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0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0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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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의 부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10권은 도로, 수도 등 로마의 인프라, 즉 사회간접시설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작가는 가도, 다리, 수도 등 하드 인프라와 의료, 교육 등 소프트 인프라에 대해 한꺼번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그런데, 인프라를 정리한 것 치고는 내용이 조금 부실해 보인다.
하드 인프라만 하더라도 항만, 성벽, 군단기지, 목욕탕, 신전 등을 추가할 수 있고 소프트 인프라만 하더라도 의료, 교육 이외에 법률, 세금, 재정, 국방, 지자체, 식량 등 훨씬 많은 것을 다룰 수 있는데 다 빠져있다.
작가 말로는 ’각 권에 틈틈히 충실하게 다루었다’고 하는데 그것만이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작가에게는 조금 실례일지는 모르지만, 혹시 15권을 맞추려고 중간에 인프라를 끼워넣은 것은 아닌지...ㅋ
 
작가가 정리한 하드 인프라는 가도, 다리, 수도다.  

우선 로마 가도는 작가 말대로 굉장하다. 그리고 가도는 수도와 더불어 인류역사에 상당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보는 로마 가도의 특징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가도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인들이 가도를 단순하게 ’통행로’나 ’군사로’가 아니라 종합적인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건설했다는 점과
  목적지를 연결하는 가도라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가도와 가도를 연결하여 로마식 ’네트워크’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로마 가도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가도는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즉 종합적으로 이용되었다.
  또 중요한 점은 로마 가도는 국가와 지도급 인사들에게 있어 ’당연히’ 건설해야 하고 확장해야 하는 것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국가 재정 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는 기본이고 원로원 의원이나 유력자들이 모두 앞다투어 가도를 건설하여 기증하게 된다.
  로마는 기원전 120년에 이미 최초의 ’샘프로니우스 도로법’을 제정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로마의 기본적인 인프라에 대해 동일한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둘째, 건설 주체
  가도를 실제 건설한 주체의 경우 간선도로는 대부분 로마군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가도 건설의 최초 목적이 대부분 군사용이었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단체나 사도의 경우 민간 사업자에게 용역을 의뢰하여 건설한다.
셋째, 가도의 구조...
  로마 가도의 수평구조는 4m의 차도, 차도 양 옆에 3m 전후의 인도, 그리고 배수로 등 평균 약10m로 이루어져 있다.
  수직구조는 4개층으로 구성되어 최하층은 자갈층, 2층은 돌+자갈+점토, 3층은 잘게 부순 돌, 최상층은 접합면이 딱 들어맞도록 70x70cm의 마름돌
  차도는 양 옆으로 기울기를 두어 빗물이 흘러가도록 하고 양측에 배수로를 만들어 빗물을 차도의 바깥으로 빼내도록 한다.
  차도 옆에 숲이 있을 경우 적당한 폭으로 나무나 풀을 제거하여 나무 뿌리로 인하여 가도가 망가지는 것을 방지한다.
  이 로마 가도는 로마인들이 유지보수를 포기하기 시작한 서기 3세기 중반부터 150년이 지난 후에도 가도를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0권을 읽다보면 연말이 될 때마다 시내의 도로와 인도를 들어내고 다시 아스팔트와 보도석을 까는 국내 상황이 우울해진다...)
넷째, 가도의 체계...
  최초 로마 가도는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남북을 X로 교차하도록 건설했다.
  모든 로마 가도에는 1로마마일(약1.5km)마다 이정표 역할을 하는 돌기둥을 세워 가도 사용자들이 거리를 가늠할 수 있도록 설치했다.
  로마인들은 조선시대의 파발처럼 국영 우편제도를 활용했고 적정한 거리마다 말을 갈아타고 마차를 정비하는 ’스타티오네스’를 설치하고 그곳에 숙박업소와 음식점 등을 만들어 놓았다.
다섯째, 가도의 길이...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500년 동안 로마인이 건설한 도로의 총길이는 간선도로만 80,000km이고 지선까지 합하면 무려 15만km나 된다.
  이 길이는 이탈리아 반도 뿐 아니라 갈리아 속주, 브리타니아 속주, 히스파냐 속주, 발칸반도, 소아시아 속주, 이집트, 북아프리카 모두 포함한다.
여섯째, 가도의 활용과 시스템...
  가도에 대한 로마인의 인식은 ’건설’ 뿐 아니라 ’유지보수’ 역시 정책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로마 집정관이나 통치자, 황제, 속주총독과 지방자치단체장은 로마 가도와 인프라의 유지보수에 적절한 예산을 배정,집행하고
  집행부서(내각)과 공식적인 직책에 인프라 유지보수 담당자를 임명하여 관리하도록 했다.
 
작가는 10권에서 로마의 가도를 정리하면서 중국 진나라 시대의 만리장성과 비교한다.
진나라의 만리장성은 기원전 3세기에 진시황이 건설했고 총 길이는 5,000km이다.
작가는 국가규모의 대규모 토목사업이 로마는 가도로, 진나라는 방벽을 건설했는지를 비교하려고 시도한다.
물론 결론은 양측 국가와 민족의 사고방식 차이를 보여주려는데 있다.
방벽은 사람의 왕래를 차단하지만, 가도는 사람의 왕래는 촉진한다는 것...
로마의 역사는 1,200년이고 진나라의 역사는 200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방벽과 가도를 단순하게 비교하면서 두 나라 민족의 사고방식과 문화, 정책을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작가가 방벽과 가도를 통해 두 나라를 비교하려면, 중국의 진나라와 그 전후 시대에 대해 로마사만큼 연구한 후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방벽으로만 보면 로마 역시 로마 제국의 국경을 결정한 후 그 경계에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건설했다.
나머지 지역의 경계에 방벽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그 경계가 천연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북쪽은 바다(북해), 서쪽도 바다(대서양), 남쪽은 사막, 동쪽도 바다(흑해와 에게해)와 사막(아라비아 사막)...






아무튼 두 번째 하드 인프라인 로마의 다리도 상당히 역사적 의미가 있어 보인다.
특히 배수 설비와 교각 공법, 수도교가 그렇다.
로마인들은 21세기에도 사용되는 교각 설치공법을 기원 전에도 사용했다.

 
 
로마의 수도는 혀를 내두르게 될 정도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수도교’였다.
로마의 수도라인 설치는 기원전 312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진나라는 기원전 224년에 건국되었다. 일본에는 국가다운 국가도 없었지만...)
가장 많았을 때 로마 시내에는 수도 라인이 최초 라인인 ’아피아 수도’ 등 총 11개에 이른다.
총 길이는 무려  449.5km에 달하고 하루에 로마로 들어오는 수돗물은 1백만 세제곱미터에 이른다.
인구가 100만명이라면 1인당 1세제곱미터의 수도를 공급하는 규모다.(누수 고려하면 0.5~0.6세제곱미터)
20세기 말에 서울, 도쿄, 로마, 파리, 런던시내의 수돗물 공급량은 약 0.5세제곱미터 정도였다.
수도는 로마의 문화인 목욕장과 특히 관련이 크다.

  
로마인들의 하드 인프라는 동시대 지구상의 어떤 민족이나 국가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그러한 뿌리가 있었기에 뿌리를 되살린 르네상스 이후에 서구가 다른 대륙을 뛰어넘어 또 다시 전세계를 지배,재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로마의 이런 뛰어난 역사를 한 입에 말아먹어 인류 역사의 발전(통상적인 의미에서)을 가로막은 것은 기독교도였다.
(내가 지적한 것은 당시의 기독교도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소프트 인프라 역시 로마가 다른 제국과 다를 수 밖에 없는 창조성과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솔직이 작가가 10권에 직접 다루는 의료와 교육은 로마의 인프라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그것은 로마의 시스템이자 문화 중에서 가장 특이한 부분이다.
의료와 교육은 정부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민간이 주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의료 부분은 로마인의 ’인생관’ 또는 ’죽음관’과 관련이 있다.
로마인은 ’달이 차면 기울게’ 되듯이 사람이란 늙으면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죽음에 대한 태도였다.
그래서 로마인, 특히 상류층이나 귀족으로 올라갈수록 크게 아프거나 죽을 때가 되면 식음을 전폐하여 죽음을 앞당기려고 했다.
어린이나 청장년층의 경우 신전에 들어가서 기원을 들이거나 도시 외곽에 집단 휴양소를 지어서 병과 싸우도록 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로마는 유아 사망율도 높았다.
로마에는 공식적인 의료기관이나 병원이 없었다.
그리스 도시국가 출신 중 의료를 연구한 학자들이 로마에 와서 사설로 의료기관을 운영하기는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에 나가서 전투 중에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대규모 병원시설을 건립하고 의사와 간호사를 대기시켜 놓기는 했다.
로마군대의 군단 규모는 약6,000명인데 그 중에는 의사와 간호사가 기본적인 지원병력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로마에서는 교육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민간이 주도하였다.
로마는 그리스의 종교를 받아들여 로마화하였는데 교육의 경우에는 그리스의 교육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로마의 상류층이나 기사계급의 자제들의 경우 그리스 도시국가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교육을 받았다.
로마가 망할 때까지 유지한 정책과 시스템 중에는 ’잘하는 사람(지역)이 잘하는 분야에 집중하기’가 있다.
그리스의 경우 일찍부터 예술과 교육, 학문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굳이 로마 내에 예술이나 학문을 위한 기관을 설립하지 않았다.
로마는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면서도 예술과 교육의 경우 그리스의 전통과 강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로마의 일반적인 교육방식은 10세 이전까지는 노예나 어머니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10세가 넘어서면 그리스 학자를 초빙하여 가르치거나 그리스 학자들이 로마 시내에 소규모로 개설한 학원에서 배우도록 한다.
10세 이전에 배우는 초등교육() 교과목은 라틴어로 읽기, 쓰기, 셈하기...
10대에는 중등교육(그람마티키 스콜라)은 17세까지이고 그리스어, 문학, 역사를 배운다.
10대 후반이나 20대에 들어가서 법률을 공부하거나 더 높은 학문을 배우려면 그리스 도시국가로 가게 된다.
(지원병으로 바꾸기 전까지 로마인들은 17세에 군대에 입대했다.)
17세에서 20세까지는 고등학교(레토리스 스콜라)에서 변론이 주요 과목이었다.(변호사나 정치가를 키우는 것이 목적...)
17세 이상부터 추가적인 전문 교육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나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에 유학을 간다.
 
법률 등 다른 소프트 인프라는 생략... 

 [ 2010년 10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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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1-06-29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과 사진들을 쭈욱 살펴보니 금방이라도 로마에 다시 가보고 싶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