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아이티에서 지진이 났을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다. 뉴스에서 보도된 내용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대한민국 영토에 3~4배는 작은 나라 아이티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무려 10만 명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TV 속에 비추어진 지진으로 파괴된 아이티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했다. 그러한 장면과 더불어 충격적인 장면이 또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굶주린 아이티의 아이들이 진흙쿠키를 먹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이 장면이 충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얼마나 먹을 게 없고 굶주렸으면 영양가 하나도 없고 신체에 지극히 해로운 진흙을 먹는 것일까?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충격적이다.


(아이티의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


현재 아이티의 기아지수는 항상 최악이었다. 세계 최악의 기아지수를 매년 자랑하는데, 기아 문제가 최악인 인도나 현재의 북한보다도 항상 낮게 측정이 된다. 참고로 이 기아지수 추정치는 미국에서 낸 것이다. 즉, 아이티는 인도나 북한보다도 훨씬 굶주리는 국가인 것이다. 참고로 북한은 1990년대 대기근을 겪었던 시기에 자국민에게 진흙쿠키를 나눠준 적은 없었다. 반면 아이티는 수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 항상 최악의 빈곤 국가 중 하나였다. 빈부격차와 부정부패 그리고 기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아이티는 어째서 굶주렸던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아이티의 친미독재 정권에게 있었다.


(아이티 국기)


특히나 분단 상황에 있는 한국인들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타국의 경제를 잘 도우며 그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다는 착각에 많이 빠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한국은 이승만 정권 이후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경제성장 동력을 얻었지만, 한국·일본·대만·싱가폴이 특수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 외에 미국의 패권적 영향이 미치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미 국가들을 보면 얘기가 전적으로 달라진다. 그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가 바로 국가 아이티의 존재다.


(아이티 지도)


아이티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지 2년이 되던 1791년에 독립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의 급진좌파라 할 수 있는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던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아이티의 독립이었다. 혁명으로 아이티에 독립국가가 탄생했지만, 1804년 마무리된 혁명 이래로 아이티는 항상 위협적 존재로 취급받았으며, 프랑스 정부는 아이티 독립 초기 220억 달러를 강탈했다. 19세기 내내 프랑스는 아이티에게 배상금 지불이라는 명목으로 이 나라의 국고를 털어갔다.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미국이 아이티 문제에 개입하였는데, 이것도 미국쪽 기업의 이익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1915년 미국은 아이티를 침공했으며 1934년까지 군정 통치를 했다. 사실상 아이티를 식민지 지배한 셈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아이티에서도 콩고의 파트리스 루뭄바와 같은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뒤마르세 에스티메였다. 그 또한 미국에 의해 제거 및 축출됐고, 미국은 1950년대 중후반부터 친미 독재정권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집권하게 된 인물이 바로 그 악명 높은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다.


(2019년 아이티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정부 시위)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1957년 정권을 잡았으며, 악명 높은 비밀경찰인 통통 마쿠트(Tonton Macoute)를 만들어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 및 숙청했다. 참고로 이 비밀경찰 조직은 뒤발리에의 준 군사 조직이었고, 이들은 미군에게 군사훈련을 받았다. 당연히 그는 자신을 따르는 집단에겐 경제적 과실을 집중적으로 주었고, 그의 집권기간 내내 아이티는 경제파탄을 겪었다. 심지어 선거도 부정선거를 저질렀는데, 1960년대 아이티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그는 반대표가 하나도 없는 132만 748표를 얻었다. 오죽하면 당시 미국 뉴욕 타임스가 “라틴 아메리카는 그동안 많은 부정선거를 겪었지만, 뒤발리에보다 터무니없는 작자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앞서 언급한 그의 폭력통치는 학살도 동반됐다. 그의 집권 기간 동안 무려 5만 명이 살해당했다.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1971년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러자 이번엔 그의 아들인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19살의 나이에 아이티 대통령이 됐다. 즉, 아이티는 친미 독재 세습에 성공했다. 아들 또한 마찬가지로 15년 동안 권좌에 있으면서 반대파를 납치, 처형, 고문하면서 민생을 유린했다. 그 결과 1986년 아이티의 민중봉기로 쫓겨나게 됐다. 비자이 프라샤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공포와 거짓으로 사회 내 반공 및 반민중 정서를 심화했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도 아이티는 계속 가난했고, 경제 상황은 여전히 최악이었다. 즉, 예나 지금이나 사는 것이 크게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미국은 꾸준히 아이티 내의 우파 군부를 지원했으며, 내정을 이간질했다.


(아이티에서 아이들이 먹는 진흙쿠키)


2009년 아이티 정부는 최저임금을 시간당 0.24달러에서 0.61달러로 올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최저임금법 도입으로 아이티 노동자는 하루에 5달러를 벌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이티 4인 가족의 하루 생활비인 12달러보다는 훨씬 낮은 임금이었다. 그럼에도 아이티 내 미국 섬유 기업들은 주 아이티 미국 대사관을 통해 불만을 제기했고, 대사관은 정부에 로비를 펼쳐 최저임금 인상을 철회하도록 만들었다. 미국 대사관의 요청으로 아이티 정부는 최저임금을 결과적으로 0.07달러만 인상했고, 그 덕분에 프루트오브더룸, 헤인즈, 리바이스 등의 읠 기업은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즉, 아이티는 프랑수아 독재가 물러난 이후에도 여전히 미국에 의해 정치와 경제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자신들 바로 아래에 있는 나라에 친미국가를 만들어 경제를 빨아 먹으면서, 인도나 북한보다도 기아지수가 훨씬 높은 나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한번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정말 미국이 세계를 부유하게 만들고 있는가? 결국 그 부의축적은 미국과 과거 19세기 서구 열강들을 중심으로만 돌고 돌았던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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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19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티의 뒤발리에 부자가 한 짓을 보면 칠레의 피노체트랑 거의 쌍벽을 이룰 정도로 지독한 중남미 ‘숭미 극우 독재정권‘의 민낯을 보여 주죠.
 

오랜만에 PBS 베트남 전쟁 시리즈를 리뷰합니다. 7화 후반부 리뷰를 9월에 했는데, 8화를 2월 중순이 돼서야 하네요. 이 리뷰도 빨리 종결하고 싶습니다. 뭐 10화까지 열심히 달려야죠. ㅎㅎㅎ


(PBS Vietnam War 8화 The History of the World 에피소드 소개 장면)


조앤 퓨어리(Joan Furey)라는 여성은 어린 시절 간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간호사 학교에 다녔으며 고등학교 동창이 구정 대공세 당시 전사하자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육군에 입대했다. 그녀는 베트남으로 갔으며 중부 고원지대인 플레이쿠에 있는 후속 병원에 배속되어 복무했다. 그녀는 복무하며 죽기 직전의 사람과 이미 죽은 사람 그리고 부상당한 미군과 베트콩 포로를 직접 보았으며, 사람을 살리기 위해 복무했다고 한다.


(헬리콥터를 통해 후방기지로 이송되는 미군 부상자들)


(리처드 닉슨 대통령, 1969년 1월 그는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참고로 닉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미국의 프랑스 지원을 옹호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1969년 1월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닉슨은 베트남 전쟁을 끝낼 것이라 말했지만, 아직 베트남에는 평화란 없었다. 미군들은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베트콩을 추격하다 전사했으며, 고지를 점령하고 베트콩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굴에 수류탄을 던졌다. 다른 한편 미국 대중은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닉슨은 베트남에서의 군사적인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협상 테이블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즉, 항복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면서 남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하려 했던 것이다. 베트남을 통일하려는 호찌민(Ho Chi Minh)과 레주언(Le Duan)의 의지는 여전히 꺾이지 않았으며, 미국 대학가에서의 반전운동은 다시 불붙었다. 1969년은 여전히 1968년처럼 전쟁은 치열했고 혁명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베트남 전쟁과 걸프전쟁에 참전했던 메릴 맥피크(Merrill McPeak)는 이 시기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1960년대 후반은 몇 가지 흐름이 합류하는 시대였습니다.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이 있었고, 인종평등을 향한 운동도 있었죠. 환경운동과 여성 권익 신장 운동도 있었고 이런 반체제적 문화를 찬송하는 유명한 로큰롤 음악을 다들 아실 겁니다.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없었을 겁니다. 이 덕분에 지금의 미국이 있고 과거 보다 좀 더 나아진 사회가 된 것이죠.”


(하노이 힐튼에 수감된 미군 포로들)


(열중쉬어 자세로 대기하고 있는 미군 포로들, 북베트남 수용소에 있던 이들은 전투기 조종사들이 많았다.)


구정 대공세로 물러난 린든 B.존슨(Lindon B. Johnson)과는 달리 닉슨은 파리 회담장에서 새로운 요구를 했다. 미군 포로들이 석방되고 실종자에 대한 하노이 측의 정확한 설명 없이는 미군 철수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반면 하노이 측은 북베트남에는 포로는 없고 전범자들만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하노이 정부는 북베트남에 수용된 포로들이나 실종자들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존슨과는 달리 닉슨은 하노이에 수감된 미군 포로의 존재를 보다 공론화시켜 화제의 중심이 되게 했다. 이에 대해 다큐멘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닉슨의 이와 같은 행보는 북베트남 민간인을 폭격하다 잡힌 미군보다는 폭격을 당한 북베트남 민간인을 더 동정적으로 생각하는 반전운동가들을 비난하는 계기가 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에 존재했던 수용소)


(남베트남 수용소 내부 독방, 이런 곳에 여러 명을 가두기도 했다.)


(남베트남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


어떻게 보자면 주객전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사회에서 먹혀 들어갔으며, 특히나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지지하는 세력들에게 호응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남베트남의 응우옌반티에우(Nguyen Van Thieu)의 사이공 정부도 적잖은 인명을 감옥에 구금하고 있었다. 대략 4만 명에 달하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4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고, 또 다른 20만 명의 남베트남 민간인도 감옥에 있었다. 수감된 민간인의 대다수는 재판조차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구금된 것이었다. 참고로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에 따르면, 당시 남베트남의 수감자 숫자는 인권유린으로 악명높던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권 보다도 죄수 숫자가 많은 적도 있다고 한다. 이들에 대한 고문과 인권유린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북베트남 간첩으로 활동하다 체포된 응우옌 타이(Nguyen Tai)는 고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다큐멘터리에서 증언했다.


“CIA의 명령에 움직이는 남베트남 꼭두각시 정보원이 날 고문했습니다. 자백을 받으려고 여러 종류의 고문을 했습니다. 전기고문을 가해서 기절시키기도 했고, 입에 물을 넣고 입을 못 열게 해서 숨이 막히면 그제야 그만두었죠. 고문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밤에 매달려서 맞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당시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 고통이 정말 심했습니다.”


(남베트남 수용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던 응우옌 타이, 한국의 비전향장기수랑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응우옌 타이의 증언을 들으니, 과거 남파 공작원으로 내려왔다가 감옥에서 수십 년을 살아야 했던 비전향장기수 어르신들이 생각난다. 이들 또한 감옥에서 보통 15년에서 20년 많게는 30년 이상을 보내야 했고, 전향을 빙자한 고문을 받았다. 남베트남 티에우 정부의 인권유린은 같은 시기 존재한 남한의 박정희 정부에서도 존재했던 역사다. 이런 거 보면 미국이 지원한 친미국가들은 하나같이 이러한 모순이 존재하는 것 같다.


(늪지대에 상륙한 미군 보트)


(진흙탕에 상륙하는 미군들)


(M1919 브라우닝 기관총을 발사하는 미군 선원)


(M-60 기관총을 발사하는 흑인 병사, 1969년 4월까지 총 54만 3,482명의 미군이 남베트남에주둔했다.)


(미군 전사자 숫자, 1969년 4월까지 미군은 총 4만 794명이 전사했다.)


1969년 4월 남베트남에 투입된 미군 병력은 최대치를 기록했다. 543,482명의 미군이 남베트남에 있었고, 그 외의 수많은 미군이 베트남 국경 너머에 있는 공군 기지(예를 들어 라오스나 태국 등)와 배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시점까지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은 40,794명이었고, 미국은 무려 이 전쟁에서 700억 달러나 퍼부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국이 만든 브레턴 우즈 체제가 휘청거렸던 것이 바로 이 베트남 전쟁이었음을 생각하면 미군의 군사비용 지출은 가히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다.


(힐 397, 이 곳이 바로 햄버거힐 전투가 있던 곳이다.)


(햄버거 힐에서 전투를 치르는 미군)


(작렬하는 네이팜)


1969년 봄 새로운 전투가 미국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바로 햄버거힐 전투(Battle of Hamburger Hill)다. 참고로 이 전투는 1980년대 헐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됐다. 11일간의 전투 끝에 햄버거 힐 전투는 종결됐다. 56명의 미군이 죽었고, 420명 이상의 미군이 부상당했다. 놀랍게도 1주일 후 미군은 이 고지를 떠나게 됐다. 전투에 대한 미국 측 뉴스 발표를 보도록 하자.


“전투 9일 동안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라오스 국경 인근에 있는 이 고지를 탈환하려 했고, 10번이나 후퇴했습니다. 사상자가 속출하여 50명의 미군과 250명의 북베트남군이 전사했습니다. 이 고지는 햄버거 힐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600명의 연합군이 전투에 추가 투입될 것입니다.”


(햄버거 힐 전투를 보도하는 미국 텔레비전 뉴스)


(부상병을 들것에 실어 옮기는 미군들)


(폭격으로 불탄 숲을 정찰하는 미군)


(미군의 폭격으로 민둥산이 된 햄버거 힐)


(라이프지가 공개한 242명의 미군 전사자 얼굴과 신상)


햄버거힐 전투와 같은 소식이 들릴 때마다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은 전쟁을 끝낼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고, 햄버거 힐이 종결된 다음달 미국의 라이프지는 1주일간 전투에서 전사한 242명의 미군의 이름과 사진을 잡지에 실었다. 희생자의 통계과 전사한 미군들의 얼굴과 함께 공개된 것이다. 사실 베트남 전쟁에서 전투의 성공과 성과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은 사상자 비율이었다. 즉, 미군 전사자나 사상자가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 보다 많으면 성공 혹은 좋은 성과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는 전사한 미군 소식이 더 중요했다.


(M-16 소총을 들고있는 남베트남군)


(전투를 치르고 있는 남베트남군)


따라서 리처드 닉슨은 이 전쟁을 끝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들 입장에선 어려운 문제였다.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남베트남군만으로는 남베트남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베트남 전쟁이 베트남 사람들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월미군 총 사령관인 크레이튼 에이브람스(Creighton Abrams) 장군이 남베트남군을 훈련해서 그 사이 미군 희생자 숫자를 줄이는 것을 이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남베트남이 패망할 것을 알리는 신호기도 했다. 에이브람스는 남베트남군만으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절대로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즈엉반마이 앨리엇(Duong Van Mai Elliot)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닉슨이 전투를 남베트남군으로 넘기는 단계적 철수를 발표했을 때, 저는 그게 과거에 프랑스가 했던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즉, 황인종끼리 하는 전쟁이죠. 우리는 베트남군이 이 전쟁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미군과 같이 싸워도 못하는데, 미군 없이 어떻게 이길 수 있겠어요?”


(닉슨과 티에우)


(베트남에서 본국으로 철수하는 미군들)


(남베트남에 전달된 미국 물자, 선박에서 지상으로 옮겨지고 있다.)


(미국이 남베트남에 보낸 물자들)


(미군이 남베트남군에게 준 M-16 소총)


닉슨은 미드웨이 섬으로 티에우를 불렀다. 참고로 미드웨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뒤집은 해전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닉슨이 티에우를 미드웨이로 부른 이유는 미국 내의 반전 시위가 대규모로 확장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미군이 점차 철수하자 남베트남에는 무수히 많은 물자가 또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100만 정이 넘는 M-16 소총과 4만 정의 유탄 발사기 그리고 수천 대의 차량이 남베트남에 보급됐다. 오죽하면 미국의 한 정치인은 미국 납세자들이 모든 베트남 군인에게 차를 한 대씩 지급하라고 요구받은 것 같다고 불평했을 정도였다. 남베트남군 병력도 증강됐는데, 85만 명에서 100만 명으로 증강됐다. 물론 이런다고 남베트남이 전쟁에서 승리할 정도로 강해지는 건 절대 아니지만, 미국은 그렇게 했다. 당시 종군기자였던 닐 시핸(Neil Sheehan)의 답변이다.


“물론 말이 안 되는 짓거리죠. 1962년과 1963년에 이미 해본 거잖아요. 남베트남 사람들은 안 변했습니다. 집 안에 들일 가구만 더 주는 꼴이 되는 거죠.”


(남베트남군들, 남베트남군은 미군의 무기로 무장했지만 전투에서 보인 전투력은 많이 허접했다.)


(남베트남군이 타고 있는 APC 장갑차)


(훈련받고 있는 남베트남군, M-1 개런드 소총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격하는 남베트남군과 휴이 헬기)


베트민으로 항불전쟁에 참전했으며 베트콩으로도 활동했던 응우옌또이붕(Nguyen Thoi Bung)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사이공 군대에 공급하는 무기를 3배나 늘렸습니다. 꼭두각시 군대가 강화된 거죠. 미군이 이기지 못한다면, 꼭두각시 군대야 말할 것도 없지 않나요?”


(응우옌또이붕, 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에 맞서 싸웠으며, 베트남 전쟁 때는 미군에 맞서 싸웠다.)


(베트남 전쟁 당시 톰 발레리의 사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은성훈장을 받았으며 저쟁이 끝난 이후 베트남과 미국 양국의 관계 개선에 관심을 많이 가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남베트남군이 비교적 잘 싸웠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어찌됐건 이들은 1968년 구정 대공세를 버텨냈고, 그때부터 1969년 중반까지 9만 명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즉, 미군이 이들의 용기를 얕잡아 봤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다큐멘터리에서 이와 같이 언급한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미군의 화력과 장비에만 의존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톰 발레리(Tom Vallely)라는 미군 참전용사 또한 미군이 남베트남군을 상대적으로 업신여겼다고 증언한다. 톰 발레리는 1969년 미 해병대 무전병으로 남베트남 꽝남 지역에서 수색 섬멸 작전에 투입됐다. 이 당시 세운 전공으로 은성 훈장을 받았다. 발레리가 훈장을 받은 지 2일 뒤 50만 명의 미국인이 북부 뉴욕주 한 낙농장에서 모여 축제를 벌였는데, 그게 바로 우드스탁 페스티벌이었다. 반전운동가들과 히피들 젊은이들이 한데 모인 것이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모인 관중들, 무려 50만 명이 이 곳 근처로 집결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기지에 여전히 존재했던 남부깃발, 이때도 미군 내의 인종차별은 분명히 존재했다.)


(반전 시위에 참여한 히스패닉 계통의 사회운동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기지 모습)


베트남 전쟁 당시 전투 중 사망한 병사 비율을 흑인과 비교해서 보면 심하게 균형이 맞지 않았다. 미군 내에서의 흑인들의 차별은 여전했다. 남북전쟁 때 사라진 남부연맹 세력의 깃발이 미군 내에서 여전히 사용됐다. 즉, 미국 본토에서 벌어지는 차별이 베트남에 파병된 군 안에서도 그대로 벌어졌다. 히스패닉들도 많이 참전했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미국 내 히스패닉 커뮤니티에서도 반전 정서가 커져갔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내에서는 상관을 살해하는 일들이 제법 있었다. 이를 두고 프레깅이라 불렀는데, 그 이유가 군 막사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파리 회담을 보도하는 미국 텔레비전 뉴스)


(호찌민의 장례식, 호찌민은 한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나, 통일을 이루기 6년 전인 1969년에 서거했다.)


(호찌민 장례식에 참가한 북베트남 시민들, 장례식에 참가한 적잖은 베트남인들은 호찌민의 서거를 슬퍼하며 울었다.)


(장례식장에서 호찌민의 위업을 받들어 통일을 이루겠다고 다짐하는 레주언)


1969년 닉슨과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프랑스 파리에서 북베트남과의 비밀회담을 했다. 키신저는 존슨 전 대통령이 폭격을 중지한지 1주년이 되는 11월 1일까지 북베트남의 입장변화가 없으면, 닉슨 대통령이 중대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1969년 9월 2일 북베트남은 베트남 독립 선언 24주년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슬픔의 날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국부인 호찌민이 심장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에서 나레이션은 호찌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1969년 9월 2일은 호찌민이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 독립 선언을 한 지 24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오전 9시 45분, 호는 사망했습니다. 호찌민은 사망한 당시 79세로 알려졌지만, 그에 대한 다른 많은 것들처럼 그의 정확한 출생일도 미스터리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호찌민은 호 삼촌(Uncle Ho)로 살면서, 일본, 프랑스, 사이공 괴뢰 정부 그리고 미국에 맞선 투쟁을 온몸으로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이제 북베트남 노동당은 제1 서기인 레주언이 이끌게 됐고, 레주언은 호찌민의 비전이었던 조국의 통일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장례를 치르는 국민들 앞에서 약속했다. 호찌민이 사망한 날 베데스타 해군 병원에서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북베트남 측에게 포로로 잡혔다 풀려난 두 명의 전쟁 포로 로버트 프리시먼과 더글라스 헥달이 북베트남 측의 비인도적 대우를 언급한 것이다. 이 기자회견이 있고 얼마 안 있어 하노이 당국의 포로 처우가 개선됐다고 한다. 예를 들어 여가시간이 늘어나거나 밥그릇이 커졌다고 한 미군 포로는 이후 회상했다.


(흑표당, 흑표당은 1966년 미국에서 창당된 조직으로 말콤X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흑인 급진주의 운동을 대표하던 조직이다.)


(미국 반공주의자들의 전쟁 찬성집회,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맞서 싸우고 있고, 그들의 테러를 기억한다는 궤변을 피켓으로 들고 있다.)


미국 본토에서는 반전운동이 거세지면서, 이른바 폭력적인 시위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중 가장 극단적인 폭력성을 보인 집단은 웨더맨이었다. 웨더맨은 피살된 경찰을 기리는 동상을 폭파했고, 체인과 파이프를 휘두르며 길거리를 달렸다. 창문과 자동차 유리를 부수고 경찰 차단벽을 공격했다. 경찰과의 대치 과정에서 6명이 총상을 입었고 250명이 투옥됐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경찰 중 75명이 상처를 입고 시 변호사가 불구가 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웨더맨은 미국 내 좌파들 사이에서도 비판받았는데, 흑인급진주의 운동으로 마오이즘 성향이 있던 흑표당이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흑표당은 웨더맨에 대해 기회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이라고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전운동가인 빌 지머맨(Bill Zimmerman)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아마도 1969년은 우리 대부분이 소외감을 느끼고 혁명적으로 된 것 같은 느낌이든 그런 해였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반응들이 나왔던 거죠. 전 이 나라에 급진적인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와 권력의 재분배가 바로 그거죠. 하지만 이걸 미국에서 무장투쟁으로 이루겠다는 건 미친 짓이죠. 언제나 유치한 환상은 있습니다. 사람들이 불만에서 벗어나서 전쟁을 끝내는 실현 가능한 전략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환상 말입니다.”


(꽝응아이의 한 농촌을 정찰하는 미군)


베트남 중부에 있는 꽝응아이 성은 항불전쟁 시기 베트민이 많던 지역이었다. 미군 병사 팀 오브라이언(Tim O'Brien)이 들어갔을 때는 베트콩들이 많이 활동하던 지역이었다. 꽝응아이는 미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가장 많은 피해를 받은 지역이기도 했다. 1969년 오브라이언이 오기 전 이미 꽝응아이의 70% 이상의 마을이 폭격당하고 공습당하거나 불도저로 밀렸으며 불에 타버렸다. 그리고 주민의 40% 이상은 난민촌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이처럼 꽝응아이성은 전쟁터 그 자체였다. 

(바오닌, 그는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이면서 세계적인 문학가이기도 하다.)


1969년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한 바오닌(Bao Ninh)은 17살에 징집됐고, 남베트남으로 내려갔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것처럼, 미국에 맞서 싸웠다. 그는 주로 남베트남의 중부 고원지대에서 전투를 치뤘는데, 그와 그의 동료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은 미군의 화력이었다. 바오닌은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미국인들은 우리가 마르크스 추종자인 줄 알아요. 틀린 생각이죠. 우린 그저 조국을 위해 싸운 것입니다. 폭격과 전쟁이 더는 없게 하기 위해서요. 그래서 죽음도 파괴도 더는 없게 하려는 것이었죠. 폭탄이 떨어지면, 아마 돌만 안 무서워할걸요? 미군이 숲에서 어떤 움직임을 눈치 채면 숲을 통째로 없애버립니다. 돈을 얼마나 썼는지 누가 알겠어요? 미국 납세자의 돈 말이에요. 한 무더기의 네이팜탄이 떨어지면, 정글은 불바다로 변하죠. 상상이 되나요? 당연히 병사들의 삶은 고달픕니다. 미군도 고달플 겁니다. 팀 오브라이언 같은 젊은 병사는 정말 비참했을거에요. 하지만 밥을 굶지는 않았죠. 미군은 굶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음식을 찾아다녀야 했어요. 군에서는 쌀 조금과 소금만 줬습니다. 언제나 미군 음식을 찾아다녔습니다. C레이션 같은거요. 일반 미군 병사들은 소풍다닐 만큼 음식을 가지고 다니면서 먹고 싶은 대로 먹잖아요. 서구 문학에서 읽었던, 탈영병을 총살하는 제1차 세계대전 같은 그런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럴 수 없었어요. 그러면 전부 죽여야 할 테니까요. 베트남에서 탈영병은 고향에 가서 한 며칠 정도 엄마를 보고 돌아옵니다. 그러면 다시 받아줘요. 대부분 죽는 건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병사들은 오늘은 살아도 내일은 죽을 수 있다는 걸아니까요. 하지만 향수병에 걸려서 엄마가 보고 싶으면, 북으로 1,000km를 걸어가죠.”


(전투를 치르는 북베트남군)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했던 바오닌의 사진)


이런거 보면,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들은 가족이 보고 싶을 때 고향으로 가는 경우도 제법 있었던 것 같다. 팀 오브라이언이 들어간 꽝응아이성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고, 적잖은 인명피해가 난 곳이었다. 그러나 오브라이언은 꽝응아이의 어떤 마을에서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그 이유는 미군을 쳐다보는 주민들 표정이 너무나도 안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은 바로 1년 전 민간인 학살이 벌여진 장소였다.


전반부 리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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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뽕들에 대한 박상후의 일침.

정말 그러하다.

그러니 러시아 침략 빼애애액 하며 미국 편 드는거다.

박상후의 ‘문명개화‘가 날카로운 팩트폭격을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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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전쟁과 프랑스 식민주의 이념
이재원 지음 / 홍문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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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런 양질의 책이 출간됐군요.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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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3년 니제르와 부르키나파소 등 사헬 지역이라 불리는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반제국주의 쿠데타 및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들 국가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기에, 한국의 언론과 서구 언론에도 제법 보도가 됐다. 니제르의 쿠데타 지지 시위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순히 러시아 깃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북한 국기인 인공기가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제법 놀랄 것이다. 저 아프리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인공기가 보였으니 말이다. 

(북한의 인공기와 이집트 국기)


사실 북한은 현재 김정은 위원장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때부터 여러 국가들과의 교류를 쌓은 경험이 있으며, 이른바 제3세계라 불리던 국가에 지원을 한 역사가 있다. 대표적으로 쿠바와 베트남 그리고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 지역이 그러한 무대였으며, 북한의 제3세계 연대 및 지원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라틴아메리카를 초월했었다. 이것은 단순히 외교적인지지 표명을 넘어서 물적 인적 지원을 포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북한은 쿠바에서 혁명이 성공하자 1960년 쿠바와 수교를 맺었으며,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민족해방운동 국제연대회의가 창설되자 이에 참가하여 미국 케네디 정부의 쿠바 해상봉쇄 해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줬다.

(북한의 김일성과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나세르는 이집트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며 국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베트남의 경우는 물적 인적 지원이 더욱 명확했다. 북한과 북베트남은 1950년에 이미 수교를 맺었으며, 1957년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 평양을 방문하면서부터 양국의 관계가 강화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김일성은 “만약 미 제국주의자들이 베트남에서 무너진다면, 그들은 아시아에서 완전히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는 베트남을 지지합니다. 이 전쟁은 우리가 치르는 전쟁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에서 요청이 오면, 설사 우리 계획에 지장을 받더라도 요구에 응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전직 북베트남 공군 소장이 밝힌 2007년 기록에 따르면, 1967년에서 1969년 사이 북한 항공기 조종사 87명이 베트남에서 복무했으며, 그중 14명이 전사했고 미군 항공기 26대를 격추했다. 더 나아가 베트남의 군 소식통은 그 숫자를 96명의 항공기 조종사를 포함한 384명의 조선인민군 공군 요원이 복무했다고 밝혔었다.

(1970년대 당시 북한의 MIG-21기와 전투기 조종사들)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에 파견된 북한의 조종사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북한의 지원은 이집트에서도 있었다. 2021년 4.27에서 출간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에 따르면, 북한과 이집트의 외교수립과 제4차 중동전쟁에서 군사고문단 및 공군 파견도 주목할만하다고 한다. 조선인민군은 1970년대 초에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 처음으로 개입했으며, 그 후로 큰 폭으로 개입이 늘어났다. 특히 이집트가 그 지역에서 첫 번째로 북한의 주요한 전략적 동반자였다. 사실 이집트는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반서방 정권이 들어섰고, 정권을 잡은 나세르는 1953년 6월 왕정제 자체를 폐지했으며, 1956년에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소유하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작전회의를 진행하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군에 배치한 3연장 SA-6, 게인플(2K-12)과 1발짜리 SA-2, 가이드라인(뒤쪽) 지대공 미사일, 모두 당시엔 매우 위력적이었으며 지금도 이용되는 무기라고 한다.)


북한은 반서방 노선을 걷던 이집트와의 관계를 1960년대부터 개선하기 시작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른바 6일전쟁에서 이집트가 서방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이스라엘군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이 전쟁에서 이집트는 개전 초기에 최소 300대 이상의 항공기를 잃었으며, 이스라엘은 신속한 군사적 승리를 거뒀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가 어렵자 북한은 이집트에게 5,000톤의 식량 원조를 제공했다. 나세르가 사망한 이후 이집트는 안와르 사다트가 집권했다. 사다트 또한, 정권 초기 나세르처럼 소련과 제3세계의 지원을 받았으며, 북한의 지원도 받았다. 사다트는 집권 초기 이집트 영토에서 소련군을 내보낸다는 뜻밖의 칙령을 공표했는데, 놀랍게도 북한의 지원은 받았다. 이집트의 방위가 위태로워지고 훈련된 항공기 조종사가 부족해 곤란을 겪는 가운데, 북한 지도부가 조선인민군 분견대 파견을 포함한 지원을 제안했다. 이집트는 이 요구를 수락했고, 북한은 전투기 조종사를 포함하여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이라 불리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는데, 북한의 지원은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참모총장 사드 알 샤즐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조선인민군의 원조가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는 보고서를 남겼는데, 이후 회상록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북한의 MIG-21기, 1970년대부터 북한은 이 전투기를 이용했으며 지금도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73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이 이집트를 방문 중이었고, 나는 해결책을 번뜩 떠올렸다. 3월 6일, 수에즈 전선 순시 차 북한 인민무력부 부상 장송 장군을 호위하는 동안, 혹시 그들이 비행 중대를 파견해 우리를 지원할 수 있는지, 그들의 조종사들이 실질적인 전투 훈련을 시킬 수 있는지 물어본 것이다. 당시 북한이 MIG-21기를 운항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당한 논의를 거쳐 4월에, 나는 그 계획을 완결짓기 위해 김일성 주석을 향한 공식 방문길에 올랐다. 그 비범한 공화국에서 매혹적인 열흘 간의 일정을 보내면서, 흔히 제3세계로 불리는 작은 나라가 자체 자원으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 보여준 모범 사례가 내게 얼마나 고무적이었는지 모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베이징에 잠시 들른 일이 그러했듯 그것은 이 회상록의 범위를 넘어선다. 대다수 비행시간 2,000시간 이상으로 경험이 풍부한 북한 조종사들이 6월에 이집트에 도착했고, 7월부터는 실전에 참여했다. 당연히 이스라엘과 그 동맹국은 머지않아 통신을 감청했고, 8월 15일 북한인들의 주둔을 단언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지도부는 그 사실을 공식화하지 않았다. 아마도 외국인 전력 보강이라는 측면에서, 북한인들은 역사상 가장 소규모 병력이었을 것이다. 조종사 20명, 조종 장치 8대, 통역사 5인, 관리자 3인, 정치고문 1인, 각 1인의 의사와 요리사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효과는 훨씬 더 컸다. 그들은 8월과 9월에 이스라엘군과 2~3차례 조우했고, 비슷한 횟수로 전쟁에서도 접전을 벌였다. 그들이 와준 것은 감동이었다. 내가 여기서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함이고, 또한 그렇게 하지 못했던 우리 지도부의 인색함에 대해 사과하고자 함이다.”


인용문에 나온 바와 같이, 북한이 보낸 인력은 조종사 20명과 통역사 5명, 관리자 3명, 정치고문 1명 그리고 각각 1명의 의사와 요리사였다. 또한, 앞서 인용한 인용문만이 북한에서 파견한 인력에 대해 고평가 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서방과 이스라엘의 보고서에도 “참전한 조선인민군 조종사들이 그들의 상대인 이집트인들보다 공중에서 훨씬 유능했다.”고 나온다. 이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MIG-21기 1대가 이스라엘 F-4E 팬텀기 2대를 대적해 여러 발의 미사일을 요령 있게 잘 피했고, 이스라엘 전투기가 결국 기지로 귀환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북한 요원들이 조종하는 미그기가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당시 사정상 성급한 훈련과 열악한 지휘 구조 탓에 이집트 지대공 미사일 담당 사병들이 걸핏하면 아군 비행기를 요격한 데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전선 및 전황을 표시한 지도)


(한 유튜버가 만든 제4차 중동전쟁 관련 영상, 심지어 이스라엘이 사라질뻔했다고 표현했다.)


정리하자면, 제4차 중동전쟁에서 조선인민군은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집트의 MIG-21기를 운항한 것이 조선인민군이었다. 반면에 제4차 중동전쟁 발발 직후 이스라엘군 내 조종사 부족 사태로 인해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를 운항한 것은 미군 항공병들이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미군의 최신 기종인 SR-71 전략 정찰 항공기들도 이스라엘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비행에 나섰으며, 전쟁의 형세를 일변시키는 데 필수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북한의 파견한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에 맞서는 공중전에서 유일한 비아랍인 전투원들이었고, 미국인들은 이스라엘의 공중전에서 유일한 외국인 조종사들이었다. 즉, 평양과 워싱턴이 각자 상대편에 맞서 중동의 한쪽 당사자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셈이다.

(김일성과 무바라크 대통령, 북한과 이집트의 관계는 1980년대에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의 전투병력이 미국 항공병들과 직접 격돌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북한의 이집트 지원은 제4차 중동전쟁 승리에 기여한 것은 분명했다. 북한의 지원을 받은 이집트 공군은 6일전쟁 때와는 달리, 이스라엘군과의 공중전에서 승리하고 이스라엘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의 혁혁한 전과를 달성했다. 그리고 이 전쟁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게 시나이 반도를 완전히 반환했기에 이집트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이후에도 이집트 정부는 북한의 지원을 받았으며, 북한은 이집트가 군사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지원했다. 특히 핵을 가진 이스라엘에 맞서 이집트 측 탄도 미사일의 성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원했다. 1980년대 이집트에는 친미 성향이 있는 호스니 무바라크가 집권했는데, 무바라크는 수차에 걸친 평양 방문을 통해 양국 사이에 미사일 개발에 관한 협력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 결과 이집트의 탄도 미사일 전력은 거의 전부가 북한 측 장비로 이루어지게 됐다.


참고문헌


김동원·안광획·이정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 4.27시대, 2021.

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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