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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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밥바라기별 이후로 황석영의 책은 읽지 않을 생각이었다. 작가의 이름 때문에 선택한 책이었으나 워낙 실망했던터라 똑같은 실망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황석영의 책이 나왔다는 말에도 무심히 지나갔다. 그러다가 알라딘 중고 매장이란 곳이 오픈했다는 말을 들었다.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벼르고 벼르다가 동생 생일을 맞아 안국동에 건너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렀다. 한참을 고르고 고르던 중에 원하던 책은 얻지 못하고 그냥 이 책 하나 들고 나왔다. 그게 작년 10월 말의 일이었다. 사놓고 벌써 몇달이 흘렀지만 선뜻 손이 안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읽어야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에 고민을 하던 중에 며칠전부터 읽기 시작했다. 3일동안에 절반쯤 읽었나? 어제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새벽에 일찍 나가야하기에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잠이 안 오니 책이나 읽자고 읽던 책을 폈다. 그런데 참 묘하다. 강남몽이라는 책의 제목이 묘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강남이요, 뜬 눈으로 밤을 꼬박 새우고 있으니 정신이 몽롱하다. 말도 안되는 생각이지만 이게 강남몽인가 싶어 혼자 실실 웃어본다.

 

  강남!

 

  세련의 대명사다. 부의 대명사다. 이번 정권에 들어서는 권력의 대명사다. 오죽하면 강부자라는 말이 세간에 회자가 되었겠는가? 그뿐 아니다. 묘하게 강남은 진보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리버럴좌파, 캐비어좌파의 한국판 강남좌파라는 말이 강부자의 뒤를 이어 등장하지 않았는가? 나꼼수의 마초 김총수는 강남대 비강남의 구도를 한나라당에서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잠실에서 살기 시작한지 6년이 지났는데 그전만 해도 강남은 막연한 현대화의 상징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6년을 살고 난 지금은 그저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 밖에는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사는 이곳이 또 한강 이남이라는 의미 외에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그렇게도 강남이라는 말 속에는 온갖 복잡다단한 의미가 숨어 있단 말인가?

 

  저자는 강남 형성사를 써보고 싶었다고 했다.

 

  삼십여년에 걸친 남한 자본주의 근대화의 숨가쁜 여전과 엄청난 에피쏘드를 단순화하고, 이를테면 꼭두각시, 덜머리집, 홍동지, 이심이 등등처럼 캐릭터화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인형 같은 캐릭터들은 남한사회의 욕망과 운명이라는 그물망 속에서 서로 얽혀서 돌아가고 그러면서 모르는 사이에 역사가 드러나게 하면 어떨까.(p376-377)

 

  아마 저자도 강남이라는 말 속에서 다른 의미를 느꼈나보다.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의 근대화, 부동산 투기, 압축성장, 권력형 비리, 폭력조직, 물신주의 풍조를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써내려 간다. 박선녀, 홍양태, 강은촌, 김진, 심남수 등등 소설의 등장 인물들은 다양한 모습들을 대표한다. 드라마틱한 인생,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하는 해방 1세대, 주먹하나로 조직의 구도를 재편하지만 역시 세월 앞에서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주먹들, 꿈을 접고 부동산 투기에 올인한 인생, 부동산 투기에 몸담았던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지식인, 자기집 하나 마련해보겠다고 이리저리 등떠밀리는 인생, 하루하루 출근하며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평범한 인생! 강남몽이라는 책 속에는 다양한 인생들의 이야기가 거미줄처럼 얽히고 섥혀있다. 삼풍백화점 붕괴라는 단순한 사건을 황석영은 부실공사라는 단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과 모순적인 구조, 인간의 욕망으로 이해한다.

 

  그래서일까? 강남몽에는 피해가자 누구고 가해자가 누구인지 알수가 없다. 다들 강남이라는 개발지에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할수밖에 없었던 나름대로의 핑계도 있다. 절대 악인으로 보였던 이도 소설이 진행되면서 어느새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바뀌어 있다. 김진은 사랑하는 이를 잃었고, 백화점 붕괴를 바라보며 과거를 지우고 싶어했던 심남수도, 사업이 부도가 난 박기섭도, 홍양태와 강은촌도 돌고돌고 돌아 어느새 피해자가 되고, 아픔을 곱씹고 있다. 강남이라는 개발지는 모두에게 지옥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夢이라는 말 속엔 그런 의미가 들어 있나보다. 남가일몽, 호접지몽, 구운몽, 홍루몽! 몽자가 들어간 많은 말처럼 그렇게 욕망을 좇아 살았지만 그들의 욕망은 한낮의 꿈처럼 깨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 꿈에 왜 그리 인생 전부를 쏟아부었던 것인지...

 

  강남몽! 소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진행형이다. 가락시영아파트 재개발, 은마아파트 재개발, 8학군, 도곡동...강남은 아직 꿈에서 깨어나고 있지 못하다. 깨어나기는 커녕 더 많은 이들이 강남이라는 꿈속의 세계로 들어간다. 분명 그 안에서 어떤 이는 한밑천을 잡을 것이고, 어떤 이는 쪽박을 찰 것이며, 어떤 이는 성공을, 어떤 이는 실패를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돌고돌고 돌아서 결국은 원점이다. 아니다. 원점보다 못하다. 모두가 가해자가 되고 동시에 모두가 피해자가 될 것이다. 황석영은 꿈꾸는 강남을 깨우기 위해서 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돌이 얼마나 아플지는 모르겠지만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나갈 시간이 되어가는데, 잠에 취해 강남에서 몽롱하게 서평을 남기는 나는 강남몽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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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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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어렸을 적부터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왔고(아버지께서는 늦게 신학을 하시고 목사가 되셨다.) 주일이면 당연하게 교회에 가는 것이요, 성경에 나오는 것들은 조금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다. 그렇다고 부모님께서 요즘과 세간의 주목을 받는 교회들과 같이 공격적이고 편협한 근본주의자는 아니셨다. 유교적인 집안에서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셨던 지라 힘드셨지만 비기독교인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 또한 자연스럽게 익히고 계셨다. 그런 부모님 밑에서 성장하다 보니 나의 신앙 또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게 선배가 읽어보라고 던져주었던 이 책은 꽤 큰 충격이었다.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이 책을 다 읽기까지 한 학기가 꼬박 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30장 읽다가 집어던지고 50장 읽다가 집어던지고, 책을 다 읽기까지 몇 번을 집어던졌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큰 충격적인 내용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이단적인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왜 그리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민요섭과 아하스페르츠라는 두 주인공은 내게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충격을 던져 준 존재였다.

 

  신학을 배우다가 마르크시즘으로, 운동권으로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종교로 마지막에는 다시 기독교로 돌아온 민요섭! 잘나가는 유대교 집안에서 자라서 자기 민족의 신 여호와를 찾아 온 세상을 돌아다니는 아하스페르츠! 둘은 민족적인 출신 성분도, 삶의 조건도, 시대적인 배경도 다 달랐지만 진지하게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구도자라는 면에서 동일하다. 작가가 민요섭의 이야기와 아하스페르츠의 이야기를 뒤섞어 진행하는 하는 것은 이러한 면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이리라.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부조리를 그냥 두는 무기력한 하나님을 부정하면서 세상에 작은 혁명을 일으키려는 민요섭 궤적과 어릴 적부터 조금도 의심이 없이 믿어왔던 하나님을 부정하면서 이집트로 바벨론으로 돌고 돌아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온 아하스페르츠의 삶의 궤적은 서로 다른 듯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어 갈수록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하고 아하스페르츠와 예수의 대화에서 정확하게 일치하기 시작한다. 아하스페르츠와 예수의 문답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시험을 적절하게 각색한 것이다. 물론 이 각색이 100%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면 이문열이라는 작가는 역사에 길이 남을 대문호로 평가가 되었겠지만 아쉽게도 이미 존재했던 이야기를 적절하게 각색하여 적절한 자리에 배치했을 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문열의 능력을 대단하게 평가하지만 말이다. 사람의 아들을 다시 펴서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인용해 보려고 했지만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 못하여 대신 성경의 이야기를 인용해 본다. 인용된 성경은 쉬운 성경 버전이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심] 그 후, 예수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내내 금식하셔서, 매우 배가 고팠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고 명령해 보시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에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웠습니다. 마귀가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리시오. 성경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천사들에게 명령하실 것이다. 그들은 손으로 당신을 붙잡아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도록 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소."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에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화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마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절하고 경배한다면, 이 모든 것을 주겠소."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썩 물러가거라! 성경에 '오직 주 너희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를 섬겨라!' 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마귀가 예수님에게서 떠나가고, 천사들이 예수님께 와서 시중을 들었습니다.(마태복음 4:1~11)

 

  사탄은 예수에게 세 가지 요구를 한다. “배가 고픈가? 그럼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먹어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가? 그렇다면 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라. 그리고 전혀 다치지 않는 기적을 보여라.” “세상을 가지고 싶은가? 나에게 한번 절하라. 이 모든 것을 주겠다.”

작가는 이 세 가지 시험을 아하스페르츠와 예수의 문답으로 바꾸어 놓았다. 기억나는 대로 적으면 대력 이렇다. “당신이 지금 배가 고프듯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배가 고프다. 당신은 그들에게 빵을 줄 수 있는가?”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라면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여라. 뛰어 내려라. 사람들이 당신을 인정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인 독립이다. 세상을 가지고 싶은가? 나에게는 남과 다른 식견이 있으니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당신을 보좌하겠다. 그러면 우리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아하스페르츠와 예수의 이 문답에서 아하스페르츠와 민요섭은 정확하게 만난다. 그리고 그들과 내가 만난다. 아하스페르츠가 던지는 질문의 요지는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세 가지 시험이다. 첫째는 부에 욕구요, 둘째는 대중적인 인기에 대한 욕구이며, 셋째는 권력에 대한 욕구이다. 사람의 아들치고 이 세 가지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하스페르츠가 끊임없이 말씀이 육화된 당신이 우리에게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절규하는 것은 신인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태생부터 인간인 우리들은 이 세 가지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다. 거칠게 표현해서 귀에 거슬리는 부분들이 많이 있겠지만 이 책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민요섭의 방황도, 아하스페르츠의 절망도 결국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우리가 이 세 가지 유혹으로부터 절대로 자유롭지 못함을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세 가지 욕구가 발현된 것이 지난 대선이고, 이 세 가지 욕구에 남보다 더 철저한 것이 MB정권이 아니겠는가? 지난 대선 우리가 도적적인 흠결을 무시하고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부자 되고 싶다, 잘 살고 싶다는 부에 대한 욕구가 아니던가? 또한 성공하고 싶고, 이름을 날리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가? 대중적인 인지도가 아닌가? 하다못해 라면을 하나 사먹을 때도 맛이 아니라 대중적인 인지도가 선택의 기준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인맥과 학맥, 혈연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기반이 되지 않고는 권력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1%이든지 99%이든지 상관없이 이 세 가지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세 가지 유혹을 무시하는 것은 사회와 연을 끊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극소수일 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세 가지 유혹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다만 얼마나 그 세 가지 유혹을 통제할 수 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적당한 선에서 멈추어 설 수 있다면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지만 멈추어 설 수 없다면 사상 최악의 괴물이 되어 버린다.

 

  유혹에 가장 충실한 예로 나는 MB정부를 바라본다. 온갖 불법과 비리로 얼룩지면서도 왜 그렇게 부동산에 목을 매는가? 왜 그렇게 국가를 이익모델로 삼았다는 비판을 듣는가? 부에 대한 욕망에 철저하게 솔직하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깨끗한 정부라 자처하면서 좌와 우를 가르고, 별 것 아닌 것에 목숨 걸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는가? 왜 자원외교가 아니라 자위외교라는 비아냥거림을 듣는가? 대중적인 인기에 대한 욕망에 솔직하기 때문이다. 왜 전 대통령을 전 방위적으로 압박하여 투신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는가? 물대포로 대표되는 강경 진압을 조자룡 헌 창 쓰듯이 하는가? 검찰과 경찰, 사법, 그리고 언론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가?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교회 장로를 내세우는, 그래서 교계의 큰 목사님들을 초청하여 간담회를 하는 MB정부이지만 그들이 걷는 길은 예수의 길이라기보다는 아하스페르츠가 번민하면서 걸어간 길이다. 아니 아하스페르츠도 차마 마지막까지 가지 못했던 길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이 정권에 가지고 있는 불편함이 존재한다.

 

  사람의 아들! 이 말은 우리가 세 가지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다. 이 세 가지 유혹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질 것인지를 2007년 이후로 우리는 보고 있고 느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교회가 고민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요, 회개해야 할 큰 허물이다. 그럼에도 교회가 민요섭의 길이 아니라 극단적인 아하스페르츠의 길로 가고 있음이 안타깝다.

 

ps 이문열은 딱 여기까지가 좋았다. 삼국지, 수호지, 초한지, 열국지까지도 봐줄만 하다. 그렇지만 선택 이후는 그에게 정말 실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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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1-10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의 아들'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이문열이라는 작가는 제게 정말 대단한 작가였더랬습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서 고개가 갸웃~ 했는데..결정타는 '삼국지 평역'이었습니다. 왠지 그때부터 작가를 의심하게되었답니다 ㅠ.ㅠ 평역 삼국지는 저를 절망의 구렁으로 밀어버렸답니다 ㅠ.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saint236 2012-01-11 11:00   좋아요 0 | URL
그래도 삼국지는 고전의 힘이 살아 있어서 괜찮았습니다. 그정도까지야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선택에서는 정말 고개를 절래절래...그후로 이문열은 쳐다도 안봅니다.

차트랑 2012-01-11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셨군요~
저 역시 어느 순간부터
고개를 절래절래~ 입니다^
그리고 저도 쳐다도 안봅니다 ㅠ.ㅠ

saint236 2012-01-11 23:46   좋아요 0 | URL
이문열에 대한 평은 대개 비슷하더라구요.

잘잘라 2012-01-1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두 분이 고개를 절래절래 하는 작가라니 갑자기 정신이 번쩍. 음.... 그래도 이왕 주문해놓았으니 초한지, 읽어보고 리뷰 올리겠습니다. ^^;

saint236 2012-01-18 10:02   좋아요 0 | URL
이문열의 글솜씨는 탁월합니다. 다만 그의 시각이 맘에 안든다는 것이겠지요. 그가 이명박 대통령을 칭송하던 기사를 보는 순간 그나마 가지고 있던...
 
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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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쉬는 시간 짬짬이 시간을 내어서 읽었다. 영화도 책도 보지 않았지만 워낙 이슈가 되었던 사건인지라 내용은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가슴에 커다란 바위를 얹은 것처럼 답답해서,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분노와 불편함과 피해자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책을 읽어 가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는 것이 더 쉽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읽을 수가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덮은 시간은 새벽 3시! 몇 시간 자고 일어나야할 나에게 무척이나 피곤한 시간이었지만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가슴에 얹힌 커다란 바위가 계속 남아 있었던 까닭이다. 

  강인호가 자신의 승용차에 간단한 이삿짐을 싣고 서울을 출발할 무엽 무진시에는 해무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희 짐승이 바다로부터 솟아올라 축축하고 미세한 털로 뒤덮인 발을 성큼 성큼 내딛듯 안개는 그렇게 육지로 진군해홨다. 안개의 품에 빨려들어간 사물들은 이미 패색을 감지한 병사들처럼 미세한 수증기 알갱이에 윤곽을 내어주며 스스로를 흐리멍덩하게 만들어버렸다. 바닷가 절벽 위에 선 사층짜리 석조건물 자애학원도 그렇게 안개 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일층 식당에서 뻗어나와 반짝이는 노란 불칩이 마요네즈 빛깔로 희미해질 때쯤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왔다.(p7) 

  희미한 안개에 포근하게 감싸여 있는 무진시와 자애학원의 전원적인 풍경을 한폭의 그림처럼 묘사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한폭의 풍경화에서 왠지 모르게 야만과 폭력, 그리고 음산한 귀기가 묻어 나온다. 그렇게 묻어나온 기운들이 숨을 턱 막히게 만든다. 단 9줄의 묘사이지만 공지영의 필력과 작품의 집필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치 퇴폐적인 일본 만화의 한자락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답답하다. 계속 책을 읽어야 하나 갈등이 된다. 그럼에도 반드시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 비슷한 것이 나로 하여금 책을 덮지 못하게 만든다.  

  아니나 다를까! 책의 내용은 충격이다. 단순히 변태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불의와 모순이 너무나 강고하다. 약자를 배려의 대상이 아닌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그래서 약자는 강자에게 먹히기 위해 존재한다는 지극히 야만적인 생각, 자신의 밥그릇을 위해 불의에 눈막고 귀막은 침묵의 카르텔,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단 하루의 생존을 위해서 합의서를 써줄 수밖에 없는 피해자 가족들의 절박함, 왜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용서하느냐는 피해자의 절규, 믿었던 법정에 대한 철저한 배신감! 소설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 리얼하다. "손녀 딸을 팔아서 아비 병원비를 대겠다는 것이 잘못된 줄은 알지만, 아닌 줄은 알지만 원하는대로 주겠다는 그들의 목소리가 자꾸 귀에 맴돌더이다. 손녀딸도 자식놈도 들을 수 없는 그 소리가 이 늙은이의 귀에는 자꾸 맴돌더이다."라는 할머니의 처절한 넋두리에 이르러서는 나도 터져나오는 슬픔을 삭힐 수 없어서 숨죽여 꺽꺽대며 울었다.  

  자애학원의 문제를 고발한 주인공을 전교조로 몰아서 붙이는 색깔론, 아직 어려서 사랑에 대해 진지하고 책임있게 다가가지 못해 발생한 비극 때문에 평생 가슴에 슬픔을 담고 살아온 그를 제자를 성폭행 파렴치범으로 몰아붙이고, 피해자들의 인권을 위해서 목숨걸고 싸우는 주인공의 여선배를 이혼녀로 그리고 품행이 바르지 못한 여인으로 몰아붙이는 가해자들의 행태! 같은 교회 일원이라고 제식구 감싸기에 급급한 교인들, 자신의 잘못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 모든 일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탄의 계략이라고 선언해 버리는 목사의 행위 앞에서는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왜? 충분히 그럴 수가 있다는 생각에서도, 그렇다고 반기독교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철저하게 현실적이어서 그렇다. 기독교인인 내가 지금까지 목격한 한국 기독교회의 작태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철저하게 현실적이다. 한나라당 모 인사가 공지영을 불러서 조사해야 한다고 했었는데, 아마도 그는 소설이 던져주는 현실성에 몰입한 나머지 그런 말을 했던 것이리라. 마치 드라마를 보면서 죽일 놈 살릴 놈 하는 열혈 드라마 시청자처럼 말이다. 

  도가니! 말 그대로 이 소설은 광란의 도가니이다. 부와 권력이 결탁하였을 때, 비록 아주 사소한 그래서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용인될 수 있는 형태로라도 결탁하였을 때 그 결탁이 어떠한 형태로 사회적인 약자를 궁지로 몰아 넣는지를 살펴보면 광란과 광기의 도가니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부와 권력과 명예욕 등등 인간의 모든 욕구가 도가니 안에서 풀어져 이기심이라는 하나의 강고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었음을 깨닫는다면 도가니라는 제목이 얼마나 적절한지 알게 된다. 만약 소설이 이것을 보여 주는 것에서 멈추어 버렸다면 이 책은 절대적인 절망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절망의 끝자락에서 나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도가니가 모든 불순한 물건을 태워 없애고 보다 순수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자애 학원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주목하면서 이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불의한 상황들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그리고 그 불의들을 도가니 안으로 밀어넣어 불순한 것들을 태워버리고 보다 순수하고 정의로운 사회라는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오랜 세월동안 묻혀져 있던, 그래서 고독하게 투쟁해야 했던 그들의 삶을 소설로, 그리고 영화로 제작하고,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 제정과 법적인 조치들을 이끌어 낸다. 지금 도가니는 불의와 야만, 부조리 그리고 협잡이라는 불순물들을 녹이고 제하여 버리는 과정을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다. 나는 거기에서 희망을 본다. 공지영 또한 거기에서 희망을 보고 있지 않을까? 

  책을 읽고 답답함을 느꼈다는 사람들이 많다. 아이들에게 이 사회가 어떤 곳인지 어떻게 가르쳐야할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바로 그들이 희망의 싹이 될 것이다. 공지영에게 정말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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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런던 세트 - 전2권 - 버려진 것들의 도시
차이나 미에빌 지음, 김수진 옮김 / 아고라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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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고라 편집부의 서평 이벤트를 통해서 만나게 된 책이다. 소설보다는 주로 인문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즐겨 있는 편인지라 이런 책이 나왔나도 잘 모르고 있다가 접하게 된 책이다. 표지가 상당히 웃긴다. 쓰레기 통이 마치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보여 주는 것처럼 멋있게 폼 잡고 공중에 떠 있다. 그 밑으로 이상 야릇하게 만들어진 집들이 자리잡고 있다. 띠지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가라고 화려하게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다가 런던을 덮쳤던 환경 문제가 모티브라고 하니 살짝 구미가 당긴다.  

  책을 한 장씩 넘겨가면서 가장 처음에 만나는 감정은 당혹스러움이다. 이건 뭐지?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한다. 어딘선가 갑자기 툭하고 이상한 캐릭터가 튀어 나오니 당황스럽다. 게다가 이 캐릭터들이 보통 이상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어릴 적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처음 접했을 때의 그런 어수선함과 당혹스러움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거창하게 등장한 슈와찌가 도대체 하는 일이 없다. 매트릭스에서 기다리던 "네오"가 이름만 올리고 아무 것도 해 놓은 것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일의 모든 것은 '사이퍼(네오를 배신하는 역)' 혹은 '링크(우주선 조정하는 사람)'같이 비중이 없는 사람이 세상을 구원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배신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이 책이 바로 그렇다. 기대하던 슈와찌는 사라지고, 선택받지 못한 자, 이름조차 책에 올리지 못한 디바가 스모그를 물리치고 언런던을 구한다. 이 얼마나 발칙한 배신이란 말인가? 

  그것뿐이 아니다. 비장하게 죽음을 당한 카나베가 어느 순간 다른 몸을 구해서 나타난다. 반인반유령 헤미, 런던에서 퇴출당해 언런던으로 들어온 차장 존스, 런던의 파생도시이며 모든 쓰레기들이 모여 새롭게 사용되는 도시 언런던, 버려지고 못쓰게 된 우산을 병사로 부리는 망가진 우산 등등. 이 책에 나오는 태릭터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아니 존재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다. 무엇인가 중요한 결점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이 캐릭터들은 런던에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존재, 이미 사용가치가 끝난 존재이기 때문에 버려진 것이다. 이런 존재들이 모인 언런던, 무척이나 어지러울 것 같지만 그 안에서 나름대로 규칙을 가지고 공존한다. 오히려 그러한 평화와 공존을 깨는 것은 가장 큰 권력과 존경을 받는 환경부 장관과 언스티처블이다. 이것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버려진 것들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버려진 것들로만 이루어진 언런던은 결코 쓰레기의 나라가 아니고, 루저들의 집단이 아니다. 오히려 그곳이 더 인간미 넘치고, 더 활기차다. 뱉어진 말, 그래서 곧 사라져 버릴 말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안타까워하는 곳이, 가래효과 때문에 자기가 잊혀질까 고민하는 현실보다 더 정겨운 곳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책이지만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 2권을 통해 드러나게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이 책은 다른 방향으로 쓰임받으면 또 다른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게다가 조금 찢겨져 망가진 우산의 부하로 변했던 디바의 우산이 약간의 수리를 통하여 다시우산이 되는 것은 버려진 것들의 가치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물질적인 풍요 속에 살면서 망가진 것을 고쳐 쓰기보다는 버리고 새롭게 사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히고 현명하게 생각되는 현대 사회 속에서 버려진 것들의 가치란 과연 무엇일까? 망가진 우산의 가치에 대해 디바가 다시 고민했던 것처럼, 우리 주변의 버려진 것들, 우리 마음 속에서 잊혀진 것들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런던의 지리와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사건에 대해서 잘 몰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도 한데 책을 펴면서 그 사건이나 영국의 지리, 혹은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 대해서 한번씩 짚어주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게 해준 아고라 편집부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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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세트 - 전4권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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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한번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소풍 전날만 되면 특별한 곳에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동네 뒷산으로 가는데도 왠지 마음이 설레어 잠을 자지 못했다. 하루 갔다가 돌아오는 소풍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설렜는데 중고등학생이 되어 수학여행이라는 것을 가게 되자 난리가 났었다. 한달전부터 최신 유행곡을 익힌다, 무슨 옷을 입고 갈 것이냐, 혹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등등 여러가지 일들로 들뜨고 분주했었다. 그러나 정작 여행을 가면 단체로 여기저기 관람을 하고 돌아오기에 여행에 관한 기억은 그다지 없다. 다만 기억에 남는 것은 3박 4일 간의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집이 왠지 더 반갑고, 부모님들을 보면 고마운 마음이 절로 드는 것이었다. 아마 여행이 가지고 가장 큰 힘이 이것일 것이다. 익숙한 것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하고 감사하게 만드는 것! 여행만이(남자는 군대도...) 주는 경험이다.  

  귀한 자식일수록 여행을 보내라. 

  우리 귀에 익숙한 말이다. 귀한 자식이라고 품에 안고만 있다면 그것은 자녀를 약하게 만드는 지름길이 된다. 가끔 MT를 가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녀석들을 볼 때마다 도대체 집에서 무엇을 가르쳤는지, 저래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혼자서 끌끌거리곤 했다. 오히려 귀한 자식일수록 밖으로 막 돌리는 것이 필요하다. 집을 떠나 멀리 여행을 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넓어지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보고 되며,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방향에 대한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선뜻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빠서? 일이 많아서? 가족들 때문에? 여러가지 이유를 대지만 사실은 겁이 나서가 아닐까? 여행 계획은 수도 없이 세우지만 막상 낯선 곳으로 들어간다는 두려움 때문에 쌌던 짐을 다시 푸르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은 아주아주 달콤한 유혹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사 놓고 꽤 오랜 시간동안 공을 들여서 읽었다. 각 권은 길어야 5일 이내에 다 읽었지만 한 권을 읽고 다음 권을 읽기까지 꽤 오랜 휴식을 가졌다. 내용은 어렵지 않지만 그 내용을 잘 씹어서 소화시키고,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유혹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이다. 지금이라도 떠나고 싶지만 아직은 준비도 안되어 있고, 용기도 없기 때문에 조금만 더 앉아 있기 위해 바로 다음 권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한없이 한비야씨를 부러워 한다. 모든 것을 다 남겨두고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세계 여행이라는 계획을 막상 실행으로 옮기니 말이다. 게다가 여자 혼자서 낯선 곳으로,그것도 오지로만 다니면서 현지의 삶을 체험하는 것은 더 어렵고 두려운 일일텐데 4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그렇게 할 수 있다니 의지도, 힘도, 체력도 정말 대단하다. 게다가 이렇게 여행하는 가운데 자기 인생의 후반전을 올인할 수 있는 일을 발견했다니 정말 부럽다. 젊은이들에게, 청소년들에게 왜 이 책이 권장도서가 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4권까지 다 읽었으니 한비야씨처럼 오지 여행은 아니지만 당장 이번 휴가에 강원도쪽으로 조용히 여행을 다녀오련다. 아직은 아이들이 어려서 갈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지만 아이들일 초등학생 정도만 되면 짐싸들고 지리산 둘레길을 한바퀴 돌고 싶다. 아이들과 이런 저런 말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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