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백낙청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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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백낙청 저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를 읽고 / 2009.08., 403쪽, 창비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는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중요 주제로 삼은 백낙청 교수의 네 번째 책이다. 백 교수는 1994년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을 시작으로 한반도 분단체제를 주제로 연구 결과물을 발표하였다. 두 번째는 1998년 <흔들리는 분단체제>이고, 세 번째는 2006년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이다. 국내 정치학자나 사회과학자 중에서 한반도 분단체제에 대해 이렇게 수십 년 간 꾸준히 연구하면서 결과물을 발표한 전문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또한 그는 615 남측위원회 공동대표로서 활동하는 등 '분단체제의 체계적 인식과 실천적 극복’에 매진해 온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 교수는 전작인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에서 분단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선언하고 한반도의 통일 방식은 흡수통일 방식인 독일식이나, 전쟁 방식인 베트남식, 그리고 상층 일부 정치집단만의 합의 방식인 예멘식도 아닌 제3의 방식일 수밖에 없고, 제3의 방식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남북이 1972년 7.4 공동성명에서부터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로 이어진 한반도식 통일 논의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한반도식 통일은 남북이 화해와 교류, 협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이 양측 정부 당국뿐 아니라 시민사회세력이 주도적으로 동참하는 가운데 - ‘시민참여형 통일 - 시나브로 통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다.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는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이 출간된지 3년 후에 발간되었다. 2007년 6.15 공동선언을 기반으로 하여 남북의 정상이 10.4 남북공동선언을 재차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2009년의 한반도 상황은 여러 가지로 악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2008년 극우보수세력으로의 정권교체 이후 촛불시위,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북의 2차 핵실험 등 파국으로 내닫는 혼미한 정국 속에서 대한민국은 경제, 민주주의, 남북관계에 걸쳐 심각한 위기상황을 겪고 있었다. 북한과 미국의 군사적, 정치적 긴장과 갈등은 커졌고, 그 여파로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하였고,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도 불안정해졌다. 설상가상으로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주도해야 할 남측에서 6.15 공동선언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이명박 정권이 등장함으로써 오히려 남북 대결을 추구하며 한반도와 동북아의 긴장에 앞장서고 있었다.
저자는 이명박 정권의 등장 이후 악화된 동북아와 한반도 정세로 인해 자신이 견지해 온 ‘흔들리는 분단체제’와 ‘한반도식 통일’에 대해 시민사회 여러 곳에서 터져나오는 우려 섞인 절망적인 분위기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 위해 이 책을 발간한 것으로 보인다.

시민단체 및 시민운동가들과 가까웠던 저자는 서문 ‘시민참여 통일과정은 안녕한가’에서 먼저 시민운동에 대해 적극적인 조언과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국내 시민단체들이 "남한 사회의 특정 개혁과제에 몰두해온 것은 시민운동의 성격상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시민운동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 때문에 유달리 시야가 좁아진 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당면 개혁과제에 골몰하는 ‘시민적’ 관심이 강한 사람들일수록 "통일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한반도적 시각의 부재는 시민운동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이른바 ‘민중진영’에서도 "지나치게 반북적이거나 상당수 진보학자와 시민운동가들의 ‘후천성 분단인식결핍 증후군’을 공유하는 정파가 엄존하며, 한반도적 시각을 강조하지만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심지어 북측 당국의 해법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다른 한 정파와 묘한 짝을 이루고 있다”(19쪽)고 평가한다. 그리고 시민운동에서 한반도적 시각이 부재한 이유는 “민중적 의제, 민중적 정서에 대한 시민운동가들의 거리두기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한 이유에 대해서는 “시민운동은 도덕적 순수성이 생명이긴 하지만 활동가들이 손에 때묻히지 않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자기 운동만 하려는 일종의 결벽증을 드러내는 것은, 어찌 보면 6월 항쟁 이후로도 여전히 협소할 수밖에 없었던 활동공간에 알게모르게 순응해온 결과요 87년 체제의 수혜집단으로서의 타성이랄 수 있다”(20쪽)고 지적한다.

저자의 지적과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동안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최소한의 정치적, 경제적 민주주의의 헤택을 누리지 못하면서 OECD 국가 중 최악의 사회적 현실에 직면해 있는데,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중산층과 고학력, 기술자 계층의 이익만 대변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민주주의도, 생존도, 평화도 위협받는 한국사회의 현실이 분단체제라는 엄존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노력에 치열하지 못한 채 선진국에서 유행하는 환경운동, 마을운동, 생태운동 등에만 집중하는 시민단체는 오히려 중산층 이하 민중들에게 위화감과 적대감만을 양산시키고 있음을 느낀다. 
‘회원 없는 시민단체’, ‘회비만 걷어 활동가만 활동하는’시민단체’, ‘정치에 입성하기 위한 시민단체’라는 지적과 비난에서 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수의 저소득층과 소외계층에게 나타나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이 시민단체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2008~2009년의 제3차 북핵위기의 특성을 ‘남한발’이라고 규정짓는다. 2009년 상황은 북미 갈등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오바마 정부의 선제적 대북강경노선 탓이라기 보다 다분히 남한 정부가 남북갈등을 선도한 데에 따른 위기로 분석한다. “이명박 정부가 6.15 선언을 존중하고 10.4 합의사항 이행에 성의를 보였다면 애당초 제3차 핵위기 자체가 없었으려니와, 최근 위기의 진행을 보더라도 한국 정부의 태도가 사태악화에 얼마나 큰 작용을 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27쪽)
이런 저자의 분석과 평가는 북핵 위기를 무조건 북측 정권의 책임이라고 단정지으면서 미 행정부나 극우보수 세력의 반북 공세에 편승하려는 국내 시민사회 진영 일부와 진보진영 일부의 무지하고 무책임한 행보와 대비된다.
6.15, 10.4 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긴장 사태가 악화된 것에 대해 저자는 “분단체제의 속성상 적어도 ‘제1단계 통일’로써 그 극복의 길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언제든지 남북화해를 역전시킬 수 있는 동력과 매커니즘이 내재하기 때문”(35쪽)이라 평가한다. 그의 ‘분단체제론’인 87년 체제가 53년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럼에도 “대결상태의 재연이 분단체제의 재고착화를 뜻하지는 않는다. 흔들리는 분단체제의 안정회복을 꿈꾸는 인사들이 남북간에 적지 않을지 모르나 그것은 세상의 변화를 무시한 일방적인 꿈일 뿐이다.”(35쪽)고 주장한다. 그가 전제하고 있는 ‘흔들리는 분단체제’의 큰 구조와 흐름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에서 잠시 언급한 ‘변혁적 중도주의’를 본격적으로 제장한다. 그가 ‘변혁적 중도주의’를 제창하는 이유는 “‘중도’가 아니고서는 광범위한 연대가 불가능한데다가, 무원칙한 ‘중도 마케팅’이 아닌 줏대 있는 중도세력이 되려면 한반도 차원의 변혁과 국내의 개혁작업을 결합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혁’의 핵심은 1980~90년대식 혁명이 아니라 ‘분단체제의 변혁’에 가깝다. “분단체제라는 용어를 굳이 안 쓰고 그 개념을 명시적으로 공유하지 않더라도 분단체제의 변혁에 실제로 기여하는 쪽으로 기운을 모을 필요가 절실한 것이다."(55쪽)
그렇다고 저자가 ‘변혁적 중도주의’가 쉽게 구현되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의 변혁이 중도세력의 동원과 개혁적 성과의 축적을 요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실제로 한국사회의 다수가 이런 변혁적인 개혁운동에 합류할지는 따져볼 문제로 남는다. 그런 일이 벌어지려면 상당한 수준의 중도 공부와 변혁 공부가 필요할 텐데, 아직도 한국사회, 특히 지식인사회는 참 중도의 연마에 무관심하고 분단체제 극복으로서의 변혁에 대한 인식이 태부족한 경우가 많”(56쪽)기 때문이다. 
그는 2008년의 촛불군중과 2009년에 고 노무현 대통령을 애도한 대중이야말로 지식인들보다 변혁적 중도주의에 오히려 가까이 다가섰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당시 대중들이 “이명박 정부의 퇴행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할 뿐 아니라, 급진 자주파나 급진 평등파의 주장도 가볍게 일축하는 형국”이라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백낙청, 대전환의 길을 묻다>(2015 창비)에서 관심을 두기 시작하여 알게 된 백낙청 교수의 ‘분단체제론’과 ‘한반도식 통일론’은 많은 면에서 크게 공감이 된다. 한반도의 현대사는 지구상 유례가 없었다. 일제 식민지 -> 외세에 의한 분단과 친일파 집권 -> 내전/국제전 -> 분단체제 재구축 -> 사대주의 군사독재체제로 이어지다가 1987년 6월 항쟁과 1990년대 초 동서냉전 붕괴를 통해 분단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세계사적 관점 그리고 한반도적 관점은 국내의 진보민주세력에 중요한 시각이다.
다만, 분단체제 극복과 ‘한반도식 통일’을 ‘변혁’으로 규정 짓고, 이념적 스페트럼이 모호한 ‘중도주의’를 규정짓는 ‘변혁적 중도주의’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변혁과 중도라는 개념이 모두 이전에 사용되는 개념과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한반도 전역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와 인민주권, 그리고 최소한의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새로운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데 백낙청 교수의 사상과 실천이 도움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인상 깊은 문장-

“분단체제가 괴물이란 말을 더러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분단체제가 괴물이라면 분단체제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우리 모두가 마음 속에 괴물 하나씩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성찰하면서, 바깥의 괴물을 이겨내는 일과 내 마음속 괴물의 퇴치를 어떻게 동시에 수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훨씬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41쪽)

“핵무기 반대는 대원칙이며 당연히 북핵에 대해서도 끝까지 폐기를 주장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인 반대는 미국 등 기존 핵보유국을 동시에 겨냥하는 철저함을 보여야 합니다.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한국의 시민사회든 정부당국이든 북의 핵보유를 방지하거나 철회시킬 실력이 없다는 점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142쪽)

“근본적으로 북조선은, 남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베트남이나 중국과 같은 수준의 독자성을 지닌 사회단위라기보다는 한반도 분단체제 속에 포섭되어 있는 매우 특수한 사회 즉 분단사회이기 때문에, 중국이나 베트남의 개혁,개방 선계를 그대로 따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해결책이 뭐냐? 저는 유일한 해결책은 남북연합이라 봅니다. 전혀 다른 두 체제를 무리하게 통일하지 않으면서도 지금처럼 남북이 연합조차 안한 채 분립하는 게 아니라, 북이 중국이나 베트남과는 다른 방식으로 최소한의 안정성을 보장받은 상태에서 필요한 개혁을 하고 개방을 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202쪽)

“분단체제 극복을 역설하며 이 목표를 위해 훌륭하게 헌신해온 통일세력이 있는데, 이들 중 상당수도 분단을 의식하기는 하되 분단현실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한반도의 분단이 원래 외세에 의해 강요된 것은 사실이지만, 분단체제가 성립한 데에는 한반도 내부세력의 작용도 있었고 전쟁보다는 분단이 낫다는 주민들의 실감도 가세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를수록 분단현실에서 이들을 보는 특권층이 남과 북 양쪽에 상당한 기반을 갖게 되었다. 분단체제의 이런 범한반도적 성격을 무시하고 남녘의 극우세력과 주한미군만 사라지면 자주통일이 된다고 믿는 것은, 북쪽의 정권만 무너뜨리면 자유민주주의 통일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공상적이다.”(270쪽)

“진보의 이름을 걸고 전통적 통일운동세력의 진보성을 부인하는 지식인, 활동가, 정치인 가운데도 분단현실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사례는 수두룩하다. 그중 일부는 ‘반북좌파’라 일컬음직한데, 분단체제 전체에 돌려야 할 책임마저 오롯이 북한 정권에게 귀속시킨다는 점에서 수구세력의 북한 때리기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분단체제는 한반도의 남과 북 외에 세계체제의 주요 행위자들까지 관련된 복잡한 체제이니만큼 그 특정한 국면에 대한 책임규명은 실로 복잡하고 다양하기 마련이다.”(271쪽)

“반북까지는 아니더라도 북의 존재를 되도록 무시하면서 남한만의 발전을 꿈꾸는 세칭 진보세력이 의외로 많다. 특히 지식인, 학자들의 세계가 그렇다. 이는 한국의 지식계가 이 땅의 구체적인 현실에 뿌리박은 공부보다 분단이 없는 외국의 현실에 연유한 이론의 학습과 전파에 치중한 탓이라 생각하지만, 아무튼 남북의 점진적 재통합을 수반하지 않는 평화국가 또는 평등사회의 수립이라든가 남한의 독자적 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건설 같은 주장을 ‘아니면 말고’ 식으로 내던지는 사례를 자주 만난다. 이는 ‘후천성 분단인식결핍 증후군’이라 부른다.”(272쪽)

[ 2015년 10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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