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人間)이라는 말은 존재의 본질에 대하여 정확하게 가르쳐 준다. 인간이란 사람과 사람사이에 달려 있는 존재 즉, 관계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일까? 사람 人자도 서로가 서로에게 비스듬이 기대어 선 모양이다.  개개인이 부족해서 각자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상대를 찾고 만나는 것이 인간의 삶이 아닌가? 문명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러한 삶들이 모여 얽히고 섥혀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듯 사람은 운명적으로 관계 지향적인 존재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서 유일하게 고독을 느끼는 존재이다. 짐승과 인간의 차이점이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고독은 가장 뚜렷한 인간만의 특징일 것이다. 물론 홀로 생활하면서 사냥하는 맹수를 일컬어 고독하다 표현하지만 실제로 그 짐승이 고독한 것은 아니다. 그 짐승을 바라보는 내가 고독하다고 느끼는 것일 뿐이다. 인가에게만 있는 고독이란 감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좌절하게도 만들고 성숙하게도 만들며 자신에 대해 성찰하게 만드는 마법의 약이다. 고독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신의 생각이 더 깊어지고 성장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깜작놀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고독에 관한 책이다. 시대의 지성이 고독이라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문제를 만나 어떻게 그 문제를 풀어가고, 또 어떻게 영성의 세계로 넘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고독에 몸부림치는 이 시대의 많은 이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양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어령씨는 한국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다. 물론 유명 아이돌들에게는 미치지 못하겠지만(젊은이들이 그만큼 책을 읽지 않는 것 같아서 이러한 현실이 정말 안타깝다.)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고, 글을 참 맛깔나게 쓰며, 시대의 지성이요, 무신론자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이런 이어령씨가 세례를 받았다는 기사를 접했을 때 참 의아해했다. 자기 딸과 자폐증을 앓고 있던 외손자의 일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이나마 이해가 됐다. 시대의 지성이요 무신론자의 대부라 일컬어지던 그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결정이었는지 짐작이 되었고, 그를 둘러싼 상황들이 얼마나 힘든 것들이었는지 약간이나나 상상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접하게 되었고 바로 구입하게 되었다. 이미 이어령씨의 화려한 글솜씨와 맛깔난 책을 접해본 나로서는 굳이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다루는 것이 아닐지라도 바로 구입했을 것인데 더더군다나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다루는 것이라면 안살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책을 구입만 해놓고 한동안 읽지 않았다. 읽어야할 책들도 많고 써야할 서평도 많아서이다. 그런데 어제 "인문 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라는 이택광씨의 책을 읽다가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잠시 쉰다는 생각으로 책을 펼쳤다. 역시 이어령이다. 책을 편 순간 그 글맛에 빠져서 마지막까지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어제 약속이 없었더라면 이 서평은 어제 밤에 올라왔을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은 독자를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는 책이다. 

  시대의 지성도 결국은 고독이라는 근원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나 보다. 이어령씨가 딸의 문제, 손자의 문제라는 위기를 만나면서 직면하게 된 것은 존재의 고독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독하게 그를 따라다녔던 고독이라는 녀석이 어느 힘겨운 순간에 불쑥 고개를 내민 것이다.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일본에서 초빙받아 연구를 하면서 느꼈던 것도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었고, 미치도록 사람을 보고 싶다는 그리움이었으며 자기 존재의 무력감이었다. 시대의 지성으로서도, 철학으로서도 채울 수 없는 갈증과 허기는 결국 그로 하여금 영성의 문을 두드리게 만들었고 그곳에서 채움을 받았으며 자신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번의 망설임 끝에 자신의 경험을 기독교인이 아닌 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이 책을 출간했다고 한다. 

  책을 보는 내내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그래도 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왜 이 책을 보면서 눈물이 나왔는가? 그가 느꼈던 고독감이 남의 이야기가 같지 않아서였다. 이어령씨와는 달리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나는 습관처럼 교회를 다녔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언저리에서 알짱거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큰 실패와 견딜 수 없는 고독을 맛보며 하얗게 밤을 지새우던 그 시간을 견디고 난 후 종교가 아닌 영성에 대하여 아주 조금이나마 눈을 뜨게 되었다. 아니다. 눈을 떴다는 것은 너무 교만한 생각이고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는 것, 혹은 그러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 신앙의 기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틀에 박히지 않고 자유로운 그의 지적인 사고는 성경을 다른 측면에서 해석하게 만들었다. 특히 기도에 대한 그의 사고는 무릎을 탁치게 만들 정도였다. 잠시 그의 글을 인용해 본다.  

  아버지가 기도를 하실 때면 사람들은 웃음을 참느라고 애썼지만 나는 그 기도를 들으면서 전통적인 기독교 정신은 바로 저런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작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기도는 언제나 우리와 가장 먼 나라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셨던 것이지요. 신문이나 방송에서 들으신 외신 뉴스 가운데 보스니아처럼 전쟁을 하거나 아프리카처럼 기근으로 굶어 죽어가는 어린이들이나 우리는 관심조차 갖지 않은 지역에서 일어난 태풍이나 홍수로 가족을 잃은 난민을 보살펴 주시라는 기도였던 것이지요.
  그 긴 기도의 끝에 이르러서야 겨우 한국과 우리 가족을 위한 기도를 하셨는데 그것도 아주 작고 멋쩍은 소리로 혹시 남은 복이 있으시면 우리 식구들, 어린 손자들에게도 좀 나눠 주십사라고 끝을 맺으십니다.(P.41)  

  지금껏 내 기도에, 내 가족을 위한 기도에 열중했던 내 얼굴을 뜨겁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기도는 먼곳에서부터 시작하여 자신에게서 멈춘다는 기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만들어 주었다. 그의 이러한 신앙의 순수함이 여러번의 간증과 세미나를 통하여 때가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책의 오타가 너무 많다. 이어령씨가 오타를 내었다고 생각할 수 없으니 출판사의 책임이려나? 설령 이어령씨가 오타를 내었다고 할지라도 출판사에서 교정을 충실하게 봤다면 이 정도로 오타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충 눈에 들어오는 오타들을 적어본다. 

  124p 6번째 줄 (들였던 것입니다.=>드렸던 것입니다.) 170p 3번째 단락 첫번째 줄 (흥동백서=>홍동백서) 178p 9번째 줄 (단신을 믿겠노라고 사다처럼=>당신을 믿겠노라고 사사 입다처럼) 262p 첫번째 줄 (목사님의 대한 애길=>목사님에 대한 이야길, 혹은 목사님에 대한 얘길) 262p 두번째 단락 네번째 줄(집회를 시작하는=>집회를 시작하는데) 마지막 페이지 2번째 (이어령 선생님와=>이어령 선생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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