모택동 혁명을 음해하기 위한 망명자 무장부대를 보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CIA의 지원을 받았던 티베트 분리주의 운동 세력은 10년간 중국 공산당에 맞서 저항을 하다가 1만 명이 죽었다. 달라이 라마가 CIA에서 받던 연봉은 186,000달러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티베트 분리주의 운동이 미국에 의해 지원을 받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리하자면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에 들어가 한 일은 억압받던 대다수 티베트인들에게 해방을 의미했다. 반면에 미국이 한 일은 민중들을 억압하고 고문하던 봉건세력을 지원한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은 대다수의 티베트 민중을 해방했으며, 악랄한 반혁명 세력에 맞서 투쟁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서구 제국주의가 티베트의 인권을 부르짖으며 왜곡하고 있는 역사다. 중국 공산당은 분명히 티베트를 해방했으며, 그런 성격은 앞서 언급한 중국 공산당의 티베트 정책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티베트 봉건세력과 미국의 사기극에 속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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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창조자 무솔리니를 읽으며

세계사 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Axis Power)에 대해 수업시간에 들어봤을 것이다. 1940년 독일ㆍ이탈리아ㆍ일본이 군사동맹을 맺고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유럽ㆍ아시아ㆍ아프리카에서 전투가 전개됐고, 이 추축국에 맞서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중국ㆍ소련이 연합국을 형성했다. 결과적으로 추축국은 세계대전을 일으켰지만, 패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보통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그 기원을 중일전쟁이나 스페인 내전에서 찾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서술은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는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이 단기간에 희생됐다. 무엇보다 히틀러가 자행한 홀로코스트는 많은 이들에게 극악무도한 전쟁범죄로 기록됐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따라서 파시즘에 대한 인식은 보통 나치와 히틀러와 등치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파시즘의 창시자는 나치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아니었다. 바로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참으로 신기한 인물이다. 그는 비록 파시즘의 창시자였고, 히틀러의 선배라 한때 떠들었지만, 정작 그의 후배에 비해 전쟁에선 정말 어리석은 짓만 골라했다.

오죽하면 수많은 밀리터리 덕후들이나 역사덕후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을 밈(Meme)화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탈리아군이 전쟁에서 졸전만 거듭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1940년 6월 독일이 서부로 진격을 가하여 프랑스를 점령할 당시, 이탈리아군 또한 남부 프랑스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6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고작 13개 마을만 함락했다. 반면 프랑스군의 인명 손실은 37명이었다. 이와같은 이탈리아군의 졸전은 이후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제작한 제2차 세계대전 다큐멘터리에서도 다음과 같이 묘사됐다.

˝무솔리니의 공격은 프랑스 산악사단에 막힙니다.˝

이게 바로 이탈리아군의 현실이었다. 심지어 무솔리니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친파시즘 국가인 그리스까지 침공했었다. 그러나 역으로 그리스군에 의해 격퇴당했으며, 결과적으로 히틀러가 구원부대를 보내어 점령을 마쳤다. 이런대도 무솔리니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20~30만 명의 지원군을 독일을 위해 보내줬다. 이는 무솔리니가 정말 이탈리아 군대의 현실에 대해 매우 무감각했음을 보여준다.

이번에 무솔리니를 읽으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았다. 무솔리니가 한때 사회주의 운동을 열정적으로한 사회운동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무솔리니의 태도는 극단적 국수 민족주의자로 변모했고,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까지 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무솔리니는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극단적 반공주의와 이탈리아 민족주의가 핵심이었지만, 놀랍게도 반유대주의는 없었다. 오히려 무솔리니의 정책이 유대인을 우대하는 정책이었다는건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러나 반공주의자 답게 무솔리니는 진지하게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했으며, 이들은 지하로 숨을 수 밖에 없었다. 중간에 안토니오 그람시처럼 옥사한 운동가도 제법 많았다. 따라서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근복적으로 억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반동적이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무솔리니가 두체로써 집권하게 되는 과정이다. 무솔리니는 1922년 군사적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지만, 그의 군사 쿠데타는 너무나도 엉성했다. 이탈리아 국왕이 이를 진압하면 간단히 무너뜨릴 수 있었음에도 무솔리니의 호전적 행위를 방관했다. 그 결과가 바로 21년간 그가 이탈리아 전역을 통치하게 된 것이다.

무솔리니의 권력 축출과정도 황당하다. 이탈리아군의 졸전으로 경제위기가 발생하고, 1943년부터 영미 연합군이 시칠리아섬에 상륙하자, 파시스트 세력 내부의 반대파와 국왕이 마음먹고 그의 권력을 빼앗았으며 그를 구금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가택연금된 무솔리니를 구출하기 위해 특공대를 보냈고, 이탈리아 북부 지역 살로에 친독 꼭두각시 정부를 세웠다.

물론 이때부터는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은 사실상 거의 없고, 독일군이 이탈리아 남부에서 진격해오는 연합군 병사를 상대했다. 사실 독일 입장에선 이러한 병력 투입 자체가 불필요한 병력 손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에는 당연히 무솔리니의 어리석은 행위들 때문이다.

이 책은 1990년 대현출판사에서 출간한 ‘인물로 읽는 세계사‘ 시리즈 중 하나다. 국내에 출간된 유일한 무솔리니 전기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데에는 작년에 당선된 이탈리아 총리 조르자 멜로니에 대한 영상을 보면서다.

현 이탈리아 총리 멜로니는 10대 때부터 정치활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이탈리아 파시즘 운동에 참여했던 멜로니는 20살이던 시절 한 프랑스측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무솔리니를 이탈리아를 위해 헌신한 영웅으로 생각한다.˝고 말하는 영상을 봤다. 도데체 뭘 보고 그런 얘기를 했는지 궁금해서 무솔리니에 대해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무솔리니에 대해 읽으면서 든 생각이 있다. 도데체 현 이탈리아 총리는 뭘보고 무솔리니를 존경한건지하는 생각말이다. 아무리봐도 무솔리니는 참으로 무능력한 인물이다. 특히 전시 지도자로서는 정말 아무런 지도력이 없어보인다. 단순히 파시즘 이데올로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무솔리니가 이데올로기를 급 전향한 점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냥 기회주의자라는 생각 밖에 안든다. 무솔리니의 생애가 궁금하다면, 도서관에서 이 책을 대출해 읽어보길 추천한다. 책이 두껍지도 않고, 사진들이 많이 들어갔으니, 읽는데 부담감 거의 없을 것이다.

다음 번에는 그의 생애를 한번 정리해보도록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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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2-26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무솔리니에 대한 1권의 전기도 있었군요!

NamGiKim 2023-12-26 10:07   좋아요 0 | URL
자서전이 있긴 한데, 전기는 이게 전부인 것 같습니다.
 
1592 격전의 길을 걷다 - 7년의 전쟁, 다시 돌아보는 임진왜란사
안광획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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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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