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성의 공동체
이병창 지음 / 먼빛으로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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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 [서평] 21세기 사회변혁을 위한 철학적 무기 <자주성의 공동체>

이병창 저, 2071. 3., 430쪽, 먼빛으로


 

이병창 전 교수는 동서양 철학을 함께 연구한다. 국내에 드문 경우라 한다. 특히 그는 대다수 철학계 학자들과 달리 현실과 유리된 철학을 연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현실 세계’에 나서는 제반 문제들을 철학적으로 규명하려 노력한다. 그만큼 마음이 따뜻한 철학자다. 또한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후에 오히려 본격적으로 ‘현실’에 대한 철학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이 교수는 <청년이 묻고 철학자가 답하다>(2015 도서출판 말)와 <현대철학 아는 척하기>(2016 팬덤북스)에 이어 2017년에 이 책 <자주성의 공동체>를 출간했다. 대학에서 못다한 철학 연구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출간한 책과 마찬가지로 <자주성의 공동체> 역시 연구의 출발점은 현실이었다. 청년들이 ‘헬조선’이라고 자조할 정도로 한국의 사회경제적인 현실은 처참하다. 그 처참한 현실의 실체는 ‘빈익빈부익부’라 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분열, 자산과 소득의 ‘빈부격차’다. 이 교수는 사회경제적인 분열 못지 않게 마음의 분열 즉, 정치사상적인 분열도 심각하다고 진단한다.

“나는 최근 마음이 아팠다. 우리 사회의 분열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경제적인 양극화로 등장한 사회적 분열이다. 그에 못지않게 정치 영역에서도 분열이 극심하다. 보수도 진보도 어김없이 분열을 겪고 있다. 분열은 창조의 원천이 되기보다 극심한 파쟁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이런 분열이 어느덧 우리 마음속까지 파고든 것이 아닌가 걱정한다.”

““분열의 원인은 무엇인가? 분열의 끝은 도대체 어디일까? 나는 스스로 물어보았다. 어떻게 하면 분열을 극복할 수 있을까? 분열의 출발점은 신자유주의라는 사회 체제에 있을 것이다. 분열은 신자유주의 사회의 특징인 파편화 때문이다.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현실을 극복하려면 먼저 우리 마음속의 분열부터 극복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9쪽)


 

이병창 교수는 정치사상적 분열의 원인을 탐구했다. <자주성의 공동체>는 한국사회의 정치사상적 분열의 원인을 철학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연구과정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다.

그는 한국인들의 마음이 분열된 원인을 21세기 한국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에서 찾았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를 극복하고 미래의 한국사회를 위한 철학적 방향을 모색한다. 그가 최근 연구하는 철학의 방향은 책의 제목 그대로 ‘자주성의 공동체’ 철학이다.


 

<자주성의 공동체>는 1부 ‘자주성의 의미’에서 이 교수는 우선 자주적 의지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여기서 자주성의 정치적 의미와 윤리적 의지가 구분되며, 자주적 의지를 욕망과 대비하여 서술한다. 욕망과 자주적 의지의 대비 속에서 자유주의의 자유 개념이 비판된다.

이어서 2부 ‘자주성의 역사적 형태’에서는 자주적 의지의 다양한 역사적 형태가 다루어진다. 여기서 운명과 의무감(자율성) 개념 그리고 낭만주의적 양심(자발성) 개념이 다루어지면서 그 한계가 지적된다.

마지막으로 3부 ‘자주성의 공동체’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자주적 의지로서 사랑의 정신을 살펴본다. 바울의 사상 그리고 동학의 사상이 다루어진다. 마지막으로 이런 종교적 공동체 정신을 극복하고 자주성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학적인 길, 유물론적인 길을 모색한다.


 

2017년 현재 한국사회에 가장 만연되어 있는 철학 사조는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라 할 수 있다. 미국 등 서구 주류에서 시작되어 전세계로 확대된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1990년대에 한국으로 건너왔다. 한국의 학계와 정치권뿐 아니라 언론계와 경제계 그리고 법조계와 시민사회단체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 전역을 점령했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에 대한 자세한 철학적 이론은 <청년이 묻고 철학자가 답하다>와 <현대철학 아는 척하기>를 참고하면 좋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의 핵심 개념은 ‘자유’와 ‘욕망’, ‘선택’과 합의’, ‘보편’과 ‘평화’ 등이다.


 

이병창 교수는 먼저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의 핵심 개념과 주요 논리를 비판한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지배했던 1980년대 중반 이후 30년 간 미국과 서구사회는 지구 전역에 폭력과 침략전쟁, 총기난사와 테러, 의심과 배제, 이주민과 갈등을 증폭시켰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자유’를 입에 달고 다니지만, 그 자유는 진짜 자유가 아니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에 그친다. 그 결과 자유는 다만 상상에만 머물며 실제로 의지를 지배하는 것은 ‘욕망의 힘’이다. 즉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욕망의 제한 없는 해방’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발생적인 힘이지만 외적인 자극이나 내적인 충동에 따라 끝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사회적 현실이 이리저리 변동함에 따라서 욕망도 춤추니, 개인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가조차 종잡을 수 없을 때가 많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기초하여 ‘합의의 공정성’을 소리 높여 떠들지만, 공정성이란 말로만 그칠 뿐이다. 공정성이라는 것은 자기의 욕망을 감추는 구실에 불과하다. 서로 불신하는 가운데 어제 합의했던 것도 오늘 깨어지는 일이 다반사이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평화’와 ‘상호존중’이라는 아름다운 옷을 걸치고 다니지만 그것은 ‘폭력’을 감추는 장식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서로를 의심하고 서로를 배제하면서 급기야 폭력을 행사하니, 미국사회에서 난무한 무차별 총기 난사가 이를 입증한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이 시대, ‘보편적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는 제국주의적 침략이 모든 폭력의 원조다. 이로부터 전쟁 이주민과 노동 이민에 대한 유럽 인종주의자의 ‘테러’가 나온다.”(10쪽)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환영하고 편승했던 서구의 철학자들은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폭력과 전쟁과 테러만을 가져오자 이를 극복하려고 시도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1세기에 등장한 들뢰즈와 데리다, 라캉과 지젝 등이 제기한 ‘생명력’의 철학 개념이다. 그러나 이병창 교수는 ‘생명력’ 개념을 비판한다. ‘생명력’ 개념이 수동적인 의지인 ‘정념’의 수준에 머무르며, ‘개인’ 차원의 의지에 그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한때 억압과 차별을 제거하자는 아름다운 말이었으나 신자유주의 시대, 현실의 파편화가 극단화되자 자기의 내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자유는 말뿐이었으며 실제로는 욕망이었다. 그 결과 전 세계에 걸쳐서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를 극복하려는 철학적 시도가 등장했다.

최근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의 대안으로서 20세기 초 모더니즘으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이 등장했다. 20세기 초 모더니즘은 근대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 과학과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관과 감수성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 결과 본질을 직관하는 계시, 꿈, 무의식, 환상 등에 기초한 다양한 모더니즘이 발전했다.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는 들뢰즈의 철학과 라캉-지젝의 철학은 모더니즘의 부활이라 간주할 만하다.

대표적으로 들뢰즈의 철학을 보자. 거슬러 올라가자면 19세기 초 셸링은 칸트의 의무 개념을 극복하고자 생명력 개념을 제시했다. 칸트는 도덕법칙을 그 자체로서 따르는 의지를 순수의 지라 했다. 그는 순수의지(자유의지)를 의무 또는 자율적 의지라고 보았다. 그러나 순수의 지는 강제적이라는 데 한계가 있었다. 셸링은 칸트를 비판하면서 순수의지 대신 양심의 개념을 제시했다. 양심은 도덕법칙을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이며 동시에 도덕법칙을 즉각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양심이 인간에게 가능한가가 문제다.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셸링은 미분 기하학에 나오는 미분적(differential) 힘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생명체에도 미분적 힘이 내재하며 이를 ‘생명력’이라 했다. 생명력은 스스로 실행하는 자발적 능력이다. 셸링은 이를 통해 양심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셸링이 제시한 생명력 개념은 20세기 초 베르그송의 철학에 영향을 주었고 20세기 후반에는 들뢰즈의 철학을 통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부활했다. 들뢰즈 역시 생명에 내재하는 미분적 힘을 핵심적인 개념으로 삼는다. 생명력은 사유에 머무르지 않고 자발적으로 실행될 수 있으므로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의 자유 개념을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들뢰즈 철학 연구자가 부쩍 많아졌다.

그러나 생명력 개념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와 그로부터 유래된 분열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점을 회의한다. 왜냐하면 생명력 개념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력 개념은 수동적인 의지인 ‘정념’의 수준에 머무르며, ‘개인’ 차원의 의지에 그친다. 정념의 수준에 머무르기에 생명력은 자기도 어쩔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혀 행동한다. 또한 생명력을 아무리 고양하더라도 개인의 차원에 그치는 한, 개인의 힘으로 시대의 어둠을 극복할 수는 없다. 개인의 생명력은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서 절망과 도피 또는 자학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11~12쪽)


 

이병창 교수는 자유주의의 문제는 ‘자유’라는 개념이 철저하지 못한 데 있었으니,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자유’라는 개념을 더 철저하게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이 교수는 ‘자주성’이라는 개념을 발견하게 되었다.

‘욕망의 선택’인 ‘자유’는 ‘도덕적 결과주의’에 빠지지만 ‘행위를 실행하는 즐거움’이 목적인 자주적 의지는 ‘도덕적 행위주의’에 기반한다.


 

“자유는 욕망 가운데 가치 있는 것을 자기의 것으로 선택한다. 그러나 자유는 마음속의 가능성이다. ‘자주적 의지’는 마음 속에 선택된 욕망 즉 ‘가치’를 실제 행위로 실행하려는 의지를 말한다.

자주적 의지의 방식은 욕망의 방식과 다르다. 자유주의가 결국 복귀하고 마는 욕망은 충동적이다. 즉 욕망은 항상 최종 결과를 얻는 것 또는 이를 통해 얻는 쾌락을 얻는 것이 목적이다. 욕망은 결과를 향해 충동적으로 달려간다. 이와 달리 자주적 의지는 자신이 선택한 가치에 충실하고자 한다. 자주적 의지는 가치에 충실한 행위를 통해 즐거움을 얻는다. 결과의 만족이 아니라 ‘행위를 실행하는 즐거움’이 자주적 의지의 목적이다. 욕망은 ‘도덕적 결과주의'라 할 수 있다. 무슨 짓을 해서든지 결과만 도달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자주적 의지는 ‘도덕적 행위주의'라 볼 수 있다. 행위를 하는 과정, 하나하나의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13쪽)


 

이병창 교수는 넓게 보면 칸트의 ‘순수의지’ 개념이나 셸링의 ‘생명력’ 개념도 자주성의 한 형태라고 설명한다. 모두 결과보다는 행위를 강조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수의지나 생명력은 개인적 차원의 의지, 정념에 머무르는 의지이다. 이런 의지로는 자유주의의 자유 개념을 극복하기에 한계가 있으므로 이 교수는 자주성의 더 고차적인 형태를 모색한다.

그는 이런 더 고차적인 자주성은 정념을 극복하는 ‘능동적 의지’이어야 하며 또한 개인의 의지를 넘어선 ‘공동체 정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오직 공동체의 힘을 통해서만 역사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지렛대의 받침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념을 넘어선 능동적 의지만이 흔들림이 없이 새로운 역사의 이념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공동체 정신의 단초를 기독교의 ‘성령’의 개념과 동학사상의 ‘모심’의 개념에서 찾았다.


 

“이런 공동체 정신은 우선 기독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의 사랑 정신은 종교적 사유에 지배되고 있다. 종교적 사유의 기초는 창조주라는 신 개념이다. 마르키온은 이런 창조주 개념을 부정하면서 그에 대치되는 ‘성령’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이를 통해 기독교의 사랑 정신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바울은 율법을 비판한다. 율법은 도덕적 규범을 실행하는 데서 ‘훈육’의 방식을 사용한다. 훈육은 행위를 처벌하거나 보상해서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방식이다. 훈육이 의존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나 훈육을 강화할수록 욕망도 강화하고 강화된 욕망은 도덕을 더욱 자주 위반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이 오히려 죄의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반면 바울은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믿음이란 곧 ‘성령과의 합일’이다. 성령이 사랑의 정신이므로 믿음이란 사랑의 정신을 온몸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가 죽음으로 실천한 사랑의 정신을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구원하고자 했다.

사랑은 흔히 받는 것이 아니고 주는 것이라 말한다. 사랑의 정신은 무엇이든 스스로 실행하는 가운데서 즐거움을 얻는 정신이다. 이런 점에서 사랑의 정신은 자주적인 의지이며, 자발적인 생명력보다 더 탁월한 능동적인 자주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율성이나 자발성은 어디까 지나 개인의 의지에 머무르는 것이다. 반면 사랑의 정신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정신은 흔히 말하는 정념의 사랑과 구별된다. 정념의 사랑은 대가를 기대하는 사랑이며 한 개인, 한 가족, 한 민족에 대한 사랑에 그친다. 그러나 성령의 정신인 사랑은 한 개인을 넘어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공동체 정신으로 나타난다. 사랑의 정신은 자신이 곧 공동체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공동체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짊어지는 정신이다.

자주적 의지의 최고 형태는 ‘사랑의 정신’이다. 사랑의 정신을 통해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다. 이런 사랑의 정신은 사도 바울의 삶 속에서 구현되어 있다. 사도 바울의 삶은 한마디로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시도였다. 그가 「로마서」를 쓴 이유는 로마 교회에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고린도서」를 쓴 이유도 고린도 교회에 베드로파와 바울파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었다.”(14~15쪽)


 

이병창 교수는 사도 바울의 사상을 통해 동학사상을 재발견하게 된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새로운 자주적 공동체 정신을 열어 나가고 있었다. 바울의 ‘믿음’ 개념은 동학사상에 ‘수심정기(守心正氣)’라는 개념으로 나타난다. 바울의 ‘사랑의 정신’은 동학사상에서 모든 사람을 천주로 모시라는 ‘모심의 사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바울의 사상과 동학사상에 차이도 있다. 바울의 믿음이 ‘성령과의 합일’을 우선시하는 것이라면 동학사상에서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이웃을 통해 천주를 발견한다. 전자가 수직적 관점이라면 후자는 수평적 관점이다.

이 교수는 그렇지만 사도 바울의 사랑 정신이나 동학사상에서 모심의 정신은 역사적으로 망각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렇게 망각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교수는 ‘성령과의 합일’ 또는 ‘수심정기’라는 믿음 개념이 수동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믿음 개념은 다시 창조주 개념을 불러들인다. 이 신은 처벌하고 구원하는 신이니 이를 통해 율법과 구원이라는 개념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더구나 기독교의 사랑이나 동학사상에서 모심은 개인적인 차원에 그치고, 사회적 실천을 결여한다. 기독교에서 사회적 차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너무나도 모호하고 비역사적이다. 동학의 ‘후천개벽(後天開闢)’이라는 개념 역시 신비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공동체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창조주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능동적으로 나오는 것에 의존해야 한다. 또한 사랑의 정신으로 결합할 공동체는 막연한 이웃 사랑이 아니라 현실적인 역사 속에서 객관적으로 실현되는 역사의 이념을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가능성은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 이 글이 목표로 하는 지점은 바로 이런 물음에 있다.”(16쪽)

이병창 교수는 결론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재해석함을 통해 그런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지만, 마르크스는 역사과학을 통해 객관적인 역사의 법칙을 발견했다. 이런 역사 법칙에 기초하여 그는 새로운 역사의 이념을 발견했다. 그것은 ‘프롤 레타리아의 해방’이라는 이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실천의 문제에 부딪혔다. 마르크스주의도 ‘욕망’과 ‘자유에만’ 기초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는 인간의 욕망에 기초하여 역사의 이념을 실천하려 했다. 그것이 레닌의 ‘전위(前衛) 정당’ 개념이며, 이 정당 개념은 부르주아 정당을 모방했다. 하지만 이런 전위 정당은 역사적 실천을 통해 드러났듯이 종파주의와 관료주의 때문에 몰락하고 말았다. 이런 종파주의와 관료주의는 아방가드르 정당이 욕망에 기초하고 유기적인 구성을 강조하는 한 불가피한 결과였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를 역사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실천의 원리가 나와야 했다. 이는 과학적으로 인식된 역사의 이념을 실현하는 새로운 형태의 이념 공동체를 의미한다. 어디에서 이런 실천의 원리를 찾을 수 있을까?

“마르크스주의에서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욕망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런 욕망이 사회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가장 근본적인 주장이 아닌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인간론은 자주적 공동체 정신과 충돌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에 대해서 이병창 교수는 세 가지 차원에서 대답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자주적 공동체 정신과 결합했던 역사적 실천 사례와 자주성의 이념 공동체에 이르는 이론적인 가능성 그리고 ‘유적 존재’라는 마르크스의 인간론이다.

“하나는 이미 역사적인 실천을 통해 마르크스주의가 자주적 공동체 정신과 결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노농혁명군인 ‘홍군(红军)’이 ‘만리장정(萬里長程)’에서 보여주었다. 1930년대 동만에서 전개된 항일 유격대의 투쟁 역시 이런 자주적 공동체 정신을 입증한다.

문제는 그런 자주성의 이념 공동체에 이르는 이론적인 가능성이다. 다행히 헤겔의 절대정신 개념이 이런 가능성을 밝혀 주었다. 헤겔은 주체라는개념을 통해 개인적인 의지 속에 이미 공동체 정신이 내재한다고 보면서 이를 ‘절대정신(絶對情神, absoluter Geist)’으로 규정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성령 개념에 해당된다. 헤겔은 절대정신이 소외되면서 신 개념이 출현한다고 했다.

세 번째는 마르크스 역시 청년기에 헤겔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으니 그의 인간론 가운데서도 헤겔의 절대정신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인간론 가운데 ‘유적(類的) 존재(Gattungswesen)’라는 개념으로 등장했다. 마르크스에게 두 인간론이 있다. 하나는 사회관계 속에서 욕망하는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유적 존재 즉 ‘자주적 공동체 정신’이다. 이 두 인간론은 하나로 통합된다.”(17~18쪽)


 

이병창 교수는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는 데서 ‘역사 인식’의 측면과 ‘역사적 실천’의 측면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욕망하는 인간’이라는 개념과 ‘자주적 공동체 정신을 지닌 인간’ 개념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 인식의 측면에서는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다. 역사를 만드는 다수 대중은 욕망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이념을 실현하는 혁명적 실천은 이념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은 자각된 소수이며, 이들은 자주적 공동체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 이런 자주적 공동체 정신에서 나오는 이념 공동체만이 역사의 이념을 실현할 힘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이론적 인식에서 인간론과 실천적 차원에서 인간론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런 구분을 통해 ‘욕망하는 인간’이라는 개념과 ‘자주적 공동체 정신을 지닌 인간’ 개념이 공존할 수 있으며, 이론적으로 인식된 역사적 이념과 실천적으로 파악된 자주적 공동체 정신이 결합될 수 있다.”


 

이병창 교수는 마지막으로 인간이 자주적 공동체 정신에 이르는 길은 역사적 실천을 통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진정으로 갈망하는 사람이 ‘인민에 대한 믿음’을 통해 자주적 공동체 정신을 얻을 수 있으며, ‘인민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짊어지는 혁명가가 탄생한다.

“진정으로 절망한 자만이 간절하 게 바란다. 이런 간절한 바람은 창조주나 메시아의 힘에 의존하게 하지 않는다. 이 간절한 바람은 오직 ‘인민의 힘’을 철저하게 믿게 한다. 인민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사랑이라는 자주적 공동체 정신을 얻는다. 바울이 사도는 신 앞에서 무한 책임을 지는 존재라고 주장하듯, 혁명가 역시 인민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짊어지는 존재이다.”(18쪽)


 

1990년대 초반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지면서 전세계의 ‘가진 것 없는’ 대다수 인민들의 희망도 사라지는 듯 했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체제의 실패가 노동자와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위한 ‘혁명적 철학’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실패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세기에 태동한 자본주의 체제가 21세기 자본주의 체제와 다르듯이, 19세기 중반에 마르크스에 의해 태어나고 20세기 초반에 레닌에 의해 상종가를 쳤던 사회주의 이념과 체제를 그대로 고수한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도 사회체제의 역사에서도 적합하지 않다.

소련과 동구뿐 아니라 현존하는 사회주의 체제와 이념(사회주의를 표방하거나 사회주의를 추구하거나 관계없이)은 과거의 혁명 사상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면 안된다.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모택동주의, 게바라주의, 볼리바리아니즘은 당시 시대와 현실에 적합할 수 있지만, 변화하는 인류와 사회경제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자주성의 공동체>는 새로운 사상을 찾지 못해 혼란스럽과 좌절하는 철학자들과 혁명가들에게 작은 선물이 될 수 있다. 그만큼 마르크스와 레닌, 모택동과 체 게바라 이후 세상과 사회를 바꿀, 소외되고 빼앗긴 전세계 인민들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는 혁명 사상을 위해 이병창 교수의 ‘자주성의 철학’은 시사하는 점이 많을 수 있다. 사회변혁을 위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자주성의 공동체>는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출발했지만 보편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다. 이병창 교수는 국내 철학사상이나 철학자만 다룬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말 그대로 ‘철학도서’이다. 따라서 독자들이 철학이라면 떠오르는 ‘개념’과 ‘이론’과 ‘철학자’와 각종 ‘철학사조’를 상당수 다룬다. 따라서 평소 철학에 관심이 없었거나 기초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는 저자의 문제제기와 논리를 따라잡기가 매우 어렵다.

필자 역시 이미 이병창 교수의 저서를 여러 권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각 책의 논리와 주제의식과 철학이론을 따라잡기가 여의치 않다. 여러 번 읽어야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자주성의 공동체> 서문을 읽어보면, 이병창 교수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포스트모던 자유주의 비판에서 자주성의 공동체 철학에 이르는 논리적 과정이 잘 요약하여 정리되어 있다. 서문과 비교하면서 본문을 읽으면 철학적 논의 비판의 중심을 잡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주성의 공동체>에 대한 필자의 세부적인 학습내용은 http://blog.daum.net/hy2oxy/8693661 를 참고


 

[2017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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