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증폭사회 - 벼랑 끝에 선 한국인의 새로운 희망 찾기
김태형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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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김태형 저 <불안증폭사회 : 벼랑 끝에 선 한국인의 새로운 희망 찾기>를 읽고 / 2010. 11., 307쪽, 위즈덤하우스


이 책은 IMF 금융위기와 미국발 경제위기를 겪고 난 이후 시기의 한국인들의 마음에 대한 최초의 심리학 보고서이다. 더 정확하게는 “ IMF 경제위기라는 크나 큰 정신적 외상을 겪은 한국인들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한 보고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단군 이래 최악의 불안과 우울, 무기력과 분노를 경험하고 있다. 정부와 언론이 화려하게 포장하여 발표하는 외형적인 경제 지표 이면에는 한국인의 어두운 그림자를 알려주는 통계가 도사리고 있다.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세계 50위권에 불과하고, 한국은 OECD 국가 중 남녀 소득 격차, 국채 증가율, 세부담 증가율, 저임금 노동자 비율, 근로 시간, 노동유연성(해고의 용이성), 산재 사망자, 비정규직 비율, 이혼율, 자살률, 사교육비 비중 등이 1위인 나라이다.
이 보고들이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생존을 위협당하며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심리학자 김태형은 한국인의 심리 상태를 한마디로 ‘불안’, 즉 생존위협에 대한 만성화된 공포라고 규정하고, 자살률이 높아지는데 출산율은 줄어드는 한국사회가 이미 멸종의 길로 들어섰다고 단언한다. 
저자는 또한 IMF경제위기 이후 사회 시스템의 변화와 환경에 대해서는 다각도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한국인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무한 경쟁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 지금까지 개인의 문제로 돌려왔던 불안, 우울 등 한국인이 겪고 있는 마음의 병은 사실 바로 한국사회로부터 비롯되었다. 급속한 경제 성장 후, IMF라는 부작용을 경험한 한국인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한국인들의 트라우마의 원인 중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발생한 것은 30%에 불과하며, 나머지 70%는 사회적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IMF 경제위기 이전부터 한국 땅에 상륙한 신자유주의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한국의 주류세력을 통해 국민들에게 검침없이 확산시켰고, 신자유주의적 발전모델을 강요함으로써 한국사회의 모든 영역을 손아귀에 완벽하게 장악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한국인들의 마음은 시퍼렇게 피멍이 들었고 그것은 어느새 치명적인 마음의 병이 되어버렸으며, 그리하여 오늘의 한국인들은 과거 어느때보다 불안하고 우울하며 무기력하고 또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광풍이 대다수 한국인들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다수 한국인들은 ‘너무나 불안’하기 때문에 일중독, 자녀교육 중독에 빠져버렸으며, 그 불안의 원인은 신자유주의가 이식한 ‘무한경쟁’이다. “경쟁에서 낙오될까봐 어른들이 강박적으로 일에 매달리고 자식들을 공부에 올인시키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과 ‘한국경제의 미래가 너무나 불확실하다’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IMF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발전 노선을 채택함으로써 한국인들의 트라우마를 계속 악화시켰다. 
그때부터 한국인들은 자신말고는 "그 누구도, 아무 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처절한 교훈을 떠안은 채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홀로 걸어가기 시작했는 것이다.

미국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해 만들어진 한국식 경쟁의 특징은 ‘승자독식의 원리’와 ‘사회의 모든 영역에 도입되는 무차별성’이다. "과거에는 노동자, 농민, 학생과 같은 사회집단들의 경우 비록 개인이기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집단 내부에는 공동체주의 혹은 공동체 의식이 강하게 살아 쉼 쉬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이나 노동자집단 내부에까지 경쟁이 무차별적으로 도입된 결과 오늘날의 학생들이나 노동자들한테서 공동체의식을 찾아보기란 아주 어려워졌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은 “한국인들의 내면에 들어와 튼튼히 자리를 잡고 앉아 지속적으로 생존위협을 가한다.”

그러한 ‘생존위협’이 현실화된 것이 바로 ‘세월호 참사’라 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세월호 참사의 원인 역시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함과는 별도로) 제도적인 측면과 구조적인 배경에는 신자유주의가 강요한 규제완화, 민영화, 비정규직화, 물질만능주의가 도사리고 있었고, 그 피해는 애꿎은 어린 학생들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별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것은 국가가 아니다!”라고 분노하면서 바꾸려고 저항하고 있지만, 더 많은 이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무기력과 우울함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론, 사법, 학계 등 도처에서 근본적인 성찰과 변화가 보이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개인의 불안, 공포, 두려움과의 연관성에 대해, 저자는 “사람은 육체적 생명만이 아니라 사회적 생명도 가지고 있으며, 그 사회적 생명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라는 개념으로 분석한다. 그 개념을 뒤집으면 “사람이 사회집단에서 배제되거나 자신의 사회적 가치가 허락하는 걸 극도로 두려워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타인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 그리고 더 이상 사회에 필요하지 않은 무가치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나 반만년 이상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를 공유해온 한국인들은 공동체의식이 여전히 강하게 때문에, 다른 민족이나 사회보다 집단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저자의 심리학적 분석은 ‘내면화된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은 사람들에게 우울, 무기력, 고독 등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시키며, 부정적인 감정은 ‘도피’ 동기를 가져오고, 그 동기는 불안과 공포를 유발시키며, 사람들은 이에 대해 방어기제를 사용하여 두려움을 회피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방어기제를 남용하는 사람은 결국 정신건강이 나빠지게 된다. "부정적인 감정은 제때에 적절한 방식으로 분출하거나 그 자극원을 제거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해결해야 정신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저자는 심리학적 분석을 통해 현재 한국인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원인을 9가지 심리 코드 -이기심, 고독, 무력감, 의존심, 억압, 자기혐오, 쾌락, 도피, 분노-로 자세하게 설명한다. 아마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저자가 제시한 심리 코드 9가지 중에서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을 자신이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들을 불안하게 하는 기본 원인이 한국사회에 있다면 마음수양이나 치료를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는 사회를 개혁함으로써 해결하는 것이 좀 더 근본적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사회개혁을 위한 활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첫째는,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마음의 고통을 야기하는 사회적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일부 원인을 안다 하더라도) 개인의 힘만으로는 사회개혁이 불가능하며 그것은 오직 사회집단만이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처해 있는 불안증폭사회의 해결책과 방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먼저 자신이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마음이 병들어서이고, 자신을 병들게 하는 것은 병든 한국사회 때문이라는 사실을 의식화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몇 가지 실천을 해야 한다. 첫째, 자신이 맺고 있는 인간관계들을 재검토하여 건강한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둘째, 건강한 공동체를 찾아 소속되고, 스스로 소규모 공동체라도 만들어야 한다. 셋째, 개인적 사회적 병인을 의식화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개인적으로든 공동체를 통하서든 정치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사회를 개혁하여 ‘사람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만이 ‘불안증폭사회’를 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증폭사회를 저지하는 사회 개혁의 방향 중 시급한 것은 최소한의 안전 장치를 확보하는 것이다. 사회안전망을 확보하는 것이고,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영역을 줄어야 하며, 사회정의와 경제정의를 구현해 한국인들의 분노를 가라앉혀야 하고, 건전한 정치세력이 등장함으로써 대중이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건전한 정치세력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필히 사상, 정치 시장에서 자유경쟁을 허용해야 함을 주장한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여 정치판에 시장원리와 경쟁원리를 도입해 시장독점을 타파하고 불량상품을 퇴출시키지 않는 한 한국의 정치상황은 좋아질 수도 없고, 대안세력도 등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김태형의 심리학은 한국인의 집단 트라우마를 개인적인 원인 이외의 사회와 역사 속에서 사회심리학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고 신선하다. 기존 한국 심리학계에서 제시하는 심리분석은 마치 '신자유주의의 심리학판'처럼 개인 위주라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보였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한국인의 집단 심리와 병리현상이 몇 년 사이에 한꺼번에 형성되지는 않았을텐데, 그 부분에 대한 접근이 부족해 보인다. 그런 면에서는 <트라우마 한국사회>가 단연 돋보인다.

심리학자 김태형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트라우마 한국사회>를 통해서다. 그는 <트라우마 한국사회>에서 한국현대사를 통해 형성된 한국인들의 사회적 트라우마를 세대별 트라우마와 집단 트라우마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트라우마 한국사회>의 전작이다.
한국인들의 사회적 심리와 사회적 트라우마를 다룬 저자의 ‘한국인의 심리 3부작’의 최종인 <싸우는 심리학>까지 읽어야 '김태형 심리학’을 다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 2015년 4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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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탐구히스토리
에드워드 H. 카 지음, 길현모 옮김 / 탐구당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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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E. H 카(Edward Hallett Carr) 저, 길현모 역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 1961, 238쪽, 탐구당


20대 시절에도 <역사란 무엇인가>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p.42)

당시 필자는 이 책을 통해 ‘역사’라는 것이 어떤 굳어진 ‘정의’나 모든 것을 규정하는 ‘개념’ 아니라는 것, 교과서나 방송 또는 언론이나 학자들이 제시하는 것 이외에 숨겨져 있거나 감추어져 있는 다른 ‘역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역사에서 위인이나 영웅 개인보다 다수의 개인과 집단이 더 중요하다는 것, 시간이 좀 더 지나거나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이 교체되면 과거의 사실에 숨겨져 있는 이면이 드러나고 과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역사는 진보할 수 있으며 미래는 희망적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한 편으로는 <역사란 무엇인가>의 내용이 희미해지고 한국사회에서 부정과 불의가 뿌리깊은 것을 목격하면서 역사와 진보에 대한 믿음이 희석화되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나마 정의와 양심이 조금씩이나마 사회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것을 목격하면서 역사와 진보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지천명의 나이에 이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롭고 각별했다.


저자는 이 책의 목차를  첫 번째 ‘역사가와 사실’에서부터 마지막 ‘넓혀지는 지평선’까지 여섯 개로 나누었다. 여섯 개의 목차를 통해 역사가의 의무와 역할, 역사와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 사회와 개인의 관계와 역할, 역사와 과학과 도덕과의 공통점과 차이점, 역사에 있어서의 인과관계, 진보로서의 역사 등을 다룬다. 따라서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와 역사가와 역사서와 인간과 세계를 두루 관통하는 ‘역사철학’을 다루고 있다.(자세하게 공부한 내용은 http://blog.daum.net/hy2oxy/8692525 에서 참고)


○ ‘위인’ : 위인에 대한 헤겔과 E. H 카의 정의를 보면, 외국의 위인들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적 인물이나 전직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칭송과 우상화 역시 합리적이지 않은 것 같다. 과거 친일파나 군사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한 시대의 위인이란, 시대의 의지를 표현하고, 시대의 의지를 전해 주고, 그것을 완성하는 인간을 말한다. 그의 행위는 시대의 정수이자 본질이다. 그는 곧 자기 시대를 실현하는 것이다."(헤겔)
"위인이란 역사적 과정의 산물 내지는 그 사역인(使役人)이면서도, 동시에 세계의 형세와 인간의 사상을 변화시키는 사회 세력을 대표하고, 창조하는 뛰어난 개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한다."(E. H 카)


○ ‘역사가와 사실’ : 세계사나 동양사, 한국사 등 인류가 이룩해 놓았다는 제반 역사서들은 과거의 모든 역사적 사실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역사가들이 특정 사실을 골라서 자신의 역사철학에 맞도록 구성한 것이며, 따라서 역사 또는 역사서 읽기를 전후하여 역사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E. H 카는 친일파와 서구숭배주의자들이 구성한 한국의 과거 역사와 현대사가 불신받을 수밖에 없는는 이유를 명쾌하게 지적한다. 


“역사상의 사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 순수한 채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하여 항상 굴곡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역사책을 읽으려 할 때에 제일 먼저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은, 그 책 속에 어떤 사실들이 실려져 있느냐라는 문제보다도 그 책을 쓴 역사가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문제이다.”(p.30)

“역사가는 임시로 선택된 사실과, 그러한 사실선택을 이끌어 준 임시적인 해석 - 그것이 타인의 것이건 자신의 것이건 - 과의 양자를 가지고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일이 진행됨에 따라서 해석이나 사실의 선택 및 정리는 다 같이 쌍방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미묘한 반무의식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울러 내포되는 것이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p.42)


○ ‘사회와 개인’ : 인류사회에서 사회와 개인을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이며, 개인과 집단의 의식과 행위는 사회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역사에서 특출했던 개인은 당시 시대적 과제나 일부 또는 다수의 요구, 외부적인 힘의 작용에 필요한 활동을 했기에 당시의 역사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런 개인이 시대적 과제나 다수의 요구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탄생 직후부터 세계는 우리에게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이고, 우리들은 단순한 생물적 단위로부터 사회적 단위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사시대나 역사시대의 여하한 단계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하나의 사회 속에 태어나는 것이고 또한 태어난 직후부터 사회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도 개인적인 상속물이 아니라 자기가 자라고 있는 집단에서 받은 사회적 획득물입니다. 언어와 환경은 다 같이 그의 사고의 성격을 결정짓는데 기여하며 그의 초년기의 관념조차도 타인들에게서 받는 것입니다.”(p.44)
“인간의 사회 속에서 개별화의 과정과 사회의 힘 및 결합력의 증대와의 사이에 대립관계를 설정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일 것입니다.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병행하는 것이며 서로가 필요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복잡하고 발달한 사회라고 할 때에 그것은 각 개인의 상호의존관계가 진보되고 복잡한 형태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근대국가 사회가 개인성원들의 성격과 사상을 형성하는 힘에 있어서나, 그들 간에 단합성이나 획일성을 이룩해 놓는 힘에 있어서 미개부족 사회보다도 무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p.45)


○ ‘역사와 과학’ : 역사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과의 관계를 취급하는 것이다. 역사가가 사실과 해석을 분리시킬 수 없듯이 이 양자도 서로 떼놓을 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양자 중의 하나만을 우위에 올려놓을 수도 없는 것이다. 역사가가 보편성과 일반성을 다루는 문제의 진정한 핵심은 이를 통해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는 데 있으며, 과학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비슷하게 역사가의 주관성과 역사적 사실의 객관성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우선 언어를 사용한다는 그 자체부터가 역사가로 하여금 과학자나 마찬가지로 일반화를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p.92)
“역사가들이 진실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속에 있는 일반적인 것입니다."(p.93)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방적인 과정은 아닙니다. 과거의 빛에 비추어서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동시에 현재의 빛에 비추어서 과거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간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양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북돋아 주는데 있습니다."(p.99)


○ ‘역사와 종교와 도덕’ : 진지한 천문학자라는 것과 신이 우주를 창조하고 지배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과는 양립될 수 있다. 그러나 신이 마음대로 유성의 궤도를 바꾸고 일식이나 월식을 지연시키고 우주의 운행규칙을 변경시킨다고 믿는다는 것과는 양립될 수 없는 것처럼 개인적인 도덕적 판단을 역사의 인과관계에 개입시키거나 교훈을 얻는 과정에 포함시키는 것은 분리되어야 한다. 역사가는 역사적 인물의 공적인 판단과 행위를 역사서 속에서 평가하는 것이지 사적인 판단과 행위를 역사서 속에 기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도덕가에게 맡길 일인 것이다.


“진지한 역사가란 신이 역사 전체의 행로를 명령하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고 믿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특정한 인종이나 종족에 대한 살률에 끼어든다거나, 요슈아의 군대를 돕기 위해서 달력을 속여서 낮 시간을 연장한다거나 하는 구약성서식의 신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개개의 역사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을 끌어댈 수도 없는 것입니다.”(p.108)

"파스퇴르나 아인슈타인은 사생활에 있어서 모범적이라기도바도 성자와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럼에도 설사 그들이 불성실한 남편, 잔인한 아버지, 절조 없는 동료였다고 한들 그들의 역사적 업적이 손상되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p.111)

“역사가들은 노예 소유주 개인에 대해서는 심판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노예 소유제 사회를 평가한는 일에 지장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이란 어느 정도까지는 해석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며, 역사적 해석은 언제나 도덕적 판단 또는 가치 판단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역사란 하나의 투쟁 과정이어서 그로부터 나타나는 여러 결과는 우리들이 그것을 좋게 판단하건 나쁘게 판단하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일부 집단이 타 집단을 희생시켜가지고 성취할 것입니다. 결국은 지는 편이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p.116)


○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 역사가에게는 일반화란 불가피한 것이고 또한 일반화를 통해서 비록 개별적인 예언을 아닐지라도 미래행동을 위한 타당하고도 유용한 일반적인 지침을 마련할 수 있다. 즉 E. H 카의 말대로, 개인뿐만 아니라 역사가들 역시 미래에 일어날 역사에 대해 정확하게 예측, 예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현재의 조건을 따져봄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역사에 대한 개연성 또는 합리적 추측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 또한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에게 역사가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다음 달에 A라는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역사가가 할 수 있다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역사가들이, 일부는 A 국가의 사태에 대한 개별적인 지식을부터, 일부는 역사의 연구로부터 끄러내려고 하는 결론은, A 국가의 정세는 이러이러하니까 만일 누군가가 일을 일으킨다든가, 정부측에서 손을 써서 이를 저지하지 못한다면 가까운 장래에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짙다는 정도의 것입니다. 또한 이상의 결론에는 전망까지도 뒤따를 수 있습니다만 그 전망은 일부는 국민 각층이 취하리라고 생각되는 태도에 관한 딴 여러 혁명으로부터 유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p.102)
"볼세비키 당원들은 프랑스 혁명이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끝장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혁명도 같은 방식으로 끝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고, 그런 까닭에 그들은 자기들의 지도자들 가운데서 나폴레옹을 가장 닮은 트로츠키를 불신하고, 나폴레옹과 가장 닮지 않은 스탈린을 신임했던 것이다”


○ ‘진보로서의 역사’ : E. H 카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과거의 여러 세대의 경험을 측정함으로써 자기의 가능성을 발전시켜 나간다는 점’이며, '인간 능력의 계속적인 발전’라고 규정한다. 결국 진보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 능력의 계속적인 발전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보를 믿지만, 진보로서의 역사의 특징은 “역사에서 역전이나 이탈, 중단이 없이 일직선으로만 전진해 나온 진보는 없다.”는 것과 "미래의 진보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사회는 과거에 자기들이 이룩한 진보에 대해서도 급속히 무관심하게 될 것이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문명의 탄생이라는 것은 진보의 가설을 위한 하나의 출발점으로 잡아볼 수는 있겠지만, 문명이란 결코 발명된 것은 아니며, 때때로 극적인 비약이 수반되었다고 여겨지는 무한히 점진적인 발전과정"이라 말합니다. 기원전 3천년, 4천년 전에 나일강이나 황하 유역에서 문명이 창안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p.171)
“적어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도 역전이나 이탈, 중단이 없이 일직선으로만 전진해 나온 진보라는 것을 믿는 일은 없었다는 것, 따라서 가장 급각도의 역전이라 해도 반드시 진보에 대한 믿음에 치명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진보란 모두에게 평등하고 동시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라 할 수 있다.(p.174)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독자들은 인류의 역사는 수백, 수천 년 전의 역사도 새로운 사실을 발견과 과학적 증거의 확인, 그리고 삭제되거나 묻혀진 사실을 통해 새로운 관점과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50~100년 전 역사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자들과 가해자/피해자의 존재, 그리고 그 후손들과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 속에서 사실 관계가 부족하거나 이해관계가 첨예한 과거사, 지배계층이나 특정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작용하는 역사적 사실과 역사해석에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것이 ‘진보’와 ‘역사’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분단과 민족 문제가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한반도의 현실은 그런 태도를 절실히 요구한다.


오랜만에 E. H 카의 역사철학을 다시 읽으면서 다시금 ‘역사’와 ‘진보’에 대한 믿음을 되살려본다. 그렇지만 20대의 열정 이후 또다시 20년을 넘는 기간 동안 지내오면서 배우고 깨닫고 느낀 지금 시점에서는 '역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쉽게 답하기가 어렵다. 그도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지적했듯이 ‘역사’는 우주나 지구처럼 자연스럽거나 법칙적으로 ‘진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21세기 접어들면서 오히려 과거보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얻으려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과거의 오류와 잘못을 되풀이하는 경향도 많고.


21세기 인류는, 서구사회에서 20세기 초 이래 100년 만에 소득과 부의 불평등성이 최고조에 도달한 것처럼, 수천~수만 년에 걸쳐 이룩한 인류의 진보가 후퇴할 수 있음을 눈 앞에서 목격하고 있다. 비록 역사가 중단과 후퇴와 전진을 반복한다고 하지만, 현재의 세대가 역사에서의 전진이 아닌 중단 또는 후퇴하는 시기를 살고 있다면 그 자체로 고통스럽고 괴로울 수밖에 없다. 2015년 한반도와 지구상에서 살고 있는 대다수의 이들이 겪고 있는 생생한 삶인 것이다.


그럼에도 미래를 살아야 하는 자식들과 후손들이 존재하는 한, 현 세대는 과거에서 교훈을 찾아 현재의 역사가 헛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인상깊은 문장-


“인간의 사회 속에서 개별화의 과정과 사회의 힘 및 결합력의 증대와의 사이에 대립관계를 설정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일 것입니다.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병행하는 것이며 서로가 필요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복잡하고 발달한 사회라고 할 때에 그것은 각 개인의 상호의존관계가 진보되고 복잡한 형태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근대국가 사회가 개인성원들의 성격과 사상을 형성하는 힘에 있어서나, 그들 간에 단합성이나 획일성을 이룩해 놓는 힘에 있어서 미개부족 사회보다도 무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p.45)


“우리들은 자유와 평등 사이의 긴장이라든가 개인적인 자유와 사회적인 정의 사이의 긴장이라든가 하는 문제를 추상적인 용어로 이야기하는 도안에 자칫하면 그러한 싸움이 추상적인 관념의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기 쉽습니다. 그것은 개인 그 자체와 사회 그 자체와의 투쟁이 아니라 사회 속에 있는 개인집단 상호간의 투쟁인 것이며, 각 집단은 자기편에 유리한 사회정책을 추진하고 자기에게 불리한 사회정책을 저지하려고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p.48)

“역사가 하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한없는 재물과 부를 지니는 것도, 전투를 하는 것도 역사 자체는 아니다. 모든 것을 행하고 차지하고 싸우고 하는 것은 인간, 즉 현실의 살아 있는 인간이다."(p.71 칼 마르크스 인용)
“2,500만의 가슴을 무겁게 억누르고 있었던 굶주림, 추위, 가차 없는 억압, 이것이야말로 철학을 즐기는 변호사나 돈 많은 장사꾼이나 지방귀족들의 금간 허영심이나 적대적인 철학 같은 것보다도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동일한 이치는 국가 여하를 막론하고 이와 같은 모든 혁명에 대해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p.71 토마스 칼라일 인용)

“이러한 이름 없는 수백만의 사람들은 많고 적고 간에 무의식적인 행동을 함께 하고 있는 개인들이며, 그들에 의하여 하나의 사회적인 힘이 형성되는 것입니다."(p.72)

“역사에 있어서 수(數)라는 것이 중요합니다.”(p.73)


“특권 없는 사람들 위에 부과되는 보수의 대가는 특권을 박탈당한 사람들 위에 부과되는 혁신의 대가만큼이나 무거운 것입니다.”

"일반화라는 것이 개개의 사실을 맞추어 넣을 수 있는 역사의 대체계의 구성을 허용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체계를 세웠다거나 믿고 있었다거나 해서 흔히 비난을 받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만 그의 서한에서는 일반화의 원칙이 들어있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놀랍도록 비슷한 사건도 상이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일어나면 전연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 이와 같은 사건의 진행을 각각 따라 연구한 다음에 이를 서로 비교한다면 이 현상을 이해하는 열쇠는 쉽사리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초월한다는 것을 최대의 덕으로 삼는 역사철학의 이론이 제공하는 열쇠를 가지고서는 결코 이상과 같은 이해에는 도달할 수 없다."(p.95)

“사회과학자들의 모든 관찰에는 반드시 그의 편견이 들어간다는 것 또한 진리는 아니다. 관찰과정 자체가 관찰대상에게 영향을 주고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 역시 진리다. 즉 자기 행동이 분석과 예언의 대상이 되고 있는 당사자들은 결과에 대한 불길한 예언에 의해서 사전 경고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에 따른 행동의 수정이 가해지게 되고, 설사 그 예언이 아무리 정확한 분석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적중되지 않는다는 일도 생길 수 있다”(p.103)

“역사가는 재판관이 아니며 사형선고만을 내리는 가혹한 재판관은 더욱 아니다.(노울즈) 그러나 히틀러나 스탈린, 매카시 상원의원 등처럼 역사가 및 일반 사람들과 동시대의 인물의 경우에는, 그들의 행위로부터 직간접으로 피해를 받은 수십, 수백만의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직능이 아니라는 주장을 누군가가 비판할 때” 역사가들이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된다고 밝힙니다.(p.114)

“개인에 대한 도덕적인 단죄를 열을 올려 주장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무의식 중에 집단이나 사회 전체를 위한 구실을 마련할 수가 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 개인의 성격이나 기질, 도덕에 집중하게 되면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낳아 놓은 사회에 대한 역사가들의 도덕적 판단, 자신들의 집단적 과오에 대한 성찰은 실종될 수 있다.(p.115)

“우리들이 역사나 일상생활에서 적용하고 있는 도덕적 기준이란 은행수표와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인쇄된 부분과 써넣은 부분이 있습니다. 인쇄된 부분은 자유와 평등, 정의와 민주주의와 같은 추상적인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얼마만큼의 자유를 누구에게 주려고 하는가, 누구를 우리들과 동등하게 인정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인가 하는 것을 딴 부분에 적어 넣기 전에는 수표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때 그때의 경우에 따라 수표의 내용을 기입해 나가는 그러한 방식이야말로 바로 역사의 문제인 것입니다. 즉 추상적인 도덕개념에 특수한 역사적 내용이 담겨져 나가는 과정이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란 말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도덕적 판단은 개념적인 틀 속에서 행해지는 것입니다만, 그 개념적인 틀 역시 역사적 산물 이외의 겻은 아닙니다.”(p.120~121)

“평등, 자유, 정의, 자연법 등의 가상적인 절대자들도 그 실제내용은 시대가 변하고 대륙이 변함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모든 집단은 역사에 뿌리박은 자신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로부터 유리되고 역사로부터 유리된 추상적 기준이나 가치란 추상적인 개인이나 마찬가지로 하나의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고 있는 믿음이나 우리가 설정하는 판단기준이라는 것도 역사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연구의 대상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인간행위의 그 밖의 측면과 조금도 다를 것은 없는 것입니다."(p.123)


“피부색은 생물학적인 유전이고, 언어는 인간의 두뇌활동을 매개로 하여 전승되는 사회적 획득물입니다. 유전에 의한 진화는 몇 천년, 몇 백만년을 단위로 해서만 측정될 수 있는 것으로써, 유사 이래로 인간에게는 아직도 이렇다 할 생물학적인 변화는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획득에 의한 진보는 세대를 단위로 하여 측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과거의 여러 세대의 경험을 측정함으로써 자기의 가능성을 발전시켜 나간다는 점에 있습니다. 즉 역사는 획득된 기량이 세대에서 세대에 전승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진보를 말하는 것”이라 규정한다.(p.170)


“인간은 조상들의 경험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역사에 있어서의 진보란 자연계에 있어서의 진화와는 달리 습득된 자산을 토대로 한다는 것이다. 이 ‘자산’에는 물질적인 재력뿐 아니라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고, 변형하고 이용하기 위한 능력도 포함된다. 그리고 '진보의 내용'은 진보를 믿는다는 것은 결코 어떠한 자동적인 불가피한 과정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인 발전을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p.178)

“역사 서술을 진보하는 과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발전해 나가는 제 사건의 진전에 대해서 부단히 넓혀지고 깊어지는 통찰을 마련해 나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p.186)

“역사에 있어서의 진보는 사실과 가치와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룩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호과정을 가장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객관적인 역사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p.196)

 “역사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역사라는 것은, 역사 자체의 방향감각을 찾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온 방향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믿음과 굳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래의 진보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사회는 과거에 자기들이 이룩한 진보에 대해서도 급속히 무관심하게 될 것입니다.”(p.198)


[ 2015년 6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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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 - 제국의 거짓말, 위안부의 진실
손종업 외 지음 / 도서출판 말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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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손종업 외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를 읽고 / 2016. 5, 430쪽, 도서출판 말

2013년에 출간된 『제국의 위안부』와 관련하여, 2014년 6월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9명이 박유하 교수를 명예훼손 혐의로 한국 검찰에 고소했고, 2015년 11월 18일에 박유하 교수가 불구속 기소되었다.
또한 피해자들은 비슷한 시기에 법원에 출판물배포금지가처분을 신청했고, 법원은 2015년 2월 34곳의 문장의 삭제를 조건으로 출판물 간행을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대해 국내의 일부 학계와 언론계로부터 학문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고 2015년 11월 26일에는 일본과 미국의 지식인 54명이 항의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필자 역시 원칙적으로 연구자의 저작에 대해 법정에서 형사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단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원칙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검찰 기소가 『제국의 위안부』로 인해 심대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의해 이 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 기소를 평가하는 데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문과 언론의 자유가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은 그 취지와 전제가 '권력에 의한 탄압', '소수를 향한 다수에 의한 폭력과 마녀사냥', '공익과 진리를 위한 추구' 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70~80년 전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힘도 없이 일본 제국의 반인륜적 범죄에 희생당해야 했고 한국의 친일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해야 했던 피해자들이 『제국의 위안부』에 의해 모욕당하고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소송을 낸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학문과 언론의 자유'에서 벗어나는 예외일 것이다. '자유'란 적어도 다른 이들에게, 특히 약자와 피해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자 기본일테니까.

『제국의 위안부』는 과연 위안부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나? 『제국의 위안부』를 직접 읽거나 비판서 등 관련 서적을 읽지 않은 채 섣불리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책 한 권이 아니라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국내외적인 상황과 맥락, 저자인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를 출간한 전후에 보여온 학문적인 성과와 언행을 살펴야만이 종합적인 판단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이 책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의 부록에는 2015년 2월 출판물배포금지가처분 신청에 대한 법원의 판결문과 삭제된 34곳의 문장이 삽입되어 있다.(첨부 사진 참조) 저자들의 주장이나 논리가 아니라 공개된 법원의 자료이다.
법원이 삭제를 명령한 34곳의 문장은 박유하의 책 제목처럼 일본군위안부를 '제국의 위안부', 즉 일본제국을 위해 '애국'을 한 식민지 여성이며, 일본군들과 '동지적 관계'를 맺었고 그녀들이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온 게 아니라 다분히 '돈'을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또는 업자에게 속아서 따라나섰다고 규정했다. 그 문장들은 위안부 피해자분들에게 또다시 커다라 심적 고통을 안겨주었음이 분명하다.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에서 저자들은 몇 가지 방향에서 『제국의 위안부』와 박유하를 비판한다. 가장 큰 문제점은 이번 일련의 사태가 문제의 본질을 떠나 학문과 표현의 자유로 초점이 옮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일본 국가기관의 관여 아래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연행된 여성들에게 '성노예'를 강요한 극히 반인도적이고 추악한 범죄행위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 그 범죄행위로 인해 참으로 심각한 인권 침해를 당한 피해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커다란 아픔을 견디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그 범죄행위에 대해 일본은 지금 국가적 차원에서 사죄와 배상을 하고 역사교육 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법적 상식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1965년에는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논의조차 되지 않았던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1965년에 해결되었다고 강변하는 부조리를 고집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그 부조리에 맞서 1,200회 이상 매주 수요시위를 개최 있고 지친 노구를 이끌고 전 세계를 돌며 경의로운 해결을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필자는 이 엄중한 사실들을 도외시한 연구는 결코 학문적일수 없다고 믿는다.

저자들은 『제국의 위안부』가 사실 관계, 논점의 이해, 논거의 제시, 서술의 균형 논리의 일관성 등 여러 측면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책이라고 평가한다.
기존의 연구 성과와 국제사회의 법적 상식에 의해 확인된 것처럼,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책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위안부』는 책임의 주체가 민간업자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법적인 쟁점들에 대한 이해의 수준은 매우 낮은 데 반해 주장의 수위는 지나치게 높다.
충분한 논거의 제시 없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제국에 대한 애국"을 위해 "군인과 동 지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규정하는 것은 '피해의 구제를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또 하나의 커다란 아픔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저자들은 『제국의 위안부』가 충분한 학문적 뒷받침 없는 서술로 피해자들에게 아픔을 주는 책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일본의 지식사회가 '연구의 다양성'을 전면에 내세워 『제국의 위안부』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과연 그러한 평가가 엄밀한 학문적 검토를 거친 것인지 커다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저자들은 <제국의 변호인>이라는 책의 제목은 말 그대로 일본제국, 일본 정부, 일본군인을 변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는 형식적으로는 양측에 화해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늘상 일본정부, 일본제국의 편을 든다는 것이다.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로  이니치신문사에서 <아시아/태평양상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뒤 ‘(수상을)사퇴하지 않는 이유’를 밝히면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망명을 『제국의 위안부』가 대신 해내고 있는 셈”이라고 소감을 밝혔는데, 『제국의 위안부』를 읽다보면 박유하가 정신적으로 과거 현재의 일본국과 동지적 관계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제국의 변호인’인 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단지 박유하 개인에게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니다. 이 책은 박유하 너머에서 『제국의 위안부』에 갈채를 보내는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과 우익에게 그리고 한국 내 지식인들에게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
『제국의 위안부』가 전하는 메시지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성향을 보이는 지식인의 욕망, 요구와 딱 맞아떨어진다고 한다. 『제국의 위안부』를 심도 깊게 비판해온 정영환 준교수(메이지가쿠인대학)는 “일본의 논단이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예찬하는 현상은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지적 퇴락’의 종착점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 책이 일본 언론계에서 이토록 폭넓게 예찬 받은 것은 박유하 씨가 일본사회의 지식인의 욕망을 민감하게 감지하여 전전의 대일본제국의 책임 부정과 전후사의 수정이라는 두 가지 역사수정주의에 호소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의미에서 ‘제국의 위안부’ 현상이라는 것은 일본의 지식인, 언론계의 문제인 것이다.”(정영환)

이런 판단에 근거해 볼 때 일본의 ‘제국의 위안부 현상’은 의도적이고 정략적으로 조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박유하라는 여류작가, 여성교수한 명의 독특한 해석에 지지를 보내는 게 아니라, 일본 내 역사수정주의와 맥을 같이 하기에 극찬해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의 우익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핵심 주장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일본 우익의 ‘종군위안부’ 관련 핵심 슬로건은 “성노예는 거짓말이다”, “강제연행은 거짓말이다.”, “종군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다”라 할 수 있다.
최근 일본 각지에서 열리는 우익단체의 ‘종군위안부’ 관련 홍보전에서는 『제국의 위안부』에 아오는 말을 인용해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고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이때 단골로 인용하는 말이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는 ‘동지적 관계’라는 말이라 한다.

이처럼 일본 리버럴, 일본 우익이 제국의 위안부에 찬사를 보내고 상을 주는 현상에 대해서이 책에서는  「일본 리버럴 지식인은 왜 박유하를 지지할까」 (길윤형),「일본의 새로운 역사수정주의와 『제국의 위안부』 사태」 (김부자), 「위안부 문제와 학문의 폭력-식민주의와 헤이트 스피치」 (마에다 아키라) 등이 그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저자들은 『제국의 위안부』와 이 책을 둘러싼 국내외 움직임에 민감한 이유가 있다.
식민지근대화론, 국정교과서로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는 입장과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흐름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1919년) 법통성을 부정하고 새롭게 건국절(1948년)을 추진하는 세력과 전쟁범죄, 식민지 지배 책임을 회피하고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꾀하는 세력은 이미 내용적인 ‘화해’를 끝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조만간 한일군사동맹을 위해 어깨동무를 나란히 할 ‘동지적 관계’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화해’의 담론으로 포장하고, 표현의 자유로 띠를 두르고, 사상 검열 당한 피해자 흉내를 내지만 ‘제국의 위안부’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제국의 위안부’의 결정적 문제는 식민지 지배의 문제를 식민지 피해자가 아니고 제국의 눈, 가해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려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지식인들 역시 책의 부록에 "『제국의 위안부』 사태에 대한 입장 "을 담은 학자들처럼 뼈저리게 반성하고 노력해야 한다. 일본제국의 식민지강점과 친일파 정권의 한일협상,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거의 대다수 한국 지식인들은 그동안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위안부』와 박유하에 대한 사법부의 대응(?)에 대해 김규항, 김철, 장정일, 유시민, 금태섭, 홍세화, 류근, 고종석 등 190명의 교수, 문화예술인, 언론인들은 '학문의 자유'를 옹호하며 반대했지만, 위안부피해자들이 수요집회를 1,200회나 진행하는 동안 정작 그들이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공론화와 문제해결에 대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묻고 싶다. 소위 민주정부라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동안에도 수요집회는 계속되었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지식인사회에서 무관심 영역이지 않았나?

"끝으로 우리는 명예훼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와 고소라는 법적인 수단에까지 호소하시게 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을 깊이 되새기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거듭 상처를 주는 이러한 사태에 이르게 되기까지 우리의 고민과 노력이 과연 충분했는지 깊이 반성합니다 그리고 외교적·정치적·사회적 현실 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의의 여신의 저울이 진정 수평을 이루게 하는 그런 방식 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노력할 것을 다짐합 니다." 2015, 12.9.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 을 위해 활동하는 연구자와 활동가 일동(2차 성명) : 국내-김창록(경북대) 등 258명, 국외-마에다 아키라(도쿄조케이대학) 등 122명 [425쪽]

- 인상 깊은 문장 -

"박유하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의 편익을 추구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녀의 책이 어떤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가가 문제일 따름이다. 학문은 ‘해결책’이 아니라 ‘진실’ 또는 ‘사실’을 통해 기존의 패러다임과 맞서야 한다."(손종업, 37쪽)

"『제국의 위안부』를 옹호하면서도 그 주장의 파편만을 임의로 가져오는 글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일본군의 동지인 위안부’, ‘위안부의 기억을 왜곡하는 우리’라는 파편으로 그 책을 말하지 말라. “제국의 일원인 위안부-매춘을 만드는 국가구조-제국의 합법”이란 논리의 흐름과 “한국의 위안부 인식을 왜곡한 배후권력인 정대협”이라는 (박유하의) 전체 주장을 가져와서 그에 대해 항변하라."(김요섭, 69쪽)

"아베 신조 수상을 비롯한 정치가는 역사의 사실을 부정하고 개찬(改竄)하며 책임도피를 도모해 왔다. 또한 아우슈비츠의 거짓말에 해당하는 위안부 거짓말이나 남경대학살 거짓말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도, 대중 매체에서 도 표현의 자유란 이름하에 역사의 사실을 부정·개찬하고, (위안부) 피해자를 다시 모욕하면서 존엄의 회복을 방해하고 있다. 우익 정치가나 헤이트 단체뿐 아니라 일부 지식인들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마에다 아키라, 89쪽)

"박노자 오슬로국립대학 교수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북한 혹은 암묵적으로 중국에 맞서기 위해 한국이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한일 화해론의 근거가 된다면 굉장히 위험한 논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론을 논의하기에 앞서 한번쯤 곱씹어 봐야 할 지적이다. 그러나 이런 점까지 인식하고 발언하는 일본 내의 리버럴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데, 어쩌면 그 점이 일본 리버럴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일지도 모른다."(길윤형, 125~126)

"즉 박유하 씨의 ‘위안부’상은 일본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이 책이 조선인 ‘위안부’는 소녀도 성노예도 아니고, 일본인 병사와는 “‘같은 일본인’으로서 ‘동지적 관계’’를 가지는 ‘제국의 위안부’로, 지금까지 성노예로서의 ‘위안부’상을 ‘전면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새로움을 가장하면서, 내실은 하타 이쿠히코 씨의 ‘위안부’ 제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의 해석(=‘전지 공창시설론’)과 우에노 지즈코 씨의 피해자상의 해석(=‘모델 피해자론’)을 합체시켜, 일본군의 책임과 식민지 지배 책임을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적인 ‘위안부’ 담론이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김부자)

"이 책이 일본 언론계에서 이토록 폭넓게 예찬 받은 것은 박유하 씨가 일본사회의 지식인의 욕망을 민감하게 감지하여 전전의 대일본제국의 책임 부정과 전후사의 수정이라는 두 가지 역사수정주의에 호소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의미에서 ‘제국의 위안부’ 현상이라는 것은 일본의 지식인, 언론계의 문제인 것이다."(정영환, 243쪽)

"2015.12·28 한일 외교 합의는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20여 년 간의 국제공조 노력을 헛되이 만드는 일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한국만이 피해자가 아닙니다. 아시아 전역의 피해자들과 그들을 위해 활동해온 전 세계 시민들에게도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베리 피셔 변호사, 172쪽)

"징용소송, ‘위안부’ 소송을 추진하던 당시 “우리는 2차 대전의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있다.” 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21세기 시점에서 2차 대전의 마지막 전투를 아직도 계속해야 하는 현재 상황이 안타깝지만, 한국의 피해자들은 배리 피셔 변호사님 같은 분이 계시다는 것에 큰 위로를 받으실 것입니다."(정연진, 173쪽)

"영화 「귀향」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장면은 ‘위안부’ 소녀들 중 한 명이 「가시리」를 부르는 장면이다. 그는 평양 권번 출신의 여성으로, 다른 소녀들보다 나이가 많다. 이것은 『제국의 위안부』나 일본 극우들이 말하는 “‘위안부’는 매춘부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장면일까. 그렇지 않다. ‘위안부’들 중에는 강제나 겁박 등에 의해 끌려온 십대 소녀들도 있었고,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따라 나섰지만 취업 사기를 당한 사람들도 있었고, 성매매라는 것을 알고 온 권번 출신의 창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황진미, 191쪽)

"그런데 박유하는 ‘위안부’ 개인들의 일상을 계속 강조한다. 이것은 마치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도와 같은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알려진 대로 식민지근대화론은 일제강점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암울하고 고통스러웠던 것만은 아니고 나름 살만한 세월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즉 ‘식민지 시기에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민지 시기에 근대화가 되었으니 식민지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논리가 ‘식민지근대화론’이다. 그러므로 박유하의 주장에 ‘식민지근대화론 위안부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김수지, 206쪽)

"결국, 제국의 위안부라는 말은 조선인 위안부를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로 만들어 일본군의 범죄를 면죄해주는데 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안부(성노예) 문제는 단지 일본만의 책임이 아니며 일본 보다 일찍 제국주의 확장을 한 서양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초점을 흐리게 한다. 이처럼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 제목은 일본의 전쟁범죄, 식민지 지배 책임을 희석화, 추상화하고, 축소하는 데 활용된다."(최진섭, 244쪽)

박유하가 “취사선택”해서 발췌한 ‘위안부’들의 ‘좋은 기억’들은 정대협 활동가와 연구소 연구자들이 여러 번 찾아가며 오랜 시간을 들여 끌어낸 증언들이다. 그 증언집에 있는 이야기를 생존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안 했다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당사자들이 “버렸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김복동 할머니도 그러한 기억을 “버리지” 않았다. 그냥 사람들에게 꼭 알리고 싶은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몇 번이고 강조하면서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다. 왜냐, 그런 이야기들이야말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라는 것을 당사자가 더 잘 알기 때문이다."(양징자, 271쪽)

"학자의 양심은 때론 국적을 초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유하의 이러한 우편향 인식은 최근 일본의 집단 자위권을 통한 무력사용 선언과 평화 헌법 개정과 맞물려 설득력이 오히려 더 떨어져 보인다. 이 부분에 와서는 ‘일본 우익 학자 누군가가 쓴 글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갈 정도이다."(조의행, 296쪽)

"『제국의 위안부』를 쓴 목적이 이해, 화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이토록 일관되게 가해자 입장은 두루뭉수리 넘어가고, 불행은 피해자 동족인 이웃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이 대체 우리 민족에게 무슨 짓을 저질러 왔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고은광순, 300쪽)

"‘4개의 터부’(천황제, 야스쿠니신사, 난징학살, 일본군 ‘위안부’ 문제) 외에도 헤이트 스피치 등을 통해 중국, 한국, 동남아에 대해 철두철미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는 점과 일본은 문명국가이고 그 이외의 아시아 국가는 야만국가라는 서구적 가치관을 답습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일본 평화주의의 본질은 이중적이며,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북한에 대해서도 오히려 일본인 납치문제를 들어 일본이 피해자인 양 하는 일본의 민족관, 인간관에 대해 평화 운동가들이 제대로 유효한 반격을 하지 못하고 있다."(서승, 323쪽)

"일본의 소녀상 철거 요구를 통해 더 깊고 넓은 시야를 갖게 됐습니다. 소녀상은 단지 일본군 ‘위안부’의 위로와 평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평화, 동북아의 평화, 나아가 전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상징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긴장, 대결, 군국주의를 추구하고, 거짓 화해와 평화를 말하는 세력이 소녀상 철거를 원한다면, 소녀상을 지키는 일이 곧 진정한 평화를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김운성, 336쪽)

"박 교수는 위안부 동원이 일본이나 일본군의 ‘국가 범죄’가 아니며, 설혹 범죄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로 ‘업자의 범죄’라고 한다. 동시에 박 교수는 업자의 책임도 크지만 일본정부의 책임도 있다고 언급한다. 그런데 천황이나 일본정부가 성노예제에 대하여 법적 책임이 아닌 식민지배와 관련해서 상징적이고 구조적인 책임을 진다고 말한다. 책임에 관한 이러한 식의 복화술은 책임을 실제로 허구화한다."(이재승, 341쪽)

"저자는 “법적 책임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외치면서 자신은 끝없이 ‘뒤틀린 법 도그마’에 빠져들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가 강요한 조약을 내세워 ‘성노예’ 피해자에게 “협력자” “가해자” “무의식적인 제국주의자”라는 지위를 강요한다. 일제가 식민지‘법’에 따라 한 일이니 문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식민 지배, 국가주의, 남성 중심주의, 근대자본주의, 가부장제가 문제라는, 이미 많은 학자가 제시한, 그 자체로서는 타당한 주장은 법적 책임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업자의 책임’으로 왜소화되어 버린다. 그렇게 잎사귀를 강조하느라 줄기를 부정하다 보니 잎사귀만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괴이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김창록, 382쪽)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운동은)역사 속에 묻혀 있던 여성의 경험을 가시화함으로 가부장제, 식민주의, 민족주의의 공모 체제에 균열을 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관점에서 거대 역사에 질문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연대는 여성에 대한 전시 폭력이라는 거대한 부정의의 대한 저항이라는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자 투쟁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확대, 유지되고 있는 초국적 페미니스트 정치학에 근거한다. 이는 젠더, 민족,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의 축이 교차하는 접점에서의 수많은 차이와 경계를 넘어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과 실천의 의지로 연결된 연대다."(이나영, 401쪽)

[ 2016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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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공부 -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위한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투쟁
장정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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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장정일 저 <장정일의 공부>를 읽고 / 2015. 5., 393쪽, RHK


이 책은 서점에 가득한 기존의 인문교양서와는 다르다. 대중이 가지고 있는 무비판적인 사유 체계에 대한 비판적인 도전으로 가득 차 있으며, 진짜 독서란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눈'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불혹의 나이까지 뜻도 내용도 없는 ‘중용’이라는 허상에 빠져 있었으며, 자신을 비롯한 많은 한국인들이 빠져 있는 ‘중용’, 그리고 ‘양비론’이라는 태도는 아무런 사유도 고민도 없는 ‘무지’에 불과하다고 질타한다. 

“나는 언제나 '중용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알게 되었다. 내가 ‘중용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력은 우리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했기 때문도 맞지만, 실제로는 무식 무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렇다, 어떤 사안에서든 그저 중립이나 중용만 취하고 있으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 중용의 본래는 칼날 위에 서는 것이라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유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니 그 중용에는 아무런 사유도 고민도 없다. 허위 의식이고 대중 기만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무지의 중용을 빙자한 지긋지긋한 ‘양비론의 천사'들이 너무 많다” (5쪽)


또한 자신이 무지한 이유를 시인을 예로 들면서 전문화된 근현대의 직업군들이 다양하고 진지한 공부를 하지 않은 채 섣불리 다른 사안에 대해 판단하고 나서기 때문임을 고백한다. 사실 그의 고백은 시인뿐 아니라 대부분의 문학가, 법조인, 경제학자, 의료인, 교수, 과학자 등 지식인, 지성인을 자처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 무지의 근거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상급 학교 진학을 하지 않았다는 결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한때 내가 시인이었다는 사실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시인은 단지 언어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최상급의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턱없는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시인은 그저 시가 좋아 시를 쓰는 사람일 뿐으로, 열정적인 우표 수집가나 난(蘭)이 좋아 난을 치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다. (...)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마흔 넘어 새삼 공부를 하게 된 이유는 우선 내 무지를 밝히기 위해서다. 극단으로 가기 위해, 확실하게 편들기 위해, 진짜 중용을 찾기 위해!” (6쪽)


문학가로 살며 정치나 사회 이슈에 큰 관심이 없던 장정일은 2002년 대선 당시 우리 사회가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국 사회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궁금증을 풀고자 23가지 화두를 정하고 관련 책들을 섭렵하면서 사유의 확장을 시도한 결과가 바로  이 책 <장정일의 공부>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23가지 화두는 모두 우리의 의식과 참신성과 창의력을 짓누르는 정형화된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상한선을 찾아서]에서 그는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이덕일), <우리가 정말 몰랐던 조선 이야기 2>(김인호/박훤), <서얼단상>(고종석) 등을 아울러 읽으며 인조반정은 잘못된 쿠데타였다는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군약신강의 문치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이승만과 박정희 같은 독재자를 갈망하게 된 것은 아닌지 묻는다. 송시열의 북벌론이 허구이듯 우리나라 보수 우익이 국부로 떠받드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도 사기극이라고 말한다. 이승만의 사기극은 박정희-전두환을 거치면서 2016년 현재 ‘북한붕괴’, ‘종북타도’, ‘종북세력’, ‘통일은대박’이라는 사기극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는 <우리가 정말 몰랐던 조선 이야기 2>에서 발췌한 '한국 주류의 기원'에 대한 다음 문장으로 글을 끝맺는다.

“오늘까지도 일제와 영합했던 서인 계열의 척족들이 일부 기업의 대주주가 되어 있다는 현실은 권력과 부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신과 혐오의 근원을 짐작케 한다.”(44쪽) 


그리고 저자는 [교양; 지식의 최전선]에서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를 통해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지적 능력 저하 현상과 대학의 교양 교육 부재 문제를 짚어본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다치바나 다카시), <두 문화>(C.P. 스노우), <문학의 사회학>(에스카르피), <통섭: 지식의 대통합>(에드워드 윌슨) 등을 함께 읽고 대학의 교양 교육 강화, 졸업정원제 실시, 과학 공부 장려, 대학의 독립성 확보 등의 방안을 조심스레 내놓는다.


[부서진 손잡이를 움켜쥐고]에서는 나치와 히틀러에 대해 깊이 알기 위해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안인희), <나치 시대의 일상사>(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바이마르공화국의 역사>(오인석) 등을 탐독한다. 저자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1차 세계대전의 참여를 놓고 분열된 것이 결국 나치의 암흑시대를 초래하는 데 일조했다는 <바이마르공화국의 역사> 한 대목을 읽고서 (이념의 변별 없이 당명만 교체하는) 우리 정당의 계통발생 혹은 자기 복제를 떠올린다. 그는 부서진 손잡이를 움켜쥐고 아무리 문을 열려고 해 봤자 새로운 미래와 희망이 열리지 않는다고 탄식한다. 이들 정당이 이념이 아니라 지역적 지지 기반과 지역주의 성향에 좌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시민들이 나치에 투표한 까닭을 레드 콤플렉스(=붉은 공포)에서 찾고서는, 자신에게도 레드 콤플렉스가 내면화돼 있으며 그것이 질서와 안정에 대한 중산층의 끈질긴 집착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깜짝 놀란다.


[과두정이 온다]에서는 <제국의 몰락>(엠마뉘엘 토드)을 통해 21세기 미국이라는 제국을 공부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 ‘델로스 동맹’에 참가한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은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대신에 포로스(조공)을 바치고 군사적 의무를 면제받았다. 아테네는 그것으로 저항적인 동맹국들을 제어하는 데 썼을 뿐 아니라, 아테네를 전 세계인의 뇌리 속에 민주주의의 발상지로 각인시켜 놓은 아크로폴리스 신전을 건축했다. 20~21세기 미국과 자본주의 동맹(협력)국가들의 관계와 비슷한 셈이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아테네에게 했듯이, 지구라는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있는 미국에게 세계가 바치는 조공의 내역은 어떤 것일까? 첫째, 미국이 참전하는 각종 전쟁에 군비를 각출하기. 둘째, 미제 무기 구입하기. 셋째, 아랍의 석유 생산 지역을 미국의 통제권에 맡기고 미국의 다국적 석유기업의 지위를 인정하기. 넷째, 달러를 세계의 기축활폐로 인정하기. 이런 것들이 군사 대국인 미국이 전 세계로부터 거둬들이는 조공의 내용이다. 미국의 군사력은 ‘국가의 안전을 확보하기에는 너무 크지만 제국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작다.’” (181쪽)


[‘정형화된 기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들]에서는 <나치 시대의 일상사>(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식민지의 회색지대>(윤해동), 한국의 민족주의 담론에 대해 비판한다. 그는 고민 끝에 일본의 조선 지배에 협력한 부류(친일파)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에 참여했던 부류(전범)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윤해동의 주장에 결국 공감한다. 우리가 “민족이라는 협소한 잣대에 얽매여 친일파의 행적만을 문제 삼을” 때, 우리가 “만주나 태평양 도시에서 저질렀던 만행은 청산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라도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미루고 있는 북한과 연대하여, 천황제 청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일제의 2등 시민이 되고자 부르짖으며 중국과 태평양 전쟁에 여러 형태로 참여했던 우리 손의 피만 씻어 내는 게 아니라, 우리 뇌수 속의 민족주의까지 씻어 낼 비장한 각오가 되어 있다면, 이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 광범위한 친일 설정에 따른 얕은 처벌보다는, 폭좁은 친일 설정에 따른 깊은 처벌이 훨씬 현실적이다.” (223쪽)

[‘정형화된 기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들]은 이 책 중에서 가장 반론이 많은 단락이다. 저자의 결론만 따져보아도 ‘현실적’이라는 취지는 무색하다. 우리에게는 1949년 반민특위가 ‘국권강탈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치하의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등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반민족행위자로 선정한 668명 마저 이승만과 친일파들에 의해 탄압을 받아 해산되었던 역사가 엄연히 존재한다. 저자가 지적하는 ‘중국과 태평양 전쟁에 여러 형태로 참여했던 우리 손의 피’가 어떤 내용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필자는 외세에 결탁하여 공동체 집단을 파괴하고 항일운동을 말살한 일제와 적극적 친일파들은 아무리 늦어도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밖에 장정일이 공부한 내용을 주제별로 모으면 봉건성과 국가주의, 양심적 병역 거부, 역사 청산, 마키아벨리즘, 근대와 민족주의, 친일과 문학, 미국 극우파, 타성 앞에서의 법의 무력함, 시오니즘 등이 있다. 인물별로는 리쭝우, 마르크 블로크, 이탁오, 고미숙, 시마자키 도손, 무라카미 하루키, 이광수, 모차르트, 조봉암, 바그너, 촘스키, 오디이푸스, 엘리자베스 1세 등이 있다. 

독자들은 장정일식 인문학 독학 과정을 따라가면서 진보/보수/과두정/친일파/민주주의/전체주의 등 우리 사회에서 늘 논란의 중심이 되는 개념들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정확한 용어를 정립함으로써 정형화된 기억으로부터 벗어나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 어떤 못지 않게 독서의 힘을 보여준다. 저자는 하나의 화두를 풀기 위해 수십, 수백 권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간다. 바로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장정일의 공부’는 전진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을 덮고 나면 더 읽고 공부하고 싶은 책들의 목록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맨 아래에 필자가 읽고 싶은 책을 수록해 놓았다)


저자의 말대로 ‘공부 가운데 최상의 공부’는 “무지를 참을 수 없는 자발적인 욕구와 앎의 필요를 느껴서 하는 공부”다. 그리고 그런 공부야말로 이 책의 부제처럼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위한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인간과 인문학에 대한 열풍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지금, 진정한 공부의 길을 알려주는 <장정일의 공부] 다시 읽기를 권한다.

-인상 깊은 문장-

“이 땅의 극우반공체제는 1949년 6.6 반민특위 습격 테러 사건, 국회 프락치 사건, 6.26 김구 암살, 6.5 국민보도연맹 창설 이후, 강요되어 구축된 것이다. (....)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극우반공 테러가 어용 관제 단체, 깡패 그리고 일부 경찰에 의해 저질러졌다면, 박정희의 극우반공 테러는 군부의 정보 장?zㄹ에 의해 훨씬 더 잘 제도화, 조직화되었으며 거기에 더해 피해 대중들의 골수에까지 스며든 ‘레드 콤플렉스’는 박정희 시대의 극우반공체계를 더욱더 잘 작동하게 만들었다.”(308쪽)


“런던탑의 축축한 감방이 없었으며 고통 속에 내지르는 비명 사이로 영리한 취조관이 조용히 취조서를 쓰고 있지 않았다면,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광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문예부흥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372쪽)


[ 2016년 6월 14일 ]


----- < 장정일 공부 > 따라잡기 ----

아래 108권 중에서 필자가 읽은 책은 고작 9권 뿐이다...ㅠ


<당신들의 대한민국> 2001 박노자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2002 박노자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1999 김용옥

<대한민국은 군대다> 2005 권인숙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2000 이덕일

<우리가 정말 몰랐던 조선이야기 2> 1999 김인호, 박훤

<서얼 단상> 2002 고종석

<사기> 사마천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2002 다치바나 다카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2001 다치바나 다카시

<문학의 사회학> 1983 에스카르피

<역사의 종언> 프란시스 후쿠야마

<두 문화> 1996 C.P. 스노우

<통섭> 2005 에드워드 윌슨

<역사를 위한 변명> 1990 마르크 블로크(호)

<이상한 패배 : 1940년의 증언> 2002 마르크 블로크(호)

<침략이 아직도 가능한가> 쇼비노

<난세를 평정하는 중국 통치학> 이종오 2003

<분서> 이탁오 홍익출판 1998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고미숙 책세상 2001

<심기도설> 최한기

<봄> 시마자키 도손 소화 2000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민음사 1999

<이광수와 그의 시대> 김윤식 솔 1999

<무정> 이광수

<배틀 로열> 타카미 코??/후카사쿠 긴지 대원씨아이 2002

<1984> 조지 오웰

<모차르트> 노베르트 엘리아스 문학동네 1999

<피가로의 결혼> 모차르트

<모차르트: 혁명의 서곡> 폴 맥가 2002 책갈피

<마이너리티  역사 혹은 자유의 여신상> 손영호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 : 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 김형인

<반미> 김민웅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 홍은택 창비 2005

<제국의 몰락> 엠마뉘엘 토드 까치 2003

<문명의 충돌> 새무엘 헌팅턴 김영사 1997

<역사의 종언> 프란시스 후쿠야마 1989

<최후의 몰락> 엠마뉘엘 토드 1976 (소련의 해체 예견)

<미국 문화의 몰락> 모리스 버먼 황금가지 2002 

<미국 정신의 종말> 앨런 블룸 범양사 1989

<그레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안인희

<나치 시대의 일상사>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히틀러의 뜻대로 : 히틀러의 조력자들> 귀도 크놉 울력 2003

<바이마르공화국의 역사> 오인석 한울 1997

<나치의 자식들> 노르베르트 레버르트 사람과사람 2001

<보수 혁명 : 독일 짓기인들의 허무주의적 이상> 전진성 책세상 2001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전재호 책세상 2000

<미국식 사회 모델> 쥐스탱 바이스

<나치 시대의 일상사>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식민지의 회색지대> 윤해동 역사와비평사 2003

<인텔리겐차> 윤해동 푸른역사 2002

<소리 없는 프로파간다 : 우리 정신의 미국화> 이냐시오 라모네 상형문자 2002

<잔인한 이스라엘> 랄프 쇤만 미세기 2002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키스 휘틀럼 이산, 2003

<거꾸로 읽는 세계사> 유시민 푸른나무 2002

<나를 배반한 역사> 박노자 인물과사상사 2003

<중국이 만든 유럽의 근대> 주겸지 청계 2003

<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

<동양은 어떻게 서양을 계몽했는가> J.J 클라크 우물이있는집 2004

<서구 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존 홉슨 에코리브르 2005

<화려한 군주> 다카시 후지타니 이산 2003

<조봉암 연구> 박태균 창비 1995

<나의 아버지 여운형> 여연구 김영사 2001

<비극의 현대 지도자> 서중석 성균관대 2002

<하이데거와 나치즘> 박찬국 문예출판사 2001

<조봉암과 1950년대> 서중석 역사비평사 1999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안인희 민음사 2003

<히틀러의 정신 분석> 월터 랑거 

<히틀러 평전> 요하힘 페스트 푸른숲 1998

<논쟁 나치즘의 역사화> 구승희 오누리 1993

<독일 제3제국의 선전 정책> 데이비드 웰시 혜안 2001

<나의 투쟁> 히틀러

<독일 국민에게 고함> 피히테

<천재, 천재를 만나다> 한스 노인치히 개마고원 2003

<히틀러의 연인들> 안나 마리아 지그문트 청년정신 2001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안인희 민음사 2003

<권력과 테러: 노엄 촘스키와의 대화> 노엄 촘스키 외 양철북 2003

<독일 제3제국의 선전 정책> 데이비드 웰시 혜안 2001

<불량 국가: 미국의 세계지배와 힘의 논리> 노엄 촘스키 두레 2001

<여론 조작: 매스미디어의 정치경제학> 노엄 촘스키 에코리브르 2006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노엄 촘스키 시대의창 2002

<촘스키, 9.11: 뉴욕 테러와 미국의 무력대응에 대한 비판과 분석> 노엄 촘스키 김영사 2001

<남자의 탄생> 전인권 푸른숲 2003

<대통령들의 초상> 이병주 서당 1991

<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 신용구 2000

<박정희 평전: 박정희의 정치사상과 행동에 관한 전기적 연구> 전인권 2006

<비극의 현대 지도자> 서중석 성균관대 2002

<비주류 역사> 마이클 파렌티 녹두 2003

<히틀러의 정신분석> 월터 랑거 솔 1999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츠바이크 분도 1977

<엘리자베스와 에섹스> 리튼 스트래치 나남 1999

<영원한 제국> 이인화 세계사 1993

<이상한 패배: 1940년의 종언> 마르크 블로크 까치 2002

<정치가 정조> 박현모 푸른역사 2001

<칼의 노래> 김훈 생각의나무 2001

<한국사로 읽느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김춘추에서 노무현까지> 이덕일 2005

<개빌독재와 박정희 시대: 우리 시대의 전치경제적 기원> 김삼수 창비 2003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르네 지라르 문학과지성 2004

<나치시대의 일상사: 순응, 저항, 인종주의> 테틀레프 포이케르트 개마고원 2003

<대중독재: 강제와 동의 사이에서> 임지현 책세상 2004

<로마 제국의 노예와 주인: 사회적 통제에 관한 연구> 브래들리 신서원 2001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전재호 2000

<전체주의> 샤피로 삼성미술문화 1971

<조봉암 연구> 박태균 1995

<조봉암과 1950년대> 서중석 역사비평 1999

 

 

<파시즘> 마크 네오클레우스 이후 2002

 

[2016년 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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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 나를 찾아 떠나는 유창선의 인문학 동행
유창선 지음 / 새빛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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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내가 행복하지 못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 : 나를 찾아 떠나는 유창선의 인문학동행> 유창선 저, 2016. 3., 새빛

 

2016년 한국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시사평론가인 저자는 한국이 이미 ‘공동체로서의 기능이 정지된 사회’라고 진단한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직장이 변변치 않다는 이유로, 너무 정직하게만 살았다는 이유로 많은 한국인들이 좌절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오랫동안 OECD 국가 중 출산률과 자살률이 1위를 달리는 상태와 무관하지 않다. 한마디로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사회라는 공동체에서 희망을 잃었기 때문이고, 그 공동체가 젊은 세대에게 미래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인터넷방송과 팟캐스트에서는 특정 정파나 정치인의 편에 서 있는 증오와 저주의 언어들이 쏟아지고 있고, 그 우물 안에 모인 마니아들은 열광하곤 한다. 이 같은 광경 그 어디에도 인간에 대한 예의와 사랑은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의 고통을 끊어내기 위해 밀알이 되는 진보의 숭고함이나 품격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진보의 숭고한 가치가 자리하고 있어야 할 머릿속에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에 대한 완고한 집착만이 가득 차 있다. 넓은 세상의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들의 곁을 떠나간다. 다른 사람들과는 소통하지도, 정서를 공유하지도 못한 채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 진보의 자폐증이다.”(128쪽)

 

직업이 정치평론가였던 저자는 정치에 대한 기대도 접은 듯 보인다. 정치를 포기할 수는 없지만, 정치에 목을 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2008년 이명박-새누리당 정권이 집권한 이후 합리적이지 않은 이유로 방송과 뉴스에서 배제되었다. 그리고 2013년 박근혜-새누리당 정권이 등장한 이후로는 저자뿐 아니라 야권 성향이거나 중립적인 정치평론가들마저 베제되어 버렸다. 정치적인 경쟁 대상의 존재마저 부정하고 국민들의 시야에서 제거하려는 전근대적인, 70~80년대 군사독재정권 방식의 ‘정치 아닌 정치’가 다시 무덤 속에서 부활한 셈이다. 

방송과 뉴스에서 밀려난 이후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인터넷 소셜스페이스 공간에서 활동하며 박근혜 정권을 견디던 저자를 더욱 지치고 좌절하게 만든 것은 한국정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욕망의 쟁투’였다. 그 쟁투 중 특히 여야간의 대결뿐 아니라 야권과 진보진영 내부에서 벌어지는 쟁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삶’과 ‘사람’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숨기지 않고 말을 해도 된다면, 우리의 앞날에 대한 나의 전망은 비관적이다. 생존과 욕망에 눈멀지 않아도 되는 착한 세상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힘든 삶이 크게 달라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기대했던 정치는 우리를 구원해줄 수 없었다. 정치의 세계 자체가 욕망의 덩어리였기에,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파벌 간의 쟁투는 우리의 기대를 번번이 배신하곤 했다. 그래도 우리가 정치를 포기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목을 매고 운명을 위탁한다면 우리는 너무 비루해진다. 변할 수 없는 진실은, 우리의 삶은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메시아는 없다.”(5쪽)

 

저자는 세상을 사는 것이 원래부터 힘든 일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말한다. 생존과 욕망에 눈멀지 않아도 되는 착한 세상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힘든 삶이 크게 달라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임을 저자는 숨기지 않고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어려울수록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 나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이 저자가 하고 싶은 얘기였다.

정치보다도, 어떤 이념보다도 우선해야 할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그를 위해 우리는 더 넓고 깊어져야 한다는 것, 저자가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것이다. 이 책의 키워드는 사람, 사랑,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개인적 삶에서든 사회적 삶에서든 쉬운 삶은 없다. 세상도 하루아 침에 바뀌는 것은 없다. 이 시대의 거대한 벽이 돌멩이 몇 개 맞아 해체되거나 재구성되는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세상을 더 낫게 변화시키는 일은 원래 어려웠던 것이고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려워도 더 나은 삶과 세상에 대한 지치지 않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가능성 여부를 떠나 그 길에 인간으로서 우리의 자존감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에 상관없이 자기의 힘을 키우고 신뢰하며 살아갈 때 삶의 지구력이라는 것이 가능해 질 수 있다."

"한번에 바뀌는 역사는 없다. 희망이 아니라 나 자신을 믿어야 지치지 않고 그 길에 서 있을 수 있다. 산 정상이 너무 높아 보인다면 아득한 그곳을 보며 오르지 말고, 한발 한발 내딛는 내 발을 보며 오르라. 가끔은 내려가고 싶은 충동을 견뎌내며 땀 흘려 오르다보면 어느덧 가고자 했던 그 곳에 서 있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240쪽)

 

삶이 힘들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지금 이것이 내가 원했던 삶인가? 이렇게 사는 게 인간답게 살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해 저자가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 준다. 

그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시대에 어떻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지 함께 손을 잡고 고민하고 싶어 한다. 끝없이 강요받는 경쟁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잃어 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라 말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돌아본다는 것은 밀실 속으로의 도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배려를 통해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갈 때,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과 손잡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람들이 재산과 명성을 얻는 데는 몰두하면서도 자기 내면의 영혼을 돌보는데 소홀한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자기 영혼을 돌보지 않는 모습이 반드시 이기적이거나 탐욕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자기보다 사회를 우선하는 이타적 삶을 사는 사람들 가운데도 자기 영혼을 돌보지 않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세상을 위해 이타적 삶을 살면서도 정작 자신의 영혼은 피폐해지고 스스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들 말이다.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느라 그렇다고 설명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좋은 삶이라 하기는 어렵다. 내가 행복하지 못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는가"(16쪽)

 

저자는 오랫동안 정치평론가 생활을 하면서 정치적 상황에 따라 자신의 활동이 좌우되는 일을 많이 겪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외부에 의해 휘둘리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삶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그 생각들을 써내려갔다고 말한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는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에는 우리 삶의 고민이 고전의 대가들과 함께 펼쳐져 있다. 소크라테스와 니체와 톨스토이와 고흐가 자신의 삶에서 느꼈던 고통과 번민이 오늘 우리의 고민과 손을 잡으며 잃어버린 자신을 찾도록 도와준다. 철학을 우리 삶의 울타리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는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느냐만 중요하게 생각했던 독자들의 삶을 반성하게 한다.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저자의 독서량이 엄청나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정치평론을 하면서 언제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책을, 그것도 자기 것으로 깊이 있게 읽어냈을까 놀라게 될 정도다. 독자들은 이 책 한 권으로 고전 100권의 힘을 그대로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부터 칸트와 니체를 거쳐 푸코와 데리다에 이르는 철학, 소포클레스와 오비디우스에서 시작하여 단테,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카프카, 카뮈에 이르는 문학, 그리고 다윈과 윌슨, 도킨스의 과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수많은 통찰들이 이 한 권의 책에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독자 대신 책을 읽어주고 요약해주는 것이 아니라 책, 철학, 인문학을 공부하는 진정한 목적이다.

"우리가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으면서 공부하는 이유는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이다. 마음속에 울림이 생기면 사람은 생각이 변화하게 된다. 생각의 변화는 다시 내 삶의 변화로 이어질 때 의미를 갖는다. 머리만 큰 사람이 아니라 다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어 뚜벅뚜벅 걸을 수 있어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내가 연결되어 있는 세계의 변화로 이어질 때 나의 변화는 비로소 완성된다. 생각이 사람을 바꾸고, 그 사람은 다시 세상을 바꾼다.”(248쪽)

 

‘나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동행’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저자가 인문 고전 공부를 통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찾는 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일반 독자들이 저자의 공부를 따라가기에는 무척이나 벅차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라는 한 권의 책 속에 저자 자신이 회의하고 고민하는 여러 개념들-인간, 삶, 탐욕, 불안, 행복, 진보, 자유의지, 자존감, 분노, 부활, 이념, 혁명, 고통, 부끄러움, 죽음, 자살, 용기, 희망, 연대, 도덕 등-을 설명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부터 현대 서구의 철학자들의 사상과 이론이 등장한다. 철학자 이외에 소설가와 시인의 작품의 일부가 소개되기도 한다. 그 수가 무려 백 명이 넘는 것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그렇게 많은 철학자와 인문학자가 동원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공부할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따라주지 않는 일반 독자들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그런 세상 역시 ‘불공평’할 것이다. 철학자나 소설가의 작품 하나를 이해하기에도 보통의 시민들은 힘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 인상 깊은 문장 -

 

"절제되지 않은 분노의 해악이 역사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도 과잉 분노가 만들어내는 거칠은 인간 심성 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분노를 다스리는 주인이 되지 못한 채 그 노예가 되는 경우를 말이다.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분노하여 세상을 바꿔 야 한다는 '진보적인'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런 모습은 흔하게 나타난다. 중요한 정치적 고비 때마다 진보라는 마을의 사람들 내부에서 나타났던 내부에서 나타났던 민낯은 이 사 회에서 진보가 어째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해왔던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권력을 향한 증오의 언어들이야 정치적 정 당방위라 설명될 수도 있겠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언어의 총질 또한 그에 못지않게 격하다. 

정치인 지지충들 사이에서는 정치인들보다 더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언어들이 난무한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을 비판하는 행위는 악으로 간주되고, 내가 지지하는 인물만이 무오류의 절대선이다. 이들에게는 '나의 것은 선, 나와 다른 것은 악’이다."(127~128쪽)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은 큰 불행이다. 인간으로서 갖고 태어난 그 엄청난 능력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죽어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생각의 능력을 갖게 되었건만, 정작 내가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채 묻혀두고 있다면 그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14쪽)

 

"자신을 돌본다는 것이 자신의 사적인 욕망을 키우고 그것에 매달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언제나 자기가 서 있는 곳을 생각하며 돌아보는 노력은 소중하다. 

세상을 바꿔야한다며 정치적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도 정작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황폐화된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삶에서는 세상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기운이 나오기 어렵다."(17쪽)

 

[ 2016년 7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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