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도시, 베네치아 - 500년 무역 대국
로저 크롤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동유럽이 열리기 전에 낭만의 도시는 베네치아였다. 도시를 연결하는 수로, 곤돌라, 아름다운 건축물 등등. 지금이야 낭만의 도시 하면 프라하를 꼽지만 내겐 아직도 베네치아다. 게다가 코에이사의 대항해 시대를 통해 세계 지도를 외운 나에게 베네치아는 남다른 도시다. 안드레아 도리아라는 제독, 지중해를 가로질러 달리는 베네치아 갤리온. 대항해 시대2를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최강의 범선 쉽과 최강의 전투선 철갑선이 나오기 전에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전함은 베네치아 갤리온이다. 게임을 시작하면서 한푼 두푼 모으기 시작해서 베네치아 갤리온을 뽑아서 지중해를 누비면서 해적들에게 삥뜯기를 시작할 때의 감격이란...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여튼 내게 베네치아는 학창시절부터 남다른 도시였다. 그러다가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통하여 베네치아의 역사를 접하기 시작하면서, 베네치아에 대해서 약간은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 야만족을 피하여 도망간 사람들이 어렵게 살아가던 베네치아가 어떻게 그렇게 강국이 되었는가? 당연히 드는 의문이었지만, 베네치아에 관련된 책들은 대개 강국이 된 베네치아, 그리고 몰락하는 베네치아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지, 베네치아의 시작과 그들이 해상 제국으로 성장할 때의 시대를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도대체 도시국가 베네치아가 해상 강국으로 성장한 이유가 무엇인가, 도대체 그 작은 도시가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유럽의 강대국들과 오스만 제국과 전투를 하면서도 쉽사리 멸망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궁금증이 이 책을 읽어가면서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베네치아가 강국, 로마 시대 뒤를 이어 해상 제국으로 성장한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그 이유를 베네치아가 선택했던 묘한 정치 제도에서 찾는다. 베네치아는 겉으로야 어떻든 간에 권력이 대물림 되지 않는다. 물론 그 집안의 부와 권력은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지만, 국가의 권력은 사유화될 수 없다. 베네치아는 철저하게 국가 권력을 사유화하는 시도를 차단하기 위해 애를 썼다. 간혹 대단한 사람이 나타나서 오랜 세월동안 베네치아를 이끌어 간다고 해도, 막대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해도, 정치 제도적으로는 여러표 가운데 한표를 행사하는 존재일 뿐이다. 국가의 권력을 잠시 위임받아서 도시를 이끌어가는 대리자일뿐이다. 어찌보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체제와 닮은 점이 많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베네치아가 오늘날의 대한민국보다 나은 점은 국가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시도들을 정치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차단하기 위하여 애를 썼다는 것?


  자원이 부족한 베네치아는 무역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공업 원료도, 심지어는 식량도 외부에서 가져오지 않는다면 한순간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베네치아 발전의 원동력이자 몰락의 주된 원인이기도 한다. 이 또한 대한민국과 닮았다. 다만 대한민국이 베네치아에 비하여 훨씬 더 커다란 영토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내수 활성화라는 또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해상 제국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베네치아는 선견지명이 있는, 그리고 지혜는 물론 결단력까지 있는 지도자를 만나 해상 제국의 길을 걷는다. 이를 위해 베네치아는 정보 수집과 수집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해상 교통망 설치에 목숨을 건다. 터키와 싸워서 영토를 잃을 때에도 베네치아가 목숨걸고 사수하려고 했던 것은 해상 교통망이었음을 떠올린다면 그들이 얼마만큼 정보의 수집과 취합, 그리고 이를 통한 외교 정책 수립에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를 가지고 외교에 나서는 베네치아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통털어 가장 현대적인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터키의 궁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이 일이 어떤 파장을 끼칠 것인지 몇번씩이나 고민하고 점검하여 외교를 벌이는 모습을 보노라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모 측근의 막연한 희망인 2년 안에 북한이 몰락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 운운한 우리나라가 그저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베네치아의 국정 운영과 협의 프로세스를 보고 있노라면, 그리고 그들이 무역에 목숨을 건다는 점을 본다면 베네치아는 국가라기보다는 주식회사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 누구도 권력을 사유화할 수 없고, 가진 무게만큼 발언권을 갖는 주식회사. 모 그룹처럼 얼마 되지 않는 지분으로 그룹을 좌지우지할 수 없고, 대물림이 아닌 시민들과 지도층의 신임을 묻는다는 점도 주식회사의 형태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다만 현대의 주식회사와 차이가 있다면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의 유무 정도?


  내가 베네치아의 역사를 읽어가면서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서 묻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과거 누가 말한 것처럼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주식회사 대한민국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CEO에 의해서 주식회사의 미래가 영향을 받는 것처럼 한 사람의 지도자에 의해서 나라의 앞날이 큰 영향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권력이 독점되지 않도록, 권력된 독점도 절대로 사유화하지 못하도록 온갖 장치들을 둔다. 혹 이러한 장치를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기업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CEO를 해임한다. 올바른 전략을 세우기 위하여 기업의 전략을 연구하고 수립하는데 도움이 되는 기관을 설치하고, 온갖 정보를 수집, 취합, 가공하며 이를 토대로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이 기본만 지켜진다면 기업은 구성원들의 충성은 물론이고, 안정적인 성장을 보장받을 수 있다. 시민들은 평시에는 큰 발언권을 얻지 못하지만 국가의 존망을 걸고 맞서야 하는 상황 앞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갖는다. 이것이 베네치아가 500년을 갔던 이유가 아니겠는가?


  오늘날 대한민국이 혼란한 이유가 무엇일까? 베네치아가 오랜 세월동안 지켜왔던 원칙들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사유화, 정보 수집과 취합, 그리고 가공의 아마추어리즘, 국민들의 발언 무시 및 재갈물리기. 장기적인 비전의 부재. 작은 도시 국가로 시작하여 해상 제국을 설립한, 그렇지만 결국에는 한계에 부딪쳐 몰락한 베네치아의 500년 역사 앞에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본다. 주식회사 베네치아의 500년 역사 앞에서 대한민국의 앞날을 묻는다.


  번역이 깔끔하여 책을 읽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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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가방 2016-11-24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세인트님의 베네치아 지식 습득과정이 저랑 거의 동일하신..... ^^;

saint236 2016-11-24 22:16   좋아요 0 | URL
그럼 연식이...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