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 - 제국의 거짓말, 위안부의 진실
손종업 외 지음 / 도서출판 말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 [서평] 손종업 외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를 읽고 / 2016. 5, 430쪽, 도서출판 말


2013년에 출간된 『제국의 위안부』와 관련하여, 2014년 6월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9명이 박유하 교수를 명예훼손 혐의로 한국 검찰에 고소했고, 2015년 11월 18일에 박유하 교수가 불구속 기소되었다.
또한 피해자들은 비슷한 시기에 법원에 출판물배포금지가처분을 신청했고, 법원은 2015년 2월 34곳의 문장의 삭제를 조건으로 출판물 간행을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대해 국내의 일부 학계와 언론계로부터 학문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고 2015년 11월 26일에는 일본과 미국의 지식인 54명이 항의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필자 역시 원칙적으로 연구자의 저작에 대해 법정에서 형사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단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원칙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검찰 기소가 『제국의 위안부』로 인해 심대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의해 이 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 기소를 평가하는 데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문과 언론의 자유가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은 그 취지와 전제가 '권력에 의한 탄압', '소수를 향한 다수에 의한 폭력과 마녀사냥', '공익과 진리를 위한 추구' 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70~80년 전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힘도 없이 일본 제국의 반인륜적 범죄에 희생당해야 했고 한국의 친일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해야 했던 피해자들이 『제국의 위안부』에 의해 모욕당하고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소송을 낸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학문과 언론의 자유'에서 벗어나는 예외일 것이다. '자유'란 적어도 다른 이들에게, 특히 약자와 피해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자 기본일테니까.

『제국의 위안부』는 과연 위안부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나? 『제국의 위안부』를 직접 읽거나 비판서 등 관련 서적을 읽지 않은 채 섣불리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책 한 권이 아니라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국내외적인 상황과 맥락, 저자인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를 출간한 전후에 보여온 학문적인 성과와 언행을 살펴야만이 종합적인 판단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이 책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의 부록에는 2015년 2월 출판물배포금지가처분 신청에 대한 법원의 판결문과 삭제된 34곳의 문장이 삽입되어 있다.(첨부 사진 참조) 저자들의 주장이나 논리가 아니라 공개된 법원의 자료이다.
법원이 삭제를 명령한 34곳의 문장은 박유하의 책 제목처럼 일본군위안부를 '제국의 위안부', 즉 일본제국을 위해 '애국'을 한 식민지 여성이며, 일본군들과 '동지적 관계'를 맺었고 그녀들이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온 게 아니라 다분히 '돈'을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또는 업자에게 속아서 따라나섰다고 규정했다. 그 문장들은 위안부 피해자분들에게 또다시 커다라 심적 고통을 안겨주었음이 분명하다.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에서 저자들은 몇 가지 방향에서 『제국의 위안부』와 박유하를 비판한다. 가장 큰 문제점은 이번 일련의 사태가 문제의 본질을 떠나 학문과 표현의 자유로 초점이 옮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일본 국가기관의 관여 아래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연행된 여성들에게 '성노예'를 강요한 극히 반인도적이고 추악한 범죄행위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 그 범죄행위로 인해 참으로 심각한 인권 침해를 당한 피해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커다란 아픔을 견디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그 범죄행위에 대해 일본은 지금 국가적 차원에서 사죄와 배상을 하고 역사교육 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법적 상식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1965년에는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논의조차 되지 않았던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1965년에 해결되었다고 강변하는 부조리를 고집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그 부조리에 맞서 1,200회 이상 매주 수요시위를 개최 있고 지친 노구를 이끌고 전 세계를 돌며 경의로운 해결을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필자는 이 엄중한 사실들을 도외시한 연구는 결코 학문적일수 없다고 믿는다.

저자들은 『제국의 위안부』가 사실 관계, 논점의 이해, 논거의 제시, 서술의 균형 논리의 일관성 등 여러 측면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책이라고 평가한다.
기존의 연구 성과와 국제사회의 법적 상식에 의해 확인된 것처럼,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책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위안부』는 책임의 주체가 민간업자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법적인 쟁점들에 대한 이해의 수준은 매우 낮은 데 반해 주장의 수위는 지나치게 높다.
충분한 논거의 제시 없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제국에 대한 애국"을 위해 "군인과 동 지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규정하는 것은 '피해의 구제를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또 하나의 커다란 아픔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저자들은 『제국의 위안부』가 충분한 학문적 뒷받침 없는 서술로 피해자들에게 아픔을 주는 책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일본의 지식사회가 '연구의 다양성'을 전면에 내세워 『제국의 위안부』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과연 그러한 평가가 엄밀한 학문적 검토를 거친 것인지 커다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저자들은 <제국의 변호인>이라는 책의 제목은 말 그대로 일본제국, 일본 정부, 일본군인을 변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는 형식적으로는 양측에 화해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늘상 일본정부, 일본제국의 편을 든다는 것이다.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로  이니치신문사에서 <아시아/태평양상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뒤 ‘(수상을)사퇴하지 않는 이유’를 밝히면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망명을 『제국의 위안부』가 대신 해내고 있는 셈”이라고 소감을 밝혔는데, 『제국의 위안부』를 읽다보면 박유하가 정신적으로 과거 현재의 일본국과 동지적 관계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제국의 변호인’인 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단지 박유하 개인에게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니다. 이 책은 박유하 너머에서 『제국의 위안부』에 갈채를 보내는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과 우익에게 그리고 한국 내 지식인들에게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
『제국의 위안부』가 전하는 메시지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성향을 보이는 지식인의 욕망, 요구와 딱 맞아떨어진다고 한다. 『제국의 위안부』를 심도 깊게 비판해온 정영환 준교수(메이지가쿠인대학)는 “일본의 논단이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예찬하는 현상은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지적 퇴락’의 종착점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 책이 일본 언론계에서 이토록 폭넓게 예찬 받은 것은 박유하 씨가 일본사회의 지식인의 욕망을 민감하게 감지하여 전전의 대일본제국의 책임 부정과 전후사의 수정이라는 두 가지 역사수정주의에 호소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의미에서 ‘제국의 위안부’ 현상이라는 것은 일본의 지식인, 언론계의 문제인 것이다.”(정영환)

이런 판단에 근거해 볼 때 일본의 ‘제국의 위안부 현상’은 의도적이고 정략적으로 조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박유하라는 여류작가, 여성교수한 명의 독특한 해석에 지지를 보내는 게 아니라, 일본 내 역사수정주의와 맥을 같이 하기에 극찬해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의 우익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핵심 주장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일본 우익의 ‘종군위안부’ 관련 핵심 슬로건은 “성노예는 거짓말이다”, “강제연행은 거짓말이다.”, “종군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다”라 할 수 있다.
최근 일본 각지에서 열리는 우익단체의 ‘종군위안부’ 관련 홍보전에서는 『제국의 위안부』에 아오는 말을 인용해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고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이때 단골로 인용하는 말이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는 ‘동지적 관계’라는 말이라 한다.

이처럼 일본 리버럴, 일본 우익이 제국의 위안부에 찬사를 보내고 상을 주는 현상에 대해서이 책에서는  「일본 리버럴 지식인은 왜 박유하를 지지할까」 (길윤형),「일본의 새로운 역사수정주의와 『제국의 위안부』 사태」 (김부자), 「위안부 문제와 학문의 폭력-식민주의와 헤이트 스피치」 (마에다 아키라) 등이 그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저자들은 『제국의 위안부』와 이 책을 둘러싼 국내외 움직임에 민감한 이유가 있다.
식민지근대화론, 국정교과서로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는 입장과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흐름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1919년) 법통성을 부정하고 새롭게 건국절(1948년)을 추진하는 세력과 전쟁범죄, 식민지 지배 책임을 회피하고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꾀하는 세력은 이미 내용적인 ‘화해’를 끝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조만간 한일군사동맹을 위해 어깨동무를 나란히 할 ‘동지적 관계’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화해’의 담론으로 포장하고, 표현의 자유로 띠를 두르고, 사상 검열 당한 피해자 흉내를 내지만 ‘제국의 위안부’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제국의 위안부’의 결정적 문제는 식민지 지배의 문제를 식민지 피해자가 아니고 제국의 눈, 가해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려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지식인들 역시 책의 부록에 "『제국의 위안부』 사태에 대한 입장 "을 담은 학자들처럼 뼈저리게 반성하고 노력해야 한다. 일본제국의 식민지강점과 친일파 정권의 한일협상,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거의 대다수 한국 지식인들은 그동안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위안부』와 박유하에 대한 사법부의 대응(?)에 대해 김규항, 김철, 장정일, 유시민, 금태섭, 홍세화, 류근, 고종석 등 190명의 교수, 문화예술인, 언론인들은 '학문의 자유'를 옹호하며 반대했지만, 위안부피해자들이 수요집회를 1,200회나 진행하는 동안 정작 그들이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공론화와 문제해결에 대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묻고 싶다. 소위 민주정부라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동안에도 수요집회는 계속되었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지식인사회에서 무관심 영역이지 않았나?

"끝으로 우리는 명예훼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와 고소라는 법적인 수단에까지 호소하시게 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을 깊이 되새기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거듭 상처를 주는 이러한 사태에 이르게 되기까지 우리의 고민과 노력이 과연 충분했는지 깊이 반성합니다 그리고 외교적·정치적·사회적 현실 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의의 여신의 저울이 진정 수평을 이루게 하는 그런 방식 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노력할 것을 다짐합 니다." 2015, 12.9.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 을 위해 활동하는 연구자와 활동가 일동(2차 성명) : 국내-김창록(경북대) 등 258명, 국외-마에다 아키라(도쿄조케이대학) 등 122명 [425쪽]

- 인상 깊은 문장 -

"박유하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의 편익을 추구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녀의 책이 어떤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가가 문제일 따름이다. 학문은 ‘해결책’이 아니라 ‘진실’ 또는 ‘사실’을 통해 기존의 패러다임과 맞서야 한다."(손종업, 37쪽)

"『제국의 위안부』를 옹호하면서도 그 주장의 파편만을 임의로 가져오는 글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일본군의 동지인 위안부’, ‘위안부의 기억을 왜곡하는 우리’라는 파편으로 그 책을 말하지 말라. “제국의 일원인 위안부-매춘을 만드는 국가구조-제국의 합법”이란 논리의 흐름과 “한국의 위안부 인식을 왜곡한 배후권력인 정대협”이라는 (박유하의) 전체 주장을 가져와서 그에 대해 항변하라."(김요섭, 69쪽)

"아베 신조 수상을 비롯한 정치가는 역사의 사실을 부정하고 개찬(改竄)하며 책임도피를 도모해 왔다. 또한 아우슈비츠의 거짓말에 해당하는 위안부 거짓말이나 남경대학살 거짓말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도, 대중 매체에서 도 표현의 자유란 이름하에 역사의 사실을 부정·개찬하고, (위안부) 피해자를 다시 모욕하면서 존엄의 회복을 방해하고 있다. 우익 정치가나 헤이트 단체뿐 아니라 일부 지식인들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마에다 아키라, 89쪽)

"박노자 오슬로국립대학 교수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북한 혹은 암묵적으로 중국에 맞서기 위해 한국이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한일 화해론의 근거가 된다면 굉장히 위험한 논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론을 논의하기에 앞서 한번쯤 곱씹어 봐야 할 지적이다. 그러나 이런 점까지 인식하고 발언하는 일본 내의 리버럴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데, 어쩌면 그 점이 일본 리버럴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일지도 모른다."(길윤형, 125~126)

"즉 박유하 씨의 ‘위안부’상은 일본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이 책이 조선인 ‘위안부’는 소녀도 성노예도 아니고, 일본인 병사와는 “‘같은 일본인’으로서 ‘동지적 관계’’를 가지는 ‘제국의 위안부’로, 지금까지 성노예로서의 ‘위안부’상을 ‘전면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새로움을 가장하면서, 내실은 하타 이쿠히코 씨의 ‘위안부’ 제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의 해석(=‘전지 공창시설론’)과 우에노 지즈코 씨의 피해자상의 해석(=‘모델 피해자론’)을 합체시켜, 일본군의 책임과 식민지 지배 책임을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적인 ‘위안부’ 담론이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김부자)

"이 책이 일본 언론계에서 이토록 폭넓게 예찬 받은 것은 박유하 씨가 일본사회의 지식인의 욕망을 민감하게 감지하여 전전의 대일본제국의 책임 부정과 전후사의 수정이라는 두 가지 역사수정주의에 호소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의미에서 ‘제국의 위안부’ 현상이라는 것은 일본의 지식인, 언론계의 문제인 것이다."(정영환, 243쪽)

"2015.12·28 한일 외교 합의는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20여 년 간의 국제공조 노력을 헛되이 만드는 일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한국만이 피해자가 아닙니다. 아시아 전역의 피해자들과 그들을 위해 활동해온 전 세계 시민들에게도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베리 피셔 변호사, 172쪽)

"징용소송, ‘위안부’ 소송을 추진하던 당시 “우리는 2차 대전의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있다.” 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21세기 시점에서 2차 대전의 마지막 전투를 아직도 계속해야 하는 현재 상황이 안타깝지만, 한국의 피해자들은 배리 피셔 변호사님 같은 분이 계시다는 것에 큰 위로를 받으실 것입니다."(정연진, 173쪽)

"영화 「귀향」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장면은 ‘위안부’ 소녀들 중 한 명이 「가시리」를 부르는 장면이다. 그는 평양 권번 출신의 여성으로, 다른 소녀들보다 나이가 많다. 이것은 『제국의 위안부』나 일본 극우들이 말하는 “‘위안부’는 매춘부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장면일까. 그렇지 않다. ‘위안부’들 중에는 강제나 겁박 등에 의해 끌려온 십대 소녀들도 있었고,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따라 나섰지만 취업 사기를 당한 사람들도 있었고, 성매매라는 것을 알고 온 권번 출신의 창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황진미, 191쪽)

"그런데 박유하는 ‘위안부’ 개인들의 일상을 계속 강조한다. 이것은 마치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도와 같은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알려진 대로 식민지근대화론은 일제강점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암울하고 고통스러웠던 것만은 아니고 나름 살만한 세월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즉 ‘식민지 시기에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민지 시기에 근대화가 되었으니 식민지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논리가 ‘식민지근대화론’이다. 그러므로 박유하의 주장에 ‘식민지근대화론 위안부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김수지, 206쪽)

"결국, 제국의 위안부라는 말은 조선인 위안부를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로 만들어 일본군의 범죄를 면죄해주는데 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안부(성노예) 문제는 단지 일본만의 책임이 아니며 일본 보다 일찍 제국주의 확장을 한 서양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초점을 흐리게 한다. 이처럼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 제목은 일본의 전쟁범죄, 식민지 지배 책임을 희석화, 추상화하고, 축소하는 데 활용된다."(최진섭, 244쪽)

박유하가 “취사선택”해서 발췌한 ‘위안부’들의 ‘좋은 기억’들은 정대협 활동가와 연구소 연구자들이 여러 번 찾아가며 오랜 시간을 들여 끌어낸 증언들이다. 그 증언집에 있는 이야기를 생존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안 했다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당사자들이 “버렸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김복동 할머니도 그러한 기억을 “버리지” 않았다. 그냥 사람들에게 꼭 알리고 싶은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몇 번이고 강조하면서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다. 왜냐, 그런 이야기들이야말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라는 것을 당사자가 더 잘 알기 때문이다."(양징자, 271쪽)

"학자의 양심은 때론 국적을 초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유하의 이러한 우편향 인식은 최근 일본의 집단 자위권을 통한 무력사용 선언과 평화 헌법 개정과 맞물려 설득력이 오히려 더 떨어져 보인다. 이 부분에 와서는 ‘일본 우익 학자 누군가가 쓴 글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갈 정도이다."(조의행, 296쪽)

"『제국의 위안부』를 쓴 목적이 이해, 화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이토록 일관되게 가해자 입장은 두루뭉수리 넘어가고, 불행은 피해자 동족인 이웃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이 대체 우리 민족에게 무슨 짓을 저질러 왔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고은광순, 300쪽)

"‘4개의 터부’(천황제, 야스쿠니신사, 난징학살, 일본군 ‘위안부’ 문제) 외에도 헤이트 스피치 등을 통해 중국, 한국, 동남아에 대해 철두철미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는 점과 일본은 문명국가이고 그 이외의 아시아 국가는 야만국가라는 서구적 가치관을 답습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일본 평화주의의 본질은 이중적이며,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북한에 대해서도 오히려 일본인 납치문제를 들어 일본이 피해자인 양 하는 일본의 민족관, 인간관에 대해 평화 운동가들이 제대로 유효한 반격을 하지 못하고 있다."(서승, 323쪽)

"일본의 소녀상 철거 요구를 통해 더 깊고 넓은 시야를 갖게 됐습니다. 소녀상은 단지 일본군 ‘위안부’의 위로와 평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평화, 동북아의 평화, 나아가 전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상징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긴장, 대결, 군국주의를 추구하고, 거짓 화해와 평화를 말하는 세력이 소녀상 철거를 원한다면, 소녀상을 지키는 일이 곧 진정한 평화를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김운성, 336쪽)

"박 교수는 위안부 동원이 일본이나 일본군의 ‘국가 범죄’가 아니며, 설혹 범죄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로 ‘업자의 범죄’라고 한다. 동시에 박 교수는 업자의 책임도 크지만 일본정부의 책임도 있다고 언급한다. 그런데 천황이나 일본정부가 성노예제에 대하여 법적 책임이 아닌 식민지배와 관련해서 상징적이고 구조적인 책임을 진다고 말한다. 책임에 관한 이러한 식의 복화술은 책임을 실제로 허구화한다."(이재승, 341쪽)

"저자는 “법적 책임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외치면서 자신은 끝없이 ‘뒤틀린 법 도그마’에 빠져들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가 강요한 조약을 내세워 ‘성노예’ 피해자에게 “협력자” “가해자” “무의식적인 제국주의자”라는 지위를 강요한다. 일제가 식민지‘법’에 따라 한 일이니 문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식민 지배, 국가주의, 남성 중심주의, 근대자본주의, 가부장제가 문제라는, 이미 많은 학자가 제시한, 그 자체로서는 타당한 주장은 법적 책임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업자의 책임’으로 왜소화되어 버린다. 그렇게 잎사귀를 강조하느라 줄기를 부정하다 보니 잎사귀만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괴이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김창록, 382쪽)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운동은)역사 속에 묻혀 있던 여성의 경험을 가시화함으로 가부장제, 식민주의, 민족주의의 공모 체제에 균열을 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관점에서 거대 역사에 질문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연대는 여성에 대한 전시 폭력이라는 거대한 부정의의 대한 저항이라는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자 투쟁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확대, 유지되고 있는 초국적 페미니스트 정치학에 근거한다. 이는 젠더, 민족,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의 축이 교차하는 접점에서의 수많은 차이와 경계를 넘어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과 실천의 의지로 연결된 연대다."(이나영, 401쪽)

[ 2016년 5월 16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