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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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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쥐!

 

  아주 짧은 이 한단어에서 어떤 말들이 연상되는가? "징그럽다, 지저분하다, 페스트, 왕성한 번식력, 해충박멸, 미키마우스, 월트디즈니, MB..." 쥐에 대해 연상되는 단어들이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다. 미키마우스나 월트디즈니 같은 것들이야 비교적 근대에 생긴 이미지들이니 쥐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들은 죽여 마땅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쓸모없는 것들이 아닐까? 이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각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처음에 쥐라는 만화의 제목을 접하고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다냐라는 의아함을 품었다. 아마도 내게 이달의 리뷰에 뽑혀서 알사탕이 생기지 않았다면 아직도 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생긴 알사탕을 가지고 무슨 책을 지를까 고심하다가 요즘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서 시간에 쫓기니 비교적 가벼운 것을 택해야겠다는 얄팍한 생각에 습지생태보고서와 쥐를 택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비교적 간단하게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채 10장을 읽기도 전에 오판이었음이 드러났다.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넘기기 어려운 책은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이후로 처음이었다.

 

  작가는 아버지의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만화라는 매체로 재구성을 했는데 흑야나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보다 내겐 더 큰 무게로 다가왔다. 유태인을 쥐로, 독일인을 고양이로, 폴란드인을 돼지로,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을 개구리로 표현하고 있는 그의 책을 읽어가면서 "왜 하필이면 쥐야? 독일인에 의해 희생당한 유태인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키려면 양이라는 캐릭터가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저자의 말장난 앞에 "아하...그렇구나."라며 감탄을 했다. 아우슈비츠를 저자는 마우슈비츠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 말장난에서부터 시작된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왜 쥐인가? 당시 미국의 아이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캐릭터가 월트디즈니사의 미키마우스다. 아우슈비츠의 내용을 가지고 만화를 그리면 아무래도 내용이 꽤나 무거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는 아이들과 청소년들, 그리고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어필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야?"라는 식상함이 가득담긴 질문 속에서 많은 이들에게 외면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무리 만화로 그려진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월트디즈니의 쥐라는 캐릭터에 친숙한 사람들에게 쥐라는 캐릭터를 충분히 가볍게 이 책을 접하게 하는 미끼가 될 것이다. 게다가 마우슈비츠라는 말장난은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머리에 각인시키는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쥐라는 캐릭터를 택했다는 것은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이 책이 읽혀질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난 다음에 독일인과 유태인의 관계를 설명하기에는 이보다 더 적절한 캐릭터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한번 묻겠다. 쥐와 고양이의 관계를 적절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그냥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왜 그것이 당연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하니까 당연하다는 말외에는 할 말이 없다. 게다가 한번도 쥐의 입장에서 쥐를 변호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쥐는 그저 죽여야 하는 해충일 뿐이니 말이다. 독일인들이 유대인을 죽인 이유에 대해서도 적절한 설명이 가능한가? 왜 그렇게 많은 독일인들이 한마디의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유태인을 죽이는데 가담했을까? 독일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악해서? 독일인들이 유태인들을 원수처럼 미워해서? 아니다. 뉘른베르크의 전범재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이 유태인을 그렇게 원수처럼 생각하고 죽이려고 노력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궁색한 변명만을 할 뿐이다.

 

  아마도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의 지도자들은 여러가지 정치적인 이유가 있을지 몰라도 일반 독일인에게는 그렇게 악랄하게 유대인을 죽일 마땅한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은 왜 그렇게 엄청난 악행을 자행했던 것일까? 그들에게 있어서 유태인은 인간이 아니라 쥐와 같은 존재라는 인식이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쥐를 보면 불상히 여기고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대신에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세상에서 반드시 잡아 죽여야 하는 해충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판단의 기준으로 우리에게도 던져준다.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은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묻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다른 책의 내용처럼 공감하면서 읽지 못하거나, 덤덤하게 읽고 있다면 어느새 우리도 독일 나치의 가치관에 물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더 비극적이고, 더 무겁게 다가온다.

 

  쥐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것이 단순히 유태인과 독일인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말일까? 아니다. 상대방을 해충으로 보고 마당히 죽여야할 대상으로 격하시켜버리는 심리적인 매커니즘은 현재 한국 사회에 팽배해 있다. 종북이, 좌빨, 좌좀, 홍어, 일베충, 꼴보수 등등.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해충으로 보고 반드시 박멸시킬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가? 상대방에 대한 인권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상대방은 인간이 아니라 쓰레기요, 해충으로 취급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변호인이라는 영화에서, 남영동이라는 영화에서 우리가 그렇게 불편하게 느꼈던 모습들이 어느새 우리들의 모습 속에도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지 않은가? 일베충이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는 일베를 벌레처럼 여기고 있지 않은가? 좌좀이라는 말을 통해서 상대방을 괴물이요, 제거해야할 쓰레기로 치부해 버리고 있지 않은가? 선교나 성지 순례를 나간 사람들이 당한 비극을 바라보면서 "잘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일인가? 안현수를 빅토르 안이라고 부르면서 변절자요 배신자라고 욕하는 것, 축구 선수를 보면서 기레기, 밥줘라고 부르면서 비하하고,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기 보다는 찧고 까부는 모습을 보면서 쥐와 도대체가 무엇이 다른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고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면서 꼼짝도 하지 않는 노조를 보면서 이미 한국은 마우슈비츠로 가고 있지 않는가라는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잠깐 멈추어서 진지하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쥐가 정말 죽어 마땅한 동물인가? 쥐에게 권리는 없는가? 뜬금없이 쥐의 鼠권에 대해서 묻는 나른한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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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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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습지센터에서는 습지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습지(濕地 wetland)의 사전적인 의미는 “물기가 축축한 땅”을 지칭하는 말로 간단하게 말하면 물을 담고 있는 땅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습지는 물에 따라 동식물의 생활과 주변 환경이 결정되는 곳이며 1년의 일정기간 이상 물에 잠겨 있거나 젖어 있는 지역을 말한다. 하지만 습지에 대한 상세한 정의는 나라마다 또는 전문가마다 조금씩 의미가 다르다.

  우리나라 습지보전법(1999년 8월 7일 시행)에서 정의하고 있는 습지는 "습지란 담수1)·기수2) 또는 염수가 영구적 또는 일시적 으로 그 표면을 덮고 있는 지역으로서 내륙습지 및 연안습지를 말한다.“ 「내륙습지」는 육지 또는 섬 안에 있는 호 또는 소와 하구 등의 지역, 「연안습지」는 만조3)시에 수위5)선과 지면이 접하는 경계선으로부터 간조6)시에 수위선과 지면이 접하는 경계선까지의 지역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에 이어서 국립습지센터는 습지의 여러가지 순기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습지를 보호해야한다는 주장을 편다. 나는 지금 이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습지에 대해 이런 긍정적인 시각이 있는 반면 그 습지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더군다나 그 습지라는 것이 이 만화에서처럼 20대들의 불확실한 미래를 은유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때는 더욱 그렇다.

 

  처음 습지 생태 보고서라는 제목을 보고는 환경보호 단체에서 펴낸 글인가 싶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지만 습지라는 말이 20대의 눅눅한 지하 자취생활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작가의 천재적인 작명 실력에 감탄을 했었다. 왠지 사서 읽어 봐야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때마침 할인 판매를 하기게 낼름 주문했다. 한장 한장 넘겨가면서 "리얼 궁상 만화"라는 작가의 호언장담이 허언인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20대의 궁상이 눅눅하게 묻어 있는 그들의 생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스카이, 인서울, 지잡대로 구분되는 현재의 구도 속에서 지방사립대학에 다니는, 그것도 잘 안팔리는 만화를 그리는 학과에 다니는 지지리 궁상맞은 20대의 삶을 유쾌하게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만화가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다. 유쾌함 속에 슬픔이, 일상 속에 20대 청춘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작가가 나온 상명대학을 잘 안다. 내가 살던 동네 바로 옆에 있던 대학이기 때문이다. 내가 고3이던 시절에 주변에 꽤 많은 대학들이 있었다. 단국대학교, 순천향대학교, 상명대학교, 천안공전 등등. 흔히 그렇듯이 자기 집 주변에 있는 학교를 그다지 높게 여기지 않는 풍토가 우리 안에도 있었고, 그래서 그 학교들을 우리는 이렇게 불렀다.

 

  "단포드, 순브릿지, 상르본, 천안 MIT공전, 호버드"

 

  선생님들도 우리에게 농담처럼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서울에 있는 학교, 그 중에서도 스카이를 가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대학의 서열화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소신있게 지원해서 서울에 갈 사람들은 서울로 가고, 근처의 대학에 갈 사람들은 위에서 말한 대학 가운데 하나를 택해서 갔다. 서울로 가지 못했다고 해서, 혹은 서울에 있는 학교를 갔다고 해서 친구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결코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서울에 가 있는 친구들은 서울에서 만나고, 고향에 남아 있는 친구들은 고향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후배들 사이에서 이렇게 고향에 남아 있는 친구들을 패배자로 낙인찍는 풍토가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가던 그런 풍토가 이제는 확고해져서 무조건 인서울을 외치는 시대가 되었다. 지방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혹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학교를 간 이들은 마치 인생에서 절대로 회복할 수 없는 패배를 당한 것처럼 항상 주눅들어 있기 시작했다. 학교를 어디 갔느냐는 말에 절대로 자기가 다니는 학교를 가르쳐 주지 않던 입시생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패배감이라는 절망의 수렁이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 안쓰럽고, 불쌍한 생각이 들었었다. 아마도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감정은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대로 패배감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탈출이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눅눅한 지하 자취방의 느낌이 아닐까? 한창 도전하고 열정을 불태워야할 나이에 인생의 곳곳에 패배감이 눅눅하게 뭍어 있는 그들을 보면서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걱정은 하지만 실제로 내가 그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나조차도 어느새 인서울을 그들에게 강요하는 세대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카이에 가지 못한 것이, 인서울하지 못한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닐텐데, 인서울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의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닌데 어느새 나조차도 그들에게 눅눅함을 강요하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 비해서 병아리 눈꼽만큼 나은 것은 공부를 조금 더 해서 인서울 했다는 것이고(그렇다고 내가 다닌 학교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다. 워낙 인기 없는 학과를 지망했기 때문이다.), 그들보다 IMF의 타격이 덜 할 대 학교에 들어갔다는 것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나는 기득권이 되어서 그들을 정죄하고, 당연한듯이 그들에게 20대의 열정대신에 지지리 궁상과 눅눅함을 강요하고 있는 기득권이 되었다. 마치 그들을 생각해 주는 척 왜 짱돌을 들지 않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그 밑바닥에 그들에게 눅눅함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힘들어하고, 답답해하는 것은 그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책은 나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그 꼰대기질이 어느새 내 안에 깊이 스며 들어서 당연한 듯이 가르치려고 드는 나를 자각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들이 정말 안쓰럽다면 최소한 그들에게 눅눅함과 궁상을 강요하지는 말아야하지 않겠는가? 아직 출발선에 서지도 않은 그들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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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2-13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 벗들이
굳이 서울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치지 말고
즐겁게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울 보금자리'를 찾고
스스로 가장 즐거운 일과 놀이를 찾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어요.

saint236 2014-02-13 20:31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도 시골에 가서 살까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지만 쉽지 않은 선택이네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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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전형적인 문과생이다. 수학과 과학은 젬병이다.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고등학생 시절이다. 10번도 넘게 봤기에 유제풀이집의 풀이방법을 달달 외울 정도였지만 숫자 몇개만 바꾸면 답을 맞출 수가 없었다. 수능시험 당시 3자리 숫자의 주관식 답을 찍어서 맞출 정도였지만(대단한 적중율이 아닌가? 999개의 숫자, 거이에 양과 음을 계산하면 거의 1/2000의 확율인데 그것을 맞추다니 지금생각해도 대단하다.) 그래도 반타작이 어려웠다. 내 내신과 수능성적의 대부분은 언어와 외국어, 그리고 사회탐구 영역이 담당했었다. 대학에 진학한 후 가장 좋았던 것은 더 이상 과학과 수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도?

 

  그래서 일까? 고등학생 시절 문학과 시에 탐독했다. 선생님들의 우려와 갈굼을 논술 준비하고, 언어 영역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무마했다. 재수가 좋아서인지 몰라도 1학년과 3학년 담임은 영어 선생님이었고, 2학년 담임은 국어 선생님이었다. 공부를 썩 잘했던데다가 특히 영어와 국어를 잘했기에 문학과 시에 대한 나의 탐독이 어느 정도 용인이되었으리라. 그렇게 닥치는대로 시를 읽어가다가 김지하의 시를 만났다. 김수영의 시도 좋았고, 유치환의 시도 좋았지만 내게 으뜸은 김지하였다.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 때문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모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마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모마음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아직 동트지 않은 뒷 골목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 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는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 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글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

 

  난 이 시 때문에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었다. 왠지 이 시를 읽으면서 책상에서 정독하면 안될 것 같아서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몰래 읽어 보기도 했다. 이 시는 오적으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운동권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김지하는 내 마음으로 표상으로 바뀌었다. 기회만 있으면 저 사람을 만나보고, 그의 생각을 듣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을 품기도 했다.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초청 강연을 준비하다가 마침 옥에서 풀려난 김지하를 강사로 모시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찾아가기도 했다. 물론 바쁜 그를 강사로 초빙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무엇인가 찜찜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품었던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이름으로 서투레 백묵으로 쓰던 그는 사라지고 생명 사상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수감 생활이 그를 더 깊은 차원의 단계로 이끌었고, 그 차원에서 생명을 주창하는 것이라 이해했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김지하는 희미해져 갔지만 타는 목마음으로라는 노래와 시는 여전히 내 마음 한켠에 김지하를 담아 두게 했다. 그리고 그 시처럼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은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70년대 박정희의 유신 독재 때문에 옥살이를 했던 그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불렀던 그가 박근혜를 지지한 것이다. 난 내눈을 의심했다. 잘못 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의 글은 선명한 활자로 내 눈에 박혀 들었고, 그만은 변하지 않기를 바랬는데 나의 욕심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후 난 한켠에 담아 두었던 김지하라는 존재를 지워 버렸다. 어느 누가 말했던 것처럼 김지하는 사라지고 김광석만 남았다.

 

  리뷰를 작성하면서 김지하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 놓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난 김지하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였던 저자의 아버지가 현실과 타협하면서 변절해가는 역사는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며, 외국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김지하의 이야기이고,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아나키스트의 길을 갔고, 함께 걸어갔던 동지 중에 어떤 이들은 신념을 지키다 죽었고, 살아 남은 이들은 현실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죽였다. 물론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현실에 대한 두려움, 걱정,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신념을 희석시켜 공중으로 흩어버리고, 변화를 정당화 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곧 변신으로 그리고 변절로 나아간다. 신념과 삶의 간극을 메우지 못한 한 아나키스트는 결국 서글픈 선택을 하게 된다.

 

  그가 공중에 몸을 던지는 그 순간에, 땅에 떨어지는 그 몇 초라는 짧은 순간에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에 대한 삶을 후회했을까? 아니면 변절한 자신을 혐오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소원을 품었을까?

 

  김지하는 지금 이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후회? 혐오? 확신? 그것도 아니면 자포자기? 잘 모르겠다. 한 아나키스트가 투신한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고, 내게 큰 충격을 준 김지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들이 아니니 어찌 그 속을 알겠는가? 다만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부렸구나라는 서글픈 자책과 함께, 더 큰 욕심이지만 품어 본다. 어찌되었던 그가 내게 줬던 도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오적을 말하던 그가 오적이 되었고, 박정희를 반대하던 그가 박근혜를 찬양하게 되었지만 난 그가 다시 한번 그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비록 지금은 추락했지만 그가 다시 한번 날아 올랐으면 좋겠다. 이렇게 변절해 버린 채로 남아 있기에는 그가 느꼈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너무 서글프기 때문이다. 내 욕심이지만 한번만 더 욕심을 부려보고 싶다. 내 욕심을 담아 이상의 날개를 적어 본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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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11-06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사의 가벼움이었을까요? 어쩌면 그리 깊은 생각없이 써내려간 시 한줄에 사람들이 그를 저항의 상징으로 만들었을 뿐, 그의 실체는 그저 그런 한 사람의 글쟁이였을지도 모르겠네요. 황석영씨도 가카와 함께 순방길에 올랐던 것을 보면, 가벼운 문사들에게는 그런 세속을 향한 욕구와 허영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saint236 2013-11-06 10:18   좋아요 0 | URL
그래서 어떤 이는 그를 그저 글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싶은 욕망 덩어리라고 평하더군요

transient-guest 2013-11-07 02:31   좋아요 0 | URL
'욕망 덩어리' 아니 '덩어리'라는 표현이 지금의 그에겐 딱 맞는 듯 합니다. 거기다가 '증오'나 '술' '밥' '고기' 등등 거의 모든 단어를 붙일 수 있죠.ㅎ

숲노래 2013-11-30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지하 님은 책을 너무 많이 읽었어요.
이녁 장모님(박경리)처럼 흙을 만지며 풀을 손수 길러서 먹었다면
글을 쓰더라도
아마 아주 다르면서 아름다운 빛을 우리한테 남길 수 있었으리라 생각해요...

saint236 2013-11-30 20:35   좋아요 0 | URL
위에서 말했듯이 그분의 변절(모르겠습니다. 다른 분들이 뭐라할지 모르겠지만 제겐 변절이지요.)이 정말 안타깝네요. 제목대로 그만은 변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 저의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숲노래 2013-12-01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걱정하거나 안타까워 하지 마셔요.
아직 살아서 글을 쓰고 강연도 하니까요.

장모님처럼 조용한 시골에서 스스로 밥을 짓는 흙삶 일구면
언제가 되든 슬기롭게 깨달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기다려야지요...

saint236 2013-12-01 23:29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요즘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요원한 일처럼 보입니다.
 
미생 1~9 완간 박스 세트 - 전9권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미생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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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생이 완결되었다. 처음에는 웹툰인지 모르고 시작했던 만화인데 9권이 완결되었고, 기념으로 끼워주던 책꽂이는 나에게 이 책을 다 소장해야할 그럴듯한 이유를 제공해 주었다. 이제 9권을 다 쳤으니 그동안 미뤄두었던 리뷰도 작성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을 했지만 쓰다가 임시로 저장해 놓고 벌써 3주가 넘었다. 바쁜 일도 있었지만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였다. 아직 생각이 완전히 정리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정리를 되었기에 리뷰 작성에 도전해 본다.

 

  바둑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에게 미생은 상당히 낯선 용어이다. 내게 미생이란 선덕여왕에서 정웅인이 연기했던 캐릭터를 먼저 떠올리게 만드는 이름이다. 미생을 마지막까지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생이라는 단어의 정립이 쉽지가 않아서 인터넷을 검색해봤다. 그리고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낸 그림과 설명으로 미생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위키피디아의 미생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내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 때문에 글씨가 완전히 같지는 않다.)

 

 

  먼저 위의 그림을 보자. 좌측과 우측 모두 흑돌이 백돌에 포위되어 있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좌측은 백과 흑이 모두 집을 만들어서 흑돌이 더이상 뻗어나갈 방법이 없다. 그렇지만 우측의 형국에서는 아직 나갈 방법이 있다. 다음 그림을 보면 이해가 된다.

 

 

  백돌이 2와 4의 공간에 돌을 채워서 집을 만들려고 하는 사이에 혹은 그곳을 포기하고 좌측에 1,3,5를 두면 백돌 세개를 포위하게 된다. 이것을 완생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완생은 되지 못햇지만 완생이 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수를 미생이라고 한다. 동안에백이 빈 공간을 채우는 사이에 흑이 우측 상단을 포기하고 좌측에 석점을 두어서 백을 포위한다면 흑이 백 석점을 꼼짝 못하게 가두어 완생이 된다. 이렇게 완생은 되지 못했지만 완생이 될 가능성이 있는 수를 미생이라 한다. 첫번째 그림에서 미생이 완생이 되면 두번째 그림처럼 변하게 된다.

 

  완생이 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지만 아직 완생이 되지 않은 미생!

 

   작가가 이 만화에 붙인 미생이라는 제목은 기가 막히다. 프로 바둑 기사의 길엣 실패하고 비정규직으로 취업한 장그래! 신입사원으로 좌충우돌 샐러리맨의 길을 걸어가는 그의 동료들! 그들은 아직 무엇인가를 이루지 못했지만 앞으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미생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삶이 완생이 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들의 인생은 혼자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차곡차곡 진행하는 그러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국의 흐름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것처럼 인생이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미지의 생물과 같기 때문이다. 미완성, 완성이라는 말 대신 미생, 완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바둑과 인생의 이런 비슷한 점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각 에피소드의 제목들이 착수, 요석과 같은 바둑 용어로, 그것도 대국의 흐름에 따라서 사용하고, 그 용어에 어울리게 에피소드가 진행됨을 보면서 작가의 천재성에 감탄한다. 아울러 인생과 바둑의 유의미한 유사점을 보면서 인생을 배우기 위해서 바둑을 배워야한다는 말의 의미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화를 읽어가면서 결코 행복해지지가 않았다. 만화를 통하여 많은 인생의 지혜를 배우는데, 위안을 얻기도 하고 용기를 얻기도 하는데 만화의 긑이 다가올수록 씁쓸하다. 장그래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계약직, 시한부 목숨 등등 여러가지 수식어가 붙는 일자리가 장그래의 포지션이다. 그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리 대단한 실력과 열정을 가지고있어도 그는 한낱 계약직이다. 그냥 쓰고 버린다. 잠시 빌려 쓰는 존재일 뿐이다. 난 여기에서 상상이 아닌 현실로 돌아온다.

 

  나도 어느 분이 작성한 리뷰의 제목처럼 미생(未生)이 완생(完生)이 되고 미생(美生)되기를 희망하지만 "이렇게만 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라는 장그래의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미생이 이 시대의 또 다른 희망 고문임을 발견하게 된다. 잘만 되면, 노력만 하면, 성실히만 일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어, 혹은 비정규직보다 더 많이 벌 수 있어 등등 온갖 희망이 섞인 달콤한 말을 쏟아내면서 열정을 착취하는 구조가 미생이 담고 있는 현실이 아닐까? 미생의 내용 중 가장 현실적인 부분들은 가장 씁쓸하고도 비정한 부분임을 떠올린다면 만화책을 읽어가는 것이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 된다.

 

  우리는 미생과 완생의 사이에 서 있다. 미생에 훨씬 가까운 위치에 서 있다. 모두 완생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지만, 이 시대 우리에겐 완생이 될 가능성의 극히 희박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멈추어야 할 것인가? 완생을 향한 꿈마저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완생을 꿈꾸는 것은 희망일까, 고문일까? 너무 사치한 것일까? 이런 저런 고민 끝에 장그래도 사라지고, 오과장도 사라지고, 김대리도 사라지고, 장그래의 쓸쓸한 표정과 말 한마디만 남는다.

 

  "미생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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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10-31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우 현실적인,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완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긍정의 주문의 외우고 달려들어도 99%의 경우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죠. 더구나 수도권에 모든 것이 집중된 한국의 구조에서는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데, 한국의 현실에서 젊은 사람이 수도권을 떠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겠지요. 이곳에서 보면, 서울이나 부산이나, 전주나 강원도나 다 한국인데 말이죠.

saint236 2013-10-31 11:14   좋아요 0 | URL
요즘 긍정의 배신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더군요. 한국에서 서울은 다른 도시와는 다른 위치를 가지고 있죠. 모든 자본과 인력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은데 서울 시립대의 반값 등록금은 졸업후 서울에서 일할 인력을 키우는 하나의 방법이지요. 그런데도 이 사실을 잊고 서울 시민의 돈으로 지방 학생을 키운다며 반대하시는 분들은 도대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습니다.

transient-guest 2013-11-02 01:36   좋아요 0 | URL
솔직한 저의 표현으로는 서울이라는 도시는 한국이라는 국가에 있어 암 덩어리 같습니다. 너무 커져서 절개해도 죽을 수 있고, 절개하지 않으면 이대로 고통을 받으면서 천천히 죽어가는...지방분권시대라고는 하지만, 핵심산업과 기관은 모두 서울에 집중되어 있죠. 지방 거점도시를 바탕으로 발전을 시켜야 하는데, 이게 다 기득권과 관련이 있어서 어렵지요...

saint236 2013-11-02 13:23   좋아요 0 | URL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통일이 된 이후에나 가능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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