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얀시, 은혜를 찾아 길을 떠나다 - 전 세계 고난의 현장에서 만난 은혜의 이야기들
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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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 얀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이 책을 열었던 나는 꽤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책을 열면서 던진 질문이 꽤나 도잘적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 

  이런 류의 질문을 안 들어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런 고민을 안해 본 것도 아니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했던 그에게, 미국 복음주의 인사의 대명사인 그에게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을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살면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자조섞인 질문을 던져 본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도(아마 지금까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해 본적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심한 우울증과 정신분열 증세로 정신병원에 세 번이나 입원했을 때도(한번은 7살 때인지라 기억이 잘 안나지만, 그 후 두번은 결혼 직전에, 그리고 둘째가 태어나고 채 백일이 되지 않은 최근의 일이다.) 도대체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교회에서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가르치면서도 말이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이 순간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라는 젊은이의 울부짖음을 엘리위젤의 흑야에서 읽었었는데 그 마음이 절절히 이해가 되던 때이다.  

  살면서 느낀 것은 이러한 질문을 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같은데 그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가끔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 힘들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랑에 실패한 젊은이도, 시험에 실패한 학생도, 취업을 못해서 눈치를 보는 젊은이도, 그리고 멀쩡히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 받은 사람들도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라며 원망을 한다는 것이다. 

  필립 얀시가 은혜를 찾아 길을 떠나는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필립 얀시도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성매매 여성들에게, 버지니아 공대 학생들에게, 아프리카의 빈곤층에게,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에게 "과연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무거운 마음을 안고 설교의 자리에 서지만 그럴 때마다 놀랍게도 그 안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 은혜가 임하지 않을 것 같은 가장 열악한 자리에 서보지만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체험한다고 한다. 아직 내가 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어렴풋이나마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은혜를 찾는 여정을 마친 후에 그가 내린 결론 또한 도발적이고,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없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언뜻 보면 그의 질문은 무신론에 도달한 것 같지만 그게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라는 질문과 "하나님이 없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한 가지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우리가 잊어버린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이미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고민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찾아 절규하는 그 순간에도 이미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계신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과거에 큰 위안을 받았던 그림을 다시 한번 떠 올린다. 하나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 순간 나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예수님을 보여주었던 그림이다. 

  (지금 이미지가 올라가지 않아서 나중에 다시 기회가 있으면 올립니다.) 

  노숙자들, 병든 사람들이 자기 순서를 기다리면서 마음을 졸이는 장면인데, 예수님은 앞에서 무엇인가 나누어 주는 그런 오만한 사람들의 자리가 아니라 내 차례가 혹시 오지 않으면 어쩌나 마음을 졸이는 쪽에 계신다는 그림이다. 그렇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졸이고 있는 우리 옆에 있는 것이다.  

  이제야 자유롭게 아무런 의심없이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 

  "하나님 없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이미 그 분은 내 곁에 계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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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
랍 벨 & 던 골든 지음, 양혜원 옮김 / 포이에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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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먼저 이 책을 읽기 전에 궁금한 것 한 가지! 

  Jesus Wants to Save Christians이라는 원제가 어떻게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분명히 번역자가 책을 읽고 그 핵심을 가지고 제목을 의역한 것이라고 보지만 직역과 의역 사이의 거리가 너무 먼 것이 아쉬우면서도 황당할 뿐이다. 과도한 의역이 자칫 저자의 논점을 흐리는 것 같아서 아쉬울 뿐이다. 

  리뷰를 작성하기 전에 먼저 읽은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한번씩 읽어본다. 이 책에 대한 과도한 칭찬도 있고, 적나라한 비판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어떤 분의 공격적인 리뷰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수준의 원색적인 리뷰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한가지 의문이 든다. 이 리뷰를 작성한 분은 과연 이 책을 읽고나 작성한 것일까? 내 판단에는, 그리고 그분의 서재를 검색한 결과(일단 그분의 구입 목록을 검색해 보았으나 없었다.) 이 책을 구입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이 된다. 구입하지 않았다고 해서 읽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겠으나 이렇게 공공격적인 분이 구입하지도 않은 책을 빌려서 읽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본인이 기독교에 관심이 없거나 불만이 있다는 것을 내가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다만 그분이 그 글을 굳이 리뷰로 작성했다는 사실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리뷰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거기에 대한 감상을 적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지도 않고, 영화를 보지도 않고 리뷰를 작성하는 것은 내 생각에는 사기라고 생각이 든다. 만약 책을 읽지 않고 이 책에 대한 느낌이나 선입견을 적고 싶다면 페이퍼를 통해서 작성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최소한 책을 다 읽고 성실히 리뷰를 작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요 예의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예수의 행적을 출애굽기를 통하여 설명한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예수의 행적을 연결시켜 설명한 책이 없지는 않지만 이 책은 여러가지 지엽적인 부분들은 모두 생략하고 시내산 계약의 의미와 예수의 행적의 의미를 연결지어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설명한다. 

  억압받는 자의 부르짖음. 출애굽기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등장하였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러한 왕이 등장하여 이스라엘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들을 억압하였고, 억압당하는 그들은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그 탄식을 들으시고 모세라는 지도자를 통하여 이들을 구원하셨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신분이 변화된 그들은 시내산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계약을 맺는다. 이제 그들은 이집트에서 그들을 구속하던 세상과 힘과 권력과 재물의 논리가 아니라 자유와 사랑의 논리를 인생의 기준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새 힘을 얻게 된 그들은 재물을 축적하고 가지 말라 명한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계약이 파기되었고 다시 억압받고 탄식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메시아를 보내주셨다. 예수는 골고다에서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되는데 그 계약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확장된 계약이다. 이 계약에 동의한 사람이 크리스천이다. 

  크리스천에게 주어진 책임은 무엇인가? 새 계약을 맺은 크리스천이 이행해야 하는 계약은 무엇인가?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탄식에 무슨 방식으로든 반응하는 것이다. 이게 새로운 계약을 맺은 우리가 행해야 책임이자 의무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또한 세상과 권력과 힘과 재물을 추구하게 되고,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귀를 막고 눈 막고 쌓아올리기에 몰두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큰 교회를 세우고, 전 인구의 1/4~1/5이라는 기독교 인구를 자랑하고, 장로 대통령을 배출했다고 자랑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심판하실 바벨탑을 쌓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획득한 힘으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기보다는 666달란트의 재물을 쌓고 말과 병거를 얻기 위하여 이집트로 내려갔던 솔로몬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는가? 교회의 문턱을 한없이 높이고 선별적으로 교회의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는가?  

  너는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이 질문은 이렇게 열심히 제국을 형성하고 힘을 모으기에 집중하는 교회들에게, 특히 한국의 교회에게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 앞에서 한국 교회는, 그리고 그 구성원인 나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교회가 안티들의 말처럼 개독이 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개독(開督)이 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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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 감동 휴먼 다큐 '울지마 톤즈' 주인공 이태석 신부의 아프리카 이야기, 증보판
이태석 지음 / 생활성서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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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참 촌스러운 제목이다. 그래서일까 이미 알고 있음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책이다. "그저 그런 책이 하나 더 나왔군!"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 책은 내 머릿 속에서 잊혀졌다. 그러다 작년 이상하게 "울지마, 톤즈"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거참 희한한 일이다 생각하면서 넘어가다가 크리스마스 근처에 KBS에서 하던 "울지마, 톤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아마도 울지마 톤즈 이후로 그것이 왜 인기를 끄는지,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가 되어 가는지 집어보는 울지마 톤즈 후속편인 것 같았다. 아내와 함께 앉아서 그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는데 중반쯤 넘어갔을 때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이다. 목이 답답해지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다큐멘터리는 그냥 이태석 신부가 생전에 살았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었고, 그의 주위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이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감없이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왜 그것을 보는 내 눈에서는 나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나는 것일까? 나는 이태석 신부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에게 울지마 톤즈 영화를 보여준 후 그들의 인터뷰를 쭉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책상에 엎드려 우느라 자리를 떠나지 못했던 한 의사에게 카메라가 멈추었다. 다 큰 어른이 큰 소리를 낼 수도 없어서 소리를 죽이고 흐느껴 우는 모습이 어찌나 서글프던지? 왜 그러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종교는 다르지만(아마도 개신교 신자였던 것 같다.) 저렇게 열악한 곳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신부님의 모습을 보니까, 여기에서 의사 안보내준다고, 힘들다고 불평했던 것들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그럽니다." 

  분명 그 사람도 아픈 이들과 함께 하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그곳에서 어려움을 견디고 있었을 것인데 그런 그의 마음에 부끄러움을 가르쳐 준 이태석 신부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 

  "친구" 

  언젠가 영화에서 "오래두고 사귀어 가까운 벗"이라는 뜻풀이를 보았다. 이태석 신부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톤즈의 친구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한다. 처음에는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중요한 것은 같이 있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이신부의 말이 마음에 깊이 담겨진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삶이 아니었던가?  그런 삶이 톤즈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은 그리움을 남긴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가 말기암이라는 판정을 받으면서도 톤즈를 떠올린 이태석 신부의 삶은 톤즈과 우리를 하나로 엮는 귀한 사랑의 고리가 되어 우리에게 기억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울지마 톤즈 중에 나온 "사람이 깊으면 그리움도 아픔이 된다"는 구절이 담긴 시로 그를 그리워해본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음에 

김경훈[石香]

만날 수 없다고
그리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 깊으면
그리움도 아픔이 된다 하지만
그 아픔 마저도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들리지 않는다고
그 목소리를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만날 수 없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저만의 색깔과 향기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음에..
                               (詩와 그리움에서) 

  아직도 사랑하고 있음에 그리움으로 인한 아픔마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고 이태석 신부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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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3-3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 이야기 정말 감동적으로 봤는데 저는 반대로
책 제목이 인상 깊고 좋아요. 그리고 마지막에 소개된 시도 좋구요, ^^

saint236 2011-03-31 11:36   좋아요 0 | URL
저도 눈물흘리면서 봤습니다.

느린산책 2011-04-0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 개봉 전에 KBS스페셜로 故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접했어요. 그때 이 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구요. 수단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악기를 연주했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가슴 아픕니다.

saint236 2011-04-05 10:15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는 보지 못하고 kbs 스페셜로 봤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 맥스 루케이도가 전하는 당신을 향한 주님의 특별한 계획
맥스 루케이도 지음, 최종훈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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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사는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질문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이 질문에 대하여 더 깊이 고민하게 된다. 창조론을 과학이라는 안경을 끼고 맞다 틀리다 분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곁길로 가고 오해를 받지만 이것도 결국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왜 사는가?"라는 말을 조금 세련된 기독교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입니까?" 성경이 천지창조로 시작하는 이유도 나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진화론에서 이야기하듯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으며, 이것을 찾아 내어 실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가 창조론이라는 말 가운데 들어 있다. 

  맥스 루케이도의 이 책은 이 부분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왜 삽니까? 당신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찾기 위해 노력합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무한한 가능성입니다라는 말 가운데 이런 도전적인 질문들이 들어 있다.  

  맥스 루케이도의 책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부분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필립 얀시가 은혜를 주제로 여러가지 책을 썼다면 루케이도는 하나님의 계획,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많은 책들을 쓴다. 참고로 유진 피터슨은 현실에서의 영성이라는 부분에 대하여 고민한다. 혹 삶이 지루하거나, 무미건조하거나, 인생의 목표를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책이 여러 책에서 씌여졌던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인지라 긴 호흡으로 글을 읽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의 글에 비하여 깊은 여운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비슷한 글을 모아 놓으니 감동이 많이 옅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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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메시지다
김기석 지음 / 포이에마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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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책이란 읽는 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다. 

  고 권정생 선생님의 말씀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한없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왜 불편한가? 지식과 삶 사이의, 신앙과 실제 사이의 괴리가 큰 까닭이다. 아니다. 원래 괴리는 컸지만 애써 외면했던 그 사실을 나에게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신앙은 말짱 헛수고라는 말!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 당연함만큼 신앙인들의 마음을 찌르는 말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팔복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번 벼리어 내어 김기석 목사님은 아주 날카로운 칼을 만드셨다. 그 칼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한장 한장 넘길수록 양심에 생채기가 하나씩 늘어난다. 심령이 가난하지도, 그렇다고 남을 긍휼히 여기지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살아가지도 못하는 필부로서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산상수훈의 말씀이 버겁기조차 하다. 그럼에도 필부의 만용이라도 부려보는 것이 신앙인이라면 가져봐야할 용기이기 때문에 애써 한발 떼어본다. 한발 한발의 무게가 천근만근 무겁기는 하지만, 한없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그래도 욕심을 내어 보련다. 

  그것이 무리가 아닌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이기 때문이다. 반경환 시인의 <때1>이라는 시가 책 가운데 인용되어 있는데 마음에 가장 깊이 남았던 그 시인지라 여기에서 인용해 보고자 한다. 

  무릎이 구부러지는 건
  세상의 아름다운 걸 보았을 때
  굽히며 경배하라는 것이고,
  세상의 올곧지 못함을 보았을 때
  솟구쳐 일어나라는 뜻이다.
  때를 가리지 못함이 무릇 몇 번이던가 

  솟구쳐 일어나지도 못하고 굽혀 경배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삶이지만 신앙을 내 삶으로 번역해 보려고 한다. 그래야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면목이라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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