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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7월
평점 :
난 전형적인 문과생이다. 수학과 과학은 젬병이다.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고등학생 시절이다. 10번도 넘게 봤기에 유제풀이집의 풀이방법을 달달 외울 정도였지만 숫자 몇개만 바꾸면 답을 맞출 수가 없었다. 수능시험 당시 3자리 숫자의 주관식 답을 찍어서 맞출 정도였지만(대단한 적중율이 아닌가? 999개의 숫자, 거이에 양과 음을 계산하면 거의 1/2000의 확율인데 그것을 맞추다니 지금생각해도 대단하다.) 그래도 반타작이 어려웠다. 내 내신과 수능성적의 대부분은 언어와 외국어, 그리고 사회탐구 영역이 담당했었다. 대학에 진학한 후 가장 좋았던 것은 더 이상 과학과 수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도?
그래서 일까? 고등학생 시절 문학과 시에 탐독했다. 선생님들의 우려와 갈굼을 논술 준비하고, 언어 영역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무마했다. 재수가 좋아서인지 몰라도 1학년과 3학년 담임은 영어 선생님이었고, 2학년 담임은 국어 선생님이었다. 공부를 썩 잘했던데다가 특히 영어와 국어를 잘했기에 문학과 시에 대한 나의 탐독이 어느 정도 용인이되었으리라. 그렇게 닥치는대로 시를 읽어가다가 김지하의 시를 만났다. 김수영의 시도 좋았고, 유치환의 시도 좋았지만 내게 으뜸은 김지하였다.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 때문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모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마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모마음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아직 동트지 않은 뒷 골목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 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는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 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글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
난 이 시 때문에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었다. 왠지 이 시를 읽으면서 책상에서 정독하면 안될 것 같아서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몰래 읽어 보기도 했다. 이 시는 오적으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운동권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김지하는 내 마음으로 표상으로 바뀌었다. 기회만 있으면 저 사람을 만나보고, 그의 생각을 듣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을 품기도 했다.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초청 강연을 준비하다가 마침 옥에서 풀려난 김지하를 강사로 모시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찾아가기도 했다. 물론 바쁜 그를 강사로 초빙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무엇인가 찜찜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품었던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이름으로 서투레 백묵으로 쓰던 그는 사라지고 생명 사상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수감 생활이 그를 더 깊은 차원의 단계로 이끌었고, 그 차원에서 생명을 주창하는 것이라 이해했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김지하는 희미해져 갔지만 타는 목마음으로라는 노래와 시는 여전히 내 마음 한켠에 김지하를 담아 두게 했다. 그리고 그 시처럼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은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70년대 박정희의 유신 독재 때문에 옥살이를 했던 그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불렀던 그가 박근혜를 지지한 것이다. 난 내눈을 의심했다. 잘못 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의 글은 선명한 활자로 내 눈에 박혀 들었고, 그만은 변하지 않기를 바랬는데 나의 욕심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후 난 한켠에 담아 두었던 김지하라는 존재를 지워 버렸다. 어느 누가 말했던 것처럼 김지하는 사라지고 김광석만 남았다.
리뷰를 작성하면서 김지하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 놓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난 김지하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였던 저자의 아버지가 현실과 타협하면서 변절해가는 역사는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며, 외국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김지하의 이야기이고,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아나키스트의 길을 갔고, 함께 걸어갔던 동지 중에 어떤 이들은 신념을 지키다 죽었고, 살아 남은 이들은 현실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죽였다. 물론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현실에 대한 두려움, 걱정,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신념을 희석시켜 공중으로 흩어버리고, 변화를 정당화 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곧 변신으로 그리고 변절로 나아간다. 신념과 삶의 간극을 메우지 못한 한 아나키스트는 결국 서글픈 선택을 하게 된다.
그가 공중에 몸을 던지는 그 순간에, 땅에 떨어지는 그 몇 초라는 짧은 순간에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에 대한 삶을 후회했을까? 아니면 변절한 자신을 혐오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소원을 품었을까?
김지하는 지금 이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후회? 혐오? 확신? 그것도 아니면 자포자기? 잘 모르겠다. 한 아나키스트가 투신한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고, 내게 큰 충격을 준 김지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들이 아니니 어찌 그 속을 알겠는가? 다만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부렸구나라는 서글픈 자책과 함께, 더 큰 욕심이지만 품어 본다. 어찌되었던 그가 내게 줬던 도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오적을 말하던 그가 오적이 되었고, 박정희를 반대하던 그가 박근혜를 찬양하게 되었지만 난 그가 다시 한번 그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비록 지금은 추락했지만 그가 다시 한번 날아 올랐으면 좋겠다. 이렇게 변절해 버린 채로 남아 있기에는 그가 느꼈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너무 서글프기 때문이다. 내 욕심이지만 한번만 더 욕심을 부려보고 싶다. 내 욕심을 담아 이상의 날개를 적어 본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