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쥐!

 

  아주 짧은 이 한단어에서 어떤 말들이 연상되는가? "징그럽다, 지저분하다, 페스트, 왕성한 번식력, 해충박멸, 미키마우스, 월트디즈니, MB..." 쥐에 대해 연상되는 단어들이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다. 미키마우스나 월트디즈니 같은 것들이야 비교적 근대에 생긴 이미지들이니 쥐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들은 죽여 마땅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쓸모없는 것들이 아닐까? 이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각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처음에 쥐라는 만화의 제목을 접하고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다냐라는 의아함을 품었다. 아마도 내게 이달의 리뷰에 뽑혀서 알사탕이 생기지 않았다면 아직도 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생긴 알사탕을 가지고 무슨 책을 지를까 고심하다가 요즘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서 시간에 쫓기니 비교적 가벼운 것을 택해야겠다는 얄팍한 생각에 습지생태보고서와 쥐를 택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비교적 간단하게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채 10장을 읽기도 전에 오판이었음이 드러났다.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넘기기 어려운 책은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이후로 처음이었다.

 

  작가는 아버지의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만화라는 매체로 재구성을 했는데 흑야나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보다 내겐 더 큰 무게로 다가왔다. 유태인을 쥐로, 독일인을 고양이로, 폴란드인을 돼지로,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을 개구리로 표현하고 있는 그의 책을 읽어가면서 "왜 하필이면 쥐야? 독일인에 의해 희생당한 유태인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키려면 양이라는 캐릭터가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저자의 말장난 앞에 "아하...그렇구나."라며 감탄을 했다. 아우슈비츠를 저자는 마우슈비츠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 말장난에서부터 시작된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왜 쥐인가? 당시 미국의 아이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캐릭터가 월트디즈니사의 미키마우스다. 아우슈비츠의 내용을 가지고 만화를 그리면 아무래도 내용이 꽤나 무거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는 아이들과 청소년들, 그리고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어필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야?"라는 식상함이 가득담긴 질문 속에서 많은 이들에게 외면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무리 만화로 그려진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월트디즈니의 쥐라는 캐릭터에 친숙한 사람들에게 쥐라는 캐릭터를 충분히 가볍게 이 책을 접하게 하는 미끼가 될 것이다. 게다가 마우슈비츠라는 말장난은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머리에 각인시키는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쥐라는 캐릭터를 택했다는 것은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이 책이 읽혀질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난 다음에 독일인과 유태인의 관계를 설명하기에는 이보다 더 적절한 캐릭터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한번 묻겠다. 쥐와 고양이의 관계를 적절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그냥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왜 그것이 당연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하니까 당연하다는 말외에는 할 말이 없다. 게다가 한번도 쥐의 입장에서 쥐를 변호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쥐는 그저 죽여야 하는 해충일 뿐이니 말이다. 독일인들이 유대인을 죽인 이유에 대해서도 적절한 설명이 가능한가? 왜 그렇게 많은 독일인들이 한마디의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유태인을 죽이는데 가담했을까? 독일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악해서? 독일인들이 유태인들을 원수처럼 미워해서? 아니다. 뉘른베르크의 전범재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이 유태인을 그렇게 원수처럼 생각하고 죽이려고 노력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궁색한 변명만을 할 뿐이다.

 

  아마도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의 지도자들은 여러가지 정치적인 이유가 있을지 몰라도 일반 독일인에게는 그렇게 악랄하게 유대인을 죽일 마땅한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은 왜 그렇게 엄청난 악행을 자행했던 것일까? 그들에게 있어서 유태인은 인간이 아니라 쥐와 같은 존재라는 인식이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쥐를 보면 불상히 여기고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대신에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세상에서 반드시 잡아 죽여야 하는 해충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판단의 기준으로 우리에게도 던져준다.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은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묻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다른 책의 내용처럼 공감하면서 읽지 못하거나, 덤덤하게 읽고 있다면 어느새 우리도 독일 나치의 가치관에 물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더 비극적이고, 더 무겁게 다가온다.

 

  쥐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것이 단순히 유태인과 독일인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말일까? 아니다. 상대방을 해충으로 보고 마당히 죽여야할 대상으로 격하시켜버리는 심리적인 매커니즘은 현재 한국 사회에 팽배해 있다. 종북이, 좌빨, 좌좀, 홍어, 일베충, 꼴보수 등등.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해충으로 보고 반드시 박멸시킬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가? 상대방에 대한 인권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상대방은 인간이 아니라 쓰레기요, 해충으로 취급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변호인이라는 영화에서, 남영동이라는 영화에서 우리가 그렇게 불편하게 느꼈던 모습들이 어느새 우리들의 모습 속에도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지 않은가? 일베충이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는 일베를 벌레처럼 여기고 있지 않은가? 좌좀이라는 말을 통해서 상대방을 괴물이요, 제거해야할 쓰레기로 치부해 버리고 있지 않은가? 선교나 성지 순례를 나간 사람들이 당한 비극을 바라보면서 "잘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일인가? 안현수를 빅토르 안이라고 부르면서 변절자요 배신자라고 욕하는 것, 축구 선수를 보면서 기레기, 밥줘라고 부르면서 비하하고,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기 보다는 찧고 까부는 모습을 보면서 쥐와 도대체가 무엇이 다른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고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면서 꼼짝도 하지 않는 노조를 보면서 이미 한국은 마우슈비츠로 가고 있지 않는가라는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잠깐 멈추어서 진지하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쥐가 정말 죽어 마땅한 동물인가? 쥐에게 권리는 없는가? 뜬금없이 쥐의 鼠권에 대해서 묻는 나른한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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