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 [서평] 빅터 프랭클 저, 이시형 역 <죽음 수용소에서, 죽음조차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 존엄성 승리>를 읽고 / 2005. 08., 246쪽, 청아출판사


법정스님 추천도서 중 서른 여섯 번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겪은 생사 엇갈림 속에서도 삶 미를 잃지 않고 인간 존엄성 승리를 보여준 프랭클 박사 자서전적인 체험 수기..

저자는 잔인한 죽음 강제수용소에서 보낸 기나긴 죄수 생활에서 자신 벌거벗은 몸뚱아리 실존을 발견했다고 말한다.부모, 형제, 아내가 강제수용소에서 모두 죽고, 모든 소유물을 빼앗기고 인간으로서 모든 가치를 파멸당한 채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 그리고 핍박 속에 몰려오는 죽음 공포를 견뎌내고 미있는 삶을 발견하고 유지했다는 저자 이야기는 독자들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 체험을 바탕으로 프랭클 박사는 자신 독특한 정신분석 방법인 로고테라피('미치료'란 뜻이며 빈 제3정신학파로 불림)를 이룩한다. 조각난 삶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미와 책임 확고한 유형으로 짜 만드는 것이 프랭클 박사가 스스로 창안한 현대 실존 분석과 로고테라피 목적이자 추구하는 바다.(책 후반부에 로고테라피에 대한 개념과 이론, 치료방식 등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음)

강제수용소에서 저자를 생존시키고 삶이 미있도록 한 것은 아래와 같이 개인적인 깨달음과 노력이었다.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 닥치더라도 설령 변할 수 없는 운명에 닥치더라도 인생에서 미를 찾아야 한다.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해서 인간 잠재력을 증명하는 것은, 개인 비극이 승리로 변하는 것과 동시에 곤경에서 인간이 성취를 일구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을 때 - 불치 병이나 수술이 불가능한 병에 걸렸다 할지라도 우리는 스스로 변화할 수 있다는 도전을 해야 한다.”

그는 인간이 ‘우스꽝스럽게 헐벗은 자신 생명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았다. 책에는 이때 사람들 마음 속에 일어나는 감정과 무감각 복잡한 흐름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제일 먼저 그들은 자신 운명에 대해 냉정하고 초연한 궁금증을 갖는 것에서 구원을 찾는다. 그런 다음에는 곧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남아있는 삶을 지키기 위한 작전에 들어간다. 가까이서 자기를 지켜보는 사랑하는 사람 모습을 떠올리는 것으로, 종교에 지하거나 농담을 하는 것으로, 나무나 황혼 같이 마음을 치유해주는 아름다운 자연을 단지 한 번 바라보는 것으로 그들은 굶주림과 수모, 공포 그리고 불에 대한 깊은 분노 감정들을 삭인다. 
하지만 명백하게 몰상식한 이런 시련에서 더 큰 미를 찾도록 도와주지 않는 한, 위에서 얘기한 순간적인 위안들은 그들에게 살고자 하는 지를 북돋아 줄 수 없다. 
바로 여기서 저자는 독자들을 실존주 중심적인 주제와 만나게 해준다. 즉,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서는 모든 상황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이 여기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뿐이라는 것이다.

저자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제가 강제 징병과 강제징용, 위안부 등으로 동원되어 일본과 만주, 동아시아 전역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떠올랐다. 2차대전 현장에서 일본군에 해 학살된 징병 조선인들, 일본과 만주 곳곳에서 강제노동 후 몰살된 징용 조선인들, 아시아 전쟁터 곳곳에 위안부로 끌려가 학대되고 살해된 위안부 조선인들,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서 미국 원자폭탄에 해 사망하고 피폭을 당해 고통받으며 숨져간 조선인들...
히틀러 나치 홀로코스트와 일제 조선인 학살 및 한반도 내 항일 조선인 학살은 학살 규모와 방향은 달랐지만 비인간적인 학살과 제노사이드 수준 만행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나치 유대인 강제수용과 학살과 탄압은 독일군과 독일인에 해 이루어졌지만, 조선인에 대한 학살과 탄압 맨 앞에는 친일파 조선인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일제 잔혹함과 일부 친일파들 굴종이 면면히 이어져 온 후 21세기 한국에서도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출판사는 이 책에 대해 "앞일을 가늠할 수 없는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조차도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성 승리를 일구어낸 한 '보통 사람'이 보여준 나치 치하 강제수용소에서 경험은 이제는 개인경험이 아닌 인류 경험이 되었다."라고 극찬한다. “우리 비극적인 과거로부터 얻은 교훈에서 미래에 대한 낙관이 샘솟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일정 부분 출판사 평가에 동하고 공감한다. 100년 넘게 이어지는, 외세에 유린당하고 친일친미 사대주 세력과 냉전수구세력 폭압 속에서 한국 민중들과 엘리트 계층이 보여주는 사대주와 굴종과 비겁함과 좌절과 변절 속에서도 결국 개인이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과 태도는 아우슈비츠 저자 태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과 저자에게 쉽게 동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는 듯한 방향성에 공감하기 어렵다. 주어진 문제를 개인 문제로 치환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제국주 간 식민지 쟁탈전에서 시작된 것이고 히틀러 유대인 학살은 증오와 공포를 이용한 통치술이 기본 바탕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주어진 인생 조건을 저항 없이 수용하면서(나치 잔혹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서 개인적으로 자살하거나 좌절하지 않기 위해 개인이 어떤 자세와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고뇌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저자와 같은 아주 능력있는(?) 개인 소수이기 때문에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그 중에서도 저자와 같이 정신적으로 망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주 극소수일 것이다.
수백 만 명 유대인들이 자신들처럼 강제로 끌려와 수용되었고 차례로 학살되고 있음을 알았음에도(비록 나치 힘과 폭력이 막강하다 하더라도..) 민족적, 집단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함께 저항할 방법을 모색하기 보다 쉽게 굴복하고 수용소 내에서 외부 도움만을 바라는 자세를 선뜻 공감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들 그런 모습이, 즉 유대인 강제 동원에 협력했던 유럽 내 유대인 조직 엘리트들 태도와 일반 유대인들 체제 및 폭력에 순응이 홀로코스트 후 유대인 학살을 빌미로 서방 문명국가(?)폭력에 도움을 받아 팔레스타인인들을 ?i아내고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을 건국한 파렴치한 행위로 고스란히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건국 후 이스라엘 정치권과 정부, 엘리트들이 미국과 서방 국가들을 (서로)이용하여 중동인들과 중동 국가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공격하고 있는 현재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책 속애서 발견한 한 가지 미심장한 이야기...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죽은 때는 1944년 성탄절에서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짧은 기간이었다고 한다. 많은 유대인들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전쟁이 끝날 것을 예상했다가 예상이 틀리자 급속하게 희망을 잃었고 그런 절망적인 태도가 사람들 살고자 하는 지를 꺽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제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많은 친일, 부일 협력자가 발생한 것도 1945년 해방 직전 몇 년 동안이었다.
즉, 현재 박근혜 정권 또는 미국에 종속과 냉전수구세력을 극복할 수 없다며 절망하고 좌절하게 되는 순간 한국인 누구나 변절하거나 육체적, 정신적 죽음에 처할 수 있으니 스스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2013년 12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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