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오래된 도시로 미술여행을 떠나다 - 미술사학자 고종희와 함께 이상의 도서관 26
고종희 지음 / 한길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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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왠지 칙칙하고 안개가 자욱한 것 같아서 싫다.

 

  프랑스?

  글쎄? 음식과 와인 빼고 무엇이 있을까? 베르사이유? 에펠탑? 화려하긴 하지만 왠지 실속이 없을 것 같다. 화려하긴 하지만 아기자기한 맛, 세월의 저력을과 고풍스러움을 느낄 수 없는 한국의 강남같은 분위기랄까?

 

  알프스의 나라 스위스? 드라큘라의 본 고장 루마니아? 부다페스트 헝가리? 이스탄불의 터키?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네?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 신성로마제국의 로마?

 

  모두 가보고 싶은 나라들이지만 서민으로 그것도 많이 쳐줘서 서민이지 중산층 이하인 내가 모두 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짧은 시간 동안에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여행도 싫으니 딱 한 곳만 선택해서 가라면 어디를 가면 좋을까?

 

  이탈리아!

 

  파스타! 세리아A! 마피아의 조국! 로마 교황청! 아말피,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 곤돌라를 타고 산타루치아를 불러보고도 싶지만 내가 이탈리아에 끌리는 가장 큰 이유는 곳곳에 남아 있는 미술품들과 건축물, 조형물들이다. 오랜 옛날 로마 제국에 의해서 건설된 도로들, 수도들, 콜로세움, 목욕탕 같은 건축물들을, 지금까지 책으로만 봤던 것들을 실제로 눈으로 살펴보고 만져 보고 싶다. 또한 곳곳에 남아 있는 미술품들을 입시를 위해 인상파니, 무슨 파니 머릿 속으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찬찬히 뜯어 보고 싶다. 물론 그때까지 책을 통해서 참을 수밖에 없을테지만 말이다.

 

  이탈리아에 대한 책을 보내달라고 하는 녀석에게 보낼 선물을 고르던 중에 이 책을 발견했다. 이탈리아, 고도, 미술품! 나의 흥미를 팍팍 자극하는 세가지 단어가 모두 들어간 책이다. 게다가 한길사에서 펴낸 책이다. 아내에게 선물할 책을 산다는 말을 하면서 슬쩍 끼워서 한권을 더 구입했다. 책이 도착하자 마자 읽기 시작했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지 솔직하게 글의 맛은 덜하다. 진짜 글을 잘 쓰는 사람의 책은 읽다가 도저히 손에서 뗄 수 없을 정도로 중독성이 있는데 이 책은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미술사를 전공한 사람답게,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답게 이탈리아의 미술에 대해서, 미술 여행에 대해서 중요한 팁들을 제공해 준다. 어느 미술관은 몇 명까지만 관람을 허용하니 미리 신청하고 가라는 등, 어느 도시에는 어떤 콜렉션이 유명하다는 등 매우 중요한 정보들이 제공되어 있다. 그것도 글로만 적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까지 곁들여서 충실하게 소개하고 있다. 혹 이탈리아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에 나오는 도시들 중에 몇 군데를 선택해서 미술 여행을 해보는 것도 여행의 새로운 즐거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다가 나와 내 아내의 눈이 멈춘 것은 피에타 상이다. 미켈란제로가 23살에 조각한 바티칸의 피에타 상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정교하게 만들었는지 미켈란제로를 왜 조각의 천재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다. 아내와 난 피에타 상을 바라보면서 주름까지 세세하게 조각하고 다듬은 리엄함과 디테일, 그리고 그 표정에서 느껴지는 성스러움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매일 이런 조각과 미술품들을 접한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택을 읽다가 또 다른 피에타 상을 발견했다. 미켈란제로가 만든 피에타 상이라고 해서 이건 뭔가 싶어서 살펴보니 미켈란제로는 평생에 피에타 상을 3개 만들었다는 것이고, 내가 본 피에타 상은 론디니움의 피에타로 미완성 조각이라는 것이다. 바티칸의 피에타가 완벽한 균형과 디테일로 충격을 주었다면 론디니움의 피에타는 대략적인 윤곽만 잡혀 있지만 투박함과 여거친 질감 속에서 예수의 고난과 성모 마리아의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 실제로 가 볼수는 없으니 꿈틀거리는 간절함을 달래기 위해 다시 한번 책을 찬찬히 훑어봐야겠다.

 

 

 

   좌측이 바티칸의 피에타이고 우측이 론디니니의 피에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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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 잡혀간다 실천과 사람들 3
송경동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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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혀간다가 요즘 유행이다.

 

  "BBK를 말하는 자 잡혀간다."(정봉주)

  "데모 하는 자 잡혀간다."(유모차 부대)

  "촛불을 드는 자 잡혀간다."(촛불 시위자들)

  "농담하는 자 잡혀간다."(박정근, 시사IN 기사 제목)

  "꿈꾸는 자 잡혀간다."(송경동)

 

  이 외에도 잡혀가는 사람들이 참 많다. 바야흐로 자기 검열의 시대이다. "절대로 그럴 분이 아니다. 그냥 소설을 써 보는 것이다."라는 꼼수로 자기 검열을 피해가지 않으면 잡혀가는 시대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집권자들이 통 크게 놀지 못한다. 통큰 것은 롯데마트에서 파는 피자 뿐이다. 그나마 통크게 놀던 치킨도 잡혀갔다.

 

  "송경동"

 

  낯선 이름이다. 솔직하게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도,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저 노동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답지 않게 시를 쓰고, 글을 쓰는 독특한 사람이라는 정도만 안다. 그 판에서야 유명한 사람인지 몰라도 나에겐 아주 생소한 사람이다. 그저 이 책을 통해서만 접했을 뿐이다. "꿈꾸는 자 잡혀간다"라는 제목에서 풍기는 절망이 선뜻 책에 손을 대지 않게 만든다. 그러다가 존경하던 선생님(내가 다니던 대학에서 특별히 존경하는 교수님은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페이스북에서 이 책에 대한 글을 보았다. 꼭 읽어봐야 할 책으로 소개하시던 그 분의 글 때문에 책을 펴고 읽었다.

 

  역시 제목 답게 답답하다. 절망스럽다. 사무실에서 보다가 꺽꺽 숨직이며 울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남몰래 눈을 깜박였다. 뻔히 잡혀갈 것을 알면서도 꿈을 꾸는 저자가 불쌍해서 울었고, 그 정도의 꿈도 용납하지 못하는 편협한 사회가 답답해서 울었고, 이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포기 하지 못하고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저자가 불쌍해서 다시 울었고,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생각 나서 또 한번 울었다. 이 글을 보고 나를 아는 사람들이 무엇이라 할까 겁이 나서 자기 검열을 떠올리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져서 마지막으로 울었다.

 

  그게 가능할 거냐고? 이건 단지 꿈일까? 그렇다라도 좋다. 진정한 문화 예술은 아직 오지 않은 꿈을 꾸는 일이니까. 퇴락한 시대를 핑계로 사람들은 가능치 않을 거라고 하는 것들을 상상하며, 모두가 평등하고 평화로우며, 자유로운 세계를 향해 오늘도 고단한 영혼의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일이니까. 가난하고 핍박받더라도 영혼을 팔지 않는 일이니까.

  모두 함께 다른 세상을 꿈꾸자. 꿈은 꾸는 순간 절반은 이루어지니까.(p 138)

 

  왜 난 송경동씨처럼 꿈을 꾸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꿈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어느새 가능과 불가능을 판단하고 있는 내 모습이 비겁해 보인다. "꿈은 꾸는 순간 절반은 이루어지니까"라는 말이 눈에 아프게 들어와 박힌다.

 

  문득 언젠가 위에 언급한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하셨던 말이 생각이 났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은 글로 볼 것이 아니라 직접 들어야 한다. 시간이 되면 인터넷에서 찾아서 들어봐라." 책을 덮고 연설을 찾아서 들었다. "I have a dream"이라는 유명한 연설!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주 부드럽고 아련한 목소리로 우리의 감성을 자극할 것이라 상상했지만 실제 연설은 정반대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연설하는 내내 그의 연설을 듣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같이 섞여서 나온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에서 "옳소"하고 선동하는 것처럼, 감격하는 사람, 동의 하는 사람,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의 반응이 그대로 담겨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목소리도 부드럽지도, 그리고 아련하지도 않다. 힘이 있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처럼 열변을 토한다. 아마 조현오 총장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특유의 목소리로 "물대포 쏴"하고 외쳤을 지도 모르겠다. 메이저 언론에서는 "빨갱이 목사, 선동가, 폭력 시위 유발자"라는 자극적인 기사 제목을 달면서 사회면 톱으로 다루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열정적이다.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격정적이다. 전율이 흐른다. 나도 모르게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옆에서 헤드셋 너머로 들리는 소리를 듣고 데모하는 영상을 듣냐고 물어본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을 듣고, 생각 난 김에 인터넷에서 송경동씨의 추모시 낭독 영상을 찾아본다. 용산 참사 피해자들을 추모하면서 쓴 시를 낭독하는데 차마 마지막까지 듣지 못했다. 저러다 쓰러지면 어쩌나 싶은 걱정 때문이다. 피를 토한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나는 네번 죽었지만 아직 살아 있다"는 시인의 절규가 새파랗게 날 선 칼이 되어 내 가슴에 박힌다. 마틴 루터 킹 목사도 그렇고 송경동 시인도 그렇고 아직 꿈을 포기 하지 못하는 이들은 이렇게나 열정적인가 보다.

 

  이제 나도 조금 더 꿈을 꿔보기로 한다. 희망 고문? 좋다. 고문을 고문이라고 느끼는 것도, 아픔을 느끼는 것도, 절망감을 느끼는 것도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아직 내가 세상과 야합하지 않은 증거가 아니겠는가?

 

  밤새워 노래와 춤과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농담과 해학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환대와 우애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게 무슨 힘이 될 거냐고? 하지만 우리는 믿는다. 사람이고자 하는 마음만큼 강한 것은 없다. 역사 이래 그 어떤 총칼과 억압과 배제도 '사람의 말들', '사람의 절규들', '사람이고자 하는 희망의 몸부림들'을 막지 못했다.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때론 외롭고 힘들더라도 그 길에 '사람'이 있다면 어디서든 빛이 비칠 것이다. --- (중략) ---  이 견딜 수 없는 절망들에 휩싸여 있는 게 너무나 힘들었던가 보다. 그 강인하던 눈에 눈물이 흐르는데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감고 있었다. 말은 안해도 얼마나 많은 절망과 패배가 쌓였으면 저럴까. 속으로 복받치는 분노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절망을 넘어보자고, 가장 아래에서 고통받으며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 희망버스를 만들게 되었다. 거기 수많은 마음들을 얹어주신 분들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p 242 - 243)

 

  좌우 우를 나누고,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고, 네 편과 내 편을 갈라 파편화시키고 점령하는 이 시대에 사람이고자 하는 꿈을 꿔보련다. 대동하고, 화합하는 꿈을 꿔본다. 설령 희망 고문이 될지라도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많다면 그 또한 고문보다는 희망에 방점을 찍을 수 있지 않겠는가? 송경동 시인처럼, 마틴 루터킹 목사처럼 "I have a Dream still"이다.

 

ps. 다행히 이 책을 다 읽었을 때(2월 9일) 송경동 시인이 보석이지만 풀려났다.

      오타- 185p 밑에서 세번째 줄 퍼세트-> 퍼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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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2-02-15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제가 읽고 있는 책의 페이지에 마침 이런 말이 나오네요.
'인생의 비극이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달성할 목표가 없는 것이 인생의 비극이다.' 목표 달성에 실패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지만, 달성할 목표가 없는 것은 치욕이라는 말인데, 역사 속의 위인이 한 말이 아니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수영 선수가 한 말이라더라고요. 요는... 꿈이 있다는 게, 멋져요. 남은 인생을 던져 살아볼 가치가 있다는 말 같아서.

saint236 2012-02-16 00:03   좋아요 0 | URL
꿈을 찾는 것이 꿈이 되어버린 시대라는 김예슬씨의 말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올랐습니다. 무슨 책인지 궁금합니다. 좋은 책은 널리 알려 사람을 이롭게 하셔야지요...

차트랑 2012-02-15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경동님의 시가 많은 분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나봅니다.
이러다가는 결국 읽고 말게되지요~

saint236 2012-02-15 23:51   좋아요 0 | URL
그렇겠지요? 결국 시란 마음에 와닿는 것이 오래 남게 되니까요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 - 여자, 당신이 기다려 온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 1
노엘라 (Noella) 지음 / 나무수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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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의 표지에 서 있는 글귀 중 내 마음에 가장 들었던 것이 "멜로디가 흐르는 미술관'이다. 그래서 난 리뷰를 쓰면서 리뷰의 제목으로 이 글귀를 선택했다. 

  예술이란 무엇일까? 특히 생소한 미술과 클래식은 나에게 잇어서 무엇일까? 그저 미술 시간, 음악 시간에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하여 머리 속에 우격다짐으로 구겨 넣었던 것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그러니 학창 시절에 도무지 클래식에 관심이 없었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몬드리안의 황금비율이 1:1.618이라는 것을 외우기 위해 노력했지 몬드리안이 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고, 알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위 작품의 제목이 Red, Yellow 그리고 Blue인 것도 몰랐다. 그냥 황금 비율은 1:1.618이라는 것만 달달 외웠을 뿐이다. 클래식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누가 무슨 곡을 작곡했는지는 달달 외웠지만 실제로 그 곡을 들어서 알았을리는 없다. 수능에서 1점이라도 더 맞기 위해서 미술과 더불어 음악은 전혀 필요없는 과목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3이 되어서 미술과 음악은 관심 밖의 과목이 되었고 선생님들도 공공연히 자율학습이라는 명목하에 국영수 공부를 조장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클래식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대중가요가 클래식 일부분을 샘플링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였다.(이현우의 헤어진 다음 날이 그 유명한 비발디의 사계의 겨울 중 2악장이며, 박지윤의 달빛의 노래는 오페라 카르멘 중 하바네라를 샘플링했다.그 외에도 신화 휘성 등 많은 가수들이 클래식을 샘플링 했지만 실제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대부터 클래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샘플링한 원곡들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아마 그대쯤에서야 비로소 춘향가도 전곡을 다 듣기 시작했을 것이다.(사랑가는 물론이거니와 개그 프로에서 나오던 쑥대머리도 춘향가의 한 부분이다. 춘향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서글픈 목소리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쑥대머리로 시작하는 창을 한다.) 

  비단 나뿐이겠는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러할 것이다. 음악과 미술은 수능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과목이라 무시해도 되며 머리속에 구겨 넣는 과목이기 십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무실에서 부록으로 주었던 클래식 CD를 틀었더니 후배가 꿍얼거린다. 재미없는 클래식을 듣는다고. 쇼스타코비치의 세컨드 왈츠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면서. 이 곡도 내가 자주 흥얼거려서 알고 있는 곡이지 그 전에는 영화에서 들어 본 기억이 있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수능 점수에 도움은 안되지만 상처받았을 때, 삶이 힘겨울 때, 거듭되는 힘겨운 삶으로 인해서 지쳤을 때 내 마음을 위로해 주었던 것은 클래식이며, 사고의 폭을 넓혀 주었던 것은 수없이 많은 명화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코린트의 눈먼 삼손은 내게 가히 충격이었고, 내 마음을 가장 많이 위로해 주던 그림이었다. 

  비발디의 사계나 베토벤의 운명을 틀어 놓고 이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한없이 감성적이 되기도 하지만 현실에 당당하게 맞설 힘을 얻기도 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명인들의 그림과 클래식이 왜 오늘날까지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라. 난 클래식 매니아들처럼 작곡가들의 생애에 대해서도, 작품의 배경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무지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접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저자도 그래서 음악과 그림을 동시에 감상했던 것이 아닐까?  

  감정의 조각들은 사랑이 되고, 애증, 그 강렬한 이끌림, 내가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믿었던 사랑은, 나는 사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괜찮아, 슬픔은 곧 지나갈 거야, 단 한 번의 잊지 못할 입맞춤 , 다시는 오지 않을, 이토록 뜨거운 순간, 아팠구나, 네가 많이 아팠구나, 불안은 창조의 씨앗이 되고, 끝이 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가장 달콤한 유혹, 아름다운 죽음을 꿈꾸다, 불완전해서 오히려 아름다운, 자유로부터 그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사랑할 자유, 꿈꿀 자유, 내 인생의 혁명이 필요할 때, 우연의 이끌림, 오감으로 느끼는 사랑, 진실은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진실 그 자체로 아름답다, 굿바이 고정관념, 헬로 자유!, 예술, 일상을 만나다 

  소단원들의 제목을 보라. 그녀의 아픔과 힘겨웠던 삶의 무게가 그대로 드러나 있지 않은가? 사랑과 이별, 상실과 불안, 극복과 희망, 삶의 의지, 비전을 향해 나가는 두려움과 용기가 읽혀지지 않는가? 바이올린 연주라는 그녀의 배움이 삶에 힘을 주고 함게 보았던 그림들이 용기를 주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그림과 음악을 가까이 접했을 그녀가 너무나 부럽다.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의 유학생활이 힘들고 어려웠을 것이지만 외국이라는 삶의 자리가 그녀에게 너무나 커다란 선물을 준 것이리라. 만약 그녀가 한국에 있었다면 아마도 이런 축복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빡빡한 삶때문에 더 진이 빠지지 않았겠는가? 

  이 책은 가볍게 보면 그냥 그림과 음악에 대한 감상 입문서 내지는 에세이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녀처럼 삶의 무게 때문에 지쳐있는 이들에게는 지친 마음을 잠시 추스르고 쉬었다 갈 수 있는 한없이 편안한 장소가 된다. 이 책은 가볍게 읽어도 무겁게 읽어도 즐거운 그런 종류의 책이라 말하고 싶다. 부록으로 같이 딸려온 CD는 정말 굳이다. CD부록이 초판본에 한해 증정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혹시 재판이 발행된다면 CD를 꼭 같이 증정했으면 좋겠다. 그것도 책의 순서에 맞추어서 음악 순서를 재구성하고 빠진 음악들도 같이 넣어준다면 더 좋을 것이다. CD를 틀어 놓고 읽는 책은 몇 배나 더 진한 감동을 선사할 것이기 대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아쉬운 점은 후반부로 갈수록 억지로 끼워 넣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고전부터 시작하여 현대 미술과 음악, 팝아트까지 다루고자 한 것은 저자의 욕심같다. 특히 앤디워홀과 번스타인은 더더욱 그런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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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5-15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ㅡ 좋은 리뷰입니다.
저 역시 미술에 문외한이라....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몬드리안의 그림이 다가오네요.
CD도 같이 오나 봐여? 오....

saint236 2010-05-15 12:14   좋아요 0 | URL
초판본에 한해서 CD가 증정품이더라고요. CD를 들으면서 책을 읽으면 왠지 있어 보인다는...ㅋㅋㅋ 읽으면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책입니다.

마립간 2010-05-1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 평가단에서 CD를 보내 주었나요? 저는 받지 못해 음악 찾으면서 읽으나라고 애 먹었는데.

saint236 2010-05-16 22:51   좋아요 0 | URL
책 뒷면에 보시면 비닐 커버에 CD가 들어 있습니다.

2010-05-17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0-05-17 22:4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읽고 서평쓰겠습니다. 요즘 사놓고 밀린 책 읽고 있는 중이라 이렇게 넉넉하게 기한을 잡은 것을 이해해 주세요.^^

비단길 2010-05-20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억지로 끼워넣었다는 느낌... 공감입니다. 그래요 워홀과 번스타인 연관성을 짚기란 좀...
'대중화'라는 의지는 비슷한데, 그건 의지이지, 작품형성과정에서나, 작품내용과는 좀 다르지 않나 싶었지요. 그외에 알듯 말듯, 일치감이 오지 않았더랬습니다.

saint236 2010-05-20 11:33   좋아요 0 | URL
저뿐이 아니었군요. 그 구색맞추기위한 끼워 넣기가 책의 즐거움을 감소시키더라구요.
 
<한국영화 최고의 10경>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한국영화 최고의 10경 - 영화평론가 김소영이 발견한
김소영 지음 / 현실문화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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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평론에 관한 책들이 요즘들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진중권의 이매진도 그렇고 영화로 철학하기, 수학하기, 게다가 설교까지. 왜 갑자기 최근 10년 사이에 영화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일까? 살만해 진 것인지, 아니면 영화라는 시각적인 자극이 없다면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영화라는 장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인지? 물론 모두 다 이유가 되겠지만 사람들이 영화에 관한 비평책을 접하는 이유는 그것이 쉽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적당히 자극적이고,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공감이 가게 중간중간에 사진도 첨부 되어 있고 유명한 대화도 기록되어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이 책은 낙제를 면하기 어렵다. 홍상수의 영화야 그렇다 치자. 최소한 이름은 들어보고 한두번은 봤을 법한 영화이니. 그러나 김기덕의 영화는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는다. 김기덕은 작품 이름은 들어봤지만 나쁜 남자 외에는 케이블에서 해주던 시간이라는 영화를 우연찮게 보게 된 것이 전부이니 말이다. 그것도 거의 끝나갈 무렵에.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김기덕에 관한 평을 읽으면 읽을 수는 있다. 그런데 도무지 흑백영화는 공감이 안간다. 70년대 후반에 출생한 나에게 도금봉, 신상옥, 문희와 같은 배우들, 그들이 출연하는 영화는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판에 그들이 출연한 영화를 봤을리는 만무이며 특별전을 한다고 해서 영화에 몸을 담고 있지 않은 내가 궂이 그곳을 찾아가고 챙겨서 볼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영화 10경이라는 대단한 제목으로 영화에 관한 평론을 작성한 것일까? 일반 사람들에게 영화에 대하여 친절하게 계도하기 위해서라면 안타깝지만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을 보고 난 후에도 난 여전히 그 영화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하랴? 내가 흑백영화를 즐기지 않는 무지몽매한 대중인 것을. 만약 이 책이 매니아들에게 내가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잰체하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매니아들은 저자의 지식과 난해한 말투에 무릎꿇고 경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 평론은 다른 평론과는 달리 카메라의 앵글까지 다룬다. 이런 앵글은 저자의 이런 의도이고, 복선은 어떻고, 줌인과 줌아웃은 무엇을 위한 것이고 시시콜콜하게 늘어 놓지만 이 책을 보고 그 영화를 다시 본다고 할지라도 앵글까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주절주절 이 책에 대해서 떠벌린 평가의 결론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 책이 대중성에 실패했다."는 말이다. 대중을 향한 배려보다는 점점 매니악해진다. 마지막에 도금봉을 비롯한 여배우 3인의 작품과 배우로서의 특징에 대하여 평한 것은 매니악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소통을 말한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현실과 소통하면서 관람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기러기 아빠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지 않았다면 "우아한 세계(송강호 주연)"는 아마도 그렇게 등장하지도 쓸쓸함을 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현실과 소통하는 것, 역사적인 배경과 맥락을 가지고 영화를 해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중요하지만 필수는 아니라는 말이다. 현실과 소통하지 않아도 영화 자체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 감동을 느낄 수 있고, 영화값이 아깝지 않을 수 있다. 저자는 평론가이자, 영상 교수이기 때문에 이 측면을 무시하는 것 같다.  

  영화는 꼭 철학을 담아야 하고, 사회와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해석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린다. 저자가 고집부리고 그 고집에 입각해서 책을 쓰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고집이 말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상당히 쉬운 말로 이런저런 어려운 외국어, 학술 언어, 전문 용어를 사용하면서 어렵게 포장한다. 비평이란 것이 이렇게 어렵게 쓰지 않으면 먹히지 않는 것일까? 씌여진 글이 학술회에서 발표되는 것이라면 무방할 것이나 대중을 위한 영화회나 혹은 대중잡지에 씌여진 글들이 그렇다면 문제가 있지 않겠는가? 나처럼 삐딱한 독자들을 만나면 내용이 어떠하든 반발감을 주기 딱 좋을테니까 말이다. 저자는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읽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깨달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어렵게 산다는 생각을 해본다. 평론가는 평론가대로 어렵게 살고, 영화 감독은 감독대로 평론가들의 평론을 의식해야 하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영화 관람객들은 평론가들의 온갖 말을 귀담아 듣고 챙겨들으면서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길 주저해야 하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냥 편하게 영화를 보련다. 휴식, 즐거움, 감동, 재미 이런 것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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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04-28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평이 되었든 평론이 되었든 또는 수필이나 소설 등도 독자들과의 교감이 중요한 것 같아요. 물론 글에는 깊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깊이를 따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가 읽어서 다른 사람이 읽어서 공감할 수 있으면 때론 비평도 되고 때론 평론도 되지 않을 까 싶어요. 어렵게 쓰는 글 읽어주기도 힘듭니다. ㅋㅋ

saint236 2010-04-28 22:2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어렵게 쓴 글 정말 읽어주는 것도 힘듭니다. 너무 난척하는 것이 지식인의 고약한 점인데 혹시 제게도 그런 모습이 있을까봐 조심합니다. ㅔ두사의 시선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재미있네요.

마녀고양이 2010-04-30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인트님도 숙제하시는 중 이시군요? ㅋㄷㅋㄷ
그런데 아래 책도 별 둘, 이번 책도 별 둘 이여염? 에고고...
저두 그냥 편안하게 영화 보렵니다, 제 느낌대로.
 
궁궐의 눈물, 백 년의 침묵 - 제국의 소멸 100년, 우리 궁궐은 어디로 갔을까?
강상훈 외 지음 / 효형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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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정부의 야심찬 계획인 4대강 사업이 시작되었다. 저항하는 국민들의 의견은 가볍게 묵살하고 "나를 따르라. 잘 살게 해주겠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국가적인 토목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후보이던 시절에 농담처럼 했던 이야기들이 현실화 되었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토목과의 르네상스가 시작될거라는 농담이 현실화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곳곳에서 환경단체들과 경찰들과 건설업체들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불과 1주일 전에도 두물머리에서 충돌이 있지 않았던가? 그린사업을 외치면서 유기농 농경지를 측량하고 개발하겠다는 말도 안되는 정부의 똘끼에 환경단체들이 실력으로 맞선 것이다.  

  안타깝고 속 상한 것은 이러한 일이 두물머리 한 곳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국적으로 4대강 사업 권역을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가 않는다. 새만금 이후 최대의 토목 사업이기에 걸린 이권들도 많을 것이고 잡음이 끊이지 않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국민들이 이렇게까지 반대하는데 밀어붙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이 책을 읽으면서 발견했다.  

  "궁궐의 눈물, 백년의 침묵" 

  제국 소멸 100년, 우리 궁궐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의문에 대하여 철저한 역사적인 고증과 추적을 통하여 명쾌하게 밝히고 있는 책이다. 고궁을 유달리 좋아하는 나였지만 이 책을 통하여 처음 알게된 궁궐이 있을 정도로 잊혀지고 침묵하는 궁궐의 역사. 왜 우리 나라 국민은 버킹엄 궁전이나 베르샤유 궁전같은 궁궐이 없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에게도 분명 버킹엄 궁전이나 베르사유 궁전같은 궁궐이 없는 것이 아니다. 경복궁도 있고,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등 많은 궁전들이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청덕궁과 창경궁, 덕수궁을 헷갈려 하면서도 버킹엄 궁과 베르사유 궁에 열광하는가? 경복궁에서 일어났던 을미사변은 뮤직비디오에나 등장하는 비극적이고 로맨틱한 사건으로 기억하면서, 프랑스 혁명의 가치는 왜 그리 외우고 다니는가? 로베스피에르는 알면서 미우라는 왜 모르는가?  

  궁궐은 단순히 건축물이 아니다. 위에서 넋두리하듯이 던진 질문들에 대한 답은 모두 여기에 있다. 궁궐은 그 궁궐이 지어지고 소실되고 복원되고 훼철되는 모든 역사의 순간에서 이해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대한제국의 몰락은 필연적으로 우리 궁궐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건축물은 그것이 지닌 본래의 용도와 기능에 따른 가치뿐만 아니라 건축물이 지어지고 사용되는 동안의 사회•정치•역사적 맥락에서 따라서도 여러 가치가 부가된다. 특히 궁궐에 들어선 근대건축물은 개별적인 건축물 자체가 갖는 건축적 가치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 사회 및 건축을 대표하는 궁궐 건축과 대비되어 지어졌다는 상대적 관계에서 더 많은 의미가 부여된다. 중화정에 대비되는 석조전이나 근정전에 대비되는 조선 총독부 청사의 모습은 명동 성당이나 러시아 공사관만큼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P.240 ~ 241) 

  일본 제국주의의 필요에 의하여 우리 궁궐은 철저하게 훼손돼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은 박람회와 공진회를 개최하고 대동아공영이라는 구호를 외치기 위하여 훼철되기 시작하였다. 한 나라의 궁궐 건물이 무단으로 철거되어 민간에 팔려가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일인가? 그것도 정작 궁궐의 주인이 아닌 일본인에 의하여 경매에 붙여지고 일본인에게 불하되는 것이,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수익금이 일본 제국주의를 지탱하기 위한 자본금이 된다는 것은 국권 상실이라는 역사적인 맥락에서만이 이해가 가능한 일이다. 왜 일제는 그렇게도 조선의 궁궐을 훼철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가? 일본의 식민지배는 곧 근대화이며, 조선은 곧 전근대라는 기본 골격을 형성하고 선전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오늘날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학자들의 주장과 이상하리만큼 똑같은 것은 단순히 우연의 산물인가? 일제의 자기 정당화와 이익 창출을 위해서 주인을 잃은 궁궐은 훼철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궁궐의 훼철은 어느 정도인가?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훼철의 예는 다음과 같다.  

  경전본정 종점에서 정남으로 보이는 남산 지맥에 한 종루가 있으니 차는 일본인의 조계사다. 그 중문은 원래 평양이궁의 황례문(황건문)으로 대정 14년에 이건하였고 그 문내 좌측에는 큰 암석상에 '동악선생사단'육자를 각하얏스니 전일 선조 때 유명한 문장 이동악 안눌 선생의 유지다. 그리고 그 사의 본당인 조선식이 건물은 원 광해조가 건축한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으로 대정 15년에 이축한 것이다. 그 사는 조선 고적의 집합소라 하여도 가하다.(P.126 별건곤 23호 재인용)  

  풍경궁은 애초 행궁의 규모나 역할을 지녔다고 추측할 수 있지만, 황건문만큼은 이궁에 버금가는 건축적 위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장대하고 기품있던 황건문은 사라졌다. 남한 내 남아있던 평양 풍경궁의 유일한 건축 유산이었던 황건문은 철거되고, 지금 그 일대에는 볼품없는 콘크리트 건물들이 들어섰다.(P.146)   

  이 책을 통하여 풍경궁에 대해서, 황건문이 어떤 과정을 통하여 헐려 나갔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숭례문이 불에 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만행이라 질타했지만, 풍경궁과 황건문은 그보다 더한 만행이 아닌가? 더군다나 이슈도 되지 못하고 아무렇지 않게 행해졌던, 그것도 학문의 전당인 대학에 의해서 자행된 만행이 아닌가? 일제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입된 근대와 전근대의 사고방식이 여전히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다. 

  궁궐의 훼철은 어떤 수순으로 진행되었는가?  

  그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상대가 신성시하는 장소에 근대의 문화 시설을 배치한다. 근대의 배치를 위해서 과거의 공간은 선별적으로 남겨지고 대부분 사라진다. 과거의 기억은 변형되고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대중은 과거를 향수하면서 동시에 무시하고 그 위에 중첩된 근대를 향유한다.(P.232 ~ 233) 

  신성의 일상화, 그리고 철저한 타자화와 경제논리에 의한 왜곡, 그리고 과거의 변형과 새로운 기억의 주입이 그 수순이다. 황제가 거하던 신성한 궁궐은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 하에 일상적인 위락 시설로 변하였고, 경제적인 논리에 의하여 판매될 수 있는 동산으로 이해되었고, 그 과정의 마지막은 조선은 전근대의 상징이며 역사의 반동이요, 일제의 국권침탈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일황의 大恩이 되지 않았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궁궐의 운명과 4대강의 운명이 오버랩되는 것은 어인 일인가? 지금 4대강 사업 역시 궁궐이 타자화 되고 이동이 가능한 동산으로 취급되면서 불하되고 사라져 그 자리에 콘크리트만 남는 과정을 똑같이 밟고 잇는 것이 아닐까? 우리 국토의 젖줄이라 부르며 역사의 고락을 같이 한 4대강이 주민 위락시설, 생활의 질이라는 말로 일상화 되고, 위락 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개발 가능한 곳으로 타자화 되고, 경제 논리에 의해 파헤쳐지고 정비되어지는 것이 4대강 사업의 본질이 아닌가? 역사성과 생명공존이라는 가치는 철저하게 배제되고 오로지 개발 가능한 가용 공간으로 인식되어 콘크리트로 포장되는 일련의 과정을 겪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 과정에서 무책임한 개발 논리는 서민 경제를 생각하는 대통령의 하해와 같은 大恩으로, 개발을 반대하는 것은 전근대의 화신으로 포장되고 주입될 것이다.  

  아마 "4대강의 눈물, 5년의 침묵-MB집권 후 5년, 우리 4대강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후속작이 등장하지는 않을런지?   

ps. 건물에 대한 일본의 보고서나 한자 상소문은 한글로 번역해 줬으면 좋을 것 같다. 궁궐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맘에 들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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