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메시 서사시 범우고전선 10
N.K. 샌다스 지음, 이현주 옮김 / 범우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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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인간에게 죽음은 공평하다.


  요즘 공평이라는 말이 사회적인 화두이다. 온갖 불공평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정의를 외치는 것은 결국은 공평에 관한 이야기이다. 비정규직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의롭지 않다는 것, 즉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죽을만큼 힘들게 노력해서 취업을 했는데 누구는 비정규직으로 취업을 해서 정규직이 된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 즉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절대적으로 공평한 것이 인류에게 있었는가? 그 어느 사회를 살펴보아도 모두가 공평하다고 느끼는 그런 순간들은 없었다. 그만큼 공평이라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가장 공평한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죽음이다. 모든 태어난 사람은 죽는다는 것만큼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자연의 법칙일 것이다. 죽음을 피해보기 위해서 애를 썼던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도 모두 죽었다. 아무리 대단한 권세를 누리던 사람도 죽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던지, 그리고 어떤 조건을 누리고 살던지 모두 죽는다. 다만 차이는 얼마나 부하게 빈하게, 그리고 오래 혹은 짧게 사느냐의 문제이지 죽음만큼은 피할 수 없다. 아마도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공평한 기회는 죽을 기회라는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진 길가메시라고 할지라도, 세상이 좁다고 돌아다니던, 그리고 분탕질을 하던(길가메시는 그것을 모험이라고 부를지라도 내가 보기엔 분탕질일 뿐이다.) 길가메시도 결국은 죽음이라는 공평한 기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자기와 함께 세상을 눕누비던 엔키두의 죽음 앞에서 길가메시는 자기도 언젠가는 죽게될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하여 당시 불사신으로 여겨지던 우트나피쉬팀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영생 불사의 기회를 얻었지만 그 기회를 놓쳐버린 그는 돌아와서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가는 그 길로 갔다.


  가장 오래된 서사시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붙어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이지만 호메로스나 일리아드만큼 흥미진진하지는 않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라는 별칭은 붙어 있어도 가장 흥미로운 서사시라는 별명은 얻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읽은 판본이 그래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중간 중간에 비어 있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언젠가 이 부분이 연구를 통해서 채워진다면 더 흥미진진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


  영웅 서사시를 읽으면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호흡이 거칠어져야 하지만 길가메시 서사시는 오히려 차분해진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종착점을 다루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식이 이집트와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또한 재미가 있다. 


  언젠가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한다는 것이 이 서사시를 읽고 깨닫게 되는 점이다. 우리는 평생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어도 나는 안죽을 것처럼 살아간다. 혹은 죽더라도 아직은 나와는 상관없는 먼 미래의 일처럼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달려가는데 치중한다. 그 길이 잘못되었는지, 바른 길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열심히 달리는 일에만 몰두한다. 그러다 보니 죽음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 불쑥 찾아온 불청객처럼 달갑지 않은 존재가 된다. 애쓰고 애쓰다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죽음이라는 불청객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삶을 마감한다면 그동안 애쓰고 살아왔던 것은 무엇을 위한 애씀이었던가? 그저 죽을 때 후회하고 "~할 걸"이라는 말로 마무리 짓는 허망한 삶, 후후회를 남기고 떠나는 삶이 되지 않겠는가?


  길가메시가 마지막에 깨달았던 것, 뱀에게 영생 불사의 약을 빼앗기고 깨달았던 것이 이것이 아아니겠는가? 영원히 살고 싶지만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우리는 날마다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죽음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설 것인가? 내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오랜 질문인만큼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묵직하다.


  책을 덮으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것을 발견하기 위해 오늘도 이책 저책 기웃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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