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20대,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넘어 - 대학등록금 1000만 원, 청년실업 100만 명, 사회의 오해와 무관심
조성주 지음 / 시대의창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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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이다. 이 말을 고려해보면 우리에게 미래는 있는가? 삼포 세대를 넘어서 오포 세대, 그리고 N포 세대가 되어 버린지 오랜 청년들에게 과연 미래는 있는가? 이 책이 나온지 10년이 되어가지만, 그래서 저자 조성주 씨가 벌써 40이 넘은 시대가 되었지만 바뀐 것이 없다. 세월은 흘러가는데 답은 없다. 오히려 그 시절보다 더 팍팍해졌다. 난 97학번이다. 조성주씨가 염두에 두고 책을 썼던 그 세대다. 대학입학과 동시에 IMF를 겪었고, 친구들 중에 많은 녀석들이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그 당시는 보통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였는데, 이상하게 내 주위에는 1학년을 마치고 입대하는 녀석들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이유가 등록금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배들은 쉬위하고, 놀고 대학생이라고 했다. 그렇게 놀고 시위를 해도, 놀면서 공부를 하고 학점이 좋지 않아도 취업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알던 대학은 학점에 목숨거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부에 목숨을 걸고, 도서관에 박혀있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 그 때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보태고, 책을 샀고,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었다. 당시 임금이 지금보다 높지 않았는데 그것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일까?(내 기억에 3천을 받는 아르바이트는 고액 아르바이트라고 했으니 말 다했다.) 등록금이 싸서였다. 그것도 많이 로른 것이지만 그래도 지금에 비하면 쌌다. 어느날 한 학기 등록금이 500이 넘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더하다. 우골탑이 아니라 인골탑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대학생들이 자조섞인 농담으로 하는 말이 자신들이 "등골 브레이커"라고 한다. 부모의 등골을 빼먹는다는 이야기다. 지금은 고등학생들이 그렇지만 당시는 대학생들이 그랬다.

 

  매번 선거가 다가올 때마다 청년문제에 대한 말은 나온다. 그렇지만 해결책은 안나온다. 청년 의원을 뽑는다, 청년들을 위한 정책을 구상한다 말은 많이 하지만 내 기억에 남는 것은 박원순 시장이 서울 시립대 등록금을 반값 등록금으로 만든 것 외에는 없다. 여전히 등록금은 높고, 그것은 마치 대학생들이 당연히 감당해야 할 몫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고 취업하는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유명하신 가카께서 요즘 청년들의 눈이 높으니 눈 높이를 낮추라는 말을 한지 10년이 되었다. 이젠 더이상 낮출 눈높이도 없다. 더 치열해진 경쟁, 그로 인해 부족해진 약자에 대한 공감 능력! 정의를 외치면서 비정규직을 꼼수를 쓰는 사람으로 무시한다. 청년 실업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비싼 등록금으로 인해 허덕이면서도 빚을 질 수밖에 없는 구조는 조성주 씨가 이 책을 썼을 때와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청년들은 절망의 트라이앵글에 갇혀서 허덕댄다. 그리고 시름시름 앓다가 말라간다. 재기 발랄한 청년의 상징은 사라진지 오래다.

 

  책을 읽으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10년 전에 쓴 이 책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한 대안들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 가장 눈물나는 대목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 다시 한번 고민을 해보자. 아프니가 청춘이라고 하지 말고, 짱돌 들라고 하지도 말고, 눈높이 낮추라고도 하지 말고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보자. 지금이 아니면 늦을 것이다. 이 책이 쓰여질 때 태어난 내 아이들이 10살 11살이다. 또 다시 같은 시간이 흐르면 내 아이들이 대학에 간다. 그때에도 이 책이 여전히 유효하게 읽힌다면 그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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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자본주의 - 자본주의를 모르면 자본주의에 당한다!
마토바 아키히로 지음, 홍성민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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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온하다.

 

  가카 시절이라면 감히 읽지 못할 책이다. 일단 책이 빨갛다. 빨간색은 빨갱이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종북적인 책이다. 다음으로 감히 자본주의를 위험하다고 말한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닌가? 자유민주주의라 함은 곧 자본주의이니 이 책은 읽으면 안된다. 또한 이 책은 자본론 연구자가 기록한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절대로 읽으면 안된다. 아마도 10년 전만 해도 감히 읽지 못할 불온 서적이 되었을 것이다. 그저 웃자고 해본 말이다. 너무 무시무시하게 생각하지 마라. 내용은 그렇게 무시무시하지 않으니 말이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익히 들어왔을 법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맹신하는 자본주의의 목적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공산주의와 싸워서 승리한 자본주의, 미국을 세계의 강대국으로 우뚝 세운 자본주의, 그리고 공산권 국가들마저도 도입하고 있는, 북한마저도 따라가는 자본주의!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과연 자본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책은 자본주의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 조심해야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패배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 것처럼 느껴지는 마르크스에 대해서 오늘날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주장하고 있다.

 

  저자가 자본주의의 독성을 자본자가 아니라 그 매커니즘에서 찾고 있다. 이 말을 나름대로 이해해보자면 자본주의의 목적은 축적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자본주의를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는 자본가를 배불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그 자본자도 자본에게 부림을 받는 존재일 뿐이다. 자본은 자신의 덩치를 불리기 위하여 노동자를 착취하고, 자본자를 이용한다. 이것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의 작동 방식이라는 것이다. 요즘 지나다니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집회와 민노총의 시위를 자주 보게 되는데 저자의 시각에 의하면 이러한 것들은 매우 비관적이다. 이들은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리막으로 달려가는 속도를 늦추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최소한 이 점에서만큼은 동의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습 속에서 그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반공이데올로기와 IMF, 신자유주의를 지나면서 한국에서는 자본주의가 기묘하게 이식되어 버렸다. 자본주의의 시작, 여기에 대한 저항, 그리고 무엇인가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닌 일본 제국주의를 제압한 우리의 영원한 동맹이자 은인인 천조국 미국에 의해서 도입된 자본주의는 마치 일제에 대한 승리가 자본주의 때문인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6.25를 통하여 우리 나라는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의 구도로 미끄러져 갔다. 잘 살아보세, 잘 살게 해주겠다는 구호 하나면 모든 것들이 용납되는 시대를 잘면서 오로지 자본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러다가 그 자본에 의해서 사회가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이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아봍이면서 "자본주의=자유주의=민주주의"라는 기묘한 등식으로 철지난 매카시즘을 주장한다. 많이 배우면 자본주의의 윗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생각 속에서 1년에 천만원이 넘는 등록금을 쏟아 부으면서 소위 말하는 일류 대학에 가려고 한다. 대입이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 모든 일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닐지라도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이러한 현상들을 심화시켰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묻는다. 자본주의를 이대로 둘 것인가? 세계 곳곳에서 이에 대한 반격이 시작되고 있는데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인가 고민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물론 그가 딱히 대안을 제시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질문을 던져준 것만으로도 그는 할 일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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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는 어떻게 문명을 구했나 - 세상을 바꾼 의학의 10대 발견
존 퀘이조 지음, 황상익 외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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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누구나 한번은 해봤을 것이다. 모기에 물리면 어떻게 하는가? 배운대로 모기 물린 곳에 침을 바른다. 혹은 손톱으로 +를 그린다. 한번으로 안되면 여러번을 했다. 그러다가 모기 물린 곳의 붓기가 가라앉으면 침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날 방송을 통하여 이것이 얼마나 나쁜 습관인지 알게 되었다. 침을 바르고, 손톱으로 상처에 +를 그리는 것은 세균 감염이 되기 좋은 여건을 만드는 것이라 상처가 덧날 수 있다고 했다. 이 방송을 본 후에 내가 얼마나 무식한 일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의학 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발견 10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로 보면 당연한 것인데 당시에 이 당연한 것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쓰고, 어려움을 겪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소개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모기에 물렸을 때 행동하는 것처럼, 당시 발견된 의학적인 내용과는 상충되는 일들이, 혹은 잘못된 오해들이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생각들이었다.


  "콜레라는 어떻게 인류를 구했는가?"라는 책의 제목은 10대 발견 가운데 공중위생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사건에서 따온 것이다. 저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2장의 제목을 책 제목으로 그대로 가져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에는 책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소개된 10가지 의학의 발견은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너무 당연해서 사소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효과가 지대했던 , 그래서 한 획을 그은 사건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의 가장 대표가 2장의 내용이다. 영국에서 콜레라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다가, 한 사람이 콜레라가 오염된 같은 물을 쓰기 때문에 전염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지만 그것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가 정비되고, 상수와 하수를 정비하는 사업을 진행하면서 콜레락라가 자연스럽게 사그라들게 된 내용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여기에서부터 공중위생이라는 개념이 출현하게 되었다고 소개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들은 이러한 의학적인 발견들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다가 생각지도 못한 사건들이 발생하고, 거기에서 의학적인 발견을 이루어냈다는 점이다. 만약 그들의 연구에 불행한 사고(?)가 없었다면 그 일들을 이루어 내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 모른다는 것을 보면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품어본다.


  한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마지막 10번째로 거론되고 있는 대체의학이다. 대체의학이라는 것도 발견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 대체의학에 눈을 돌리는 것이 의학적인 발견이라고 한다면 왜 그런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밝혀야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장에 비해서 깊이가 없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대체의학을 의학의 발견이라고 하기보다는, 요즘은 이런 추세로 나가고 있다는 차원으로 에필로그에서 이야기를 하던던지, 아니면 맥락 상 아예 빼 버리는 것이 흐름상 무난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의학에 대해서 깊이보다는 얕고, 사건 중심으로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혹은 청소년들에게는 한번쯤은 읽어보라고 권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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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욤비 -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기
욤비 토나.박진숙 지음 / 이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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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럽지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우리나라에도 난민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과거에 보트 피플들이 우리 나라에 왔다가 인정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간혹 신문으로 접해보기는 했지만 욤비씨처럼 난민으로 우리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게다가 난민이라는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이 자리를 빌어 욤비씨와 같이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쓰는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두산백과 사전에서 난민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인종, 종교 또는 정치적, 사상적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해 외국이나 다른 지방으로 탈출하는 사람들.

  난민의 일반적 의미는 생활이 곤궁한 국민,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곤궁에 빠진 이재민을 말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로 인종적, 사상적 원인과 관련된 정치적 이유에 의한 집단적 망명자를 난민이라 일컫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난민이 발생한 사례를 보면 러시아 혁명 기간에 약 150만의 난민이 러시아를 떠났고, 1934년 독일에 나치정권이 수립되자 반체제 인사들과 유대인을 비롯한 나치의 피해자 약 250만의 난민이 독일을 등지고 각지로 흩어졌다. 또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1947년 인도의 분열과 팔레스타인 분열, 1948년의 팔레스타인 전쟁, 1975년의 캄보디아와 라오스 및 베트남 등지에서 "보트 피플"로 유출된 인도차이나 난민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98년부터 시작된 코소보에 대한 세르비아군의 인종청소 때에는 78만에 달하는 주민이 학살을 피해 국외로 탈출하였다.

  이러한 난민에 대해 국제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출과 원조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난민이 발생하자 국제연맹은 노르웨이의 탐험가 난센을 난민구제판무관으로 임명하여 외국에서 거주할 수 있는 신분증명서(난센여권)를 발급하였고, 1939년에는 국제연맹
에 독일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를 두어 난민보호에 나섰다. 또 1946년 유엔은 산하에 국제난민기구를 설치하여 제2차 세계대전 때 피해를 당한 난민, 정치적 추방자의 보호와 구제를 행하여 난민을 자유의사에 따라 원하는 나라에 정주시키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그 역할이 끝나자 1951년에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를 설치하여 난민보호를 위한 유엔의 보조기관으로 삼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위에서 보듯이 난민 문제를 그 역사가 꽤나 오래 되었다. 물론 위에 기록된 난민은 현대적인 의미의 난민일 뿐이지, 역사상 난민은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난민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이 부분이 거의 무시되어 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외국에서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은 점을 감안한다면 한국에서 난민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 한국에 욤비씨가 입국했다는 것은 불행이라고 해야할지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더군다나 그가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왠지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마음이 더 안타깝다. 그가 난민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애를 썼던 이유가, 직장의 문제와 자녀 교육의 문제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마음이 더 짠하다. 


  도대체 왜 한국에서는 난민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이렇게도 지난한 일일까? 특별히 정치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그들에게 난민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까다롭게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은 이유는 난민에 대해서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게 마음이 더 아프다. 난민에 대해서 무관심한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보는 견해로는 크게 2가지가 아닐까 한다.


  첫번째는 글로벌을 외치지만 우리의 의식 수준이 그 정도로 성장하지 않은 것이다. 국어를 잘 배우기 전에 우리는 먼저 영어를 배우고, 일본어를 배우고, 중국어를 배우려고 애를 쓴다. 영어를 잘 할 수 있다면 아이에게 수술까지 시키는 나라가 우리 나라다. 오렌지를 어린쥐로 발음해야 맞다고 하는 나라가 우리 나라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 수준은 아직 글로벌하지 않다. 우리의 사고 방식은 아직도 60년대 7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어떻게 잘 먹고 살 것인가, 어떻게 수출해서 4만불 시대를 이룰 것인가는 목이 터져라 외치지만, 국제 사회 속에서 한국이 감당해야할 몫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정치인들은 오로지 경제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지, 국제 사회와의 공조에는 무관심하다. 온실가스 줄이기 위한 협약을 하면서 이산화가스를 입에 담는 대통령이 있던 나라가 우리 나라다. 그러다보니 아직 외국에서 원조를 받던 그 시절의 수준에서 한발도 못나가고 있다. 그러니 약자를 돌아보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리가 없다. 의무와 권리는 함께 가는 것이라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배우지만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으니, 약자에 대한 책임, 더군다나 난민같은 최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을리가 없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오는 사람과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통역관을 넉넉하게 배치하지 못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둘째로 단일민족이라는 환상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살아왔다. 시험문제의 답에 단일민족이라고 자랑스럽게 적던 것이 나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니, 나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그들이 오늘날 이 사회의 허리라는 것이 비극이겠지)이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로 단일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사고방식 속에서 난민은 우리가 보호해야할 약자가 아니라 단일함을 깨뜨리는 이질적인 존재이다. 가능하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런 껄끄러운 존재, 그것이 난민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역설적이게도 욤비씨의 자녀들은 자신들을 한국사람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 콩고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고 싶은 욤비씨에게 꽤나 씁쓸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난민에 대해서 무관심한 한국에서 욤비씨의 아이들이 살아남기 위한 생존방법이 아니겠는가?


  이 두가지는 결국 폐쇄성이라는 단어로 귀결된다. 사고의 폐쇄성, 구성원의 폐쇄성! 그러니 편가르기와 패거리 의식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히고 싶다. 아직은 초등학교 저학년이라 어렵지만 1~2년 정도 지나서 고학년이 되면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혀주면서 우리나라에도 난민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기꺼이 감당하고 돌아보아야할 몫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다. 이것이 난민들에게 시혜와 같은 불편함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우리의 자녀들이 내 나이가 되었을 때에는 더 나아지지 않겠는가?


  난민! 신문에만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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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02-01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와로 국내에도 많은 난민이 들어오는데 난민지위를 받는 분은 극소수라고 하시더군요.

saint236 2018-02-03 11:09   좋아요 0 | URL
마음이 열리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두려워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난민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해서 사각지대에 놓이신 분들의 마음이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이 책을 통해서 해보게 되었습니다.
 
희망난민 - 꿈을 이룰 수 없는 시대에 꿈을 강요당하는 젊은이들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혼다 유키 해설, 이언숙 옮김 / 민음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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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서 오세요. 희망 찾기 유령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책을 중간쯤 읽었을 때 나도 모르게 내 귀에 이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참 무서운 말이다. 처음 이 책을 구입했을 때 희망 난민이라는 제목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힘겨운 생호라 여건 속에서 난민처럼 떠도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 저자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사회는 우리에게 희망을 말하고, 희망을 품으라고 말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희망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는, 그래서 차라리 희망을 포기하도록 단념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내 생각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였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의 저자답게 저자는 희망을 단념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에 대해서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세계 평화라는 거창한 주제로 출항하는 피스보트! 이 여행을 통하여 무엇인가 삶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젊은이들! 100일이 넘는 여행기간 내내 가장 적극적으로 헌법9조와 난민 문제, 평화 헌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던 젊은이들! 여행이 끝난 후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생각했던 젊은이들조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평화, 난민과 같은 문제들은 그들의 머리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만 그들의 삶을 채운 것은 피스 보트를 통해 맺게 된 인간관계!


  무엇인가 비틀린 것 같은 기묘한 현실을 저자는 공동체성과 목적성을 가지고 설명한다. 세계 평화라는 목적성이 휘발되어 버리고 피스 보트 참가자라는 공동체성에 천착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체성이라는 것도 서서히 사라져 버릴 것이지만 그래도 이들이 현실에 그런대로 만족하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자신들의 존재를 받아들여주는 승인 공동체가 아니겠는가? 차라리 어설픈 희망을 주지 말고 이렇게 공동체성이라는 것으로 살아간다면 젊은이들에게 이 또한 행복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사회 변화라는 것은 가끔 나타나는 깨시민 엘리트들에게 맡겨두고 말이다. 나는 저자의 이 말을 역설로 받아들여야할 지 아니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오해한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을 덮으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피스보트와 같다는 생각말이다. 희망을 찾기 위해 시작했지만, 몇번의 냉각기를 거쳐서 목적은 읽어버리고 그저 공동체성에 천착하면서 안심하는 그런...광화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외친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몇년 전에는 광우병 때문에 이명박 하야를 외쳤다. 명박 산성이 등장했고, 대통령은 청와대 뒷산에 올라서 반성을 하면서 아침이슬을 불렀단다.(내가 보기엔 아침이슬을 드신 것 같지만. 물론 장로님이라 그렇지는 않았겠지...) 세월호 사건 때에도 광화문에, 시청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릴레이 단식도 했다. 그런데...뭐가 달라졌지?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왜? 궁금했다. 물론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그저 관찰만하고 있는 나를 비겁하다고, 그런말 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왜 달라지지 않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 찾았다. 목적성의 휘발과 느슨한 공동체성이 그 이유이다. 지금 광화문에는 박근혜 하야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에 모인다. 그들은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는 동지이다. 몇번 이러한 일이 반복된다. 그러면 묘하게 연대 의식만 남고 박근혜 하야라는 목적성은 휘발되어 버린다. 부글부글하던 마음이 냉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몇번 반복되면 이젠 냉각되지 않는 이들을 향하여 외친다. "단념해. 희망은 없어. 파랑새는 죽었어." 세월호가 지겹다는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저자말대로 세상을 바꿀 엘리트, 깨시민들은? 없다. 정치 지도자라는 사람들, 그들은 아예 뜨거워지지도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다른데 있다. 같은 공동체성도 없고,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기에 아예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박근혜 하야를 외치면서도 총리 임명권 줄께라는 말에 신중을 기하는 야당 정치인들을 보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희망은 없다. 그런데도 사회는 희망이 있다는 환상을 준다. 이런 희망고문을 멈추라고 한다. 파랑새는 죽었다. 그런데 이대로 끝내도 되는가? 희망이 없다고 단념하고, 느슨한 공동체성에 천착하면 되는가? 나는 혼자가 아니야, 누군가 나와 비슷한 사람들, 나를 용인시켜줄 사람들이 있다는 안도감에 위안을 느끼면 되는가? 나는 이것이 더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기 알겠지만 그래도 난 해설과 반론의 혼다 유키의 입장, 그래도 목적성을 포기할 수 없다는 말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책을 읽은 후의 상념이 사라지기 전에 두서 없이 적어봤다. 나중에 이 책을 다시 곱씹어보면 생각이 좀더 정리가 되겠지만, 내 성격상 지금 적지 않으면 언제 적을지 모르기에 급하게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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