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 :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레볼루션 시리즈 3
호치민 지음, 월든 벨로 서문, 배기현 옮김 / 프레시안북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68혁명 당시 서방의 젊은이들이 투쟁의 물결 속에서 외치던 구호가 있었다. 그 구호는 바로 “Ho! Ho! Ho Chi Minh!(! ! 호치민!)”이었다. 당시 미제국주의자들의 야만적인 침략전쟁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노년의 혁명가는 중국에 가서 요양하는 것과 특별한 기념일에 연설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그리고 북베트남 공산당에서의 그의 권력은 1960년대부터 제2인자 레주언(Le Duan)과 나눈 상태였다. 19683월 구정 공세(Tet Offensive)로 인한 반전 운동으로 미국의 린든 B. 존슨 정부가 고민에 빠져있을 때 호치민은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구정 공세의 결과를 보고 받았고, 베트남 정치국 국원인 레둑토(Le Duc Tho)"구정 공세 이후의 상황을 평가하기 위해 곧 남부로 출장을 갈 것"이라고 얘기하자, 호치민 또한 함께 내려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냈었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남부로 내려가진 못했었다. 그러던 196992일 베트남 독립 선언 24주년에 그는 심장병으로 급사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베트남 전쟁 시기 그가 실질적으로 군대를 지휘하거나 남베트남 내부에서 조직을 창설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는 실질적으로 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전투에 참여했던 적은 없었다. 총과 수류탄을 든 건 그의 휘하에 있던 보응우옌잡(Vo Nguyen Giap)과 같은 지휘관들과 제국주의에 침략에 맞서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고 정글속에서 침략자들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던 무명의 병사들이었다. 호치민 평전(Ho Chi Minh A Life)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William J Duiker)는 책 서문에서 베트남 전쟁 승리의 공로자를 셋으로 나눴다.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 첫째는 한 세대 이상 남베트남의 정글과 늪에서 혁명적 대의를 위하여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미군에 맞서 싸우다 죽어간 무명의 베트콩 전사들이고, 둘째는 뛰어난 결의에 노련한 능력까지 겸비한 베트남 노동당 지도자 레주언을 비롯한 그의 북베트남 공산당 동료들이며, 셋째는 베트남 공산당 창건자이자 혁명운동의 지도자였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주석직을 종전 6년 전인 1969년까지 맡고 있다가 타계한 호치민이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호치민은 전설적인 혁명가 체게바라와 달리 한평생 총을 든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힘과 인민대중의 결집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 힘과 결집력은 바로 호치민의 독립운동 경력과 한평생 그가 집필한 글과 연설에서 나왔다. 사실 호치민은 레닌이나 마오쩌둥, 스탈린이나 트로츠키와는 달리 주의(ism)’라는 말 앞에 자신의 이름이 붙은 적이 없었다. 사회주의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혁명가들이 그의 이름을 붙여 호치민주의라는 말로 결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사회주의자들 기준으로 보았을 때, 호치민이라는 인물이 자신만의 어떤 특별한 사상을 만들어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1960년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남베트남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된 베트콩(Viet Cong: NLF, National Liberation Front in South Vietnam)만 보더라도 마르크스-레닌주의(Marx-Leninism)과 같은 어떤 사회주의적인 이론을 철저하게 학습한 조직이었다기 보단 반제국주의적인 기치 아래 단결하고 결집한 세력이었다. 1941년 팍 보(Pac Bo) 동굴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의 창설한 베트민(Viet Minh)도 베트콩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 이론보단 반제국주의 기치 아래 결집한 세력이었다. 또한 호치민은 왜 이데올로기적인 논문은 한번도 쓰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데올로기는 마오쩌둥에게 맡기고 싶다라며 장난스럽게 대답할 정도로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데올로기라는 거 자체에는 크게 관심이 없던 인물이었다.

 

분명 호치민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이론의 기반은 좀 약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글과 연설은 그런 한계점을 보완할 정도로 베트남 인민 대중들에게 호소력이 강했고, 심지어 베트남에 존재하는 수많은 소수민족에게도 영향력이 미칠 정도였다. 윌든 벨로(Walden Bello)가 정리한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Ho Chi Minh, Down With Colonialism)’는 베트남 인민대중에게 강력한 호소력과 결집력을 만들었던 그의 글과 연설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책은 1920년에 개최되었던 투르 회의 연설부터 시작하여 그가 마지막으로 한 1969720일의 공개적인 연설과 그의 유언장으로 끝을 맺는다.

 

이 책에 나온 호치민의 글과 편지 그리고 연설문들은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일본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과 야만적인 행위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비판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 식민지 시절 그가 해외에서 썻던 글들을 보면 베트남을 강제로 식민지화한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이 내세웠던 자유, 평등, 우애정신과는 모순된는 현실을 아주 날카롭게 지적한다. 1940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베트남에 들어왔을 때, 그들의 야만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베트남 인민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단결하도록 호소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 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베트남 인민들의 저항을 호소하는 글들이 대다수다. 그런 그들이 특히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의 그의 연설과 글로 모여있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그가 했던 연설에서도 그런 반제국주의적 정서가 아주 잘 드러난다. 이와 같은 호치민의 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호치민이라는 인물의 위대함과 인민을 향한 순수한 마음 그리고 제국주의에 맞선 그의 저항정신이다. 1950년대 소련의 서기장을 지내며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을 만났던 니키다 흐루쇼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정치 경력을 쌓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사실 누구도 나에게 그런 인상을 남긴 사람은 없었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사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호치민의 삶의 방식과 그가 동료들에게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면, 그는 확실히 신성한 사도들에 비견할 만한 인물이었다. 혁명의 사도 말이다. 그의 눈에서 번득이는 순수함과 진실함의 빛줄기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의 원칙과 행동에서 부패하지 않은 공산주의자의 진실함을 보았고, 대의에 헌신하는 자의 순수함을 느꼈다.”

 

니키다 흐루쇼프가 표현한 것처럼 이번에 식민주의를 타도하라를 읽으면서 호치민 주석의 따뜻한 마음과 애민정신 그리고 반제국주의 투쟁 정신을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호치민 주석과 베트남 전쟁을 공부할 때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런 위대한 혁명적 지도자를 독립 영웅 혹은 국부로 모시는 베트남이 참으로 부러울 때가 많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는 이만큼 국제적으로 성공한 독립영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위대한 지도자의 지도아래 제국주의 국가들의 야만적인 침략을 무찌르고, 영웅적으로 투쟁하여 자주독립과 통일을 쟁취한 베트남은 당연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베트남 하면 저개발국가나 한국으로 결혼 오는 국가와 같은 편향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물론 베트남이라는 국가가 제국주의자들의 수탈과 전쟁을 겪으며 경제적으로 초토화되어 아직은 저개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들의 역사와 국부 호치민의 삶을 보면 절대로 무시당하여야 할 나라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해내지 못한 위대한 역사를 창조해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힘으로 강대국 프랑스와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을 차례로 무찌른 역사에서 우리의 역사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이번에 읽은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는 호치민 주석의 감동적인 글과 연설을 통해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글과 문장 하나하나에 인민에 대한 애민정신과 반제국주의 정신 그리고 베트남 독립을 향한 그의 열정이 다 담겨 있었다. 베트남의 위대한 지도자 호치민을 매우 존경하는 필자로선 이 책에 나온 호치민 주석의 글과 연설 하나하나가 구구절절 와 닿았고, 나도 모르게 감동하며 읽게 되었다. 호치민의 저항정신과 애민정신 그리고 반제국주의 정신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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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사진을 담은 통합 사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년 뒤, 아시아에서 일어난 전쟁이 있었다. 그 전쟁은 식민지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식민지 지배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세력의 싸움이었다. 그 전쟁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이다.

(1954년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 지도)

 

1. 배경

(1945년 9월 2일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하는 호치민)

1945년 8월 15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 제국주의가 연합국에게 항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국의 OSS와의 협력을 구축해 나가던 호치민(Ho Chi Minh)의 베트민(Viet Minh)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항복하기가 무섭게 베트남 전역에서 ‘총 봉기’를 일으켰고, 일본군을 자체적으로 무장해제 시켰다. ‘총 봉기’를 일으켜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킨 호치민은 1945년 9월 2일 대략 100만 명의 인파가 거리로 몰려나온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다.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그러나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 연합국들은 베트남을 북위 16 도선을 기점으로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16도선 이북에는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군이 16도선 이남에는 영국군이 들어왔다. 중국 국민당의 경우 1946년 사이에 베트남에서 철군했으나, 영국군은 달랐다. 영국군은 베트남 남부에 입성하면서, 19세기 당시 베트남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프랑스를 끌어들였고, 그 과정에서 꼭두각시 황제인 바오다이(Bao Dai)를 내세웠다. 프랑스를 베트남에 개입하도록 만든 영국은 베트남 문제를 프랑스에게 넘긴 채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프랑스가 베트남에 다시 들어온 이유는 명확했다.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하겠다는 목적이었다. 베트남에 다시 들어온 프랑스는 1946년 2월 중국이 베트남 북부에서 철수하자, 베트남 북부지역으로 들어갔고, 호찌민의 베트남은 프랑스군의 진주를 반대하지 않는 대신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것과 같은 요구사항들을 프랑스에게 요구했다.

(1946년 퐁텐블로 당시 협상)

 

이 과정에서 호찌민의 베트남과 프랑스측은 베트남 문제에 대한 협상을 전개하는데, 이게 바로 퐁텐블로 협상이다. 퐁텐블로 협상은 1946년 7월에 시작됐다. 호찌민을 비롯한 베트민측 인사들은 프랑스까지 이동하여 협상을 진행하였으나, 양측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고, 협상은 어떠한 성과물 없이 1946년 9월 10일 결렬됐다. 당시 미국은 나름대로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프랑스의 샤를 드골 정부는 미국에게 “우리를 돕지 않으면 소련 편을 들 것이다.”라고 강력하게 협박했기에, 대체로 프랑스 편을 들었다. 따라서 미국은 언제든지 개입할 가능성이 있는 상태였고, 인도차이나 문제를 지켜보고 있었다.

 

2. 전쟁의 시작과 프랑스의 기선제압

퐁텐블로 협상이 결렬되고 나서 2달이 지난 1946년 11월 프랑스는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을 무차별 포격했다. 프랑스군 함대의 포격을 받은 하이퐁은 당일날 최소 6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하이퐁을 무차별 포격한 프랑스군은 1946년 12월 수도 하노이에 입성하여 베트민군과의 전투를 치렀다. 1946년 12월 19일 호치민과 그의 공산당 동료들은 프랑스와의 더 이상 타협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결론을 내리고,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하이퐁을 포격하고 있는 함대)

 

1946년 12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당하자 베트민은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베트남 정부는 다가올 전쟁은 3단계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내용의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 공개 성명에 따르면 제1단계에서 베트남군은 방어에 치중하며 산악 요새에서 전력을 강화하고, 제2단계에서는 혁명군은 굴에서 나와 적의 노출된 시설을 기습하며, 제3단계에서는 전면 공세로 들어가 적군(프랑스군)을 바다로 내모는 최종공세를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이 전쟁에 프랑스인 233,467명, 외인부대 72,833명, 북아프리카인 122,920명, 아프리카인 60,340명 등 막대한 병력을 투입했다. 베트민을 지휘하던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장군은 1947년 1월 탄라오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하노이의 후방 교란적전을 계속했다. 1947년 1월 중순 프랑스 부대가 중국인 구역의 가장자리에 있는 시장까지 도착하자, 베트민군은 많은 지역 주민과 더불어 그 지역을 버리고 홍 강(Hong River)을 건너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 전투에서 대략 수백 명의 베트민이 전사하고 프랑스군 100명 정도가 전사했다. 아무튼 전쟁 초기 남부 증원군의 확보와 화력의 절대적 우세로 프랑스군은 1947년 3월 남 딘까지 점령하면서, 호치민 정부는 곳 괴멸할 것 같았다. 그러나 베트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산악과 정글에서 베트민들이 농민들과 소수민족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이른바 ‘레아 작전(Operation Lea)’으로 교착된 난국을 타개하려 했었다. 이 작전은 박 칸이라는 지역에 낙하산 부대를 투하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수군은 빠르게 진군하여 곧 베트민 본부를 찾아냈다. 프랑스군이 레아 작전을 개시했을 때, 호치민은 사령부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지만, 프랑스군은 호치민을 체포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레아 작전은 큰 틀에서 실패했고, 1948년 1월 인도차이나공산당 상임위원회는 혁명에 유리한 쪽으로 상황이 변하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전쟁 초기에 발표했던 공개 성명의 제1단계가 끝났고, 제2단계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했다.

2. 중국의 지원과 베트민군의 반격

 

레아 작전 실패 이후 프랑스 정부는 다시 정치적 해결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는데, 이번에는 호치민 정부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정권을 수립하여 이와 협상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바오다이 해결책(Solution Bao Dai)’이었다. 이렇게 바오다이를 내세웠던 프랑스는 1949년 3월 프랑스 엘이제궁에서 바오 다이와 협정을 맺어 베트남은 코친차이나까지 통합한 하나의 국가임을 인정해 주었다. 이는 베트남준국가의 수립을 뜻했고, 프랑스는 자신들이 일으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의 대결’ 구도로 이끌어 가려고 했다.

 

1949년이 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점차 호치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베트민군의 게릴라전에 고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1949년 10월 1일 베트남에게 있어 더 좋은 일이 일어났다. 마오쩌둥(Mao Tse Dong)이 이끌던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국공내전에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중월 국경지대와 북베트남 지역에서 프랑스군에 맞서 항전하던 베트민군을 물적 인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1950년에는 마오쩌둥의 중국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이 호찌민의 베트남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중국 공산당의 지원으로 1953년 말까지 베트민은 중국으로부터 지원받은 800문의 무반동총과 기관총 6000정의 반자동 소총과 자동 권총 그리고 600만 발의 탄환을 보유하고 있었다.

(동케 전투 당시 호치민)

 

1950년 9월 중순 베트민 부대들은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의 취약시설에 대한 일련의 기습을 개시했다. 중월국경지대에 있는 도시 동케를 베트민군이 점령했을 때, 프랑스 정보부는 베트민군이 바주카포, 박격포, 그리고 무반동총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동케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은 패주했고, 수백 명의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1만 톤이 넘는 탄약까지 버리고 갔다. 동케 전투(Battle of Dong Khe)에서 베트민군이 프랑스군을 무찌른 것이다. 1950년 10월 말 중월 국경 지대 전투가 끝이 나면서 베트민의 공격은 홍 강 삼각주 북쪽의 광대한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1950년 12월 이에 힘입은 보 응우옌 잡 장군과 공산당 지도자들은 홍 강 삼각주의 가장자리에 있는 세 지역을 잇따라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1951년 초에 이를 실행에 옮겼다. 1951년 2월 베트민군은 홍 강 삼각주를 완전히 차지하기 위한 대공세를 했지만, 처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프랑스군이 미국으로부터 지원 받은 네이팜 폭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네이팜 폭탄의 위력)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미국은 프랑스가 식민지 유지를 위해 베트남에서 전쟁을 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이 마오쩌둥의 승리로 끝나고 1950년 북한의 공격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매카시즘이라는 반공주의에 빠지게 되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식민지 세력 대 민족해방세력의 전쟁이 아닌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라는 시각에 근거하여 보게 됐기 때문이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돕게 된 미국은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대략 1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과 1400대의 탱크와 340대의 비행기, 350대의 정찰 보트, 24만 정의 소총 및 기관총, 1500만 발의 탄약 등을 프랑스에게 지원했다. 이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가 지불하던 전쟁 비용의 80%에 달했다.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미국이 대신 전쟁을 치렀다고 봐도 무색할 정도로 프랑스에게 상당한 물자를 제공했다.

 

아무튼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생각했던 홍 강 삼각주 공격이 실패하면서, 베트민 측에선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베트민군 총 1만 명 가운데 3500~4000명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반면 프랑스군은 전사자 400명에 부상자 1200명이었다. 베트민군은 마오 케와 다이 강 공격에서는 더 큰 패배를 기록했으며, 결국 많은 사상자를 내고 산 속으로 철수했다.

 

홍 강 삼각주 공격이 실패로 끝난 뒤 전쟁은 점차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1951년 2월의 총공격은 베트민군의 처참한 패배로 끝났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베트민군은 다시 전세를 역전 시키기 위해 홍 강 삼각주의 남쪽 변두리에 있는 한 도시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호아 빈 전투(Battle of Hoa Binh)’다. 1951년 11월 이후 사실상 호아 빈을 점령한 베트민은 프랑스 진지에 대대적으로 공격을 감행했고, 1952년 2월 프랑스군은 진지를 버리고 삼각주로 물러났다. 또한 1951년 10월 초 프랑스군 15개 연대가 두옌하, 훙난 그리고 띠엔 훙 지구에서 대규모 전투를 시작했는데, 격렬한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꽁호와 안미 그리고 안빈 이 세 지역에선 500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하기도 했었다. 호아 빈 전투가 베트민의 승리로 끝난지 몇 달이 지난 1952년 말 베트민군은 하노이 근처 논들을 자유롭게 다녔고, 삼각주 마을 곳곳에서 혁명 조직들이 재건되었다. 1952년 10월 중순엔 베트민 3개 사단이 응이아 로의 프랑스군의 기지를 공격했고, 점령했다. 심지어 베트민은 국경을 넘어 라오스 북부로 들어가 성도 삼 네우아를 점령하고, 라오스의 수도 루앙 프라방에서 프랑스군을 위협하기도 했었다.

 

3. 디엔비엔푸 전투와 전쟁의 종결

(프랑스의 앙리 나바르 장군)

 

이처럼 195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미국의 막대한 물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점차 패배하고 했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가던 1953년 인도차이나 프랑스 원정군 사령관이 된 앙리 나바르 장군(Henri Navarre)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작전을 구상하게 되는데, 그 작전은 라오스 국경지대 근처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만약에 베트민이 라오스와 카보디아까지 진출하여 남부의 게릴라 부대와 힘을 합해 사이공을 점령하게 된다면, 프랑스에게 더 불리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포를 산으로 옮기고 있는 베트민)

 

1953년 11월 나바르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라오스 국경 산간지대에 있는 디엔 비엔 푸의 대규모 요새를 구축하고 11000명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이 디엔비엔푸 요새의 약점은 오로지 비행기로만 병력과 물자의 수송이 가능하다는 데 있었는데, 나바르는 우세한 화기와 공군력으로 베트민군을 막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은 비밀리에 디엔비엔푸를 포위했다. 대략 4개의 보병 사단과 1개의 기갑 사단으로 이루어진 5만명의 병력은 비밀리에 디엔비엔푸로 움직였다. 이 대규모 전투부대가 필요로 하는 중화기와 식량은 동원된 수만 명의 농민이 멀리 떨어진 기지에서부터 등짐을 날랐다. 여기에는 중국 공산당 정부가 지원한 수백대의 화물 자동차도 동원 되었다. 또한 베트민들은 대략 250대 정도의 대포를 순수인력으로 산 곳곳에다가 설치해놓았고, 디엔비엔푸 요새를 4방으로 포위했다.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사진)

 

프랑스군이 만들어 놓은 디엔비엔푸 요새를 비밀리에 4방으로 포위한 베트민군은 1954년 3월 13일 집중포화를 퍼부으며 공격을 개시했다. 2~3일 만에 프랑스군의 주요 전진기지가 함락되고 비행장 또한 폭격으로 사용할 수 없어졌으며, 프랑스측은 4천 명의 공수부대를 급파하기도 했지만, 전세를 역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디엔 비엔 푸 요새가 베트민군에게 포위당하자 당시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디엔비엔푸 전투에 미군의 파병을 고려했었다. 미국은 ‘독수리 작전(Operation Vauture)’이라 하여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한 미국 공군기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디엔비엔푸 요새를 공격하는 베트민 부대를 폭격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실행되진 않았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한 베트민)

미국이 참전을 고려하고 있을 때 보 응우옌 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군은 디엔비엔푸 요새의 포위망을 조금씩 좁혀들어갔다. 5월 초 베트민은 디엔 비엔 푸에 있던 프랑스군의 외곽 방어선을 뚫고 내부 방어선 까지 포격했고, 5월 6일에는 사기가 꺾인 프랑스군 병사들을 향해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부르며 프랑스군의 사기를 더 저하시켰다.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은 마침내 항복했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략 2300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고, 110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베트민군은 대략 23000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작전 중 10000명이 전사했지만,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다. 아무튼 디엔비엔푸 전투가 끝이 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베트민군의 승리로 끝났고, 베트남은 프랑스 제국주의를 꺾었으며 독립을 쟁취했다.

 

4.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의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대략 8년간 베트남에서 전개되었다. 특히 베트남 북부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베트남인들은 단결하여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냈다. 8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베트민은 대략 17만에서 20만 명 정도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프랑스군은 대략 7만 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민간인도 15만 명이 사망했다.

(제네바 회담)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스위스에서 제네바 회담이 열렸다. 제네바 회담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 도선을 기점으로 다시 남북으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이 분단에는 조건이 있었다. 분단 2년 이내에 베트남 전역에서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시행한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총선은 미국과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이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무산됐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프랑스군은 6월 말에 베트남 중부고원지대 자라이 성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렀다. 안케 전투(Battle of An Khe)가 그러했다. 그리고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도 대패했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호치민)

 

아무튼 프랑스군은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위해 일으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대패했고, 결국은 철수해야 했다. 베트남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을 쟁취했다. 이는 1858년 프랑스가 다낭을 점령하며 시작했던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지배체제에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 쾌거였다. 따라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전 세계적 민족해방투쟁의 역사에서 길이 남을 업적이자 자랑스러운 승리의 역사다.

 

5. 참고문헌

 

1.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저, 유경찬(역), 을유문화사 출간, 2002

2. 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저, 정영목(역), 푸른숲 출간, 2003

3.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 저, 이산 출간, 2002

4.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저, 창비, 2006

5.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호치민 저, 윌든 벨로 (서문), 배기현 (옮김), 프레시안 북, 2009

6. 미국민중사 2, 하워드 진 저, 유강은 (역), 이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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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2019-09-29 0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대착오적인 식민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프랑스가 결국 자신들의 몰락을 자초한것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NamGiKim 2019-09-30 10:30   좋아요 1 | URL
네 애초에 프랑스가 베트남과 알제리를 식민지화 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에서 시작된 전쟁이었죠.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으니, 자신들에게도 승전국으로써의 떡고물이 떨어지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결국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죠.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신서 114
와다 하루끼 / 창비 / 1992년 8월
평점 :
절판


 

김일성! 우리에게 있어서 이 이름을 공개적으로 꺼내는 건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북한 괴뢰 도당은 나쁜 놈”이라는 식으로 북조선과 김일성에 대해 가르쳐 왔던 우리 사회는 오랜 기간 동안 북조선과 김일성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았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시절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라는 인물에 관해 그저 악마화된 이미지만 부각했던 우리 사회는 일제시기 그가 만주에서 전개했던 항일무장투쟁을 인정하지 않았었고, 군사정권 시기 어용학자들은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북한 괴뢰 정권의 수괴 김일성이 아니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김일성 가짜설은 대중들에게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졌고, 이런 궤변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탄생한 수구 세력인 뉴라이트가 이어받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뉴라이트와 수구 세력들의 주장과는 달리 북조선의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그 김일성이 맞다. 김일성 가짜설은 1945년 10월 그가 평양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대회에서 모습을 비추면서 떠돌게 된 얘기였다. 당시 민중들은 1937년 보천보 전투를 전개했던 김일성의 얼굴을 알지 못했었기 때문에 생겼던 해프닝이었다. 그 과정에서 해방 후 우익들이 이를 이용 또는 악용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 부장을 지냈던 김형욱이 자신의 저서에서 밝혔듯이,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김일성은 북조선의 김일성이 맞았다. 1980년대부터 남한으로 탈북한 북측의 고위급 인사들도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북조선의 지도자 김일성은 일제시기 무장투쟁을 했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렇다면 왜 뉴라이트와 수구세력들은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부인하거나 축소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는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다. 1912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김일성은 1920년대 중후반부터 반일 활동을 했었다.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의 저서 제국주의론을 읽었던 그는 만주로 갔고,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 일본군대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1932년에는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었다. 김동한을 비롯한 친일변절자들이 설립한 민생단 공작으로 인하여, 숙청의 피바람이 불 때 살아남은 김일성은 1933년 둥닌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인 스중헝을 구하기도 했었다.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일성은 무송현성 전투와 대덕수 전투, 소덕수 전투 그리고 이도강 전투 등을 치르는 등 전투를 계속하면서 장백산지구에 근거지를 형성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기 1달 전인 1937년 6월 김일성은 만주 국경지대에 있는 식민지 조선의 보천보에 잠입하여 진공작전을 개시했었다. 그 과정에서 최소 14명 이상의 일본군 순사와 군인이 죽고 부상당했다. 보천보 전투 이후 김일성 휘하의 부대는 간삼봉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중일전쟁이 격해지면서 일제는 1938년부터 매우 조직적으로 만주에 있는 유격대를 진압하기 시작했고, 김일성 휘하의 부대들은 이른바 100일에 걸친 ‘고난의 행군’을 해야했다. 1939년 10월 일본의 관동군은 또 다른 토벌작전을 개시했는데, 1940년 3월 김일성 휘하의 부대는 홍기하에서 추격해오던 마에다 부대 120명을 매복공격하여 섬멸했다. 이후 김일성과 그의 부대는 만주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넘어갔고, 1942년 8월에는 소련의 붉은 군대 휘하의 제88특별여단에 배속되게 된다. 1940년 10월 소련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김일성이 속해있던 만주의 독립군들은 1942년까지 일제에 맞서 무장투쟁을 했었다. 비록 1945년 8월 소련군이 개시한 만주 진공 작전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김일성을 포함한 북조선의 만주 빨치산파 지도부들은 193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었고, 소련에서 대일전을 준비했었다.

 

이렇듯 김일성은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립운동을 해왔다. 따라서 반공주의에 심취한 수구 세력들에게는 이러한 김일성의 항일 경력이 당연히 부담스러울 테고, 국민들에게 숨기고 싶었을 테며, 이를 왜곡하거나 축소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의 양심적인 역사학자 와다 하루끼는 이 책을 통해서 수구세력들이 왜곡해오거나, 숨기고 싶어했던 김일성 항일투쟁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부분이야말로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을 읽다보면, 항일무장투쟁 당시 군사 지도자 김일성의 지도력이 잘 발휘되는 모습들이 무장투쟁에 같이 참여했던 후세대들의 증언을 통해서 드러난다. 북조선의 지도자 김일성 또한 자신이 지휘하던 병력을 잘 통솔했다. 그랬기에 보천보 전투를 통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질 수 있었고, 일본군의 끊임없는 추격을 피해 ‘고난의 행군’을 이겨낼 수 있었으며, 추격해오던 관동군 측 마에다 부대를 홍기하에서 전멸시킬 수 있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1930년대 중반 김일성은 장백산에 근거지를 형성했었다. 여기서 말한 장백산은 우리가 아는 백두산이다. 즉 김일성은 1930년대 중반에 백두산을 근거지로 항일투쟁을 했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봣을 때, 현재 북측에서 백두산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선 김일성과 만주 빨치산파들이 1948년 북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뒤, 이후 북조선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나온다. 만주 빨치산파 대다수는 북조선에서 주요요직을 차지했고, 북조선 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북조선에서 주요 요직을 차지하게 된 인사들의 인적구성을 보면 대다수가 항일운동을 했다. 1949년 조선 인민군 창설 1주년에 수여된 48명의 군 간부 서훈을 보면 일본사관학교를 나온 자가 한 명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조선 인민군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은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난 지 1년 뒤인 1992년에 출간되었다. 김일성이 사망하기 2년 전에 출판한 이 책을 읽으며 필자는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을 다시 한번 공부할 수 있었고, 그 또한 항일 투사로서의 경력을 당연히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산 김원봉 선생마저 빨갱이로 모는 우리 사회에서 지금 당장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인정하는 것은 절차 및 조건이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작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와다 하루끼나 브루스 커밍스 같은 양심적인 역사학자들이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튼 정말 좋은 책을 읽었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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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핸드북 삶과 전설 4
힐다 바리오 외 지음, 윤길순 옮김 / 해냄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3년만에 체게바라를 읽으며

공익 근무를 대기하던 3년 전 필자는 체게바라 자서전을 읽었었다. 당시 체게바라 자서전을 읽게된 필자는 그의 매력에 푹 빠져 체게바라와 쿠바 관련 서적들과 관련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많이 찾아서 봤었다.

40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가진 체게바라의 삶은 필자로 하여금 많은 감동을 주었다. 아르헨티나에 있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의과대학을 다니다 친구와의 라틴 아메리카 여행 중 자발적으로 혁명가의 길을 걸었던 그의 삶은 참으로 로맨틱하고, 열정과 정의 혁명과 같은 것들이 그의 삶에 다 담겨져 있다.

특히나 의과대학 학생에서 쿠바 혁명가, 쿠바의 장관 그리고 다시 혁명가로 이어지는 그의 짧은 생애을 통해 그가 전세계 민중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59년 쿠바혁명을 승리로 이끈 뒤, 쿠바에 머물며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그는 1964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아프리카의 혁명을 위해 콩고 밀림으로 들어가 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는 남미의 볼리비아에 들어가 볼리비아 정부군과 맞서 싸우다 산화했다. 체의 이러한 행동이야 말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존경심을 끌어올리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체게바라의 혁명이 성공한 곳은 미국의 플로리다하고 90마일 정도 떨어진 쿠바 뿐이었다. 비록 그의 혁명이 성공한 건 쿠바 뿐이지만, 이후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는건 위에서 상술했듯이 그의 삶이 참으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이 책은 체게바라의 사진들을 정리한 책이다. 체게바라의 어린시절 부터 1967년 볼리비아에서 사망할때 까지의 그의 사진들이 나온다. 이 책에 나오는 사진들을 보며 필자는 그 사진안에 담긴 여러가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체게바라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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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지정학적으로 미국보다 훨씬 불리했다.

소련이 해체된게 단순히 소련 공산당의 관료와 스탈린주의적 도그마의 문제로만 보며,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가 더 우월한냥 주장하는건 분명 문제가 있다. 아니 미국과 소련은 시작부터가 달랐다. 소련은 제1차세계대전의 피폐한 경제 상황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거쳤고, 얼마 안가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으로 시작된 내전을 겪으며 주요 산업시설들이 초토화 되었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으로 일정부분 경기 회복하고 스탈린의 경제개발 프로그램으로 생산력을 올렸지만, 1941년 히틀러의 침공으로 다시한번 초토화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다시 경제를 회복시켜야 했다. 거기다 지정학적으로 우크라이나나 러시아 남부를 제외하면 농업을 할 땅이 거의 없다. 아니 그냥 나머지 지역은 북극이다. 괜히 그들이 부동항을 탐낸게 아니다.

반면 미국은 어떤가? 제1차세계대전 참전으로 초강대국으로 오른 뒤, 1920년대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보여주듯이 과잉과 풍요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과잉생산이 1929년 경제대공황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과잉생산 체제가 문제였기에 제2차세계대전 참전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다. 거기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때 1941년 진주만 공습 외에는 영토가 공격받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본토의 공업시설과 농업 시설이 고스란히 유지될 수 있었다. 거기다 그들의 지형은 어떤가? 동부에 번창한 공업지대와 남부의 농업지대, 서부의 광산과 석유생산 그리고 알래스카와 부동항들까지, 지정학적으로 소련보다 훨씬 더 유리했다.

따라서 냉전시기 미국이 소련보다 앞설 수 있었던 것은 우월한 자본주의 때문이라기 보단 그냥 지정학적으로 주어진 조건이 소련보다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국이 소련조건이었으면, 툰드라에서 등신짓하다 지들끼리 폭주하여 박살났겠지!! ㅋㅋㅋㅋㅋ 아무튼 이런 넘사벽인 미국과 싸워 대등한 위치에 올랐던 소련이 참 능력있는 나라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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