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파편들 - 도널드 그레그 회고록
도널드 P. 그레그 지음, 차미례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평]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의 < 역사의 파편들 Pot Shards: Fragments of a Life Lived in CIA, the White House, and the Two Koreas >를 읽고 / 2014. ., , 창비

미국 정부에서 퇴직한 후 남북 화해와 동북아시아 평화체제 구성을 위해 일정 부분 역할을 하고 있는 그레그 전 미국대사의 회고록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궁금했다. 그가 백악관과 CIA에서 주로 근무했다는 것과 특히 그의 재직 중 한국에서 근무한 기간이 제법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베트남과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을 오랫동안 담당했고, 그 개인적으로도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박정희 군사독재체제, 광주항쟁과 87년 6월 항쟁, 남북관계와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직간접적으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출판사와 언론은 이 책을 그레그 개인의 역사이자 동시대 미국과 한반도 역사에 대해 진술하는 내용으로 홍보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가족을 위주로 한 개인사와 그 가치를 중시하는 저자의 시선이 회고록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난다. 즉 개인의 회고록이 핵심인 셈이다.
물론 그는 1973년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 지국장으로 부임한 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관과 조지 H. W. 부시 부통령 안보보좌관을 거쳐 1989~93년 주한 미국대사를 역임했다. 그는 두차례 김대중 구명에 관여했고, 노태우 정부의 주한미군 전술핵 철수, 팀스피릿 한미군사훈련 중단 결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그레그는 이 책에서 미국의 주요 외교현장에서 일한 자신의 회고를 통해 1950년대 이후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의 실상을 말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접한 사건과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도, 60여년간의 외교경험과 통찰력으로 20세기 후반 베트남전, 이란 콘트라 스캔들, 쿠바 핵위기 등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그레그는 철저한 미국의 공무원이지만 최소한의 양심과 합리성을 지닌 보수주의자로 보인다. 이런 점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그의 회고와 평가 부분을 읽어보면 느낄 수 있다. 
그는 1962년부터 64년까지 워싱턴에서 베트남 담당부서 책임자로 근무하고, 1970년부터 72년까지 싸이공 외곽의 지역담당관으로 일하면서 베트남전을 몸소 체험한다. 2만명 수준의 소규모 주둔에서 50만명의 미군 전투병이 실전에 배치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부자의 시각에서 왜 미국이 베트남에서 실패했는가를 진솔하게 토로한다. 정책 결정자들의 오만과 편견, 관료적 편의주의, 일방주의적 사고가 정보와 정책 면에서 참담한 실패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이해 부족, 베트남 민족해방의 성격에 대한 무지도 날카롭게 짚어낸다. 그레그는 호찌민의 경우와 더불어 미국이 사담 후세인, 김정은에 대해 악마화라는 오류를 범하는 것에 우려를 표한다. 
“우리가 싫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지도자나 집단을 무조적 악마화하려는 경향이 우리를 끊임없이 곤경에 몰아넣는 원인이라는 점이다. (…) 그 결과는 악선전과 선동정치에 의해 커져버린 상호적대감, 관련된 모든 상대에게 돌아가는 피해뿐”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지적은 대다수 한국인들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그의 회고를 통해 확인한 것 중 한 가지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김대중 납치사건과 전두환정권의 김대중 사형집행을 막아낸 일화이다. 그는 당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부 지시를 의도적으로 위반하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 박종규를 찾아가 압박했다고 토로했고, 결과적으로 당시 권력실세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해임에 이르게 하는 과정을 기술했다.
그 이외에도 그가 미국의 정보요원이자 외교관으로 한국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사례는 많다. 1991년 무엇보다 한국에 전진배치됐던 전술핵 철수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와 더불어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로버트 리스카시 장군과 더불어 워싱턴을 설득, 1991년 12월 팀스피릿 한미군사훈련을 전격적으로 중단시킨 바 있다. 그 결과 ‘남북한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되는 등 남북한관계에 중대한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뿐만 아니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한소 수교 등에도 결정적 공헌을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한국인으로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레그는 미국의 대북 정책에 대해 “북한문제는 미 정보국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어온 실패 사례다”, “이념적이고 오도된 접근방식은 그동안 한국과 미국(부시)정부가 합작해서 북한과의 새로운 관계를 위해 마련했던 뜻깊은 발전을 비극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부당하게 중단시켜버렸다”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 실패의 근원에는 미국정부가 북한의 지도자를 ‘악마화’하는 데 있다고 단언한다.
그는 2009년 공직 퇴임 이후에도 대북관계 개선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최근에 국내 언론들에 소개되었듯이 2009년 여름 김정은이 평양의 공개무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며 한반도의 중대 변화가 임박했음을 알렸을 때, 조지 바이든 부통령에게 김정은을 미국으로 초빙하자고 편지를 썼다가 거절당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레그는 민간외교를 계속하며 남북 그리고 북미 간의 평화를 구축하는 데 자신이 기여할 바를 찾아가는 중이다.

“한반도의 분단은 끝낼 수 있고 또 반드시 끝내야 하는 비극이다. 그것은 서로 계속하고 있는 악마화가 대화로 바뀌고 화해가 이뤄질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는 말로 회고록 전체를 마무리한다. 이는 그가 회고록을 펴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것임을 알게 해준다.

사실 이 책을 통해 내가 무척 궁금했던 부분은 얻지 못했다. 내가 궁금했던 부분은 한국전쟁과 박정희의 5.16 군사쿠테타, 한국 중앙정보부 창설에 대한 미국 CIA의 개입, 유신쿠테타에서 미국의 역할, 김재규의 저격과 12.12 군사쿠테타에서 미국의 개입 정도,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었다. 대부분 사건의 경우 그레그는 정책 결정과 집행 체계 선상에서 근무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한미 간의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미국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일관할 뿐이다. 
어찌 보면 한 나라의 고위 정부 관료로써 취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취해야 하는 입장인 셈이다. 이런 점에 대해서 나는 이 책에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얻지 못했지만 저자에게 특별한 불만은 없다.

한국사회에서는 자신의 이념적 견해에 따라그레그를 ‘책략가', ‘자유주의자’ 또는 ‘친북인사인’라고 평가한다. 이 책의 발문에서 문정인 교수는 그에 대해 세가지 전혀 다른 이미지로 간략하게 정리했다. 
"첫째, 미 CIA 출신으로 미국의 배타적 국익에만 충실했던 외교관 이미지다. 둘째, 한국 민주주의와 대북포용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온 자유주의자 이미지다. 셋째로 북한을 여섯번이나 다녀오고 북한 입장을 옹호, 대변하는 ‘반정부·친북’ 인사 이미지”다.
즉 오랫동안 그와 교유해온 문정인 교수에 따르면 그레그는 보수반동도 아니고 친북인사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나라 미국을 사랑하고 국익을 중요시하는 애국자이며, 그에게 미국의 국익은 민주주의·인권·평화라는 가치의 신장이다. 그가 한국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 애쓴 노력 또한 근대 이래 인류가 지켜온 보편적 가치들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문정인 교수의 평가에 대해 나도 동의한다. 독자들도 이 책을 읽은 후 자신만의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는 이 책에 대해 "개인의 기억을 중시하면서도 객관적 진실에 다가가려는 노력, 뛰어난 감성과 유머감각을 겸비한 이야기 솜씨는 흡입력을 더해준다. 무엇보다 과거형에 머무르지 않는 미래지향적인 시선은 여타의 회고록들과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라고 평가한다.
저자가 책 속에서 ‘객관적 진실’에 다가가려고 노력한다는 점은 나도 인정하지만, 객관적 진실은 개인 한 명의 기억에 의존해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과 박정희의 5.16 군사쿠테타, 한국 중앙정보부 창설에 대한 미국 CIA의 개입, 유신쿠테타에서 미국의 역할, 김재규의 저격과 12.12 군사쿠테타에서 미국의 개입 정도,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 등에 대한 객관적 사실은 미국이 아직 공개하지 않은 국방부, 국무부, CIA의 비밀문서가 어느 정도 말해줄 것이다. 즉 2050년부터 부분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럼에도 그레그가 ‘미래지향적’인 시선을 갖고 있다는 점은 크게 공감한다. 냉전 시대에 미국과 한국, 미국과 조선(북한)이 겪었던 상황은 이제 과거의 역사다. 미래에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남북이 화해와 협력, 통일로 진전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대결과 갈등에 머물지 않고 후손들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미국 역시 남북전쟁을 겪었지만 화해와 협력으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 바로 ‘역사의 교훈’일 것이다.

[ 2015년 11월 24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