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끼나와, 구조적 차별과 저항의 현장
아라사키 모리테루 지음, 백영서 외 옮김 / 창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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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내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 중에 그알싫이 있다. 그동안 듣지 않아서 밀려있던 방송을 운전을 하면서 들었다. 5번에 걸쳐서 몇번씩 나눠 들었는데 그 노래의 마지막에 이 노래가 소개되어 있다. 노래의 분위기는 정말 발랄하다. 내용도 그렇게 어둡지 않다. 오히려 목가적인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에 아련히 추억에 젖을만하다. 그렇지만 이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마음이 먹먹해지고, 울컥했다. 노래의 내용은 이렇다.

 

  노래를 만든 키나 쇼키치가 어린 시절에 자기 옆집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옆집 아저씨의 부인은 오키나와 전쟁으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같이 살면서 부부싸움이 잦았다고 한다. 어느날 부인이 자기 딸의 목을 자르고 머리를 냄비에 넣고 끓인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인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아저씨는 동네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이 아저씨는 매일 옆집의 키나씨에게 술을 달라고 왔다고 한다.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면서 이 아저씨가 힘을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래도 그렇게 발랄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노래의 배경을 아는 사람에게 이 노래를 발랄하고 기분 좋은 노래는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슬프고 속상한 노래이다.

 

  한때 디스코텍과 롤러장에서 신나는 분위기를 위해서 틀었던 노래 가운데 보니엠의 "바이 더 리버 오브 바빌론"이 있다. 이 또한 그렇게 경쾌한 CCM이지만 그 가사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슬픈 역사인 바벨론 유수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의 아리랑처럼 서글프지도 않고, 그렇다고 한오백년처럼 한을 밖으로 표출하고 있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슬픔과 비극은 너무나 처절하다. 이와 비교할만한 노래를 꼽자면 언뜻 생각은 안나지만 리쌍의 광대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니사이라는 말은 오키나와 어로 안녕하세요란다. 오지상은 아저씨라는 말이다. 키나가 오지상에게 무슨 말을 했었을까? 오지상은 어린 키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전쟁에 대해서 말은 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비극과 슬픔은 나이를 넘어서 두 사람을 하나로 묶지 않았을까? 그런데 더 슬픈 것은 하이사이 오지상은 아직도 진행형이라는데 있다. 원래 일본과는 다른 류큐 왕국이 1609년 사쓰마번의 침입을 받아서 침탈을 당하다가 1879년 폐번치현이 조처로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 시에는 본토를 수비하고 천황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희생을 강요당했고, 패전 후에는 미국에 의해서 점령당하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은 되었지만 여전히 미국의 최전선 기지로 남아 있다. 미국의 수많은 기지들은 일본에 미군 기지를 두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되었고,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폭격기가 오키나와에서 출격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오키나와를 악귀들이 살고 있는 악귀도로 불렀다.

 

  일본의 방어를 위하여 끊임없이 침탈당하던 오키나와가 이제는 일본의 이국적인 관광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사탕수수와 이국적인 풍경에 눈을 빼앗기지만 오키나와의 역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이용하는 자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끝모를 천박함에 가슴이 먹먹해 진다. 일본에 유행하는 것 중에 배드 트립이라는 것이 있단다.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장소들을 여행하면서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자는 취지의 여행이지만 오키나와에 대한 조금의 사과도 없이 이루어지는 배드 트립은 그저 돈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도 계속되는 오키나와의 슬픔을 보면서 제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얼마전 휴가를 맞이하여 제주도에 다녀왔다. 아내가 나한테 어디 갈지 물어 보기에 나한테 묻지마라고 나한테 가자고 하면 강정마을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가 한 소리 들었다. 결국 제주도의 풍경 좋은 곳을 다녔지만 그러면서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제주도의 슬픔과, 제주도에 대한 본토인으로서의 부채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전히 제주도에서는 차별이 진행되고 있고, 본토 방어를 위해서 제주도에 해군 기지를 만들고, 본토인들의 휴가를 위해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그 어떤 산업 기반도 없기 때문에 제주도는 여전히 관광 수입에 의존하게 된다. 특별 자치도라는 말도 내가 보기에는 그저 제주도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꼼수일 뿐이다.

 

  오키나와의 슬픔, 제주의 슬픔은 다수를 위해 희생한 소수의 슬픔이고, 그 희생도 선택이 아닌 강요이기에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있다. 오키나와도 제주도 그냥 그런 곳이다. 원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곳이라 여길 뿐 이 문제에 대해서 인식조차 하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사이 오지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것도 더 정교화되고, 고착화되어 가는 시스템에 의해서 말이다.

 

  ps. 하이사이 오지상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포털검색에 하이사이만 치면 하이사이 오지상이라는 완성어가 검색되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관심이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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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을 넘어 - 정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앤서니 앳킨슨 지음, 장경덕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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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대선 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말이 있었다.

 

  "경제 민주화"

 

  도대체 저것이 무엇이냐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아직도 경제 민주화가 무엇인지 제대로 감도 못잡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후자에 많이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만 학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상식 수준으로 생각을 해보고 내린 결론이 이거다.

 

  "돈 많은 사람만 잘 사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최소한의 생존권은 위협받지 않는 분배가 실현되는 것"

 

  좋은 말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이루기가 얼마나 지난한지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경제 민주화의 경자만 꺼내도 빨갱이 취급을 받는 세상에서, 시장(서울 시장이 아니다.)이 거의 신처럼 대우받는 세상 속에서 경제 민주화를 입에 올리는 것이 목숨을 걸고 하는 이야기인지를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가 이를 입에 올렸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갔다. 그러면서도 저러다 말겠지라는 생각도 동시에 품었다. 아무리 노무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노무현이 이 부분을 넘지 못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 이상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 민주화를 공약으로 걸고 나왔다. 그 아버지가 어떻게 했는지는 잠시 깜빡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김종인씨까지 영입하면서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거기에 깜빡 넘어가서 이왕이면 다홍치마, 위대한 영도자 박정희 각하의 영애가 이젠 다른 세상을 열려나 보다라면서 표를 몰아줬다. 다 모아도 절반이 안된다는 패배감을 추스리기도 전에, 그 경제 민주화가 실종되었다.

 

  말은 그럴듯 했지만 김종인씨가 팽당했다. 쫓겨나면서 많이도 억울했나보다. 새누리당이 경제 민주화를 포기했다는 짹 소리를 내면서 갔다. 여기에서부터 신호탄이 되어서 곳곳에서 역주행이 벌어지고 있다. MB처럼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면서 굳건히 그 기조에는 공조하고 있다. 복지도 줄고, 누리 과정도 줄고, 어르신들 수당도 줄었다. 그러면서 솔솔 풍겨나오는 이야기들이 이러다 다 죽는다. 기업이 죽으면 나라도 죽고, 국민도 죽는다고 말한다. 철지난 트리클 다운 효과를 만병통치약처럼 꺼낸다. 너무 기업 편에 서기만 하면 MB와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나 보다. 비지니스 프렌들리를 과감히 탈피하면서 최저임금을 올리면 죽는다는 기업들의 항의를 묵살하고 자그만치 450원이나 올렸다. 이렇게 하면 경제 민주화가 실현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청년들은 죽겠다고 외치는데, 중소 기업들은 힘들다고 하는데, 사교육비가 너무 높다고 외치는데 내가 해봤는데로 말하던 그분처럼은 말은 못하지만(해본게 없으니 못할 수밖에) 귀막고 눈감고 입다물고 지낸다. 어쩌면 국가와 결혼한 대통령은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의 시집살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통령 임기를 다 마쳐도 채우지 못하는 4년은 어찌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불평등을 넘어라는 책에서는 불평등이 커지는 현상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내버려 두면 경제 정의는 물론이고 사회 정의마저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렇지만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은 깜깜무소식이다. 아마 투철한 안보 의식으로 무장한 그들에게 이 책은 책 제목처럼 빨갱이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사라진 경제 민주화는 어디에 있을까? 현상금을 걸고 찾을 수만 있다면 찾고 싶다. 소수의견에서 나오는 대목처럼 100원이라고 걸고 찾고 싶다. 파업하는 사람들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물려 투신하게 만드는 이 땅에, 6300원으로 황제 식사를 했다는 국회의원이 고개를 들고 다니는 이 세상 속에서, 법인세 감세 효과가 MB정부 4년 동안 30조가 넘는 세상 속에서, 손자학비 증여 금액을 1억까지 비과세한다는 세상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잘한 일이라고 박수치는 세상 속에서, 215억 7천만원의 연봉(2014년 기준 정몽구 회장/현대제철 퇴직금 94억 9100만원 포함)을 받는 대그룹 총수와 5,210원을 받는 최저 임금자가 공존하는 세상 속에서 실종된 경제 민주화를 찾고 싶다.

 

  경제 민주화야 바지 줄여 놨으니 3년 후에 오지 말고 지금 와라!

 

  고전적인 문구라도 붙여놓고 찾고 싶다. 불평등을 넘어 정의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불평등한 구조만이라도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고, 우리가 알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목함 지뢰에 폭약이 몇 그램 들어갔는지는 모른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내용은 좋은데 별점을 두개 준 이유는 정말 간단하다. 너무 표가 많다. 저자가 말한대로 도표가 하나씩 등장할 때마다 이 책의 독자들이 줄어들텐데, 이 책의 독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이 리뷰는 알라딘에서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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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여지도 - 두 발과 땀으로 써내려간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의 풍경
박점규 지음 / 알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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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 4110

  2011 - 4320 

  2012 - 4580

  2013 - 4860

  2014 - 5210

  2015 - 5580

  2016 - ?

 

  위의 숫자가 나타내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가? 앞의 숫자는 연도를 나타내는 것이고, 뒤의 숫자는 최저 임금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2013년까지 최저임금 수준이 5천원을 넘지 못하다가 2014년 갑작스럽게 5천원의 벽을 돌파했다. 이는 순전히 박근혜 대통령의 공로가 아닐까 생각한다. 기억력이 약간이라도 좋은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2012년 대선후보 시절에 최저임금이 얼마냐고 묻는 사회자의 말에 "한 5천원 넘나요?"라는 말을 했다가 된통 당했던 일을 말이다. 아마도 그 일이 마음에 걸렸던지, 그녀가 대통령이 되어서 최저 임금을 5천원 넘게 해 주셨다. 2013년까지 200~300원대 사이에서 오르던 최저임금은 2014~2015년 사이에는 자그만치 300~400원 사이에서 오르게 되었다. 물론 퍼센티지를 따지자면 비슷하겠지만 어찌 되었건 이만큼 오르게 된 것은 각하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각하의 은총이 너무 과하다 생각한 경영계에선 2016년 최저임금을 올해와 동일한 5580원으로 하자고 한다. 더 이상 올리면 기업해 먹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면서 아마도 그들은 비지니스 프렌들리를 천명하셨던 MB 시절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번면 노동계에서는 1만원으로 대폭 올려달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경영계의 말대로 4420원을 더 올려준다면 이것이 기업의 경쟁력을 깎아먹는 일이 될까? 문든 그런 궁금증에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기로 했다. 2015년 비정규직을 850만이라고 잡았는데 이 비율이 전체 노동인구의 45.2%라고 한다. 그럼 단순 계산으로 폭 넓게 잡아도 1800만이 넘지 않을 것이다. 30일 풀로 하루 8시간 일한다고 계산해보자

 

  1800만 * 4420원 * 30일 * 8시간 * 12달 = 229조 1328억원

 

  1년 동안 229조 1328억원이 추가로 더 소요된다는 말인데(이것은 말 그대로 단순 계산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맞는 것은 아니다.) 과연 이것이 기업들에게 힘든 일일까? 2013년 자료에 의하면(2015년 자료를 못찾았다.) 우리나라의 외부 감사를 받는 법인 23000개의 사내 유보금이 1102조 4천억원이란다. 쉽게 말해서 투자도 안하고 그냥 자기 지갑에 넣어둔 돈이 1102조 4천억원이라고 하는데 2014년이나 올해에는 더 늘어났을 것이고, 내년에는 더 늘어날 예정이다. 2013년 사내 유보금만 가지고 최저임금 1만원을 주는 것이 단순계산으로 4년은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 죽자는 말이냐? 먼저 파이를 키워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고 있는 기업의 속내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이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시대, 한번 비정규직이 되면 죽을 때까지 희망을 포기해야 하는 시대, 3포 세대가 아니라 5포 7포인 시대에서 과연 우리의 노동은 안녕한가? 이 책은 우리에게 이것을 묻고 있다.

 

  당신의 노동은 안녕하십니까?

 

  전국 각지의 노동 현장을 돌면서 작가는 끊임없이 이 질문을 묻는다. 그리고 안녕하다는 답을 찾기 위해 애를 쓰지만 돌아오는 거의 모든 대답은 안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MB처럼 젊은이들이 쓸데 없이 눈이 높다고 눈을 낮추라고 나도 해봐서 안다고 이야기를 할 것인가? 잘 모르겠다.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주지 않는다. 다만 있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간혹, 정말 간혹 우리의 노동을 안녕하게 만든 사람들을 소개해줄 뿐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희망이 되고 고맙고, 감동이 된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을 이야기하면 빨갱이가 된다. 못된 놈이 된다. 직업적인 데모꾼이 된다. 노동 운동 출신 국회의원드링 몇명이나 배출된 이 시대에 말이다. 이 시대에 우리의 노동은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우리는 어떠한 노동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인가? 진지하게 묻고 또 물어야 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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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연대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시간 연대기 -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시간의 모든 것
애덤 프랭크 지음, 고은주 옮김 / 에이도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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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발명품이다?

 

  상당히 논란이 예상되는 문장이다. 그렇지만 이 책의 저자는 단연코 시간은 인간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다.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그 시간들을 구분하고, 시간을 측정하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을 활용하는 것은 철저하게 인간이 만들어낸 체계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시간은 인간이 발명해낸 발명품이 맞는 것도 같다.

 

  이 책은 인간이 시간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만들고 발전시켜 왔는지는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달의 관측과 점성술로부터 시작된 시간 개념은 고전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을 거치면서 보다 잘게 쪼개졌다. 과거에는 1년, 한달 이런 단위로 구성되어 있던 시간들이 오전과 오후로 구분되고, 시간으로 구분되더니 분이 생기고, 초가 생기고, 이제는 나노초로 구분되기까지 한다. 나노초라는 개념이 우리에게는 낯설게 느껴지지만 실제 1초보다 짧은 시간들은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친숙하다. 육상을 비롯한 기록경기에서 소수점 두세자리까지 구분하여 등수를 구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구분된 등수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눈으로 계측이 불가능한 그 짧은 순간들도 우리에겐 이미 숨쉬는 것만큼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에서 다루는 무한한 시간과 아주 짧은 시간들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고, 그 시간들이 어떻게 우리 생활 속에서 구현되고, 우리의 삶의 형식들을 바꾸어가는 지를 알게 되었을 때에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변화가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업무에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피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시간은 금이라는 격언을 가지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애써오는 우리의 모습들이, 그리고 우리가 마치 시간을 정복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모습들이 인간의 오만이구나 생각해 본다. 삶은 편리해졌고, 시간은 더 정교해졌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낭만과 고전적인 생각들은 너무나 안타깝고, 우리의 삶이 더 팍팍해진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현대 물리학이 우주에 대한 신비를 벗겨내면서 우주를 대상화했듯이 말이다.

 

  시간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 시기에서 시간을 우리가 관리한다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이 계량화되고 경제 논리에 매몰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한가지 아쉬운 것은 현대 물리학에 대해서 아무리 간단하게 다루고 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개념이기 때문에 비과학도가 잃어간다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다. 아마도 이 리뷰가 두서없다고 생각이 든다면 여기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책이긴 하지만 서평단 도서로 받지 않았다면 전혀 읽어보지 못했을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은 알라딘에서 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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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3-24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턴, 아인슈타인이 나오는 중반부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어요.. ^^;;

saint236 2015-03-25 18:47   좋아요 0 | URL
현대 물리학의 다중우주 이야기는 돵최...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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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히브리어에 스올이라는 말이 있다. 음부 혹은 지옥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언젠가 학생 때 찾아갔던 교회에서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면서 했던 언어 유희다. 서울이 너무나 타락하고 죄가 가득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스올과도 같은 곳이다라는 의미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처음에 들었던 생각이 이것이다.

 

  신문의 1면을 장식하는 온갖 굵직한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 서울이다. 워낙 인구가 많은 도시이기도 하겠지만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서울이 작동하는 원리이기 때문이리라.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어려운 질문의 답은 "자본"이다. 서울은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 작동된다. 교회도, 문화도, 건물도, 도시 개발도 모든 것은 자본의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태초에 자본이 있었으니, 이 자본이 서울을 창조하지는 못해도 서울을 발전시키고 인도한다. 돈이 된다면 물건도 팔고, 집도 팔고, 사람도 팔고, 몸도 판다. 윤리와 도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지만 그 이면에 흐르는 것은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이다.

 

  돈이 되기 때문에 강남이 개발되는 것이고, 돈이 되기 때문에 강남에 모이는 것이고, 돈이 되기 때문에 인서울을 외치면서 사교육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서울의 브랜드화도, 개인의 학벌도, 부동산 열기도, 고용 유연성도 자본이라는 틀에서 이해가 되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하여 머지않아 자본의 논리가 몰락하고 인류는 평등으로 나아갈 것이라 외쳤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직 임계점에 다다라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자본주의 사회가 몰락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신자유주의라는 기치 하에 자본은 서울을 사로잡았고, 점점 더 자본주의의 최전선으로 인도하고 있다. 곳곳에서 불안한 소리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 정도 소리에 서울을 움직이는 자본의 논리가 무너질리 없다. 오히려 자본은 물질이라는 유형을 집어 삼키고도 모자라 기억이라는 무형의 자본마저 끌어 당기고 있다. 서울 곳곳에 존재하는 한옥 마을, 곳곳에서 이야기하는 역사 도시 프로젝트, 고서점, 추억의 장소도 가격을 매겨서 관광 상품을 만들고 있다. 개인과 집단의 기억마저도 돈이 된다면 기꺼이 판매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얼마전 방영되었던 자동차 광고는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싼타페로 기억한다. 어떤 사람이 함께 했던 차를 폐차하거다 팔아 버리지 않고 그 부품을 가지고 미술 작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 회사는 개인의 기억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광고했다. 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의미가 있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뭔가 이상하다. 차의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달리는 것이다. 진정으로 그 차를 사랑한다면 끊임없이 관리해서 달리게 만들어야 한다. 실제로 오래된 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아직도 대한민국 어딘가를 포니는 달리고 있다. 그런데 그 차를 박제화 해서 가끔 돌려보면서 즐거워 하는 것, 그리고 이런 일을 통하여 우리는 당신의 기억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기억이라는 것도 판매의 대상이 된다는 자본의 논리가 아닐까?

 

  서울에 살고 있으면서 자본의 논리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꽤나 힘이 든다. 그렇지만 서울에 살고 있다고 해서 서울의 작동 원리인 자본에 충실하는 것은 바람직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이 그 결과임을 기억한다면 말이다. 서울이 스올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서울을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가 아닐까?

 

  추신. 의미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책이 꽤나 재미가 없다. 서평 도서를 받으면서도 과감하게 별 2개를 준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이것은 알라딘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기록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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