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시대 -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제자백가의 귀환 1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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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백가 시대의 재조명이라는 큰 주제를 가지고 1권이 나왔다. 아직 2권을 사보지는 못했지만 1권을 통하여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이해가 간다. 조금 거칠게 표현해 보자면 맑시즘의 유물론이라는 프리즘을 가지고 제자백가 시대를 조명한다고 하겠다. 원래 리뷰의 타이틀을 유물론 강의 교재라고 잡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꽤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굉장히 날카롭게 사유하기 때문에 유쾌한이라는 수식어를 첨가한 것이다. 요즘 딱딱한 인문학이나 정치에 대해서 유쾌하게 풀어나가는 것이 새로운 트렌드인가 보다. 

  인간의 경제적 상황이(물적토대, 혹은 하부구조) 이데올로기와 사상(상부구조)를 규정한다. 

  유물론에 대해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나마 접해본 사람이라면 위의 문장이 의마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물론은 맑시즘, 공산주의라는 빨간색을 아주 진하게 칠해놓은 개념이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야 과거보다 덜하지만 여전히 빨간색은 옅어지지가 않고 있다. 게다가 인문학이라는 것이 얼마전까지 거의 사양학문처럼 여겨지던 시대이기 때문에 세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렇지만 MB정권 들어서 인문학과 경제학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것은 당연히 유물론을 다시 집어드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빨간색이라는 무시무시함, 레드 콤플렉스를 걷어내고 유물론을 접하게 된다면 이만큼 설득력있고, 논리적인 해설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유물론이 왜 등장하게 되었는가? 여러가지 학설들이 많이 있겠지만 정신과 육체 사이에서 정신쪽으로 치우친 사상적인 편향을 바로 잡아 우리 삶을 보다 현실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접근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서구에서 기독교 정신과 철학이라는 거대한 이야기 앞에서 육체의 삶이라는 것은 그저 정신에 종속되는 변수로만 이해되었지만 근대로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과연 정신에 비하여 육체는 열등한 것인가? 상부구조는 하부구조를 규정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고 반대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물적인 것들이 정신적인 것들을 규정할 수 있다는 대답을 내놓게 된다. 꽤 복잡한 말이지만 간단하게 하자면 우리의 삶의 조건에 의해서 우리의 정신과 사상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중국 역사상 가장 사상적으로 자유롭고 다양했던 시기인 제자백가! 그 제자백가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온갖 잡스러운 학문들이 발생했고, 사불범정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온갖 잡스러운 학문은 유가의 벽을 넘지 못하고 다 스러지고 말았다고 이해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성리학이라는 말은 이러한 현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유가가 현실적인 부분을 소홀히 했다는 반성이 나오면서 성리학에서 양명학과 고증학으로 모습을 바꾸기는 하지만 그러한 변신도 유가 내의 변신일뿐 어쨌거나 유가의 사상이 절대 우위에 있다는 기본 전제는 바뀌지 않는다. 중국의 역사는,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역사는 철저하게 유가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이해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식의 과격한 책까지 등장한 것이 아닌가? 

  강신주는 이러한 동양 사상의 이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유가가 다른 학파에 비하여 사상적으로 우월한 것인가? 또한 우리의 사고는 유가의 가르침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제자백가라는 말로 표현될 정도로 다양한 학설들을 고작 십 여가지의 학파로 분류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렇게 제기된 질문들에 의하여 강신주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제자백가의 귀환이라는 부제 가운데에는 이러한 그의 생각이 담겨 있다.  

  왜 강신주는 제자백가의 재발견이 아니라 귀환이라는 말을 사용했을까? 재발견이라는 말은 어떤 사물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여 인정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제자백가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재발견 정도의 수동적적이고 지협적인 차원에서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제자백가들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보다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제자백가의 귀환이라는 발칙한(?) 용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1권에서 강신주는 제자백가는 이러한 유파가 있으며 어떤 사상을 주장하였다는 식의 전통적인 구조주의의 입장이 아니라 시대사적인 흐름으로 제자백가를 이해한다. 강신주에게 있어서 흐름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흐름을 무시한다면 유가, 불가, 도가, 법가, 종횡가 등등 제자백가의 사상들은 모두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서 발생하였다는 사실 또한 무시하게 된다. 주나라의 천하가 저물어 가자 주나라의 예법을 바로 세워서 질서를 세우고자 한 것이 유가요, 주나라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버리고 법과 제도를 통하여 혼란을 잠재우고자 한 것이 법가이다. 외교적인 기술을 통하여서 현상 유지를 꾀하는 것이 종횡가이다. 다른 사상들도 마찬가지다. 주나라의 몰락, 그로 인한 혼란과 전쟁, 민생 파탄! 이를 잠재우고 사람 사는 세상을 설립하려는 필요에 의하여 제자백가가 출현한 것이다. 즉 삶의 안정이라는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서 온갖 이데올로기와 사상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유가가 오랜 세월 독보적인 통치 이념의 위치를 점하고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시대의 필요를 잘 잡아내고 그 요구에 맞추어 자신을 잘 변신시킬 수 있었던 유연함 때문이라는 것이 유가에 대한 평이다. 물론 세월이 흘러가면서 변신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게 되었고 그 순간 유가의 가르침은 타파되어야 하는 구습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시대의 흐름과 시대의 요구라는 점에서 제자백가를 바라본다면 이 책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오늘 SNS 통제라는 방통위의 초강수를 뉴스로 접하게 되었는데 이는 철저하게 시대적인 요구에 역행하는 정책이다. 우리네 삶의 환경과 조건은 지금까지와는 매우 다른 정신적인 가치들을 요구한다. 한국적인 예의라고 포장되었던 것들은 이미 상당부분 그 힘을 잃고 타파되어야 하는 구습으로 취급받았다. 요즘 열풍을 일으키는 동양 고전의 상당부분이 노자 장자 계열임을 떠올린다면 방통위의 가치관이 얼마나 이 시대의 요구와 동떨어져 있는지 충분히 알게 될 것이다. 제자백가의 귀환이라는 말 가운데에서 깨닫게 되는 또 다른 것은 통제를 통해 획일화를 꾀하는 정부의 바람과는 달리 이 시대는 다양한 제자백가의 사상들이 화려하게 귀환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새로운 사상적인 흐름이 아니겠는가? 

  조만간 2권을 구입해서 읽을 예정이다. 과연 관중과 공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강신주는 둘을 가지고 어떤 썰을 풀어낼 것인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춘추전국이야기와 열국지 교양 강의와 함께 읽는다면 더더욱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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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연설 - 고대 아테네 10대 연설가를 통해 보는 서구의 뿌리
김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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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돈 안 되는 학문”

  “그거 해서 밥 벌어먹고 살겠냐?”

  인문학을 전공하려는 학생들이 가장 깊이 하게 되는 고민이요,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질문이다. 스티브 잡스 때문에 인문학이 재조명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순수한 인문학자로 남는 것은 가난하게 살겠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는 선언이다. 순수한 인문학자로 남기 위해서는 집안에서 재정적으로 뒷받침이 되던지, 혹은 교사나 교수와 같은 안정적인 직업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가지고 있었던 교사라는 직업마저 포기해 버린다. 그것도 더 좋은 직업을 위해서 학위를 따겠다는 그런 현실적인 생각이 아니라 그냥 공부하는 것이 좋아서라고 한다. 참 현실감각 제로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위대한 연설”이라는 제목으로 고대 아테네의 10대 연설가를 하나의 책으로 묶었다. 이 또한 현실감각 제로인 선택이다. 

  그래도 연설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면 오바마의 연설이라든지, 혹은 카이사르, 링컨, 케네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같은 이들의 연설을 묶는 것이 훨씬 책을 팔아 먹기에는 좋을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도 아니고 이름도 생소한 안티폰, 뤼시아스, 안도키데스, 이소크라테스, 이사이오스, 뤼쿠르고스, 데모스테네스, 아이스키네스, 휘페레이데스, 데이나르코스의 연설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니 책을 팔기는 지난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과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사고 방식이 이미 서구화된 우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주장하며 각 연설가들의 삶과 생각에 대해서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10명의 연설가를 다루기에는 책의 분량이 부족했기에 심도 있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의 연설가는 정치인이다. 고대 그리스의 10대 연설가라는 말은 곧 그들은 고대 그리스도의 10대 정치인 혹은 정치인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는 말이다. 가령 이사이오스는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발휘하지 않았지만 데모스테네스의 연설 선생이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고대 그리스의 10대 연설가들은 자신들의 연설 기술을 가지고 대중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특정한 결단을 하도록 요구한다. 바로 여기에서 연설과 정치가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 책과 우리가 처한 현실이 만난다. 

  오늘 우리 사회는 매우 혼란스럽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져서 서로를 공격하기에 바쁘다. FTA는 끝장 토론까지 갔지만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에서는 참을 만큼 참았으니 강경 처리하겠다는 의사를, 야당에서는 절대로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조만간 무력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 예견된다. 오죽하면 국회의원은 국 K-1이라 국민들이 조롱까지 하겠는가? 그 어느 때보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심각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난 그 이유를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5일 국회를 찾아가 했던 말에서 찾는다. 국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했던 말은 이렇다. 

  나도 자존심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요구하면 응하게 돼 있는 FTA 합의문 조항이 있는데, 왜 미국에 허락해 달라고 하느냐. 주권국가로서 맞지 않다. 대통령이 그렇게 약속한다. 왜 오바마 (대통령) 말을 믿나. 대한민국 대통령 말을 믿어야지. 나도 1년 3개월 지나면 대통령 그만둔다. 그런데 이렇게 합의하려고 하는 이유가 바깥세상에 나가 보니 세계가 지금 먹고살려고 혈안이 돼 싸우고 있다. 내가 나라를 망치려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동아일보 기사 인용 http://news.donga.com/3/all/20111116/41908778/1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자존심 운운하면서 국회의원들에게 왜 자신을 안 믿는냐 제발 믿어달라고 한다. 국회의원들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국민들에게 이 말은 농담 따먹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말을 대한민국 국민들이 불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의 말이 틀려서인가? 내용이 어떻든 간에 대통령의 말을 믿어달라는 그의 호소는 절대로 잘못된 호소가 아니다. 다만 그의 호소 이전에 그 호소가 담고 있는 진실성에 의문이 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국민 담화와 언론을 통하여 보여왔던 대통령의 행위들이 국민들에게 신뢰감을 못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뤼쿠르고스에 대해서 이 책이 기록하고 있는 부분을 충분히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그의 연설의 힘, 수사적 설득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어쩌면 그의 말이라면 “작은 것도 큰 것으로, 큰 것도 작은 것으로” 믿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아테네 시민들의 신뢰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신뢰감은 12년간, 아니 남아 있는 기록의 바깥에서 짐작할 수 있는 더 긴 시간 동안 공인으로서 그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보여주었던 품성과 실천이 빚어낸 것이겠다.
  국가의 기강을 위협하고도 국가의 신뢰도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잘못을 저지른 혐의를 받고도 슬쩍 넘어갈 수 있는 현재의 분위기에서, 초연하게 사심을 버리고 종교적인 경건성과 도덕적인 정직성, 윤리적 정의와 공평무사의 정신으로 오로지 아테네의 재건과 아테네 시민의 참살이만을 위해 노력했던 정치 연설가 뤼쿠르고스의 모습이 희망처럼 떠오른다. 지금 우리 곁에는 그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능력과 품성을 가지고 용감하게 정의를 실천할 사람은 정녕 없는 것인가? 그런 사람이 몹시도 아쉽고 그리운 시절이다.(p224~225) 

  우리는 흔히 고대 아테네 연설가들의 특징을 말장난으로 이해했다. 삶이 받쳐주든,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교묘한 말기술을 통하여 대중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을 연설가들, 혹은 소피스트들이라고 오해했다. 동양의 귀곡자와 소피스트들을 같은 부류로 취급하여 교묘한 말장난으로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이해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언변이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삶과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말에 힘이 실리지가 않는다. 뤼쿠르고스가 민회 앞에서 나를 제발 믿어달라고 애원하지 않아도 그리스 아테네 시민들은 이미 그를 믿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왜? 그의 품성과 실천이 그의 말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국회에서 자존심이 있다 믿어달라 하는데도 왜 믿지 않는가? 이유는 간단한다. 뤼쿠르고스의 경우와 반대대기 때문이 아닌가? 이것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말로 먹고 사는 정치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며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公約을 空約으로 바꾸시는 분들을, 언행일치가 안되는 분들을 국민들은 잊지 않고 기억한다.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C급 정치인은 권력으로 지지를 이끌어내고, B급 정치인은 말로 지지를 이끌어내지만 A급 정치인은 삶으로 지지를 이끌어 낸다. 

  ps.표지에 이소크라테스의 이름 중에서 "I"가 빠져서 소크라테스가 되어 버렸다. 같이 읽어보면 좋을 책: 귀곡자 교양강의(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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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1-22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FTA 날치기 가결 소식듣고,
갑자기 가슴 한가운데가 답답하니 딱 막혀옵니다.

제발 신뢰할 수 있는 대통령을 원합니다, 간절하게요.

saint236 2011-11-23 01:05   좋아요 0 | URL
믿어달라는 것이 결국은 이것이네요.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데 누가 믿어 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젠장입니다.
 
철학의 시대 -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제자백가의 귀환 1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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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만발입니다. 공원국의 춘추전국 이야기와 비교하면서 읽으면 재미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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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 - 유목적 사유의 탄생
이정우 지음 / 아고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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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책을 구입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정말 공감이 가는 말이다. 알라딘에서 최소한 1년 이상 서재질을 하는 사람치고 이 말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는가? 나도 처음에 알라딘에서 책을 구입해서 읽기 시작한 이래로 4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산 책들의 가격이 만만치 않다. 처음에는 눈치를 주던 아내였지만 내가 어디가서 술을 먹고 들어오는 사람이 아닌지라 다른 사람들 술 먹을 때 책을 산다고 눈을 감아 준다. 매일 알라딘에 들어가 새로운 책이 나왔는지 살펴보고 몇번의 망설임 끝에 책을 보관함에 담는다. 그렇게 담겨진 책들을 따져보기를 몇번하고 난 다음에 어렵사리 구입한 책이 배송되었을 때의 그 기쁨은 해본 사람만이 안다. 알라딘을 통하여 안면을 트게 된 택배 아저씨, 그리고 낯익은 박스를 뜯을 때의 설렘임이란...마치 소풍을 앞두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두근거림같다. 이 두근거림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매번 똑같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책을 구입하는 것이다. 그렇게 책을 구입하고 닥치는대로 읽기를 시작했다. 새 책을 읽고, 그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의 감동, 그리고 그 책에 대한 짧은 감상을 적을 때의 감동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그런 대에 노란색 표지에 "탐독"이라고 적힌 제목은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으로 다가온다. 

  아고라 서재를 통하여 알게 된 책을 한 장씩 넘겨가면서 다른 알라디너들이 했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게 된다. 문학을 다루고 있는 1부는 거의 접해본 책들인지라 술술 넘어간다. 문학을 가지고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철학자들이 왜 문학에 그렇게 공을 들이고 관심을 갖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이정우라는 사람의 문학에 대한 이해에 때론 고개를 끄덕이면서, 혹은 갸웃거리면서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다보니 어느새 2부에 도착했다. 초반에는 그런대로 읽을만 하지만 점점 후반으로 갈수록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공학도라면 모르겠지만 수학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나에게 과학을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척이나 난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게 3부로 넘어가면서 더 난이도가 높아진다. 3부는 철학자들의 존재론에 대해서, 동양 고전에 대해서 철학 강의가 시작되면서부터는 유체이탈 현상 비슷한 것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한자 한자 이해하는 것이, 한장 한장 넘기는 것이 결고 만만치 않은 일이다. 내 이해력과 책장과의 투쟁이라고나 해야할까? 참 대단한 양반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마지막장까지 다 읽고 난 후에 드는 생각은 정말로 책바보가 이런 사람이구나 대단하다 뿐이다. 간서치는 아마도 이런 사람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서 놀면서 닥치는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그의 말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닥치는대로" 읽었기 때문에, 그리고 공학도에서 철학도로 전공을 바꾼 그의 이력 때문에 그의 책 읽기는 폭이 상당히 넓다. 게다가 한번도 자신을 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저 사유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규정하는 그의 태도 때문일까? 그의 책 읽기는 문학, 과학, 고전을 넘나든다. 나처럼 인문학 책만을 편식해 온 사람이라면 단단히 마음을 먹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가 다른 이들에게 읽기 쉬운 교양서를 쓰기 위하여 이 책을 기록했다는 그의 말이 왜 그렇게 바보같다는 생각이 드는지? 왠만한 내공으로는 그의 책을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데 읽기 쉬운 교양 서적이라니... 

  이 책을 덮으면서 그의 책 읽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흔히 독서는 자기가 자신이 있는 분야, 혹은 전공 분야에 몰입하기 쉬운데, 그 몰입이 매몰로 이어지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의 폭을 넓힌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독서가 자기의 생각을 넒히기 위해서라면 더욱 그러하다. "유목적 사유의 탄생"이라는 말 속에서 결코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곳 저곳을 두리번 거리면서 폭 넓게 책을 탐독하는 그의 독서가 그대로 담겨 있다. 언젠가 이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보다는 레벨업이 되었을 때 다시 한번 이 책에 도전해 보고 싶다. 그 때에는 분명 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고, 지금과는 또 다른 것들을 보게 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해 본다. 

ps.별이 2개인 이유를 순전히 책이 너무 어려워서 후반부에는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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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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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이 워낙 재미있었던지라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을 구입했다.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의 후속 작업으로 시작했다는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은 한편의 시를 선택하고, 의미를 분석하고,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구조적인 방법은 동일하나 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저자가 말한대로 별개의 작품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강신주는 이 책을 통하여 세상을 자아와 타자의 관계로 이해한다. 한 개인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그는 한 사람의 성인이 되는 것이다. 강신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밀면 밀리고 당기면 당겨지는 문과 같은 존재가 어떻게 자유로운 존재, 스스로 행동을 개시하는 존재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카뮈는 반항할 때 인간 개개인에게는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의식이 깨어난다고 말했던 겁니다.(P.303) 

  자의식이 깨어나는 단계, 그것이 각성이다. 오감을 포함하는 감각, 각성, 자각! 대체 각(覺)이라는 말이 무엇인가? 배운 것(學)을 보는(見) 것이다. 지금까지 머리로만 알고 있던 것을, 몸에 익숙한 프레임을 벗어 던지고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부라고 생각해 왔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이상 각(覺)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기에 강신주는 각(覺)하는 것은 괴로움을 수반하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몇 주 전 함께 교회에 다니는 한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분에겐 아들이 한 명있는데 직업 군인인지라 가족과 따로 떨어져 살고 있다. 며느리와 손자는 서울에서 따로 살고 있는데 며느리가 전형적인 헬리콥터 맘이다. 남편과 따로 떨어져 외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아들에게 목을 맨다. 학교도 SKY 외에는 안 된다. 공부를 안하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하는 아들에게 다가가 공부하라고 SKY외에는 안된다고 윽박을 지르니 괴로워한단다. 그러다가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시험을 앞두고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안 며느리가 손자의 휴대폰을 압수했다는 것이다. 고2나 된 녀석에게 그랬으니 사단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는 엄마가 하는 대로 말을 잘 들었던 손자가 집을 뛰쳐나간 것이다. 집에도 연락이 없고, 할아버지에게도 연락이 없어서 학교에 가서 기다렸다가 만났고 간신히 달래서 본인 집으로 데려오셨다는 것이다. 모자 관계는 여전히 냉전 중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사연을 다 듣고 걱정하시지 말라고 당연한 과정이라고,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지금까지 엄마의 통제를 받으며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 왔던 아이가 거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사고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안 엄마는 당연히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아이를 더 구속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 속에서 아이는 자신을 옥죄고 있는 통제 프레임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뛰어 넘든지, 거기에 순응하든지 양단 간에 결정을 내리게 된다. 여기서 순응하면 평생 엄마의 통제를 받으며 사는 것이다. 요즘 부부싸움을 하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하는 부부들이 꽤 많다고 한다. 스스로 부모의 통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은 성인이지만 정신은 여전히 유아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영화 올가미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닐까?) 반대로 통제를 뛰어 넘으면 그 때부터 그는 성인으로서 자신의 세상을 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자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통제 매커니즘을 인식하고 그 매커니즘 안에서의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배하는 구조를 발견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자유로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시험해본 사람이 한계에 직면했을 때, 그는 자신을 옥죄고 있는 구조를 발견할 수 있는 법입니다. (P.299 ~ 300)  

  왜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각해야 하는가? 각은 타자와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고 내가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각이 전부이자 결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여행의 첫 출발점이 된다는 말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세계 혹은 타자들과 직접 부딪쳐야만 합니다. 설령 체제가 제공한 제스처를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세계와 직접 부딪치면 되는 겁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가 흉내 내고 있는 제스처가 나의 삶에 어떤 행복과 힘을 주는지 알게 될 테니까요. 물론 모방하고 있는 제스처를 시험해 본다는 것 자체도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흉내 내고 있는 제스처는 스펙타클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고, 당연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기능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활동하는 주체"가 되는 순간, 우리에게 붙어 있던 제스처들이 떨어져 나가게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P.264) 

  배운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는 단계를 통하여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익숙하게 몸에 배어 있던 통제들을 벗어버리고 독립된 자아로서, 한 개인으로서 타자와 책임 있는 관계, 바른 관계를 맺어 가는 삶, 그게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픈만큼 성숙한다는 말,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 결국은 각(覺)하는 괴로움을 말하는 것이리라. 

  ps. 우리는 각하느라 괴롭고 가카는 또 다른 이유로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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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자 2011-11-07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보면서,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괴롭게 저또한 각 하는 경험을 아주 어렴풋하게 느낀 것 같아요. (사실 전 굉장히 횡설수설 하며 썼는데) saint236 님 리뷰 보니깐 정말로 책이 말하려고 하는 큰 줄기가 정리되는 것 같아요. 제가 깨닫지 못했던 큰 그림이 이거였구나 싶네요. 정말 잘 보고 갑니다.^^!

saint236 2011-11-07 21:33   좋아요 0 | URL
ㅎㅎ 저야말로 님의 리뷰를 보고 맞아 이런 부분이 있었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