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 미안하다고 해야 할 때 - 반성과 성찰의 기록
신석진 외 지음 / 생각비행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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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진보정치, 미안하다고 해야 할 때>를 읽고 / 2015. 12, 신석진 외, 생각비행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에 대해 강제해산 결정을 내렸다. 진보를 표방하던 한 정당이 통째로 사라진 순간이다. 사법살인이라는 논란도 있었지만 사회적 시선은 냉담했다. '종북'이라는 꼬리표가 가져온 결과다. 

한때는 200만표가 넘는 유권자 지지를 받기도 했고, 통합진보당 전신인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따지면 15년 세월을 지켜왔지만 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셈이다. 


그런데 바로 1개월 후인 2015년 1월 통진당 해산 결정의 핵심근거가 됐던 이석기 전 의원의 내란음모죄(내란선동은 유죄)가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으면서 헌재의 결정이 지나치게 정치적 의도를 가졌던 것 아니냐는 주장이 다시 제기됐다. 물론 그렇다고 사라진 정당이 다시 부활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이 책은 그 모든 과정을 직접 겪었던 통합진보당 당직자들의 담담한 자기반성과 진보정치에 대한 성찰의 글이다. 사법적 판단에 대한 반론이나 당시 냉담했던 진보진영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는 글이 아니라는 점에서 거부감이 한결 덜하다.


"어떤 의도로 이 책을 썼는지 밝혀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진보정치 실패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 진보정치 실패에 대한 지지자들의 원망이 적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 고 있다. 한때 200만 명이 넘는 유권자가 보내준 표를 받은 정당이 공중분해 됐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른 것이지만, 진보정치는 그 전에 이미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진보 정치의 진지한 성찰과 새로운 각성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는 사람 들이 이 책을 읽기 원한다."(서문)

많은 사람이 통합진보당의 해산에는 수구세력의 전례 없는 공안탄압이라는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 측면에서는 타당한 의견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갈릴레오, 서구의 혁명세력과 사회주의 정당, 조광조와 허균, 동학농민항쟁과 학생운동 등 한국사회를 비롯한 전세계 모든 지역과 국가에서 당시의 체제와 이념에 반하거나 권력자들의 전횡에 저항하는 개인과 세력은 유례 없이 탄압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체제와 권력자들이 새로운 사상이나 세력을 탄압한다고 하여 새로운 사상이나 세력이 항상 패배하거나 좌절하지는 않았다. 과학은 신앙을 극복했으며,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 그리고 서구의 좌파 정당은 오랜 탄압과 공격을 뚫고 승리를 거두었다. 한국사회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진보정치의 실패를 인정하면서 우호적 여론이나 민주주의라는 대의에 입각해 통합진보당을 지원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실패한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고로 이 책은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치가 실패한 책임이 당사자들에게 있다는 시각에서 출발해 그것이 무엇인지 밝혀보려는 치열한 노력의 산물인 셈이다. 외부의 탄압에게만 책임을 돌리거나 외부적인 조건만을 탓해서는 스스로 변하여 상대방과 조건을 극복해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터넷을 뒤져보면,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이라는 진보정당 14년을 거치면서 정당의 주류정파의 생각과 행동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비주류측 관점의 출판물을 많지만, 주류의 입장이나 관점에서 진보정당사를 기술하거나 입장/관점/태도를 밝히는 출판물은 거의 없다.

그런 측면에서도 이 책은 진보정당 14~5년의 흐름과 평가를 균형감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들은 현실정치에서 적지 않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왜 통합진보당이 스스로를 긍정적이고 진취적 사고의 담지자로 진보적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키지 못했는가 하는 뼈저린 후회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이 책에 담아냈다.


4명의 공동저자가 명망가가 아니라 실무당직자라는 점도 선입견을 줄이는데 일조했다. 

저자들은 통진당 해산결정 이후 독서모임을 만들어 6개월 동안 토론을 하면서 얻은 고민의 결과를 담담하게 책으로 엮었다. 이들은 진보정치의 실패와 통진당이 보여줬던 아마추어리즘과 국민과의 괴리 등을 비교적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또 예민한 주제라 할 수 있는 종북논란에 대한 진보진영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도 에둘러 가지 않고 정직하게 말하고 있다. 이들은 "종북 이념으로 한국에서 정치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그럴 의사를 가진 정치세력도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정치는 신앙이 아니며,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주장과 논리는 도태되기 마련"이라고 잘라 말한다. 


또 경제민주화, 무상급식 등 복지확대, 재벌해체 등 진보진영이 앞장서 제기했던 이슈가 보수정당까지 채택하고 수용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진보정치의 고민은 한층 더 깊어지고 세련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저자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듯이 반성과 성찰이 주를 이루다보니 대안모색에 대한 비중이 많지 않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구체적으로 책 내용을 살펴보면,

1장은 ‘다수파의 원죄, 패권주의’를 다루었다. 통합진보당 당원들은 소명 의식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일해왔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돌아온 평가는 독단과 전횡을 일삼는 ‘패권주의자’란 비난이었다. 이 글에서는 왜 그런 평가를 받게 됐는지부터 밝힌다. 고단한 진보운동에 헌신하게 한 원동력은 강한 신념과 확신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배타적인 선민의식으로 나타났고 문제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민주주의’란 가치를 스스로에게도 엄격하게 적용하고 다원주의적 태도를 가질 것을 제안하고 있다. 또 제도적 해법보다는 정치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타협과 절충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2장 ‘진보의 멍에, 종북주의’는 통합진보당에게 가장 난감하고 사회적으로 첨예하게 부딪히는 종북주의에 대한 글이다. 통합진보당은 그동안 북한 관련 쟁점에 대해 뚜렷한 자기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그런 태도가 원칙적으로는 일리 있을 수 있지만, 모든 것을 검증받아야 하는 정치인과 정당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북한을 추종하고 있지 않으냐는 의구심에 대한 해명과 반론도 있다. 없는 것을 없다고 증명해야 하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음을 보여준다. 북한에 대한 태도를 반북, 비북, 친북, 종북으로 나누고, 종북과 반북은 배제하되 친북은 물론 북한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비북을 진보가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북핵 문제와 3대 세습,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진보가 취해야 할 입장을 제안한다.

3장에서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비판 중 패권주의와 종북주의를 제외한 문제들을 살펴봤다. 우리는 진보정당에서 이념과 철학이 갖는 역할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다만 그간의 진보진영 내 이념 논쟁이 실제로는 알맹이가 빠진 세력 간 갈등에 불과하며(‘이념논쟁’, 관행을 극복하자), 정통과 이단 논쟁 같은 소모적 양상을 띠고 있음을 꼬집는다(‘정통’과 ‘이단’의 이분법). 정당은 일사불란한 질서가 필요하지만, ‘오더’가 아닌 자유롭고 개방적인 토론을 바탕으로 해야 함을 강조한다(일사불란함의 전제, 자유롭고 개방적 인 토론의 힘). 전민항쟁을 꿈꾸던 시절의 언어 습관이 갖는 문제를 지적하고(전민항쟁의 향수), 의회주의, 합법주의와 같은 어법이 나온 배경을 짚는다(의회주의, 합법주의 비판의 두 측면). 아울러 애국가 논란을 통해 진보가 가져야 할 ‘국가관’은 어떠 해야 하는지 짚고 있다(진보는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 

4장 ‘진보 혁신의 고정관념’은 진보정치의 혁신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되풀이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진보의 거친 행태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에 수긍하면서도, 진보정치의 근원적 동력일 수 있는 진보운동의 가치나 급진적 지향을 버리지는 말자고 주장한다. 다만 진보가 추구해야 할 급진성이 무엇인지는 제시하지 못했다. 이 책의 한계다. 정권심판론과 같은 정치적 의제의 과잉이 문제라는 지적에 대해, 두 차례의 보수정부 등장 이란 현실에서 진보정치는 사회경제적 민주화뿐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낡은 진보’의 근거로 제시되는 민족 문제도 진보가 버려야 할 영역은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이를 대하는 진보당의 관성적 태도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4장은 또 진보정치의 근간처럼 여겨지는 ‘노동 중심성’이 눈앞의 시급한 과제를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의문을 제기한다. 노동운동에 대한 혁신 요구에 대해서도 진보가 현장에서의 실천을 떠나 관성적으로 접근하고 있지는 않은지 문제를 제기한다.

5장 ‘경제정책, 이념에서 현실로’는 진보정치에 대한 정치적 사고의 변화나 혁신이 정책 영역에서 어떻게 투영돼야 하는지 보여준 다. 우리 경제 현실에서 전통적인 진보/보수의 구분이 설명력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며 그 원인을 밝히고 있다. 통합진보당이 ‘재벌 해체’를 고수해야 했던 이유가 이념이 아니라 우리 경제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야권도 경제성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면서, 현 단계에서 진보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유용한 정책 대안을 제시한다. 진보진영에서 나오지 않았던 참신한 주장들이 있다. ‘부유세 논쟁’을 통해 진보정치의 성찰적 변화과정을 구체적으로 짚어가는 한편 ‘증세 논쟁’을 통해 진보진영도 세부적인 방법론에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기회비용이나 상충관계가 없는 정책은 없다며 정답을 찾기보다는 대응방안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어찌됐든 격동의 현장을 보냈던 진보정당 당직자들이 스스로의 실패와 좌절을 인정하며 기울였을 술잔들이 눈에 선하다. 

그래서일까 작가 장정일은 "정치에 관한 책이 이토록 마음을 아프게 할 줄 몰랐다"면서 "참혹하고 아름다운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는 좌우명을 누군가 독차지해야 한다면 그것은 진정 이들의 것"이라고 추천사로 대신했다.(‘정치에 관한 책’이 이토록 슬플 줄이야 (장정일 독후감)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475)


친일과 분단, 전쟁과 군사독재, 그리고 그 오랜 과정에서 형성된 기득권 구조와 분단이데올로기가 강력한 영향을 끼친 결과, 한국사회는 21세 들어서도 겉만 화려한 채 그 내면을 썩어들어가고 있다. 1%, 5%의 최상층은 온갖 불법과 편법, 부당한 방식으로 부와 권력을 획득하고 있고, 95~99% 대다수 사람들은 허리가 휜 채 하루하루 삶을 이어가고 있다.
'헬조선', 'OECD 최악의 50관왕', '초고속 고령화와 저출산', '5포세대와 N포세대' 등이 바로 지난 100년의 한국현대사가 가져온 결과로서 21세기 한국사회를 상징하는 표현들이다.

소위 '진보'는 그런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상이나 흐름, 정책이나 세력을 의미한다. '헬조선'을 극복해나가기 위해서는 변화를 시도하는 주체들부터 스스로 부족한 점을 극복하고 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의 서문의 제목이 최근 몇 년 동안 격동적으로 전개된 한국사회의 진보진영/진보정치권에 대한 종합적인 진단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것은 "진보정치의 한 시대가 갔다"이다.

- 인상 깊은 문장 -

"우리의 토론이 진보정치 실패 원인 분석부터 시작한 것은 아니다. 토론을 통해 우리가 얻은 첫 명제는 “진보정치의 한 시대가 갔다”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이 책 전반에 스며든 전제가 됐다. 안타깝게도 어떤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글쓴이들의 부족한 탓이 크고 무엇보다 지나온 시대에 대한 해석이 명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토론 결과를 요약 해보면 다음과 같다."

"글쓴이들이 진보정당 15년의 역사를 모두 감당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은 시기를 남들과는 다소 다른 위치에서 지켜봤다. 합당과 분당, 그리고 정당 해산에 이르는 역사적 과 정에 필요한 실무를 처리한 당사자이기도 했다. 당의 지도부나 전문적인 연구자는 아니지만, 남길 수 있는 기록과 공유할 수 있는 평가가 있으리라 판단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아무런 대표성이 부여되진 않았지만, 치열한 현장의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으리라 믿었다."

"지난 몇 년간 함께 시련을 경험한 동료 중에 혹시나 이 책을 읽고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일일이 대면하여 양해를 구할 일이었으나 용기도 없고 부끄러워 그러지 못했다. 글쓴이 모두는 진보정치가 생존하기 힘든 척박한 한국 정치판에서 단지 살아남는 것을 넘어 수권 가능한 세력으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다. 부족하지만 이 책이 진보정치의 재기와 도약을 바라는 모든 이의 희망 가운데 자유롭고 개방적인 토론의 소재로 활용되기를 바랄 뿐이다."

[ 2016년 5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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