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은 성경 밖 성경이야기
유재덕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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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성경 시리즈를 한권으로 모아 놓은 책이랄까? 시간이 있으면 연린다 성경을 추천한다. 없으면 이 책으로...리뷰는 열린다 성경 작성시 포함하여 기록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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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그런 것이다 - 신념과 맹신과 광신의 차이를 말하다! 온전한 삶 시리즈 1
송태근 지음 / 포이에마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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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히브리서 11장은 고린도전서 13장과 더불어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성경이다. 고린도전서 11장이 사랑의 본질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면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다른 성경들은 다 생각이 나지 않아도 한국 기독교인의 머리 속에는 고린도전서 13장과 더불어 히브리서 11장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한국 기독교 신앙은 믿음이라는 말을 빼고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한 예를 들어 보면 예전에 내가 했던 경험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성경을 읽다가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겼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 가인이 벌을 받아서 도망가는데 이해가 안되는 말을 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 하면 어떻게 합니까?" 아벨을 죽인 가인이 다른 사람에게 위협을 받으면 어떻게 하냐면서 하나님께 호소하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이 어디서 튀어 나온 것인가? 성경을 읽다보면 이러한 의문들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목사님께 이것을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돌아오는 답이 "성경은 믿는 것이다. 의심하지 말아라." 이거다. 아마 내가 다니던 교회가 시골이어서 상당히 보수적이었나 보다. 그런데 그 대답을 듣고 내가 드는 생각이 도무지 납득이 안되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도 이해가 안되면 선생님에게 묻는다. 그러면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이해를 시키려고 하는데 유독 교회에서만큼은 믿으면 된다고 넘어간다.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이 정도 밖에 안되는 것인가? 의문을 표하는 사람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이 정도가 과연 믿음이 본질인가? 이 정도가 믿음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면 한국 기독교의 수준이 매우 안쓰럽다. 

  교회에서 그렇게도 많이 사용되는 믿음이라는 말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다. 아니다. 이 책은 다른 책들과는 달리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과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진지하게 묻고 대답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나의 단호함(신념)이나, 어떤 목적에 맞추어진 과도한 동의(맹신), 혹은 믿음이 요구하는 인격적 요소 앞에서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양상(광신)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 흐름에 맞게 읽다보면 믿음에 관해 우리가 크게 오해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이란 말을 중의적인 뜻으로 설명한다. 첫번째로 믿음은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와 함께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임과 동시에 하나님께 반응하는 우리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두번째로 믿음은, 그 자체만으로는 구원이나 의를 획득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면에서 철저하게 통로적이고 도구적이지만, 동시에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기쁨을 드릴 수도 없습니다.(p13) 

   믿음의 본질에 대해 이보다 더 탁월한 설명을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흔히 믿음을 신념, 혹은 맹신, 혹은 광신으로 착각하지만 이것들은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으로 무슨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을 한다. 간절히 원하면 주신다라는 표어아래 믿음이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정리해 버린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이 흔들린다면 믿음이 없다는 말을 듣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는 척 한다. 아무리 굳건한 기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기도하면서 마음이 흔들리도 두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믿음의 유무와는 상관이 없다.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약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약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믿음이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묘한 습성 때문에 한국 교회의 믿음은 광신이나 맹신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반대로 이러한 현실에 반발하여 매우 차갑게 논리적으로 성경을 보면서 이것이 믿음이다라고 말하지만 대부분 그런 것은 신념이기 쉽다.  

  믿음이 무엇인가? 믿음이란 어떤 상황을 만날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상황이 어렵고, 절망스럽고, 흔들리고, 의심이 든다고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바라보기를 포기하는 것이 믿음이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사람이 그 안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선물이다. 동시에 믿음이란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기 위한 인간의 의지력이기도 하다.  

  믿음의 본질에 관하여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과연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송태근 목사와 함께 하는 믿음을 찾아가는 여행이 꽤 재미있고 유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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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通박사 조병호의 성경과 고대전쟁 - 고대 제국들의 전쟁을 통한 세계질서!
조병호 지음 / 통독원(땅에쓰신글씨)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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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이지만 가끔 기독교 신앙 서적을 보면서 너무하다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이 딱 그때이다. 가격에 비해서 책 내용이 부실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예전에 후배에게 이 책의 전편격인 "성경과 5대제국"을 사주었기 때문에(물론 내용도 보지 않고 후배가 사달라고 한 책이기 때문에 사주었지만) 어느 정도의 기대는 가지고 이 책을 구입했다. 그런데 자꾸 읽으면서 참 허술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책의 진행도 앞뒤로 왔다 갔다 한다. 앞에서 잠깐 언급하고 넘어간 전쟁 이야기를 뒤에서 상세하게 서술하는 식이다. 물론 그 상세한 서술이라는 것도 내가 보기엔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  

  리뷰라고 쓰면서 참 오만하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겟지만 평소에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여기에 언급된 책들은 다 읽어봤다면 이 책에 대해서는 그 정도의 오만은 부려도 용납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에 언급된 데이터들은 실제로 원전들을 가지고 비교해 보니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책의 흐름도 시대 순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제국과 관련된 주요한 전쟁들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다만 문제는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이 영 쌩뚱맞다는 것이다.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세계사 특히 고대 근동의 역사는 꼭 공부해야 할 부분이다.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내용들이 사실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을 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세계사를 통해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는 방법이 된다. 예를 들면 에스더 1장과 2장 사이에 페르시아 전쟁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왜 갚자기 아하수에로가 분노하고 새로운 왕비를 뽑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세계사의 모든 전쟁들의 양상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가령 알렉산더는 기습에 능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성경에서 기습에 관한 내용을, 공성전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다윗의 예루살렘 점령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역사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성경에 이러한 전쟁의 양상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위대하다라는 이상한 논리를 주장한다. 가장 위대한 전쟁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사단과 싸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며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마지막은 진정한 평화가 무엇이냐는 내용으로 결론을 내린다. 

  저자가 역사를 전공했다고 해서 기대했지만 정말 기대 이하의 책이다. 개개로 살펴보면 맞는 것 같지만 모아 놓으니 뭔가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역사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앙 서적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이 책의 긍정적인 점을 꼽자면 고대 근동의 역사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 혹은 시간이 없어서 간략하게나마 살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유익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딱 거기까지만이다.  

ps. 여러가지 눈에 거슬리는 부분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하나를 꼽자면 부르투스의 카이사르 살해 사건에 분노해서 로마를 뒤집어 놓은 것을 전적으로 안토니우스의 행위이기에 옥타비아누스와는 무관하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합작품이라는 것이 역사적인 진실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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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2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1-11-02 16: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transient-guest 2011-11-12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류의 책은 관심이 가질 않아요. 특정한 사관이나 목적을 가지고 fact를 이용한 결론을 도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saint236 2011-11-12 12:37   좋아요 0 | URL
잘못하면 역사 왜곡으로 이어지죠.
 
사도행전 속으로 3 -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사도행전 6.7장 이재철 목사의 사도행전 설교집 3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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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권에 접어들어서야 드디어 이재철 목사다운 설교가 시작된다. 내가 이재철 목사의 설교를 듣는 이유는 두가지이다.  

  첫째는 철저하게 본문 중심이라는 것이다.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너무 작위적으로 듣기 좋은 이야기, 복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곳곳에서 성경의 본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축복의 약속이 넘치도록 선포된다. 과연 그 복은 누구를 위한 복이며, 누구 주는 복이며,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복과는 상관없이 한국적인 상황에서의 복, 장수와 물질적인 풍요만 선포하는 전혀 비성경적인 설교가 얼마나 많은 강단에서 넘쳐나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복의 선포를 따라서 모여들고 있는가? 삼박자 축복에 열광하고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는 말씀에 열광한다. 그렇게 많은 축복의 선포 뒤에 몇 배는 더 많은 저주의 선포가 이어짐을 애써 무시하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이재철 목사는 이런 면에서 자유롭다. 지나치리만큼 회개를 강조하며 성경을 파고 또 판다.그의 설교가 묵직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둘째 그의 설교는 폭이 참 넓다. 성경을 그저 성경으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을 무시한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은 기본이요, 인문학적인 그리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배경까지 동원하여 말씀을 해석하기 때문에 그의 설교는 기독교인에게도 그리고 비기독교인에게도 호소하는 능력이 크다. 사도행전 속으로는 비교적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편이지만 곳곳에서 보여지는 그의 폭넓은 시각은 참으로 존경스러우며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물론 이재철 목사의 설교가 흠이 없고 완전무결하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선포하고 해석하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 안에 인간적인 생각이 필연적으로 끼어들 수밖에 없다. 내 판단에도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인다. 특별히 정치적인 상황을 해석하는 부분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꽤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에서 제대로 설교하는 몇 안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사도행전 속으로 3권에서는 그는 스데반의 설교를 통하여 교회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여준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기로부터 얻게 된 기득권들과 이권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성전 안에 가두어 버린 유대인들을 비판하는 스데반의 설교를 통하여 바벨탑을 쌓아 올리고 있는 한국 교회의 잘못된 믿음을 비판한다. 예전에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일이 있었다. 그분이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기 형제들이 모이면 누구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크냐를 놓고 다툰다고 한다. 그것도 자랑스럽게 영어로 이야기를 한다.  

  "What's the biggest church in the worrld?"  

  그 이야기를 듣고 무척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어떤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인가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 어느 교회가 가장 큰 교회인가를 다투는 한국 교회는 스데반의 설교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요, 우리의 삶의 한복판에 들어오셔서 동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무너져버릴 바벨탑을 쌓는데에만 몰두한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져 버릴 것이다. 시간이 없어서 1권과 2권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3권만이라도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 바른 교회의 모습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3권만큼은 꼭 읽어볼 것을 권한다. 특히 청년들은 반드시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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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아 멈추어라 - 불가능에 도전하는 믿음
스티븐 퍼틱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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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아, 멈추어라" 

  상당히 자극적인 제목이다. 왜 이렇게 신앙 서적의 제목들은 자극적인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왜 나는 이렇게 자극적인 제목에 혹 해서 책을 구매하는 것일까? 아마 나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내용이 더 자극적이 되어가는 것 같다. 

  자극적인 제목이지만 제목을 통하여 중요한 기도의 원칙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된다. 기도란 무엇인가? 크리스천만큼 기도에 열심인 사람들도 드문데, 의외로 기도에 대하여 무지한 경우가 많다. 특히 연령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 하다. 기도에 무지하다 보니까 기도에 관한 오해가 두 가지 생긴다. 

  첫째, 기도는 만사 형동의 도깨비 방망이라는 사고이다. 언뜻 보면 맞는 말이다. 주로 강단에서는 이런 식으로 설교가 행해진다. 그렇지만 정말 맞을까? 언론이 생략을 통하여 사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듯이 설교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힘들고 어려운 말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들을 생략해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오해하게 만든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믿음이라는 말이 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죄가 사함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교리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 말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구원을 받는 믿음이란 예수를 믿는 사람의 삶은 전혀 새롭게 변화되어 과거로 회귀하지 않는다는 믿음의 실천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실천이라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설교자는 종종 이 부분을 생략해 버린다. 가령 누가 "기독교를 믿는 것은 진짜로 어려운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부담을 느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자주 생략이 이루어지고 이런 과정을 통하여 믿음이 오해되는 것이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기도해도 안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내 욕망을 위해 구하면 분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종종 잊어 버린다. 그래서 나의 욕망에 충실한 기도의 제목들을 끝도 없이 늘어 놓는다. 그리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기도가 모든 것을 변화 시킬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복권 당첨을 위해 기도했으면 최소한 복권은 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책은 이러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고 기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기도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비판한다. 

  둘째 될만한 것들만 기도한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인데,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제한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기도해도 나의 생각대로, 내가 생각한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기도하는 것은 나의 몫이지만 그 기도에 어떤 형태로든 응답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이다.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경험을 몇번 하다보면 기도자들도 나름대로 영악해지는데, 될법한 것들만 기도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달에 월급을 100만원 받는 사람이 이번달에도 100만원을 벌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기도도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사람이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하면 100만원의 수입은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사람이 기도를 한다면 이번달에도 직장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건강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기도일 것이다. 

  무슨 말이냐?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기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들만 가지고 기도하는 기도의 편식을 하고 있지 않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도는 왠만하면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99%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 그렇지만 이런 기도만 하는 사람은 기도의 깊은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다. 여호수아처럼 태양을 멈추는 것 같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들이 이루어지는 기도의 참 맛을 이해하지 못한다. 불가능에 도전하라는 제목은 이러한 기도의 참맛을 체험해 보라는 말이다.  

  불가능해 보일 것 같은 상황,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벽 앞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깊은 웅덩이 가운데에서 진실하게 마음을 담아 기도해보라. 그 순간 기도의 참맛을 느낄 것이고, 그 순간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크심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기도하는 이유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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