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김정일 - CEO Of DPRK, 때를 기다려 올인하는 전략, 그 모든 것을 밝힌다
정창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추천 [서평] 김정일을 새롭게 이해하기 <CEO of DPRK 김정일 : 때를 기다려 올인하는 전략>

정창현 , 2007. 10., 446, 중앙북스


 책은 2007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김정일과 남북정상회담에 한창 준비하고 있을  출간되었다. 오랫동안 북한을 연구하면서 국내에서 손꼽히는 북한 전문가로 평가받는 정창현 교수가 노무현 정부 관계자와 독자들에게 김정일  김정일의 북한 정권에 대한 실체와 권력 수립 과정을 분석하여 내놓은 것이다. 남의 최고 지도자와 정부 관계자가 북의 최고지도자와 정부 관계자와 국가 대 국가로 협상을 하려면 상대방에 대한 당연히 어설픈 정보나 편향적인 정보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분석 정보, 수십년 동안의 상대방 국가와 지도자의 권력 형성과정, 상대방의 철학과 정책과 비전을 알아야 한다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가 북한의 최고지도자로서 지낸 기간이 수십 년이고 북한에서는 여전히 김일성 주석과 더불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영도자, 지도자 인정받고 있고 김정은은 김일성과 김정은의 ‘혁명전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김정일  김정일 집권시 북한 체제를 아는 것은 지금의 김정은 체제와 북한을 이해하는  도움이 것이다.


당시  책을 출간한 출판사와 저자 역시 단순히 방송언론의 상업주의적 가십 거리나 호기심, 정보 차원의 '무지와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국가 경영 리더십에 주목할 시점이 되었음에 주목했다. 

그의 리더십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개인 김정일'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운영하는 'CEO 김정일' 주목해야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김정이 국방위원장을 'CEO' 표현하는것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낼 것이다. '철권통치자'에게 무슨 리더십이냐고 비판할 수도 있다.  북에서는 어떻게 위대한 영도자 ‘CEO’ 지칭할  있느냐고 거부감을 드러낼 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히 정보 차원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접근하는 구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각도에서 분석할 때가 됐다고 본다. 또한 남북의 화해와 협력, 변호하는 북한 사회를 읽는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내 방송이나 언론이 북한과 북한 지도자에 대해 일관되게 폄하하고 편향적으로 기사화하지만, 국내외 일부 전문가들은 남북 협상이나 북미 협상, 북일 협상이나 6 회담 테이블에서 북한은 항상 주도권 아닌 주도권을 갖고 간다고 평가한다. 북한은 협상 일정을 뒤바꾸기는 예사이고, 어젠다를 한순간에 바꾸기도 한다. 아예 협상 자체를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도대체 무엇이 북한으로 하여금 이러한 파워 지니게 할까?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어도 북한의 국력은 대한민국과, 미국과, 일본과, 그리고 6 회담 당사국들과는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는데도, 북한이 이처럼 항상 협상의 주도  쥐게 하는 원천은 무엇일까? 더군다나 김정일 시대의 북한은 현재처럼 핵무기나 장거리미사일도 개발하기 전이었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근대 이후 대를 이어 권력을 이어받은 마지막 후계자라는 비판을 뒤로 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고 지도자로 자리 잡을  있었던 전략, 10 넘게 붕괴한다 외교가의 분석을 무색케 하며 김정일 체제로 완전히 정착할  있었던 전략, 전방위로 압박해오던 미국과 일본을 핵실험 하나로 관계 정상화로 돌아서게 하는 전략의 요체는무엇일까? 

2000 1 남북 정상 회담을 끝내고 돌아온 김대중  대통령은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서방  평가는 크게 왜곡됐다 토로했다. 방북   전부터 각종자료와 정보를 섭렵하며, 정상 회담을 준비해온 김대중  대통령조차 이러한 평가를  정도면 일반 시민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2000 10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회담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도 2003 출간한 회고록(<마담 세크레터리, The Mighty & The Almighty>에서  위원장에 대해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지 알고 있는 지적인 인물이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견해를 확인할  있었다. 그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으며 미몽에 빠져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비록 경제의 계획을 얘기할  비합리적인 부분이 있었지만 그는 회담에 대비한 준비를 아주  했다고 느꼈다. 그는 똑똑했다라고 평가했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상하고 북한의 노동당, 군대, 정부, 대남사업을 장악해가는 과정이다. 

김정일의 초기 성장은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특혜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닐 때, 그는 대학 당 위원회 소속이면서도 노동당 중앙의 주요 회의를 방청할 수 있는 특혜를 누렸다. 그 과정에서 당시 북한의 사상투쟁을 대학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엄청난 특혜와 특별 학습을 통해 김정일은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후계자로 육성되었던 것이다.”

김정일은 대학 졸업 후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배속되었다. 북한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는 핵심 중의 핵심부서라 한다. 그가 중앙당에 배속된 직후인 1967년 북한에서 ‘갑산파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김영주의 주도 하에 갑산파에 대한 대대적인 정치적 비판과 숙청이 이어졌다. 김정일은 당 조직지도부가 중앙당 전원회의를 조직준비하는 과정에서 갑산파 숙청과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깊숙이 관여했다. 

김정일은 1968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으로 옮겼다. 선전선동부는 조직지도부와 함께 노동당의 핵심 부서라 한다. 그 직후 북한 군부에서는 김영주의 후계 추진에 반발한 ‘김창봉, 허봉학 사건’이 일어났고, 노동당은 군 전반에 대한 검열을 진행했다. 김정일은 이 사건과 관련해 인민군 당 전원회의 일정을 준비하고 보고서 작성, 토론 준비, 결정서, 문건 작성을 직접 준비했다. 또한 예술분야에 깊이 관여하며 영화예술론을 서술했고, 북한에서 강력한 선전 수단이던 예술 분야를 장악하여 빨치산 원로들의 신뢰를 이끌어냈다.

김정일은 조직지도부장과 선전선동부장을 맡은 1960년대 후반 이후 노동당, 군대, 행정기관, 대남사업기관에 대한 지도검열을 강화하면서 1970년대 중반까지 빠르게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김정일 후계 문제는 1970년 처음 빨치산 원로 세대인 김일, 최용건, 건최현 등이 제안했지만 김일성이 보류했다. 이어 1971년 하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2차 전원회의 직후 개최된 당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두 번째로 논의되었다. 이 자리에서 병환으로 조직비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김영주가 김정일을 노동당 조직,사상비서 자리에 앉히자는, 후계자로 선정하자는 제안을 했다. 김영주의 제안은 빨치산파들의 호응을 얻었지만, 김일성이 “조금만 더 두고보자”며 다시 보류 결정을 내렸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김정일을 후계자로 결정하자 또는 당 비서로 선출하자는 빨치산 원로들의 제안과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의 논의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김일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김정일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였다.

결국 1974년 2월 당 중앙위원회회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하부에서 올라온 결의서에 기초하여 김정일을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공식 결정했다. 빨치산 1세대의 내부 논의를 시작한 지 4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회의는 김정일에게 당 정치위원회 위원 자리를 주는 동시에 ‘공화국 영웅’ 칭호를 안겨주었다. 김정일은 이미 조직지도 비서와 부장, 선전선동 비서와 부장을 포함한 1인 5역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북한 언론은 김정일을 ‘당 중앙’으로 호칭하기 시작  했다. 당시 김정일은 만 33세였다. 

그가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에서 만났던 시기는 후계자가 된 지 26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만났던 김정일에 대해 술회하고 평가한 내용들은 가식이나 허풍이 아니었던 셈이다.


저자는 김정일 위원장을 항상 파격 행보라고 평가하는 데서 벗어나 정상적인 일상 행보 받아들여야 하며, ‘두려운 전략가 아니라 예측가능한 CEO’ 면모에 주목해야 7  남북정상 회담의 충격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교수는 이와 관련 김정일의 외교 형태에 대해 국내외 언론과 전문가들은 벼랑  전술이라고 규정해 왔다, 그러나 김정일의 외교술은 6 회담에서  드러나듯이 단순히 막무가내 버티기 아니라 결단의 타이밍을 중시한다 말한다. 특히 적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유리한 결단의 조건을 만들기 위한마지막까지 준비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는  위원장이 자신에게 보고되는 최종 문건이 나올 때까지 실무 부서와 관련 부서들 간의 끝장 토론 거치도록 하며, 그래서 최종 입장이 나올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했다.그렇지만 일단 최종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위원장의 결단이 내려지면 일사불란하게 집행되는데,  위원장의 결단과 추진력 원천이 여기에 있다고 덧붙인다. 


 책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리더십을 읽을  있는 다양하고 풍부한 증언과 자료가 담겨 있다.  중에서도 조선노동당의 고위인사를 지내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신경완 씨의 증언이 뼈대를 이룬다. 신경완은 1998 사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이름이 공개되는 것을 꺼렸다. 신분 노출을 우려해 일부 증언은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르게 진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모양이다.  월간지 기자가 그의 실명을 거론하자 여러 북한 연구자들도 그의 실명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의 경력에 대해 구체적으로 공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책에서는 그가 의도적으로 다르게 구술했던 내용을 바로잡고, 저자가 잘못 기술했던 사실들을 바로 잡았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의 정상 회담 녹취록, 방북 언론사사장단과의 대화록, 폴리코프스키 러시아 극동지구 전권대사와의 대화록을 실어  위원장의 정치관, 외교관, 통일관, 경제관, 문화관 등을 엿보게 했으며,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과의 2 남북 정상 회담 365 막전막후 이야기도 담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최고 자리에 오르기까지 김정일 위원장의 족적을 세밀하게 추적했으며, 기쁨조 등에 대한 오해와 진실도 실어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 2016년 10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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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 나남신서 2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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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규율권력과 자발적 복종 <감시와 처벌 : 감옥의 탄생>

미셀 푸코 저, 오생근 역, 2001. 11., 464쪽, 나남출판

"손에 2파운드 무게의 뜨거운 밀랍으로 만든 횃불을 들고, 속옷 차림으로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문 앞에 사형수 호송차로 실려 와, 공개적으로 사죄할 것" 다음으로 "상기한 호송차로 그레브 광장에 옮겨진 다음,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버린다."(23쪽)

<감시와 처벌>의 첫 문단은 위와 같이 시작한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실재했던 유죄판결문 중 일부이다. 현대인으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장면이다. 실재했던 판결문은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5세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다미엥이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일이다.

한반도에서도 20세기 이전의 형벌방식은 비슷했다는 주장이 있다. 조선시대 대역 죄인에 대한 능지처참형이 바로 그것이다. 성삼문 등 사육신이나 수많은 사화와 민란의 주인들이 받은 형벌을 그 비교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능지처참형이 18세기 프랑스의 다미엥이 받은 거열형과 비슷했을까. 하지만 구체적이고도 악랄하게 형벌을 집행한다는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유사하지만 프랑스 지배자들이 조선의 지배자들보다 더 참혹했던 것이다. 서구인들의 과거 신체형은 한국인(동양인)의 상상을 넘는 공포 그 자체였다. 푸코는 이를 ‘지극히 화려하고 호화스런 의식’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

왜 이런 처벌을 내렸을까. 지배체제에 그리고 권력에 감히 도전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누구도 왕권이라는 권력에 도전하면 그런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민중의 반란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극약처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악한 신체형이 18세기 후반 이래 전반적으로는 감옥에 범죄인을 감금하여 교정하는 자유형으로 바뀌었다. 범죄를 저질러도 이제 더 이상 신체에 손을 대지 않는다. 감옥이라는 공간에 감금한 다음 규율을 통해 교육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형벌의 목적이 되었다.

(물론 이런 규정은 서구인들이 같은 서구인 범죄자들을 대하는 경우에 대한 것이다. 서구인들이 강제로 식민지로 삼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18세기 유럽의 잔인한 형벌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경우도 일제강점기를 거쳐 20세기 말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시절까지만 해도 공공연하게 고문과 구타가 존재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탈북자에 대해서는 국정원의 고문과 악행이 여전하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것은 합리적 계산에 의거하여 효과적인 징벌의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원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원칙이 있다. 이들 원칙 모두가 언뜻 보아도 매우 합리적이다. 첫 번째 원칙인 '양의 최소화 원칙' 하나만 보자.

"범죄는 그것이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범죄에 대한 그런 생각에, 그것보다 어느 정도 큰 형벌의 불이익을 결부시키게 되면 범죄는 저지르고 싶지 않은 행위가 될 것이다." (148쪽)

가혹한 형벌을 신체에 부과하지 않아도 범죄인이 형벌의 불이익을 생각하여 범죄를 억제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오히려 그 이상의 처벌을 하려다 보면 범죄인은 완전범죄를 노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범인 잡기만 어려워진다. 그것은 결국 범죄인이 권력을 농락하는 꼴이 된다. 그러니 이러한 원칙은 고도의 계산이 따른 것이다. 일종의 심리학이 동원된 것이다.

사람을 진짜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강압적인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이고 관념적이어야 한다. 예컨대, 계량화를 통한 비용-효과분석을 형사정책에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근대 이성의 합리주의적 사고가 아닌가. 이런 사고의 결과가 바로 신체형에서 감옥이라는 새로운 제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형벌제도의 발달 때문에 권력은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학문이 발달시켰다. ‘일망감시시설(팝옵티콘 panopticon)’, 즉 교도관 한명이 여러 죄수를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은 관리의 효율성을 불러 일으켰다. 건축학, 광학은 이 시스템을 바탕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죄인의 죄를 측정하기 위한 심리학, 병리학의 발달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즉, 권력은 자신이 필요한 학문만을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감옥의 탄생은 단순한 형벌제도의 변화가 아니다. 푸코는 이 변화가 18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인간과 사회를 합리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규율사회'의 건설이라는 측면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본다.

감옥은 그 규율사회의 하나의 전형일 뿐이다. 푸코에 의하면 “규율사회는 감옥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학교, 병원, 군대, 공장 등 주요한 사회기관 모두는 알게 모르게 공통적으로 인간의 신체에 관한 과학적인 관리법을 적용하여 예속적이고 복종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는 곳이다.

푸코가 말하는 근대국가, 근대사회의 핵심은 바로 ‘복종하는 인간’이다. 사회의 시스템이 사람들을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 사회가 규격화한 사람만이 ‘쓸모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쓸모 없는 사람’, ‘이방인’, ‘사회부적응자’, ‘이탈자’, ‘범죄자’가 된다. 사회체제에 복종하는 사람으로 키워지고, 그렇지 않으면 도태된다. 어떤 경우에는 사회가 설정한 정상의 기준에서 일탈한 광인이 되어 ‘사회의 쓰레기’가 된다.

“쓰레기가 되고 싶지 않으면 인간들이여 사회의 규율에 따르라.” 이것이 푸코가 주장하는 근대사회의 핵심이다.

 

푸코가 관찰한 바로는 이러한 규율사회의 전형은 군인에서 시작되었다. 18세기 후반 탄생한 상비군들은 과거와는 다른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이들의 신체는 길러졌고,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신체에서 ‘반항(저항)할 수 없는 인간’이 탄생하였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군인은 만들어지는 그 어떤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틀이 덜 잡힌 체격, 부적격한 신체를 필요한 기계로 만들면서 조금씩 자세를 교정시켜 나갔다. 계획에 의거한 구속이 서서히 신체의 각 부분에 두루 퍼져나가 각 부분을 마음대로 지배하여, 신체 전체를 복종시켜, 신체를 언제든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러한 구속은 습관이라는 무의식적인 동작을 통하여 암암리에 그 작용을 계속하게 된다. 요컨대 '농민의 몸가짐을 추방해' 버리고, 대신에 '군인의 몸가짐'을 심어준 것이다." (204쪽)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것을 푸코는 하나의 정치(기술)로 보았다. 이 정치(기술)은 단지 신체를 표적으로 강건한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신체의 지배를 넘는 어떤 목적이 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일까. 그렇다. 신체의 지배를 통해서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정치(기술)의 ‘최종 목적’이다.

이 기술의 요체는 강제 지배가 아니다. 통제되고 있는 사람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의지를 토대로 통제된다. 자기의 내적인 욕망에 의해 스스로 순종적인 신민이 되어 권력의 그물코 속에 자기를 걸어 두는 것이라고. 우리는 스스로 기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원해서 말이다.

“끊임없는 판단과 검사를 통해 인간 행동의 객관화와 자료화가 달성되며 이것이 근대 인간과학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까지 푸코는 주장하면서 <감시와 처벌>을 마무리한다. "개인은 특별한 규율적 권력 기법이 생산한 실재"라는 것이다. 이 명제는 근 현대를 추동한 서양적 합리주의의 동역학에 대한 푸코적인 바깥으로부터의 사유가 도달한 한 극점으로서, 나중에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감시와 처벌>에서 제기하는 푸코적 권력론과 담론 이론의 통찰은, 권력과 지식은 서로 반대항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근대 이후 권력과 지식이 서로 갈수록 정교하게 얽혀가게 된다는 것이다. 합리성을 주창한 계몽주의의 득세 이후, 보다 세련된 권력일수록 스스로 진리와 객관성을 자임하고 채택하는 형태로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진리나 합리성의 이념 자체가 '일정한 권력효과를 동반하면서 사용되는 말의 흐름과 쓰임으로서의 담론'인 것이다.

 

서구인들은 자기의 기독교적 문화나 가치관과 다른 아시아, 아프리카나 중동 이슬람세계를 정복할 때 처음에는 군사력 같은 물리력에 의존했다. 그러나 물리적 강압만에 의한 지배가 오래 지속되기는 어렵다. 약소국의 시민들이 강국의 가치관과 문화를 부러워하고 자신의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할 때 강대국의 헤게모니가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강대국의 관점과 자신들의 시각을 약소국 주민들이 동일시할 때 강국의 지배는 거의 영속화된다. 결국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는, 부정적인 동양관과 긍정적인 서양관을 동양인들 자신이 자발적으로 수용할 때 완성되는 것이다.

예컨대 '오리엔탈리즘'은 동양(Orient)에 대한 어떤 이미지나 관점을 총칭한 것으로서 대부분 부정적인 요소들, 즉 동양이 미신적이고 퇴영적이며 후진적이라는 등의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다. 동양이 이런 방식으로 채색되면 서양의 이미지는 당연히 그 반대가 된다. 즉, 서양적인 것은 과학적이고 진보적이며 선진적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리엔탈리즘이란 용어 자체가 서양 여러 나라들이 제국주의적 경략에 여념 없던 시절 서양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강점기 그리고 미국제국주의의 미군정기와 한미동맹 체제는 ‘한국식 오리엔탈리즘’을 심어놓았다. 바로 식민지근대화론과 같은 식민사관과 군사작전권의 영구적인 포기, 그리고 각종 보수적 집회와 종교행사에 도배되는 성조기를 통해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이 한국인들(특히 기득권층과 노인세대) 사이에 광범위하게 뿌리 깊게 새겨져 있음을 보여준다.


[ 2017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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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진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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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위키리크스가 발가벗긴 ‘대한민국의 알몸’ <그들은 아는, 우리만 모르는 : 위키리크스가 발가벗긴 ‘대한민국의 알몸’> 김용진 저, 2012. 01., 400쪽, 개마고원


작년(2016년) 10월 경 페이스북 친구를 통해, 위키리크스가 2010년 가을 폭로한 미국 국무부의 기밀 문서 중 한국과 관련 내용을 파헤친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알게된 이상 읽어야 했다.

위키리크스가 미 국무부의 기밀문서 25만 건을 <가디언>, <뉴욕타임즈>, <슈피겔>를 통해 폭로했음을 알게되었을 때, 필자는 당연히 대한민국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 및 한반도와 관련하여 미 국무부와 주한미대사관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국내 주요 정치권이나 언론, 학계 어느 곳에서도 미 국무부 기밀문서와 관련하여 기본적인 정보만 기사로 내보낼 뿐, 한국과 관련한 사안에 대해서는 관심도 적었고, 언론으로서 자세한 내용을 파헤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몇 년 뒤 김용진 기자에 의해 기밀 문서 중 한국 관련 내용이 책으로 출판되었지만, 도서 정보를 자주 접하는 필자도 알지 못했다. 다행하게도 페이스북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이것 또한 SNS의 힘이면 힘이라고 할 것이다.)


‘KOREA’란 단어가 들어간 미 국무부 비밀전문이 1만4,165건이고, 주한 미국 대사관이 작성한 것만도 1,980건에 이른다. 이 책은 바로 그 주한 미 대사관 작성 비밀 외교전문을 통해 권력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 한 비밀들, 미국은 알지만 정작 우리는 모르는 ‘대한민국의 실체’에 대해 심층분석했다.

미국산 쇠고기 협상과 아프간 파병, UAE 원전 수주, 독도 문제, 론스타, 한미 FTA 등 한국 사회를 격동시킨 사건들의 뒤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들만의 밀담과 비밀협상들이 그 대상이다. 비밀문서에 기록된 충격적인 내용들은 ‘공식적인 발표’ 뒤에서 굴러가는 ‘진실’을 보여준다.


미국은 이명박이 서울시장이었던 시절부터 그를 유력 대통령 후보로 보고 주시하고 있었다. 대선 과정에서도 다른 후보들보다 이명박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는데, 미 대사관이 작성해 보고 가운데 정동영 관련 문건이 9건인데 반해 이명박 관련 문건은 26건이나 된다.

이명박은 미국 입장에서매우 유용한 존재이기도 했다. 미 대사관은 MB를 “매우 친미적인 스탠스”를 보이는 유일한 후보로 평가하고 그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리고 미국은 이명박의 당선을 매우 반기며, 자신들의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2008년 2월 21일 전문, 366쪽)


하지만 미국은 MB를 좋게만 바라본 것이 아니다. MB의 모든 측면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미 대사관은 이명박 대통령을 “포퓰리스트”라며, “휴고 차베스의 보수파 버전”으로 간주했다. 이명박 후보가 내세운 747 공약은 ‘포퓰리즘의 산물’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MB가 복지에 대한 요구를 ‘포퓰리즘’이라고 폄하한 것과 대조적인 부분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자질과 배경을 “국법을 느슨하게 해석하는 삶을 살았다”며 냉철히 적시하면서 그의 당선은 “어떤 특별한 정치 기술이나 정책 비전보다 일차적으로는 좋은 운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렇게 몇 년간 정보를 모은 ‘MB 사용설명서’를 가지고 MB정부를 요리하기 시작했다.


한국 내 친미 사대주의 성향의 인사들은 미국의 개입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보다 미국의 편에 서서 적극 협력했다. 대통령부터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부끄러운 친미 사대주의 행동을 일삼았다. 2007년 대선이한창일 때 이명박캠프의 유종하 선거대책위원장이 버시바우 대사를 찾아가 BBK 스캔들의 핵심인 김경준의 한국 송환을 연기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명박 후보가 미국의 요구에 철저하게 따를 것임을 약속했다.(2007년 10월 31일 전문, 255쪽)

이명박 진영의 불법부정 행위는 대선 운동 기간 중에 미국에까지 마수를 뻗치면서 스스로 미국의 먹잇감, 놀잇감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명박정권의 주요인사들도 강한 친미 성향을 내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인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미국 대사관의 오랜 정보원”이라고 불릴 정도다. 그는 1997년 대선 때는 여론조사 공표 금지 기간에 미 대사관에 조사 결과를 알려주기도 하고, 2007년에는 MB의 최측근으로서 선거 동향을 알려주고 차기 정부의 인선 정보를 미리 흘리기도 했다. 또한 그 밖의 여러 정보원들이 고위관리의 인사나 주요 정책들을 미국에 줄줄 흘리고 미국 입장에서 조언해준다. 예컨대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론스타에 대한 금융위 결정사항을 미리 미국 대사에게 알려주고 대응 방법을 조언해주기까지 했다.


이명박 정권의 청와대와 정부 각부처의 인사들만이 친미 사대주의자이고 미국의 간첩과 정보원은 아니었다. 한국의 주요 권력층 주변과 정계, 정부관료들부터 NGO나 노동조합에 이르기까지 이미 오래 전부터 미국의 간첩이었고 정보원이었다.

저자가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주한 미 대사관의 외교전문 전체를 대상으로 미국의 정보원들을 검색한 결과, ‘청와대 정보원’이 가장 많았다. 이외에 국회, 외교통상부, 통일부, 국방부 순이다. 국정원이나 기무사쪽은 CIA나 국방정보부쪽의 정보원이 다수일 것이다.

예를 들어, 2007년 9월 노무현 대통령이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제15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참석해 조지 부시 미대통령과 회담할 당시, 회담 사흘전 청와대 경제담당 비서관은 미 대사관 참사관을 만나 노무현 대통령이 회담에 응하는 대책을 미리 알려주었다. 청와대의 통일안보전략 비서관은 2007년 남북회담에 대한 사전 정보를 제공하였다. 외교통상부 북미1과장은 대통령 신년연설 내용도 사전에 미 대사관에 제공하였다. 또한 2007년 대선 당시 청와대는 정동영 후보를 지원하지 않았고 ‘이명박이 당선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손을 놓았다.(그랬던 사람들이 국민들을 속이고 지금도 야당에서, 정부조직에서, 연구소와 언론에서 비열하게 애국자인 것처럼, 진보적인 것처럼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청와대 정보원들은 노무현 정부가 정동영 후보를 지지하는 데 별다른 열의가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대신 노무현 지지자들은 무소속 문국현 후보를 위해 일하고 있거나 전 보건복지부 장관 유시민의 2012년 대선 캠페인을 이미 시작했다고 한다. 노사모 남동지부 수장이자 현재 청와대 행정관인 김태환은 노무현 지지자들이 ‘모두 각자의 길로 갔다’며 ‘아무도 자발적으로 정동영의 캠프에 합류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승리하는 게 불가피하다고 애석해 하며 인정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artid=201109201734421&mode=view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A&nNewsNumb=201111100009


한국의 정치인과 관료들이 이렇게 미국에 ‘알아서 기었으니’ 미국이 한국에서 원하는 목적을 얻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이런 사실이 드러난 이상 한국의 바깥에서 한국 정부를 ‘꼭두각시’라고 조롱해도 대꾸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미국은 자신들이 관철시킬 목표를 설정하고, 치밀하고 철저한 정보 수집과 관리를 바탕으로 개입 작업에 나섰다. 주한 미 대사관은 이명박 후보가 당선됐을 때부터 ‘한국 대통령 당선자에게 개입하는 위한 게임플랜 Game Plan for Engaging the ROK President’(50쪽)를 수립하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 대사관이 선거가 끝난 직후 본국에 발송한 전문은, 이명박정권의 출범을 맞아 쇠고기 시장 개방과 이라크 파병 연장, 한미 FTA 비준을 한국 정부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몇 년 뒤 상황은 미국의 목표가 거의 대부분 달성되었음을 알려준다. 미국산 쇠고기는 2008년 4월 시장이 개방됐다. 이라크 자이툰 부대의 파병도 무리없이 연장됐다. 한미FTA는 미국에 더 유리해진 재협상을 거쳐 날치기 통과됐다.


미국의 계획대로 진행된 것은 이것들만이 아니다. 미국은 2008년 3월에 “훈련 및 장비 지원을 위한 한국군의 아프간 파병”을 한국 관련 우선순위 목록에 올려놓고, 9월에 5억 달러를 지원해줄 것을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또한 2009년 4월에는 각 동맹국가에 아프간 지원금을 할당했는데 한국에는 5억 달러가 배정됐다. 일본에 이어 가장 많은 액수였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2011년 4월에 아프간에 5억 달러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위키리크스 공개 문서에는 미국의 끈질긴 지원 압박과 그에 굴복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미국이 2008년 2월 설정한 목표 중 하나인 5년 동안 지속되는 방위비분담협정(그전까지는 2년 정도 기한이었음)도 2008년 말 호놀룰루에서 미국의 뜻대로 타결됐다.


MB정부가 미국에 끌려 다닌 것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사례는 쇠고기 시장 개방 문제다. 2008년 4월 이명박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시장 개방을 결정하자 한국에서는 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선물로 그런 결정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그런데 위키리크스에서 공개된 문서들은 정말로 그런 ‘빅딜’이 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MB의 측근인 현인택 전 통일부장관은 1월 18일에 버시바우 대사와 만나 한미 정상회담 장소로 “캠프 데이비드를 방문하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라고 말했으며, 버시바우 대사는 다음날인 1월 19일에 이경숙 대통령직인수위 위원장 등과 만나 “이 대통령의 성공적인 방미 등을 보장받기 위해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에 도착할 때에 맞춰서 미국산 쇠고기의 한국 시장 개방에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고 못을 박으며 쇠고기 시장을 개방할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MB측은 정말로 국민들의 눈을 피하면서 쇠고기 시장 개방을 약속한다.(2008년 2월 21일 전문, 124~125쪽)


미국의 요구에 따라 쇠고기 시장 개방을 약속했으면서도, 총선 전 여론을 의식하여 공식적인 사인은 하지 않는 ‘꼼수’를 부린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둔 뒤 곧바로 쇠고기 시장 개방에 나섰고, 이명박 대통령은 캠프 데이비드로 초대돼 부시 대통령과 미국산 스테이크 만찬을 즐겼다.

한미 재협상 문제에서도 미국에 굴복하며 국민들을 속이기는 마찬가지였다. 2009년까지만 해도 이명박정부는 FTA 재협상은 절대 없다며 확언했고, 2009년 11월에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내 얼굴을 걸고서라도 재협상은 없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정부는 비공식적으로 미국측에 재협상 의사를 내보이고 있었다.(2009년 2월 21일 전문, 267쪽)


그리고 결국 한국 정부는 미국과 재협상에 들어가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줬다. 한미를 빨리 비준하기 위해 미국에 양보를 거듭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미국 역시 한국과의 체결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는 미국 비밀전문 기록이 있다.

“한미 FTA는 다음 세대에도 한국을 미국에 묶어둘 핵심 요소이며, 또한 미국이 동북아시아에 정착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 가운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상호 간의 본질적인 교역 이익에 더해서 동북아시아에 대한 우리의 헌신과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시기에 한국을 더욱 미국에 묶어놓는다는 측면에서 한미 FTA의 상징적 효과는 막대한 것이다.”(2009년 11월 5일 전문, 272~273쪽)


미국은 한미 FTA가 자신들에게 막대한 실질적, 상징적 이득을 준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내색하지 않고 재협상을 통해 더 많은 이득을 얻었다. 반면 한국측은 미국이 FTA를 원하고 있는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하지 못하고, 조속한 비준에만 매달려 일방적으로 끌려 다닌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런 무대 뒤에서의 밀약이 여론에 공개되지 않도록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각종 포장을 했다. 한국 외교부 관계자는 그런 ‘포장술’ 내지 언론 회피 꼼수를 미국측에 설명하기까지 한다.(2008년 12월 18일 전문, 108~109쪽)


미국의 요구에 따라 아프간을 지원할 계획이지만, 그렇게 여론에 비춰지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미국 정부의 요구를 모른 척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프간 지원이 워싱턴의 정치적 압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한국 정부가 아프간의 상황과 아프간 국민들을 염려하기 때문에 나왔다고 보이게” 해야 한다고 포장 기법을 조언해주기까지 했다. 이 전문을 보고받고 미 국무부는 한국 정부가 언론을 상대하는 방식에 대해 통찰력을 얻었다며 극찬했다.

정부는 이렇게 있었던 논의를 없던 것처럼 숨기는 것 말고도, 원전 수주나 자원외교 성과를 마구 부풀리면서 다른 식으로 국민들을 속이기도 했다. 원래부터 한국이 수주하기로 돼 있던 UAE 원전을 치적으로 치장했으며 별다른 실익도 없는 볼리비아 리튬 개발과 쿠르드 유전 개발 사업을 몇 억 달러짜리 자원외교 성과라며 포장해왔다. 하고도 안 한 척, 안 하고도 한 척, 끊임없이 국민을 기만해왔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기밀문서를 통해 본 한국 정부와 대통령의 모습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비굴하고, 부끄러우며, 한심하다. 미국의 요구와 압박에 속수무책으로 굴복하고서 굴복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갖은 꼼수를 쓴다. 정권의 부끄러운 치부는 어떻게든 감추려고 하고, 있지도 않은 성과를 치적이라며 크게 부풀린다. 국민들의 안전과 이익보다, 정권의 체면과 자신의 보신을 우선시하는 모습은 분노를 일으킨다. 한국인들이 5년여 동안 익히 짐작하고 있던 것들을 이 책은 확실하게, 있는 그대로의 증언으로 확인해준다.

하지만 이것을 단지 대통령 한 명, 한 정권의 문제로만 축소시켜서도 안 될 것이다. 미국 영향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국민들 모르게 중대한 결정을 해온 것은 어느 정권, 어느 권력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권력은 기본적으로 기만·위선·은폐의 습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정파적 시각을 떠나서 권력이 감추려 하는 진실들을 주권자인 국민들에게 알리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이번에 공개된 위키리크스 문서와 그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의 발간은 정보의 민주화에서 큰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으로 인해 그동안 ‘자신들만 알고 우리는 모르게’ 한국 사회를 움직여왔던 권력자들은 그 부끄러운 알몸을 까발리게 됐다.


[2017년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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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대지와 검은 눈 - 한국 전쟁의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
앤드루 새먼 지음, 이동훈 옮김 / 책미래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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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영국군의 눈에 비친 한국전쟁의 참상 <그을린 대지와 검은 눈, Scorched Earth, Black Snow : 1950년 한국 전쟁의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 >
 

제목의 ‘그을린 대지’는 북한 지역을 초토화한 유엔의 지침을, ‘검은 눈’은 네이팜탄 공격을 뜻한다.
 

영국은 한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까지 불리며, 세계 최강의 국력을 자랑했다. 그 영국의 군대는 머나먼 한반도에서도 싸운 적이 있었다. 그것도 우리 한민족의 비극인 한국 전쟁에서...

한국 전쟁 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해였던 1950년. 영국군은 그 해에 낙동강과 인천, 사리원, 평양, 박천, 장진호, 흥남 등 모든 격전지에서 치열한 혈투를 벌였다.
 

근 70년간 알려지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가, 어느 영국인 기자의 치열한 자료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이제야 비로소 세상에 빛을 드러냈다. 저자는 한국 전쟁을 '부당하게 잊혔던 전쟁'이라고 평가하며,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영국군과 호주군들의 증언을 통해 생생하고 극적으로 되살려냈다.

“영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치른 전쟁 중 가장 인명피해가 컸으며 가장 잔인했던 전쟁은 따로 있었다. 이라크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전쟁은 당시에도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으며, 오늘날의 영국인들도 그 전쟁을 거의 모르고 지낸다. 그 전쟁은 다름 아닌 한국전쟁이다.”
 

이제까지 한국인들에게 알려진 한국전쟁의 진실과 참상은 친일과 부정부패, 헌정유린 군사독재로 점철된 한국의 기존 군 관료와 정치인, 언론인과 학자들이(또한 그런 자들을 비호하고 육성한 미국 정부와 언론의) 제공한 '일방적인' 정보였다고 할 수 있다. 영국 정부나 영국인 역시 크게는 그런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저자가 미국정부와 미국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읽어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물론, 제한된 정보와 관계 그리고 영국인 특유의 편견 속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그리고 북의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을 인종주의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책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1951년 임진강 전투를 다룬 <마지막 한 발>의 저자인 저자의 이번 신작은 한국전쟁 초기인 낙동강부터 참전했던 영국군 27여단과 장진호 전투에 참여한 41코만도 부대를 다루고 있다. 27여단은 원래 중국 본토의 공산화이후 홍콩 방어를 위해 배치되 있다가 한국으로 긴급 파견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 대대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다가 병력 완편을 위하여 27여단에 배속된 것이다.

27여단 병사들은 한국 전쟁에서 그들의 용맹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그들이 본 다른 것들도 증언하고 있었다. 미군의 군수적인 풍요로움, 미 공군의 오폭, 사기와 훈련에서 준비가 안된 모습 뿐만 아니라 한국 전쟁의 잔혹함에 대해서는 북한뿐만 아니라 미군, 남한 그리고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도 증언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영국군 1087명이 전사했다. 포클랜드 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전사자를 모두 합친 수(783명)보다도 더 많다. 책은 영국 제27여단과 41코만도 부대, 그리고 왕립오스트레일리아연대의 참전기를 통해 전황이 가장 격렬했던 1950년 마지막 몇 개월의 최전선 상황을 보여준다.

영국 군인들은 불과 1주일 전에 출발 명령을 받았고, 무기나 보급품도 제대로 없는 상태에서 참혹한 전쟁터에 떨어졌다. 이들은 부산 방어선에서의 전투, 인천상륙작전과 중국의 충격적인 개입, 장진호 전투, 흥남철수작전 등 전쟁의 가장 극적인 순간들을 체험했다. 포로 학살, 마을 소각, 민간인 살해 등 60년이 흐른 지금에야 털어놓는 이야기들도 있다. 한국과 미국에서 말하지 않는 진실, 즉 유엔군과 미군과 한국군에 의한 북한 민간인에 대한 수많은 폭격과 학살의 일부가 드러나 있다.
 

영국은 한국이나 미국, 일본과 달리 북한에 대사관을 설치한 160개 나라 중 하나다. 따라서 이 책은 북한에 대해 아주 적대적이면서 제대로된 정보가 없는 한국인이나 미국인의 한국전쟁 관련 기록이나 책, 즉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전쟁관련 정보와 많이 다를 수 있다.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저자 역시 ‘종북’이고 ‘빨갱이’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책 속에서 기록해 보이듯이 한국전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이념대립이 동서냉전으로 극한 대립을 펼치기 시작한 1950년대에 불행하게도 냉전의 최전선인 한반도에서 벌어진 내전은 국제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제국주의 외세들의 협잡으로 일제에게 식민지 강점이 되었고, 그 외세들에 의해 분단이 되었던 한반도로서는 어찌보면 부득이한 일, 즉 필연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념대결의 틈바구니에서 영국군인들이 영국과 미국의 자본가들과 군산복합체 그리고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위해 머나 먼 타향으로 전쟁에 동원된 구조적 뭌제에 대한 저자의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저자가 냉전의 관점에서 한국전쟁에서 벌인 영국군의 모습을 저술한 책이지만, 분단도 전쟁도 원하지 않았던 한민족의 입장에서 돌아보면 ‘피눈물이 나는 전쟁’이다. 책의 제목처럼 유엔군과 미군은 ‘움직이는 흰색’이 보이기만 하면 한반도 어느 곳이든 네이팜탄을 퍼부어버렸다. 그 결과로 2천만 명의 한민족 중에서 30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영국군의 활약상 중심의 책의 내용 중에 한민족의 피눈물이 보였다. 한민족에게 더이상 분단이나 전쟁이 도래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 책은 증언하고 있다.


[ 2016년 12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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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 사건 숨겨진 이야기 민족21 통일이야기 2
정창현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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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장성택 사건을 통해 본 북한체제 <장성택 사건 숨겨진 이야기>

정창현, 2014. 1, 180쪽, 선인


북한 김정은 체제를 이해하기 위한 '사건' 중 가장 큰 것은 아마 유교적 문화가 강한 북한사회에서 최고지도자의 매형인 장성택을 처형한 것이다.

장성택은 2013년 12월 전격 처형된 것으로 국내 언론은 보도했다. 이 책은 장성택이 처형된 지 한 달만에 출간되었다.


북의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반당반혁명 종파행위’로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고 ‘국가전복음모행위’로 사형집행된 것은 2013년 12월 12일이었다. 당시 국내외에서는 이구동성으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리가 나왔다.

당시 북한이 장성택에 대한 조선노동당 정치국 결정서와 판결문을 전격적으로 공개했지만 아직까지 ‘장성택 숙청’의 전모를 파악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장성택 사건은 당시 북 내부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많은 숙제를 던졌다. 북의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고, 남북대화를 복원한 상호 신뢰를 마련하는 조치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점이었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장성택 숙청과 관련해 북이 공개한 정치국 결정서와 판결문을 분석하고, 최근 북 내부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글을 모았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많지만 이번 사태를 객관적으로 해석하고 향후 북의 정책방향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책을 펴내며 中)


저자는 국내외에서 정확성이 높은 북한전문가로 알려져있다. 주류 언론이나 학계 전문가들이 ‘소설’을 써대고 있을 때 가장 사실에 가깝고 가장 풍부한 내용으로 균형잡힌 논지를 오랫동안 일관되게 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번 책에서도 북한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 보도 내용과 특별군사재판 판결문, 김정은 제1위원장의 노동당 제4차 세포비서대회 연설문 등 1차 자료에 충실히 근거해 역사적 맥락과 다양한 정보들을 추가해 이 사건을 총체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2012년 12월부터 2013년 4월까지 긴장이 고조된 시점에 장성택이 공개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이와 관련 장성택이 2012년 12월 ‘은하 3호 장거리 로켓’ 발사와 2013년 2월의 3차 핵실험에 대해 반대의견을 갖고 있었다는 설이 흘러나오고 있다.”(장성택 핵실험에 반대했나?, 65쪽)

“두 전언의 내용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장수길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의 자금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당 행정부 간부들에 대한 내사가 이때 시작됐다고 한다.”(한 달여 동안 공개석상에 등장하지 않아, 69쪽)

“노동당 중앙당 과장급 이상의 간부 중에서 장성택 사건과 직접 관련돼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람은 국내 전문가나 언론의 예상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이른바 장성택 라인은 없다, 74쪽)


뿐만 아니라 “장성택은 누구인가”, “김정은 시대 북의 ‘경제와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장성택은 ‘내각책임제 원칙 위반’을 위반했나”, “김정은 시대 북은 어디로 가나” 등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사안들을 하나하나 짚고 있다.


장성택이 김일성 주석의 딸 김경희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만나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승낙받은 이야기부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학생간부직을 도맡고 “동서고전을 읽어 이색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박식한 편”이었다는 인물평, 73년 ‘70일 전투’에서 공을 세워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지만 76년 평양주민 소개작업 때 비판을 받은 이야기 등은 북한에 대해 거의 무지한 우리들에게 낯설지만 흥미롭게 다가온다.


저자는 김정은 시대의 ‘핵-경제 병진노선’에 대해서도 “1990년대 초반 김일성 시대에 제시된 마지막 노선을 대외적 정책의 기준점으로 삼는다는 것”이라며 경제노선으로 ‘3대 제일주의’와 대외노선으로 요즘식 표현으로 ‘포괄적인 대외전략’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장성택 사건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김정은 시대 북한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를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해주는 셈이다.


북한에 대한 단편적인 ‘첩보’들이 마치 사실인 양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는 우리 언론과 학계의 현실에서 저자의 북한 문헌 분석 작업과 최선의 정보취합 및 가공작업은 학자이자 기자인 저자만의 단연 돋보이는 능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장성택의 측근들이 실제로 ‘1번 동지’라는 말을 했는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이 나왔는지는 불확실하다”거나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전언이다” 등 모르는 부분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미덕까지 갖추고 있다.


북한에 대해 궁금한 이들에게, 북한의 정책과 움직임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장성택 사건이 여전히 궁금한 이들에게, 아니 김정은 시대 북한의 향방이 궁금한 모든 이들에게 <장성택 사건 숨겨진 이야기>의 일독을 권한다.


[ 2016년 12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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