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지음 / 책과함께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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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노명식 저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를 읽고 / 2011. 06., 446쪽, 책과함께

이 책은 1789년 프랑스혁명과 복고 왕정, 1848년 2월 혁명과 나폴레옹 3세의 제2제국, 그리고 파리 코뮌의 발발과 실패까지 100년에 가까운 프랑스 혁명사를 알기 쉽게 풀어쓴 입문서다. 특히 저자는 프랑스 근대사가 영국이나 미국과 다른 노정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추적했다.

개인적으로 프랑스혁명과 그후 100년사는 늘 언젠가 한 번 공부하고 싶었던 역사였다. 프랑스와 조선은 비슷한 시대에 봉건제 절대왕조라는 엇비슷한 사회체제였는데, 프랑스에서는 18헤기 말 시민혁명 또는 사회혁명이 발생한 후 100년간 혁명과 반혁명이 이어지면서 근대국가로 이어졌고, 조선에서는 19세기 초부터 세도정치가 100년간 이어지다가 급기야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미나 교재로 채택된 이 책과 피에르 세르나 등이 발간한 <무엇을 위하여 혁명을 하는가 : 끝나지 않은 프랑스혁명>, 마크 스틸의 < 혁명 만세 : 걸쭉한 넉살, 삐딱한 불온함, 끝내 가슴 뭉클한 프랑스대혁명 이야기 >, 그리고 프랑스혁명의 주역들이 영감을 얻은 책인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연달아 읽었다.
루소와 더불어 프랑스혁명의 주역들에게 영향을 끼친 토머스 페인의 <상식>과 <인권>은 한두 달 전에 이미 읽었고...

제1장 ~ 제4장은 프랑스대혁명을 불러일으킨 18세기 프랑스의 사회경제적 토대과 사상적 배경, 대혁명의 직접적인 원인과 국민의회, 공화정의 수립과 루이 16세의 처형을 가져온 입법의회와 국민공회, 데르미도르파의 반동과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그리고
부르주아 공화국이 흔들리는 과정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프랑스 혁명의 궁극적인 원인은 "번영 속에서 불거진 계급 간의 불균형"이었다. 프랑스혁명의 배경과 원인에서 한국사회의 소위 지도층과 재벌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지난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 역시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와 마찬가지로 "번영 속에서 불거진 계급 간의 불균형"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리고 지난 10년 역시 재벌과 기득권들의 번영과 중산층 이하 서민들의 소득악화의 연속이었다는 것이다.

1장 ~ 4장을 통해 새롭게 알게된 흥미로운 사실은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는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점거나 프랑스 혁명 직후 처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루이 16세는 혁명 후 3년 6개월 후인 1793년 1월 20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프랑스 혁명 직후 국민의회와 인민들은 루이 16세가 공화정을 인정하고 따르면 입헌군주제로 정착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겉으로는 헌법을 존중하고 공화정 수립을 인정하는 채 했지만, 뒤로는 왕당파와 외국 왕조와 결탁하여 반혁명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었고, 그에 따라 의회에서 '공화국의 적'으로 판결되어 처형된 것이다.

제5장 ~ 제9장은 나폴레옹 시대의 개막과 몰락(15년), 제1/2차 복고 왕정(15년)과 7월 왕정(19년), 제2공화국의 탄생과 좌절(5개월), 제2제국의 탄생(23년)과 프로이센 대 프랑스의 전쟁, 그리고 코뮌 혁명의 발발과 실패를 서술하고 평가한다. 프랑스 역사에서는 파리코뮌의 좌절과 함께 프랑스의 3공화국이 시작된다.

프랑스 혁명이 꾸준히 이어지지 않고 반혁명 - 쿠테타 - 군사독재 - 왕정복고 - 제2공화국 - 제2제국 - 파리코뮌이라는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 데 있어 큰 분기점은 혁명가 마라의 암살과 당통파의 실각, 그리고 로베스피에르와 산악파의 실각이었다.
저자는 로베스피에르의 산악파에 대한 데르미도르의 반동을 "프랑스의 민주 공화주의를 100년간 후퇴시킨 반혁명"으로 규정한다.

한국의 대다수 교과서나 책, 그리고 인터넷의 기록에 의하여 한국인들은 로베스피에르라고 하면 당연히 '공포정치'와 '독재'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혁명정파인 산악파가 집권했을 때의 프랑스 현실은 프랑스혁명을 완성시키기 위한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했다.
5장을 통해 처음 알게된 사실은 로베스피에르가 세상에 알려진 소문과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를 "냉철한 성격과 대담한 용기, 예리한 통찰력과 사람들을 압도하는 웅변, 탁월한 조직력과 완전한 공평무사"하다고 평가한다. 로베스피에르의 예리한 통찰력은 1792년 독일 군주들에 대한 혁명정부의 전쟁을 반대한 것으로 나타난다. 로베스피에르는 "전쟁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군사독재자가 나타나서 프랑스를 반혁명과 패전으로 이끌고 갈 것"이라며 전쟁을 반대함으로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출현(1799년)을 예고했던 것이다.
또한 로베스피에르와 산악파의 혁명정책은 "빈민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시민의 경제적 사회적 독립을 성취하고 그 독립을 기반으로 하여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세우려던 평등과 덕의 공화국 프로그램"이었다. 그들이 실각한 이후 그런 정책이 프랑스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100년 이상이 더 필요했다.(소설 <장발장>과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은 1829년 7월 혁명 후 설립된 7월 왕정 기간 중인 1832년 6월 봉기를 소재로 한 것이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프랑스만을 근대국가로 전환시킨 역사적 사건이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프랑스혁명은 낡은 전제주의 유럽 여러 나라에 자유와 평등, 국민주의와 자유주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새 씨앗을 뿌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프랑스 혁명은 그 자체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입헌 군주주의의 시도도, 민주 공화주의의 실험도, 심지어 나폴레옹 제국마저도 다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데이비드 톰슨과 뷔리의 입장을 소개하면서 프랑스대혁명 100년의 마지막을 장식한 파리 코뮌의 실패를 프랑스의 "공화적, 혁명적 전통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20세기 사회혁명의 모델로 보았던 마르크스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평가에 무게를 두고 있다. 파리 꼬뮌의 처절한 경험이 사람들로 하여금 폭력에 의한 혁명의 기도를 포기하게 하여 제3공화국 체제라는 평화적 타결과 화해의 길을 열게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어째서 영국이나 미국처럼 순조롭게 시민혁명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피로 얼룩진 혁명과 반혁명을 되풀이해야 했을까?"라는 저자의 질문에 어떤 해답을 내릴 수 있을까? 사실 이 책을 모두 읽은 다음에도 쉽사리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과연 저자의 질문은 타당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영국 시민혁명은 왕권과 지주권력의 타협이 1차 혁명이고 부르주아와 왕권-지주권력의 타협이 2차 혁명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영국에서 진짜 "일하는 사람들"인 인민의 권력에 대한 타협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이 시민혁명이라 주장하기에는 영국 등 유럽대륙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1천만 명이 훨씬 넘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차지했다는 점에서 원초적으로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다. 미국의 시민혁명은 고작 영국이라는 식민지 본국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독립투쟁일 뿐이었다고 폄하할 수도 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의 시민혁명의 주요 주체인 부르주아 세력의 경우 해외에 광범위한 식민지를 개쳑(?)한 후에 식민지에서 수탈한 부를 통해 정치권력을 분배받고자 하는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정당성이 결여된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소위 '신식민지' 방식으로 군사 경제적 수탈을 계속하고 있지 않은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말까지의 한국현대사도 거칠게 표현하면 혁명과 반혁명이 반복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1894년 갑오농민혁명에서부터 1997년 IMF까지... 그 사이에는 1910년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 굴욕과 1919년 기미인민항쟁(3.1운동), 1928년 원산총파업과 1929년 광주학생항쟁, 1948년 4.3항쟁과 5.10 단독선거, 1950~53년 한국전쟁, 1960년 4월 혁명과 61년 반혁명 군사쿠테타와 1972년 유신 친위쿠테타, 1979년 부마항쟁과 12.12 반혁명 쿠테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과 1987년 6월항쟁, 1995년 전두환 구속과 1997년 IMF 경제붕괴까지 프랑스만큼 파란만장한 100년이었고 그 과정에서 민중들의 피와 땀이 물들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선거를 통한 혁명을 시도한 것이고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선거를 통한 반혁명을 시도한 것이라면 너무 과도한 규정일까??

비록 시대가 다르고 조건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기 때문에 프랑스혁명 이후 100년사를 한국현대사를 일대일로 맞대응하거나 비교할 수는 없어도 프랑스혁명 후 100년사에서 우리 역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 인상 깊은 문장 :

"8월 10일 사건은 파리 시의회 즉 파리 코뮌을 프랑스의 실권자로 만들었다. 입법의회는 파리 코뮌의 요구대로 왕권의 일시 정지를 선언하고 보통선거에 의한 새 국회인 국민공회의 소집을 가결했다. 왕권은 우선 잠정적으로 정지되었지만 결국 영원히 폐지될 터였다. 왕은 탕플에 유폐되었다. 그는 거기서 다섯 달을 더 살다가 처형되고 만다. 라파예트는 8월 10일 사건에 반격을 시도하여 일선 군대를 파리로 회군시키려다 실패하여 벨기에로 도망했다. 왕정을 수호하여 입헌군주 체제의 테두리에서 혁명을 성취하려던 사람들은 이제 라파예트와 함께 몰락하였다. 8월 10일 사건의 주동 세력은 온건한 부르조아가 아니라 파리의 노동자와 빈민과 영세 상인이었다. 이들이 앞으로 혁명을 한결 더 과격하게 만든다. 이들은 귀족이 입는 퀼로트라는 바지를 입지 않는다고 하여 '상퀼로트'라 불렸는데, 이제 이 상퀼로트가 파리 코뮌의 실권자로 나타났다."(p.126~127)

"돌격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무장 군인이 의사당을 점령하였다. 총검이 500인회 의원들을 쫓아냈다. 저녁 7시경 원로원은 앞서 500인회가 결의한 나폴레옹의 추방을 취소하는 조건으로 보나파르트, 시에예스, 뒤코스의 3인으로 구성되는 임시 통령정부의 조직을 공포하였다. 총재정부는 폐지되고 새 통령들에게 행정권이 위임되었다. 루시앵은 30~40명의 500인회 의원들을 긁어 모아놓고, 원로원의 결정을 승인하고 62명의 자코뱅파 의원을 제명하고 12월 22일까지 6주일간의 휴회를 결의하였다. 밤 2시, 세 사람의 통령이 의회에서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선서하였다.
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라고 한다. 지난 1792년에, 혁명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면 혁명은 결국 군인 독재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리라던 로베스피에르의 말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10년간의 혁명은 이제 한 군사 모험가의 지배로 그
막을 내렸다.(p.207)

"3월 28일 정식으로 파리 코뮌이 선포되었다. 약 2만 명의 방위대와 수만 명의 시민이 운집한 시청 광장에서 의원으로 선출된 방위대 중앙위원회의 랑비에가 “인민의 이름으로 코뮌을 선언한다”고 외치자 “공화국 만세! 코뮌 만세!”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방위대의 행렬이 프랑스 국가 ‘라마르세예즈’의 주악에 맞추어 의원들의 사열대 앞을 보무도 당당히 행진하면 민중의 미친 듯한 갈채가 우뢰처럼 터져 나왔다. ……
분명히 파리의 민중은 이제 자신이 자신의 생활과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감동과 의욕에 넘쳐서 코뮌 선포의 날을 축제의 날로 지샜다. 민중의 소박하고 약동하는 해방감이 코뮌의 파리를 뒤덮었다."(p.417~418)

[ 2014년 2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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