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딕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4
허먼 멜빌 지음, 레이먼드 비숍 그림,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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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진리만을 강요하던 폭력의 시대에 맞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문학의 효시가 된 불후의 고전

내게 <모비 딕>이라는 작품은 고전이라거나 불후의 명작이라거나 하는 식의 인식은 없었다. 유명한 책이었고 <필경사 바틀비>에 홀딱 반한 후 관심이 생긴 허먼 멜빌의 역작이기에 읽어보고 싶었던 정도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종인 님의 원전 번역판이 나왔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전 번역분야에서 믿고 보는 이종인 님의 번역인데다 직접 길고 긴 [해제]를 쓴 이 벽돌책을 설레는 마음으로 펼쳤다.

이런저런 거창한 수식어구가 붙는 작품인 만큼 사전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나서 읽고 싶었기에 [해제]를 먼저 읽고 시작했다. 어릴 적 동화버전으로 읽었던 모비딕은 내 머릿속에서 보물섬과 노인과 바다와 심지어 해저2만리가 뒤섞인 혼종이었음을 알았다. 결국 나는 모비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번역자가 풀어주는 '거대한 소설'에 대한 '거대한 주제'가 생소하고도 무겁게 다가왔다.

[<모비 딕>, 거대한 주제를 다루는 거대한 소설]이라는 제목의 [해제]를 통해 작가의 생애와 작품 배경을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작품 속에 깃든 고전들과 상징적 표현들에 대해 역자가 다각도로 분석해 놓은 부분이 흥미로웠다. 거대한 책을 읽을 땐 사전정보가 작품의 이해에 필수라고 생각한다. 나는 문장 하나하나 분석해놓은 평론들은 안 읽지만, 작가의 생애와 작품 배경에 대한 설명은 먼저 읽기를 선호하는 편이다. 이 책은 읽기 전 [해제]를 먼저 읽기를 권하고 싶다. 그냥 지나친 문장들이 사실 상당히 의미심장한 문구였음을 뒤늦게 알고 후회하기 전에 말이다.

이 작품은 독특하게도 고래에 대한 '어원'과 이전 책들에서의 '발췌록'을 작품에 앞서 실어놓고 있는데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작품 내내 시종일관 유지되며 작품의 서술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소설적 내용 보다는 고래와 포경선에 대한 다큐적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작품을 읽으며 '20세기에 도래할 모더니즘을 예고'했다는 그리고 '기존에 없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형식으로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효시이자 상징주의 문학의 대표작'이 되었다는 이 소설의 의미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게 되는데, 특히나 작품 속에서 성경과 셰익스피어의 체취를 맡고 그리스신화와 플라톤의 향기를 맡을때마다 더욱 곱씹게 되는 이 작품의 가치는 독자마다 상당히 다르게 느껴질 것 같다.

나를 이슈메일이라 불러다오. (p. 37)

역자의 해설에 의하면 이 작품의 이 첫 문장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문장이라고 한다. 또한 이 문장과 호응하는 듯한 마지막 문장인 " 또 다른 고아인 나를 발견한 것이다. (p. 691) " 와 (그냥 고래도 아니고 다른 고래도 아닌)흰고래, 이렇게 3가지의 상징성에 대해 이해하면 이 작품을 거의 다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주 인용되는 성경적 인물들과 세익스피어식 대사는 배경지식이 있다면 더 바로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쪽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역자의 주석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일은 처음에는 꽤 힘들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중략) 타르 단지에 손을 담가야 하는 일반 선원이 되기 전까지 시골 학교에서 덩치 큰 학생들도 벌벌 떠는 호랑이 선생 노릇을 했던 사람이라면 자존심이 이만저만 상하는 게 아닐 것이다. 장담하건대, 선생에서 선원으로 전업하는 것은 엄청난 변화다. 씩 웃으며 이런 일을 견뎌내려면 세네카와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을 한 사발 진하게 달여 마셔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고통도 시간이 흐르면 점차 무뎌진다. (p. 40)

이 작품에는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은근히 많이 들어가 있다. [해제]뒤의 [허먼 멜빌 연보]에서 이미 읽고 온 것처럼 허먼 멜빌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기울자 학교를 중퇴하고 임시 교사로 일하다가 포경선에 취직했다. 고작 그의 나이 21세(1840년) 때였다. 3년 정도의 이 경험은 작가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의 첫 소설의 배경이 되기도 했으며 30세에 집필한 그의 역작 <모비 딕>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모비 딕>에 대한 혹평으로 작가적 삶을 거의 접어야 했고 살아 생전에는 제대로 된 인정을 거의 받지 못하다가 사후(1891년)에 1920년대가 되어서야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여하튼, 자신을 이슈메일이라 불러달라고 한 작품 속 화자는 젊은 청년이고 상선만 타다가 포경선을 타기 위해 포경업으로 유명한 섬 낸터킷에 왔다.

내가 고래잡이 항해에 나선 것은 틀림없이 신의 섭리를 따라 아주 오래전에 예정된 원대한 계획의 일부일 것이다. 이 항해는 대규모 공연 사이에 낀 짤막한 막간극이나 일인극과 같다. 이 부분이 전체 공연 안내지에 소개된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p. 41)

치열한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전

이슈메일이란 자의 고래잡이 항해

피비린내 나는 아프가니스탄전쟁

다른 사람들이 고상한 비극에서 감동적인 역할을, 우아한 희극에서 쉽고 간단한 역할을, 익살극에서 쾌할한 역할을 맡을 때, '운명'이라는 무대 감독은 왜 내게 포경선 선원이라는 초라한 역할을 맡겼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 없어도, 이제 와서 모든 상황을 돌이켜보니 다양하게 변장하고 내게 교묘히 나타난 여러 동기와 원인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것들은 예정된 역할을 하도록 나를 밀어붙였고, 또한 기만하여 내가 편견없는 자유의지와 예리한 판단으로 스스로 그런 선택을 했다고 믿게 만들었다. 가장 결정적인 동기는 거대한 고래 자체의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이었다. (p. 42)

책을 보면 저 선전문구?!들이 색과 크기를 달리 하고 있어 더욱 눈에 띄는데, 이또한 이 책 전반을 아우르는 분위기 중의 하나다. 현실비판이 없지 않다는 것.

허먼 멜빌이 이 작품을 쓰던 시기는 미국에 나름 전운이 감도는 시기였다. 흑인노예를 둘러싼 남북전쟁 직전의 상황이었고 따라서 정치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복잡한 시대였다.

무엇보다 허먼 멜빌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자긍심이 무척 높았던 사람 같다. 신의 섭리에 따라 예정된 계획의 일부로 포경선 선원이 되었고 대통령 선거전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 못지 않게 중요한 고래잡이 항해를 한 '나'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무대위에서 그 어떤 비극이나 희극이나 익살극보다 뛰어난 <모비 딕>을 열연하고 있다. 이 '극'이 뛰어난 이유는, 실제 일어났던 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현실'이며 그렇기에 다른 그 어떤 허구보다 더욱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라는 작품이 생각난다. 19세기 중반 사실주의의 대표작으로 19세기 후반 나타난 모더니즘에 영향을 끼쳤다는데 <모비 딕>은 그 모더니즘의 선구작으로 일컬어진다. 사실주의던 모더니즘이던 그에 앞서 있었던 사조들의 그 어떤 '허구성'보다 '현실'을 중요시 하는 사조들이기에 허먼 멜빌의 자긍심은 앞서간 문인의 자신감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모더니즘이 도래하기 이전의 소설들은 철저히 리얼리즘을 내세웠다. 가령 디킨스와 발자크는 전형적인 19세기 리얼리즘 소설가로서 작품 내 인물들에 대해 전지적 관점을 취한다. 다시 말해 세상은 소설가가 그려내는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따라서 소설가의 자아와 세상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러나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은 소설가가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화자는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고 상상한 것 말고는 알 수 없으며, 그마저도 인식이 불완전할 때가 많다는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 자아와 세상은 불일치 하므로 세상보다는 자아의 심리적 리얼리티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더니즘 작가들은 화자의 관점을 중시하면서 내면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드라마화하는 데 집중한다. 이것이 모더니즘 운동의 핵심이다. <모비 딕>은 여러 면에서 모더니즘을 예고하는 작품이었다. (p. 702 - 해제 中) ]

<모비 딕>은 1인칭 화자로 서술되면서 화자의 심리 묘사가 중심을 이룬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화자가 그런 심리를 갖게 되는 요소들에 대해 다큐멘터리라고할 정도의 구체적 사실들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그와는 비교되게 인물들의 대사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듯한 연극적 어투로 방백처럼 표현된다. <모비 딕>은 정말이지 이런저런 요소들이 새롭고 신선한 묘한 작품인 것이다. 지금도 묘한데 발표 당시에는 얼마나 묘했겠는가.

어쨌든 화자인 '나' 이슈메일은 낸터킷에 가기 전에 '물보라 여관:피터 코핀'에 묵게 되는데 주석에 의하면 '여기서는 사람의 이름으로 쓰였으나 코핀에는 시신을 넣는 관 이라는 뜻도 있다 (p. 45)'고 한다. 이 '관' 은 이 소설의 결말에도 의미심장하게 등장하는데 이처럼 <모비 딕>에서는 앞뒤 대칭적으로 상응하는 상징들이 종종 등장하곤 한다. 그리고 이 여관에 걸린 그림은 이 소설 전체의 줄거리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또한 대칭적 장면으로 읽혀지는 부분이었다.

그래, 이슈메일, 저게 바로 너의 운명일 수도 있어. 하지만 왠지 나는 점점 다시 즐거워졌다. 그래, 배가 부서지면 나는 명예롭게도 불멸의 존재로 진급하는 거야. 그래, 고래잡이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야. 아차 하는 순간에 혼란 속에서 영원의 세계에 던져지니 말이야. 하지만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우리가 삶과 죽음의 문제를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 이 땅에서 어른거리는 내 그림자가 실은 내 진짜 본질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적인 것을 보는 방식이란 것이, 굴이 바닷물을 통해 태양을 바라보며 그 두터운 물을 가장 얇은 공기라고 생각하는 방식과 너무나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육신이 더 나은 내 존재의 찌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원한다면 누구든 내 육신을 가져가라. 이건 내가 아니니까. 그러니 낸터킷을 위해 만세 삼창! 부서진 배든, 으스러진 육신이든 올 테면 와라. 제우스라 할지라도 내 영혼은 부술 수 없으니. (p. 76)

이슈메일은 이제 낸터킷에서 포경선을 타고 출항한다. 여관에서 만난 식인종 야만인 퀴케그보다 더 이상한 선장인 에이해브 선장이 이끄는 피쿼드호를 타고 바다로 바다로.

"거기 돛대 꼭대기! 잘 살펴봐. 너희들 전부! 이 근처에 고래들이 있어! 흰 고래를 보면 폐가 찢어지도록 소리치란 말이야!" (p. 182)

"자네들 중 누구든 이마가 주름지고 아가리가 구부러진 대가리 하얀 고래를 보고하면, 오른쪽 꼬리에 구멍이 세 개 뚫린 하얀 대가리 고래를 보고하면, 자, 이 금화는 바로 그 사람의 것이다!" (p. 218)

출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에이해브 선장은 광기어린 집념을 드러낸다. 흰 고래를 찾아라! 선장의 한 쪽 다리를 앗아간 그 흰 고래를.

'작은 건물이야 공사를 처음 시작한 건축가가 완공할 수 있겠지만, 진정 웅장한 건물은 최후의 마무리를 후대에 맡기는 법이다. 신은 내가 그 어떤 것도 완성하지 못하게 한다. 이 책 전체도 하나의 초고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초고를 위한 초고에 불과하다. 아아, 내게 시간과 체력과 자금과 인내를! (p. 197)'

에이해브 선장은 위대한 흰 고래를 찾고 '나'는 그 위대한 여정을 기록한 후대로서 그 막중한 책임을 다하려 노력중이다. 허먼 멜빌은 <모비 딕>이라는 자신의 작품에 이토록 엄청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작정하고 쓴 것인데 그러한 작품이 그토록 혹평을 받았으니 작가로서 받은 상처와 타격이 컸을 것 같긴 하다.

이 모든 아름답고 명예롭고 숭고한 연상에도 불구하고, 흰색의 가장 내밀한 개념 속에는 포착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깃들어 있어 두려운 핏빛보다 더 큰 공포를 우리 영혼에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포착하기 어려운 특성 때문에 흰 색을 좀 더 기분 좋은 연상에서 분리시켜 본질적으로 무시무시한 대상과 결부시켰을 때 그 공포는 배가된다. (p. 253)

우리는 아직 흰색의 마법을 풀지 못했고, 왜 흰색이 우리 영혼에 그토록 강하게 호소력을 갖는지 알지 못한다. 더욱 이상하고 훨씬 더 불길한 점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흰색이 영적인 것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며, 나아가 기독교 신이 쓰고 있는 베일인 동시에 인류에게 가장 소름끼치는 것들을 강화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p. 261)

이 모든 것의 상징이 바로 흰 고래다. 그래도 당신은 이 맹렬한 추격을 의아하게 여기겠는가? (p. 262)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많은 측면은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은 두려움으로 이루어져 있다. (p. 261)' 라며 이슈메일은 '흰 고래'의 의미와 그러한 흰 고래를 쫓을 수밖에 없는 심리에 대해 독자를 설득한다. 또한 고래의 속성과 종류, 포경업의 구체적 작업들을 설명하면서 이 두려운 흰 고래를 '모비 딕'이라는 구체적 존재로 연결시키는데 그렇게해서, 조업을 하며 만나는 배들마다 에이해브 선장의 '흰 고래'를 보았냐고 묻는 광기어린 집착을 포경업의 특성상 그러한 추적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자연스럽게 설득시키려 한다. 흰 고래도 흰 고래를 쫓는 일도 모두 너무나 그럴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일인 것이다. 호메로스의 비극이 그러했듯이 단테의 신곡이 그러했듯이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그러했듯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흐름을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모비 딕>이라는 작품으로.

성문율이든 불문율이든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확실한 규약 (p. 488)

1. 잡힌 고래는 잡은 자의 것이다.

2. 놓친 고래는 먼저 잡은 자가 임자다.

하지만 이 훌륭한 법규는 워낙 간결해서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이 법규를 설명하려면 방대한 주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p. 489)

'잡힌 고래'와 '놓친 고래'에 관한 두 원칙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 사회에 있는 모든 법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p. 491)

작가는 '잡힌 고래'에 대한 비유로 러니아 농노나 공화국 노예, 과부의 마지막 동전 한 닢이 탐욕스러운 지주에게 잡힌 고래라고, 미통한 파산자가 가족이 굶어죽는 것을 막기 위해 돈을 빌리러 왔을 때 고리대금업자 모르드개가 무지막지하게 떼는 선이자가, 대주교가 등골 빠지게 일하는 수십만 노동자들의 얼마 되지 않는 빵과 치즈에서 뜯어낸 10만 파운드가, 영국에게 잉글랜드가 미국에게 텍사스가 '잡힌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묻는다.

마찬가지로, '놓친 고래'는 스페인에게 있어 아메리카가, 러시아 황제에게 있어 폴란드가, 터키에게 있어 그리스가, 영국에게 있어 인도가, 미국에게 있어 멕시코가 '놓친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묻는다. 이처럼 '인권이나 세계의 자유도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모든 인간의 생각이나 마음이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겟는가? (p. 492)' 라고 물으니 어찌 '놓친 고래'를 추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모비 딕을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다 드디어,

"고래가 물을 뿜는다! 고래가 물을 뿜는다! 흰 산 같은 혹이다! 모비 딕이다!" (p. 655)

운명의 추격이 시작된다. 이 운명적 장면이 등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르고 얼마나 많은 설명이 이어졌는지 모른다. 이 벽돌책에서 이 몇 페이지를위해 그토록 길고 긴 설명이 그토록 현실감 넘치는 증명과 증언들이 등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요약본 책에서라면 대부분 모비 딕에 대한 선장의 집념과 모비 딕을 발견하고 추적하는 소설적 줄거리가 대부분의 내용이겠으나 원전 그대로의 모비 딕에서 사실 이러한 소설적 줄거리는 그리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렇게 버려진 아들 이스마엘로 시작해서 레이철호(라헬=레이철, 아들을 잃은 어미 라헬)에 의해 구조되는 고아로 끝나는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흰 고래'는? ...

확실한 것은 성경에 대한 이해가 풍부한 독자가 읽었을 때 분명 나와는 다른 감상을 얻었으리라는 것이다.

항해모험기이라고 하나 항해모험기로 읽히지 않는 이 소설은 한번 읽는 것으로는 다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이 험난한 여정을 내가 언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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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인종, 계급 Philos Feminism 2
앤절라 Y. 데이비스 지음, 황성원 옮김, 정희진 해제 / arte(아르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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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흑인, 퀴어, 공산주의자, 감옥산업복합체 폐지 운동가...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저항의 아이콘 앤절라 데이비스가 쓴

교차 페미니즘의 고전

Women , Race & Class

1981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단순한 제목의 이 책은 학문적 논리 보단 저자 개인의 삶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그리고 짧은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그 출판년도만으로도) 페미니즘의 고전이라 불릴만 하다. 하지만 40여년 전 미국내에서의 활동을 기반으로 쓰여진 이 책의 내용에 대해 그리고 페미니즘이라는 학문 자체에 대해 낯선 독자를 위해 국내 페미니즘학문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을 정희진 박사가 책의 서두에 해제를 덧붙였다.

여성은 이렇게 다양하다. (중략) 인종과 계급, 지역처럼 구조적인 문제로 인한 차이나 개인의 성격에 따라 젠더나 '여성성'을 실행하는 방식이 다른 여성들도 있다. 이 중 누구를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가부장제 사회에서 규범적 여성('젋고 예쁜 중산층 여성')은 남성이 정한다. 이에 반해 여성주의는 '아줌마, 할머니, 노예 여성, 트랜스 젠더 여성'도 여성이라고 주장하며 여성의 범위를 확장한다. 페미니즘 이론과 운동의 목표는, 개별적인 인간이 아닌 여성을 남성 공동체를 위한 성역할 노동자 집단으로 환원시킨 성차별 체제에 대한 도전이자 여성의 개인화와 인간화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억압받는 존재라는 자각과 함께, 여성이라는 범주를 만들어 낸 권력을 해체하자는 주장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여성의 같음과 다름을 동시에 주장한다. (p. 12) -해제 中-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여성학 혹은 여성을 위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여성만의 ... 뭐 이런 해석이 일반적인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따지고 들자면 이러한 대중적인 해석은 옳지 않을 때가 많다. '성차별이나 인종주의는 지배 세력이 정한 규정이다. (p. 13)' 라는 저자의 말처럼 여성이라는 범주가 누군가에 의해 규제된 범주라면 더구나 그것이 억압에 가깝다면 그 범주를 해체하고 그 범주를 만들어낸 권력을 해체해야 한다는 저자의 설명은 일면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누가 여성인가' 라고 묻는 정희진 박사의 질문에 앤절라 데이비스가 한 답은 당시 사회상을 생각해 봤을 때 이해하기가 훨씬 나았다.

[여성, 인종, 계급]은 미국의 페미니스트 앤절라 이본 데이비스가 1981년에 발표한 여성학 이론의 고전이다. 앤절라 데이비스는 대표적인 흑인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데이비스만큼 평생을 다양한 정체성과 젠더를 넘나드는 광범위한 삶을 산 이도 드물 것이다. 앤절라 데이비스는 흑인, 여성, 레즈비언이자 공산주의자, 저술가, 교수, 감옥 폐지 운동가, 팔레스타인 국제연대 활동가, 미국 공산당 대통령 후보였던 거스 홀과 함께 1980년과 1984년에 부통령 후보에 두 번 출마했다가 낙선한 직업 정치인이자, 한때 FBI가 지명한 10대 수배자이기도 했다. (p. 14)

저자의 다종다양한 이력만큼이나 저자가 주제삼을 것들은 다중적일 수 있겠으나 저자는 '누가 여성으로 간주되며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는 영원한 질문(p. 15)'에 집중하여 이 책을 쓴 것 같다. '페미니즘이 다루는 젠더는 여성과 남성 간의 차이가 아니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의 개념을 규정하는 권력을 질문하고 추적한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남성과 남성의 차이 그리고 여성과 여성 간의 차이에 의해 구성된다. 뚜렷이 두 개의 성으로 구분되는 '순수한' 남성과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이기만 한 남성, 여성이기만 한 여성은 없다. 즉 성별만으로 작동하는 문제는 단언컨대, 없다. 동시에 젠더를 고려하지 않은 인종, 계급 개념도 불가능하다. (p. 15)' 는 해제의 설명처럼 여성이지만 여성이면 안되는 '페미니즘은 그 자체로 모순적인 사상이다. (p. 15)' 여성이라는 개념은 생각보다 굉장히 유동적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복합적 권력의 성격을 매 순간 고민해야 하는 상황적 지식 (p. 16)' 이라고 해제에서 설명된다. 따라서 저자인 앤절라 데이비스가 말하는 페미니즘을 이해하려면 저자가 살았던 미국사회의 모습을 알아야 하는데, 가장 자유로운 국가로서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미국이 흑인노예의 노동을 바탕으로 자리잡은 가장 인종구속적인 국가라는 것은 (저자인) 흑인여성노동자의 눈으로 따라가다보면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저자는 공산주의자로서의 프레임이 강하다. 그래서 해제에서도 '이 책의 전반적 '정서'가 흑인 페미니스트의 입장이라기보다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자의 입장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유다. (p. 26)' 라고 살짝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극명한 공산주의관련 경험을 갖고 있는 나라인 한국에서 그 프레임도 해체하며 읽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리이기에 그렇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요지는 여성이 흑인, 노예, 가난한 사람일 때 여성성의 기준과 페미니즘 이론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보편성의 반대는 특수성이라고 설명되어왔다. 그러나 이는 보편의 기준을 바꾸지 못한 채 특수하고 예외적인 타자만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페미니즘은 기존의 방식을 비판하고 차이를 드러낸다. 남성중심적 보편성이든, 백인 여성 중심의 보편성이든 모든 보편성은 차이를 드러내야만 해체된다. (p. 20) '여자로 태어났으면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아도 페미니스트인가?' 우리는 기존의 '백인 중산층 이성애자 고학력 비장애인 젊은 여성'의 경험에 기반한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한다. 페미니즘 뿐 아니라 중산층의 경험은 모든 지식의 기반이다. 삶이 지나치게 고달픈 이들이나 부자들은 언어를 생산할 여력이나 이유가 없다. 모든 언어, 지식은 중산층의 삶의 경험에 기반한다. 이는 기존의 페미니즘이 모두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존의 서구 페미니즘을 상대화하고, 내가 선 자리, 로컬에 맞는 지속적인 재해석과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p. 21)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에서 벗어나 이제는 '기존의 서구 페미니즘을 상대화하고, 내가 선 자리, 로컬에 맞는 지속적인 재해석과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한 노력중의 하나로 페미니즘의 고전을 읽을때에도 경전처럼 읽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처럼 고전은 경전이 아니다. (p. 27)' 라는 해제에서의 문장을 되새기며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 '먼저 투쟁한 이들의'역사적 맥락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공부가 필수적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배운다. 어떻게? 시공간이 다른 로컬에서 나의 위치성을 자각하고 저자의 생각을 상대화, 재의미화 하는 공부여야 한다. (p. 27)' 다행히 이 책으로 하는 '공부'는 일단 가독성 면에서 어렵지 않다.

노예 여성들은 여자라는 태생 때문에 온갖 형태의 성적 억압에 취약했다. 남성에게 가장 가혹한 처벌이 태형과 신체 훼손이었다면 여자들은 태형과 신체 훼손에 더해서 강간을 당했다. 사실 강간은 노예 소유주의 경제적 지배력과 노동자로서의 흑인 여성에 대한 감독관의 통제력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특수한 학대는 그러므로 이들의 노동에 대한 가혹한 경제적 착취를 원활하게 했다. 이 착취를 위해 노예 소유주들은 억압을 할 목적이 아니고서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성차별주의적 태도를 버렸다. 흑인 여성들이 인정된 의미에서의 '여자'가 아니었으므로 노예제는 흑인 남성들의 남성우월주의 역시 억눌렀다. (p. 35)

미국사회에서의 페미니즘 발달을 이해하려면 흑인노예로서의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실 미국 사회내의 많은 문제는 흑인노예제에서 시작된다.

흑인노예로서 여성과 남성의 구분은 없었다. 평.등.하게 학대받고 착취당했다. 오히려 여성의 신체적 특징 때문에 흑인여성노예는 더 심한 경험을 감내해야 했다. 이는 흑인노예공동체 사회에서의 남녀 관계가 백인지배층 사회에서의 남녀 관계와 다르게 형성된 배경이기도 했으며, 추후 페미니즘의 발달에 있어서도 흑인여성과 백인여성의 시각에 상당한 간극을 가져오게 했다. 여하튼 미국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그래서 흑인노예제 폐지에서 시작된다.

나는 쟁기질을 하고 심고 수확해서 헛간에 모아둬요. 어떤 남자도 나보다 잘하지 못해요! 그럼 나는 여자가 아닌가요?

나는 남자만큼이나 많이 일하고 많이 먹을 수 있어요. 나한테 주기만 한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똑같이 채찍질도 견딜 수 있죠! 그럼 나는 여자가 아니냐고요?

나는 자식을 열셋 낳았고 걔들이 거의 전부 노예로 팔려가는 걸 봤어요. 내가 어머니로서 비탄으로 울부짖을 때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내 소리를 듣지 못했죠! 그럼 난 여자가 아닌가요? (p. 109)

초기 여성 권익 활동가들은 흑인 여성의 곤경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노예제 반대에 참여하고 있는 백인 여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1851년 여성대회에 흑인 여성으로 유일하게 참석했던 소저너 트루스의 '나는 여자가 아닌가요?' 라는 연설은 지금 읽어도 찡한 울림이 있다. 하지만 노예제 폐지와 여성권익향상 운동은 서로 돕다가도 때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눈치를 봐야 했다. 둘다 해결될 수 없다면 하나라도 관철시켜야 하지 않나 라는 조바심에 힘을 합치기보다 서로 견제해야 할 때도 많았다. 이또한 그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

노예제의 사슬이 끊어지긴 했어도 흑인들은 여전히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고 강도 면에서 노예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종주의자 폭도들의 테러 공격을 상대해야 했다. (중략) 남부에 사는 흑인의 일상에는 여전히 노예제의 악취가 진동했다. (p. 131) 노예제 시기에 그랬듯 농업에 종사했던 흑인 여성들은 온종일 옆에서 함께 일했던 흑인 남성들만큼이나 혹사당했다. 이들은 종종 남북전쟁 이전의 상황을 되풀이하고 싶어 하는 지주들과의 '계약'에 서명을 하라고 강요당했다. 계약 만기일은 형식에 불과할 때가 많았다. 지주들은 노동자가 정해진 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빚을 자신들에게 졌다고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 144)

남북전쟁으로 노예제가 공식 폐지됐어도 남부에서 흑인들의 삶은 획기적으로 달라질 게 없었다. 가진거 없이 해방된 노예들은 여전히 지주들 밑에서 노동을 해야 했고 노동을 하면서도 빚을 져야 했으며 그렇게 지게 된 빚은 늘어나기만 해서 종신계약에 가까운 노동은 노예제에서의 노동과 다를게 없었다. 오히려 혐오범죄에 더 노출되기까지 했다. 중요한건 깨우침과 깨달음이었기에 '교육'이 강조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여성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교육을 쟁취하기 위한 미국의 여성 투쟁사는 남북전쟁 이후의 남부에서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이 함께 문맹과의 전투를 진두지휘했을 때 진정한 절정에 도달했다. 이들의 단합과 연대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생산적인 가능성 중 하나를 지키고 공고히 다졌다. (p. 176)

이 희망적인 연대가 오래 지속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권력투쟁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셈법이 통하는 사회가 아니고 인종주의라는 것이 그렇게 단번에 사라질 수 있는 인식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오랫동안 기다려온 여성참정권이 승리를 거둔 뒤에도 남부의 흑인 여성들은 이 새로 성취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폭력적으로 저지당했다. (p. 230' 미국내 페미니즘역사에서 흑인여성의 입장을 조금 더 세밀히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누구보다 많이 억압당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흑인여성으로서의 페미니즘 관점을 세우는데 있어 저자는 공산주의라는 논리를 접하며 큰 깨우침을 얻은 듯 하다. '근 20년간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대변인이었던 사회당은 여성 평등 투쟁을 지지했다. 사실 숱한 세월 동안 여성참정권을 옹호한 정당은 사회당이 유일했다. (p. 234)' 따라서 저자의 공산주의자로서의 논리도 따로 챙겨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흑인 여성 노예의 삶에 대한 일체의 탐구는 노동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평가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p. 32)

도덕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근거로 노예제에 반대하던 가장 급진적인 백인 폐지론자들조차도 급성장중인 북부의 자본주의 역시 억압적인 시스템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p. 114)

남북 간의 군사적 경합이 남부의 노예 소유계급을 전복시키는 전쟁이라는 점에서, 이는 기본적으로 북부의 부르주아지, 그러니까 공화당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발견한 젊고 열정 가득한 산업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수행된 전쟁이었다. 북부의 자본가들은 국가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경제적 통제력을 손에 넣고자 했다. 그러므로 남부의 노예정치를 상대로 이들이 벌인 투쟁은 흑인 남성이나 여성의 해방을 인간으로서 지지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여성 참정권이 남북 전쟁 이후 공화당의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듯, 이 승리에 도취된 정치인들이 흑인의 천부적인 정치권에 신경을 써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이들이 남부에서 새로 해방된 흑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확대할 필요를 인정했다고 해서 이들이 백인 여성보다 흑인 여성에게 더 호의적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p. 127)

노예제 시기에 흑인 여성을 강간할 수 있는 자격의 근간이 노예 소유주의 경제 권력이었듯, 자본주의사회의 계급 구조 역시 강간을 장려하는 장치를 내장하고 있다. (p. 302)

여성에 대한 전반적인 억압이 자본주의에 없어서는 안 되는 버팀목으로 남는 한, 성차별주의의 폭력적인 얼굴인 강간의 위협은 꾸준히 존재할 것이다. 강간 반대 운동, 그리고 이 운동의 주요 활동들은 독점자본주의의 궁극적 혁파를 염두에 둔 전략적 맥락 안에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p. 304)

오늘날의 흑인 여성들에게, 그리고 모든 노동계급 자매들에게, 가사노동과 육아의 부담이 자신의 어깨에서 사회로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여성해방의 급진적 비밀 중 하나를 담고 있다. 육아와 식사 준비는 사회화되어야 하고 가사노동은 산업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서비스는 노동계급이 충분히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p. 343)

흑인노예는 기본적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였고 당시 사회사상 중에서 남녀 평등을 포함한 논리는 공산주의가 유일했다. 그러니 저자가 흑인여성운동가로서 마르크시즘에 경도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40여년이 흘렀다. 저자와 같은 사회주의자적인 시각은 여러 면에서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시각은 의미있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내가 선 자리, 로컬에 맞는 지속적인 재해석과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다시 저자의 페미니즘론으로 돌아가서 노예제 폐지와 참정권 획득을 이루고 나서도 여전히 문제화되고 있는 '강간'에 대해 살펴보면,

현대 강간 반대 운동의 초기 단계에서는 강간 피해자로서의 흑인 여성을 둘러싼 이런 특수한 환경을 진지하게 분석한 페미니스트 이론가가 거의 없었다. 백인 남성에 의해 시스템 차원에서 학대와 멸시를 당하던 흑인 여성들과, 강간 기소라는 인종주의적 조작 때문에 불구가 되고 목숨을 잃는 흑인 남성들을 묶고 있는 역사적인 ㅐ듭은 이제 막 의미 있는 수준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상태였다. 흑인 여성들이 강간에 저항할 때면 그것이 흑인 남성을 상대로 강간 기소를 날조하기 위한 치명적인 인종주의적 무기로 사용될 위험이 거의 동시에 제기된다. (p. 267)

저자는 '흑인 강간범 이라는 해묵은 신화(p. 278)' 가 꾸준히 이용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노예제 폐지 이후 인종주의가 그 꼴을 갖추는 데에 가상의 흑인 강간범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흑인 남성을 가장 빈번한 성폭행범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무책임한 주장이다. 나쁘게 말하면 이는 흑인 전체에 대한 공격이다. (p. 291)' 흑인여성들로서는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혼란한 때일수록 기준과 명분은 명확히 세워야 했고 저자는 이러한 점들을 분명하게 분석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 '해묵은 신화'가 미국 사회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투영되고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해진다.

출산통제의 진보적인 잠재력은 여전히 반박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운동의 역사적 기록을 보면 인종주의와 계급착취에 대한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다. (p. 306) 임신중지와 영아살해는 생물학적 출산 과정이 아니라 노예제라는 억압적인 조건이 동기로 작용하는, 극한의 상황이 빚어낸 행동이다. 당연히 이런 여성 대부분은 누군가가 자신의 임신중지를 자유를 향한 디딤돌이라고 추켜세운다면 있는 힘껏 분통을 터뜨릴 것이다. (p. 309) '자발적인 모성' 슬로건에는 진정으로 진보적인 새로운 여성상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비전은 중간계급과 부르주아 여성들이 누리는 생활양식에 견고하게 묶여 있었다. (p. 313)

두 입장차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생학으로 변질된 출산제한이었다. '나치가 전체 통치 기간 동안 시행한 불임수술의 건수가 미국 정부가 단 한 해 동안 자금을 지원한 불임수술 건수와 거의 똑같을 수도 있다는 게 진짜로 가능하단 말인가? (p. 326)' 가능했다. 그렇다면 그 대상이 누구였을까?!

'노동 속에서 노예 여성은 노예 남성들과 동등했다. 이들은 일터에서 지독한 성평등에 시달렸기 때문에 노예 거주 지역에 있는 집 안에서 '가정주부'인 백인 자매들보다 더 큰 성평등을 누렸다. (p. 341)' 저자가 말하는 '지독한 성평등' 이라는 표현을 보며 '평등'의 의미가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평등이 일반적인 남녀평등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저 문장에서 느껴지는 듯 했다.

저자는 '독점자본주의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시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p. 359)' 라고 최종적인 전략을 제시하며 책을 마무리하지만 이 전략은 우리 시대에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페미니즘에서 새롭게 제시해야 할 전략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봐야할 중요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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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어진 리더들의 전쟁사 - 고민하는 리더를 위한
존 M. 제닝스 외 지음, 곽지원 옮김 / 레드리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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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받기는 어렵지만 욕먹기는 쉽다

당신은 어떤 리더가 되고, 어떤 리더를 따를 것인가

'고민하는 리더를 위한 삐뚤어진 리더들의 전쟁사' 라는 이 책의 원제는 'The Worst Military Leaders in History' 이다.

장교를 가르치는 사관학교에선 당연히 역사속 군장교들에 대해 가르칠 것이다. 미국의 사관학교도 그렇다. 하지만 저자는 수업에서 가르치는 성공 사례 외에 실패 사례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역사상 최악의 군사 지도자'라는 주제로 쓴 글을 모았다.

'고대 아테네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전쟁사학자들이 뽑은 최악의 리더 top15' 라고 표지에 써있듯이, 전쟁사 라기 보다는 개별 인물사에 가까운 글들이라 시대를 아우르는 역사는 아니고, 또한 미국사관학교에서의 수업을 바탕으로 해서 그런지 미국내 전쟁에서 활약한 장군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미국의 역사가 짧은 편이다보니 전쟁사도 짧기 때문에 대부분 근대 전쟁에서의 미국 장군들이 많이 등장하는 만큼 모르는 인물들이 많았다. 미국사람이 우리의 강감찬 장군이나 이순신 장군을 모르듯이 우리도 그네들의 남북전쟁이나 양차대전에서의 장군들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달까.

학문으로서의 전쟁사가 리더십에 비판적인 평가를 요구하는 만큼, 해당 분야 연구자들이 누가 잘한 지휘관인지 못한 지휘관인지를 따지기 위한 강력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략)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인물 중에는 잘 앙려진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이 모든 글을 관통하는 요소는 등장하는 모든 리더가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단점이 바로 그들의 유산이 되었다. 그 비판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p. 12) 이 책은 편집자들의 요청으로 여러 출처들을 참고해서 '왜 그들이 역사상 최악의 리더인가?' 라는 질문에 논거를 제시했다. 편집자들이 글을 모아 한 권으로 펴냈지만, 사실은 무능한 리더십을 주제로 한 매우 주관적인 평가를 모은 셈이다. (중략) 이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나쁜 지휘관들의 특징을 논의하는 것이다. (중략) 아무리 불편해도, 비판을 외면하는 것은 전쟁터에서의 리더십 연구가 절반짜리 진실만 쫓아다니게 한다. (p. 33) -서론 中-

길고도 상세한 '서론'에서 저자는 이 책의 의도와 인물들에 대해 개략적으로 책의 내용을 요약해준다. 전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중에는 통사가 아닌 개별 인물 한 명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기에 각자 뽑은 최악의 리더는 다종다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모인 15명의 최악의 장군들을 범죄자, 사기꾼, 멍청이, 정치꾼, 덜렁이 라는 5종류로 구분하고 있지만 사실 이 별칭들이 꼭 들어맞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한 가지 공통점으로 그냥 다 나쁜 놈들 이라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나쁜 놈들은 전쟁에서 나쁜 리더일 수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그러니 최악의 리더로 뽑혔을 것이고, 그래서 매번 대부분의 글의 마무리는 '역사상 최악의 지휘관이라는 칭호를 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겠다' 라는 식의 문장이 되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적백내전 당시 몽골제국을 부활시켜 러시아제국의 부활도 만들려고 했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피의 남작'이라고 불릴 만큼 잔혹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리 장군에게서 위대한 장군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원주민 학살과 인종차별주의자로 KKK단의 배후가 되기도 했던 네이선 베드퍼드 포러스트 또한 잔혹행위로 악명이 높았다. 미국내 원주민 학살의 대표적 사건 중 하나인 샌드크리크 학살의 주범인 존 M. 치빙턴 또한 무차별적 잔혹행위로 자신의 전적을 쌓으려고 했던 자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을 패전으로 몰고 간 데이비드 비티, 미국 남북 전쟁에서 무능함으로 유명세를 떨쳤다는 기드언 J. 팔로,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잘못된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안나, 1차대전때 전쟁 준비는 하지도 않고 굴하지 않는 호전성으로 패전을 거듭했다는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2차대전 당시 미 공군에서 수차례 패전했음에도 진급했던 루이스 브레러턴, 미국 남북전쟁당시 전술적으론 유능했으나 그만큼 누구보다 사상자를 많이 냈던 조지 A. 커스터 모두 개인적으론 무능했으나 정치적으론 무능하지 않은 나쁜 리더의 전형이었다.

대부분 근대 전쟁속 장군들이 많았지만 역사 속 장군들도 몇몇 등장하는데,

삼두정치의 한 명이었던 로마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 대해 '패배가 클수록 리더십이 나쁘고, 승리가 클수록 리더십이 훌륭하다. 이런 식의 해서대로라면 크라수스 또한 무능한 지휘관 반열에 올라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수일 수 있다. (p. 217)' 라고 최악의 리더이긴 한데 최악의 리더일 수밖에 없었던 여러 사정들이 있었다라는 방향성이 다른 글들과 차별적으로 읽혔다. 크라수스에 대응하듯 이어지는 장군은 고대 그리스의 니키아스 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크라수스와 짝을 맞춘 장군이 니키아스라고 하는데, '니키아스는 고대 최악의 지휘관임이 명백하다. 하지만 역사를 통틀어서도 최악의 지휘관일까? (p. 239)' 라는 질문에 비해 이어지는 내용은 최악의 리더임이 맞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예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을 때 니키아스 때문에 화가 났었는데 다시 읽어도 니키아스라는 장군은 정말이지 너무나 화를 돋우는 사람이다.

알비 십자군 전쟁때의 툴루즈 백작 레몽6세는 시대적 한계가 인물의 한계와 만났을 때 어떻게 나쁜 리더가 되는지 보여주는 듯 했는데, 러일 전쟁에서 노기 마레스케의 군사적 무능함이 일본 군인정신으로 탈바꿈된 것도 비슷한 논리구조로 보였다. 로마제국의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 에 대해서는 로마제국의 전체 맥락없이 한 개인의 리더십을 문제 삼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고,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올슬리 경에 대해서는 '체계적이고 사려 깊은 군인 (p. 340)' 이랬다가 '군사 지도자로서 한계가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p. 341)' 라는 마무리가 최악의 리더라는 주제면에서 설득력을 좀 떨어뜨리는 듯 했다. 그런데 이런 애매한 글을 마지막으로 맺음말이나 결론 혹은 후기 없이 책이 끝났다. 마무리글 없이 책을 끝낼거면, 편집의 순서상 가장 뒤의 글은 확실한 '최악의 리더'로 갈무리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인정받기는 어렵지만 욕먹기는 쉽다. 특히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역사는 늘 승전과 영웅을 노래하니 어찌보면 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처럼 실패자들을 모은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또한 정치가 복잡해져 갈수록 리더의 자질이 중요해지는 것 같다. 군장군들의 이야기지만 군통수권을 거머쥐고 있는 리더에게로 확장시켜 생각해 볼 수도 있을테니 이 책이 알려주는 최악의 리더십에 대해 이 시대의 리더와 견주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어떤 리더를 따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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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위의 세계사 - 한 장으로 압축된 인류의 역사 EBS CLASS ⓔ
김종근 지음 / EBS 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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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지리학자 김종근이 읽어주는 인류 기술의 집약체,

고지도의 세계를 만나다

일명 길치라고 불리는 나에게 학창시절 지리과목은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는 분야였다. 내가 좋아하는 역사와 접목시켜서 배웠더라면 흥미를 느꼈을 텐데, 역사에서 지도가 엄청나게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역사서에 관심을 갖게 된 최근 몇년전에서부터야 깨닫게 됐다. 역사서를 읽다보면 자주 만나게 되는 지도들은 그야말로 '한 장으로 압축된 인류의 역사' 라는 말 딱 그대로 들어맞는다. 지도 중에서도 특히 고지도에 대해 자꾸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다.

이 책에서 다루는 고지도 10장에는 지도상에 묘사된 지리 정보와 함께 지도가 제작된 당시의 상황, 그리고 지도를 작성한 목적이 생생히 담겨 있습니다. 나아가 과거 사람들의 세계관까지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는 지리와 역사가 만나는 지점이며 세계를 바라보는 철학과 당시 사람들의 일상사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지도가 작성되던 시기의 학문 및 과학의 수준이 드러나며, 지도를 작성한 회화 및 인쇄술의 발달 정도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p. 4) 세계에는 이 책에서 제가 안내하는 고지도들 외에도 수많은 중요한 고지도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제가 고지도 10장을 선택하여 설명하는 것은 이들 지도 10장만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설명을 시작으로 궁극적으로 고지도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리고자 함입니다. (p. 6) - 들어가며 中-

저자가 말하듯이 이 책에는 10장의 고지도와 그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생소할 수 있는 지도에 대해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하려는 저자의 배려는 차례에서부터 빛이 난다. 차례를 보면 각 지도의 이름과 핵심 및 간략한 개요가 쓰여져 있다. 따라서 지도가 생소한 사람도 차례를 보면 대략의 내용이 예상이 가면서 궁금증이 절로 일어난다. 아하 그래서 어떻게? 아하 그래서 왜? 하는 식으로.


목차

1장 바빌로니아의 세계지도 : 신의 눈으로 천지를 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세상에 질서와 구조를 부여하고, 바빌론을 지도 가운데에 위치시켜 그들의 수도를 세상의 중심으로 바라보았다.

2장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 : 그리스인이 본 철학적 세계

‘지구는 편평하다’는 믿음을 최초로 깨트린 사람들은 그리스인이었다. 점차 ‘우주가 구형이라면 지구도 구형일 것’이라는 주장이 그리스 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3장 헤리퍼드 마파문디: 중세 기독교의 세계관을 담다

천지창조와 예수 재림, 최후의 심판에 이르는 과정, 신적 질서와 설계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성서의 내용이 지도에 고스란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4장 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 그리스 철학과 이슬람 과학의 만남

중세 유럽의 지리학이 퇴보한 가운데, 이슬람 세계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문헌을 아랍어로 번역해 수용한다. 나아가 천문학, 지리학, 수학의 발전에 힘입어 고대에 작성된 지도를 계승·발전시킬 수 있었다.

5장 배수의 제도육체: 동양의 지도 원칙을 세우다

동양에서는 어떻게 지도를 그렸을까? 동아시아에서는 서구에서 개발한 지도 제작 기법이 들어오기 전부터 제도육체, 방격법, 평환법, 백리척 등 기하학을 바탕으로 한 거리계산법을 활용했다.

6장 메르카토르의 아틀라스: 지도학의 황금기

정치적, 종교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업 기술, 인쇄 산업의 중심지였던 네덜란드는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지도학은 황금기를 맞는다.

7장 카시니의 프랑스 지도: 지도는 어떻게 국가를 완성하는가

약 150년간 4대에 걸쳐 카시니 가문이 제작한 지도는 중앙집권적 방식의 지도이자 프랑스 시민이 국가라는 공간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든 대단한 발명품이었다.

8장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새 나라 조선의 기틀을 세우다

새로운 왕조를 연 조선은 역성혁명을 정당화하고자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막 움트기 시작한 왕조를 안정시키려는 일환으로 만들어진 지도에는 천문과 지리가 제왕의 학문임을 나타내고자 했다.

9장 김대건의 조선전도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서방에 한반도를 알린 지도들

19세기 격변의 시기, 조선 최초의 천주교 사제가 만든 조선의 지도. 김대건 신부는 무슨 목적으로 조선전도를 작성했을까? 또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는 무엇이 다를까?

10장 존 스노의 콜레라 지도: 전염병을 다스리다

마취과 의사 존 스노가 밝힌 콜레라의 진실. 모두가 콜레라의 원인을 독기라고 생각할 때 그는 오염된 물을 발병의 원인으로 꼽았다. 존 스노는 어떻게 지도를 활용해 콜레라를 막을 수 있었을까.


지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지구의 형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인식론인 까닭에 고대인들이 지구의 형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아보는 일은 중요합니다. 특히 바빌로니아의 세계지도에는 고대인들의 지구평면설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p. 16)

첫번째 지도는 문명의 시발점이기도 한 지역 바빌로니아에서 만들어진 세계지도다. 이 오래된 고대시대에 세계지도가 있었다는 것이 신기한데, 인간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을 거듭해 온 것이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바빌로니아의 세계지도의 존재가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고대 문명 발상지 네곳, 즉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 모두에서 지구편평설은 지구의 형태에 대한 최초의 모델이었습니다. (p. 23)' 눈에 보이는 세상만 지도로 그리던 때 세상은 당연히 편평해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바빌로니아 세계지도에서 바빌론을 세상의 중심으로 묘사한 것처럼 자신이 사는 지역이 곧 세상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4세기 고대그리스에서 지구가 구형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 파르메니데스는 지구를 원반 형태가 아닌 구체라고 생각한 최초의 인물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p. 50)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의 모양과 크기를 이전의 철학자들에 비해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예를들어 (중략)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했습니다. (p. 51)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학자 였던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문학과 지리학서를 집필했는데 그가 사용한 도법은 유클리드 기하학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릴 수 있었기에 당시에는 혁신적인 지도 제작법 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다양한 과학지식들은 중세 유럽에선 종교에 밀려 사실상 퇴보를 하게 된다.

헤리퍼드 마파문디가 세계기록유산에 선정된 이유는 중세에 만들어진 세계지도 가운데 유일하게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지리뿐만 아니라 역사학, 인류학, 민족학, 종교학, 신학과 관련해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어 시각적인 백과사전 역할을 함으로써 중세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p. 69)

'마파'는 식탁보, 테이블 냅킨 등을 뜻하고, '문디'는 세계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 용어는 8세기경부터 서유럽의 라틴어권 국가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중략) 르네상스 시기가 오기까지 600년 가까이 기독교 세계에서 세계를 설명하는 그림과 지도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p. 70)' 마파문디 라는 단어가 라틴어였는지 몰랐다. 어감상 느낌이 왠지 이슬람 명칭인가 했더니 라틴어 지도 였구나;;; 여하튼, 지도는 당시의 세계관을 담아낸다. 로마 시기에 만들어진 지도를 바탕으로 한 헤리퍼드 마파문디는 기독교 신앙의 교리와 믿음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지리적 지도의 역할을 강조한 지도다운 지도는 이제 유럽이 아닌 이슬람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가 우리에게 더 의미깊은 이유는 이 지도에 '신라'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세계지도에 '신라'가 등장한 김에 이제 저자는 동양의 지도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동양의 지도 라고 표현해봤자 결국은 고대중국의 지도인 셈인데, '육체론'이라는 지도 제작 원리는 놀라웠다. 서양보다 빨랐고 정확했다. 무엇보다 현실적이었다. 한반도의 지도를 포함하여 동양의 지도는 땅의 거리나 모양이나 방향등 실측자료에 최대한 가깝게 그려내고 있어 관념론적 서양지도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왠지 뿌듯했는데 유럽에서도 차츰 이런 지도가 등장한다. 대표적으로는 메르카토르의 아틀라스라고 할 수 있겠다.

메르카토르가 살았던 16세기에 작성된 일반적인 지도들은 방향, 거리, 육지의 형태, 경위도 등이 모두 부정확하다는 문제점이 있었어요. (p. 159)

메르카토르가 살았던 16세기는 바야흐로 유럽의 항해시대다. 망망대해 바다에서 도착지를 정확히 찾아가기 위해서는 해도가 절실히 필요했기에 메르카토르의 지도는 개선된 해도라고 할 수 있었다. 항해사들에겐 이 지도가 무척 유용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법으로 만들어진 지도에는 거리나 육지의 면적이 왜곡되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p. 161)' 지도는 사실 실용적인 측면이 강하다. 필요가 결과물을 유도하기 마련이니 유럽의 지도는 해도중심이었기에 더더욱 동양의 육지중심 지도와는 달랐던 것 같다. 여하튼 이 당시의 지도에서 COREA를 발견하니 반가웠다.

유럽의 육지지도가 빈약하다는 게 너무 강조되서일까? 다음 등장하는 지도는 본격 육지 지도다. 비록 프랑스에 국한된 지도이기는 해도, '카시니의 프랑스 지도'는 지도를 통해 국가의 영역을 확인한다는 것이 어떻게 국가를 완성하는지 생각하게 해주었다. 이 세계최초의 국가 기본도를 150여 년만에 완성한 사람은 나폴레옹 이었다. 국가지도 하면 우리에게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도가 있지 않은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바로 조선의 지도 말이다. 1395년에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와 1402년에 완성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모두 혼란스런 조선초기 나라의 안정과 왕권강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한반도의 지도를 떠올려보라고 했을때 조선의 지도 보다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런데 동시대 인물인 김대건 신부도 조선전도를 제작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어 신기했다. 김대건 신부의 지도에서 서울이 Seoul 이라는 로마자로 처음 표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김정호의 지도는 여전히 볼수록 놀랍다. 그리고 김정호에 대해 알아야 할 정보는 널리 알려진 '지도' 보다도 그에 얽힌 신화아닌 신화이야기 이다.

어떤 기록물에도 김정호가 죄인으로 투옥되었다거나, 김정호를 도와준 이들이 관련 죄목으로 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여러가지 설은 실제가 아니라 '신화'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즉 김정호가 전국 답사 과정을 거쳐 지도를 제작했다기보다는 신헌이라는 고위 관료의 도움으로 정부의 문서고에 보관된 많은 지도와 서적을 열람하여 지리 정보를 확보했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지도와 지리적 서적을 작성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지요. 그리고 조선 정부로부터 어떠한 핍박도 받지 않고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일제강점이 동안 조선 정부의 무능함을 부각하고 그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고자 식민 정부에서 이와 같은 '신화'를 만들었다고 여겨집니다. (p. 264)

김정호 신화는 일제가 조선을 폄하하기 위해 퍼트린 낭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김정호 신화는 역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다. 오랫동안 왜곡되어 온 정보를 수정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철썩같이 믿고 있을 때 아무리 정확한 정보를 들이대도 사람들은 여간해선 자신의 믿음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이는 이 책의 마지막 지도인 존 스노의 콜레라 지도 이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취전문의 였던 의사 존 스노는 당시 공기의 오염으로 전염된다고 알려진 콜레라가 사실 물이 원인이라는 것을 여러차례 주장하고 증명했지만 그가 죽을때까지 그의 이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비록 사후에 인정되긴 했지만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려서야 기존의 왜곡된 정보가 수정된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

지도 한장한장 읽을 때마다 그 시대를 잠시 엿보고 온 기분이었다. 지도 한 장을 세세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많은 역사들을 배울 수 있다니 역사 역사 읽기에서 지도읽기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달았다. 저자가 쉽게 설명해주는 지도이야기가 재미있다보니 다른 지도들에 대해서도 술술 풀어준 또다른 책으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책에선 기왕 양 페이지를 할애해 크게 인쇄한 지도가 가운데를 씹힌 모양이 아닌 (적절한 간격을 둔 인쇄로) 완전체 지도를 세세히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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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저벨
듀나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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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 SF월드의 정수 '링커 우주'

그곳에서 펼쳐지는 기상천외한 모험!

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은 종종 불친절하다는 말을 듣는다. 곽재식 작가는 듀나 소설을 [제저벨] 같은 걸로 시작하면 이게 뭔가 하면서 헤맬 수 있다고 친절하게 경고한 적 있다. 하지만 독자들이 과연 작가가 숨겨놓은 모든 레퍼런스들을 다 이해해야 하는 걸까? 모르면 모르는 대로 즐거운 독서가 가능하지 않을까. (p. 301)" 라고 저자는 말했지만, 곽재식 작가의 경고가 맞았다. 이 책은 무척 불친절한데... 나는 듀나 소설을 이 작품으로 시작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모르는 독서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즐거운 독서는 불가능한 사람이다. 제대로 다 알고 이해하고 넘어가야 만족스런 독서가 된다. 지식을 얻는 책이 아니라 소설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어떻게 읽었겠는가. (참고로, 이 책은 10년만의 개정판이다. 아마 10동안 계속 불친절한 책이라는 소리를 들어오지 않았을까 싶다.)

"진저는 어딨어요?"라고 묻는 녀석들은 정말 그 농담이 신선한 줄 알까?" (p. 13)

초반부터 내용이해의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프레드 에스테어라는 [스윙 타임}의 필름에서 막 뛰쳐나온 헐리우드 배우처럼 생긴 선의에게 던지는 농담을 농담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는 독자는 이책을 대체 어떻게 읽어가야 하나;;; 이게 무슨 지식정보책도 아닌데 모르는 영화 모르는 배우 이름이 나오면 일일이 찾아가며 읽어야 하나? 내가 대체 왜 소설을 읽으며 그래야 하나? 저자는 온통 헐리우드 흑백영화를 총 출동 시켜서 이 작품을 진행하고 있는데...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배우들과 영화들이 아니다.

"뒷바라지할 쿠퍼 몇 마리만 남겨놓고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목석같은 올리비에가 있는 곳에는 늘 아자니가 꼬이는 법. (중략) 하늘을 덮고 있던 우중충한 비구름에 지름이 수백미터가 넘는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을 통해 수십 마리의 아자니들이 황금 비처럼 쏟아지는 거야. 아자니들이 바닷물 속으로 뛰어드는 동안 지금까지 주변을 먼저처럼 맴돌던 100여개의 빨판 상어들은 중력장의 고리를 끊고 떨어져 나가지. (중략) 간신히 물 위에 떠 있는 빨판상어 안에선 보이는 게 별로 없지. 유리창 하나 난 건 조그많고 바닷물로 더러워져 있으니까. 그래도 그걸 통해 같이 빠진 동료 빨판상어들과 멀리서 다가오는 구조선들을 볼 수 있을 거야. (p. 12)"

올리비에, 쿠퍼, 아자니, 빨판 상어... 무엇보다 링커 라는 것에 대해 책을 다 읽어도 이것들이 대체 뭔지 알수가 없다.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서 왜 오는건지 와서 무엇을 하는 건지 하다못해 생물인지 아닌지조차 알수가 없다. 작가는 이 소설속 세계를 전혀 설명하지도 묘사하지도 않는다.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도 모르겠는데 그 세계 속 인물들이 무엇을 하건 집중이 될 리가 없다. 인물들이 하는 일은 현실세계에서의 일과 크게 다를게 없고 (사람이 하는 일이 현실이나 미래에서나 거기서 거기랄까;;;) SF라는 장르가 현실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를 배경으로 함으로써 특별하게 읽히는 건데 이 소설의 세계는 당췌 무슨 세계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우주도 세계도 제쳐놓고 인물들과 사건들을 읽다보면 이건 SF라기 보다는 현실풍자 내지는 우화처럼 읽히는 거다. (왜 우화처럼 읽히는지는 뒤에 다시 언급할 예정)

크루소 태양계는 연성계입니다. 우리가 사는 크루소 알파와 그 주변을 1만2000년 주기로 도는 적색 왜성 크루소 베타가 있지요. 거기엔 디트리히가 네 개인가 있습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소행성에 뿌리를 박고 공항 구실을 하는 올리비에들이 잔뜩 있고, 웨인과 기네스들이 메뚜기처럼 소행성 사이를 폴짝폴짝 뛰어다닌답니다. (p. 15) 문제는 아자니들이 거기 있기를 싫어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놀기 좋아하는 아가씨들은 가르보에서 내리자마자 광속의 99.999999... 퍼센트로 여기까지 휙 나라오는 겁니다. 미처 내리지 못한 운 나쁜 승객들을 끌고 말이죠. 그림이 그려집니까? 딱 <공포의 보수>라니까요! (p. 16)

디트리히도 웨인가 기네스도 가르보도 끝까지 무엇인지 설명되지 않는다. 또 옛날 헐리우드 영화 <공포의 보수>는 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제저벨은 배의 이름이다. 귀여운 곰돌이 외형의 선장과 앞서 언급한 회색인간 선의 프레드 그리고 항해사와 엔지니어 그리고 외형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요리사 아주머니. 이들은 베티 데이비스 여사(당연히 난 누군지 모른다!!!)의 초상화가 그려진 제저벨을 타고 다니며 바다에 떨어진 사람들을 구조하는 일을 하고 종종 다른 의뢰도 받곤 하는데, 이번엔 바다에 빠져있는 도서관큐브를 찾아달라는 의뢰였다. 그런데 이 큐브를 획득하자마자 제저벨에서는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로즈 셀라비라는 군함이 제저벨을 추적해온다. 로제 셀라비는 곰돌이선장이 8년간 혹독하게 일하다 탈출한 곳이었다.

"내가 돕고 있는 게 누군지는 말할 수 없어. 하지만 이게 보다 큰 그림의 일부라는 건 말해줄 수 있지. (p. 54)"

도서관 큐브와 로즈 셀라비 잠입 건은 정말 큰 그림의 일부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크루소 알파라는 행성에서의 존폐를 건 사건들이 시작된다. 사건이 점점 중요해지면서 화자도 프레드 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는 항해사로 바뀐다.

마리아 부츠는 아름다운 곳이었어. 적어도 사람들이 정착한 제1대륙은 그랬지. 거대한 바다와 혼란스러운 해류 때문에 날씨가 변덕스럽고 폭풍이 심하긴 했어도 그곳은 링커 바이러스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폭발 진화한 아름다운 생태계가 있었고, 도시를 짓고 농장을 세울 수 있는 공간도 충분했으며, 링커 기계의 관심은 주로 극지에 쏠려 있었어. 다들 이보다 이상적인 식민지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 (p. 60)

선의 프레드는 이야기하는 걸 즐겼는데 그중에서도 자신의 고향 행성 마리아 부츠d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링커 바이러스, 링커 기계, 링커 우주... 수시로 나오는 링커 라는 게 무엇인지 아무리 읽어도 알수가 없다.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여하튼, 인류의 후손에 마리아 부츠에 정착하려 했는데 올리비에들이 떠나면서 마구 파괴시키고 간 바람에 정착민들은 모든 것을 맨손으로 다시 시작해야 했다.

문제는 지식이었어. 폭풍으로 도서관과 대부분의 정보 저장 장치가 파괴되었거든. (중략) 정착민 절반은 도서관 건물 안에 들어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들을 종이에 옮겼어. (중략) 이 백과사전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어. 필수적인 과학 지식이야 비교적 쉽게 재구축할 수 있지. 하지만 인문학 지식은 어떨까? (p. 62) 인류 문화의 보고라는 예술 작품들은 어떻게 하나?(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부츠의 사람들은 최선을 다했고 종종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어. (중략) 마리아 부츠의 도서관에는 온전한 책 대신 제목과 줄거리가 적힌 목록들이 들어섰어. (중략) 이래 놨으니, 마리아 부츠 사람들이 창작욕에 달아오른 건 당연하다 하겠지. (p. 63) 언젠가부터 마리아 부츠의 사람들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어. 피부와 머리칼은 색을 잃었고 성격은 내성적이 되었으며 몽상은 늘어만 갔지. (중략) 마리아 부츠가 꿈꾸는 건 지구였어. (중략) 우리들은 제목만 남아 있는 책들을 수백번씩 다시 썼고 그림들을 다시 그렸으며 영화들을 다시 찍었어. (p. 64) 이런 시기가 지속되자, 더 이상 지구는 지구일 수가 없었어. 우리는 실제 지구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이제 별 관심이 없었어. 지구는 오로지 꿈의 재료였어. (중략) 고립기는 표준력으로 16년 전에 덜컥 끝나버렸으니 말이야. 올리비에 다섯 마리가 제3대륙에서 뭔가 근사한 일을 하려고 다시 우리 별을 찾았던 거야. (중략) 그러는 동안 그들 몸에 붙어온 밀항자들이 우리를 찾았어.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도서관 큐브를 하나 던져주었어. 거기엔 우리가 필사적으로 재현하려 했던 지구와 관련된 모든 지식들이 들어 있었어. (p. 65) 아무도 더 이상 우리만의 지구를 꿈꾸지 말라고 하지 않았지. 하지만 '진실'과 '사실'이라는 단어의 힘은 예상보다 훨씬 컸던 거야. 진짜 샬럿 브론테의 책들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우리가 쓴 수많은 [제인 에어]들은 그냥 덧없게 느껴졌어. 그중 몇 권은 심지어 원작보다 더 나았는데도 말이야. 그렇다고 우린 원작을 그냥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어. 진짜 [제인 에어]는 우리에게 너무 생생해서 오히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유령이었어. 마리아 부츠는 공황에 빠졌어. 자살률이 늘어나고 출산율은 떨어졌지. 이 혼란기가 몇십 년은 갈 것 같았어. (중략) 열세 살이 되자, 나는 마리아 부츠를 떠났어.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우주로 날아갔지. 그게 우리에겐 유일한 해결책이었던 것 같아. 몇백 년 동안 마리아 부츠를 지배해온 꿈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어. 그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건 현실 세계의 행동이었지.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어. 어쩌다가 운이 나빠 차단 상태에 빠지면 주저앉아 전에 꾸었던 꿈을 다시 꿀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p. 67)

마리아 부츠 라는 행성의 운명은 이 책속에 등장하는 세계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곳에 떨어졌다 - 기존의 지식을 잃어 재구성하면서 꿈을 꾸기 시작했다 - 꿈을 꾸면서 새로운 삶이 안정화 되었다 - 기존의 지식이 다시 돌아왔다 - 혼란과 우울에 빠졌다 - 떠나거나 계속 헛된 꿈을 꾸는 수밖에 없었다 ... 라는 순서랄까. 꿈이 현실의 촉매제가 될수도 있지만 그 꿈이 유령이나 망령이 되어버리면 현실을 파괴시킬 수도 있었다.

선장에게 섹스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우주시대 이후 더욱 막강해진 트레키들의 위세였다. 과거 지구에서 이들은 우스꽝스러운 소수였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인구수만 따진다면 교회마피아를 능가하는 당당한 문화 집단이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링커 우주는 할리우드 배우들이 라텍스 가면을 쓰고 외계인 흉내를 내는 <스타 트랙>의 우주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어느 누구도 스스로 움직이는 우주선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p. 82)

트레키 라는 단어를 사전검색하면 '스타트렉의 팬'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스타트렉을 거의 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링커 못지 않게 그저 마냥 새롭고 알수 없는 단어일 뿐이다. 여하튼 작가는 스타트렉 뿐 만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의 광팬이고 영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는 사람인것 같다. 영어를 영어로 써놓으면 나같은 영알못은 읽지도 못하겠지만 영어를 한글로 써놓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트레키 니 링커 니 할리우드 영화 제목들이니 다 영어와 미국문화를 익숙해 하는 사람은 익숙할지 몰라도 나같은 영알못에게는 외계어와 다를 게 없다. 그래서 이 책이 (과학과 상관없이) sf 인 것인지도.

여하튼, 프레드는 과거에 시드니와 약속을 한 적이 있기에 시드니가 죽은 지금 그 아들이 요청한 일을 해야만 한다. 독일군과 소련군으로 나뉘어 2차세계대전을 끊임없이 재현하고 있는 전쟁놀이터 토요일에 가야 하는데 그 토요일에서 한때 전쟁광으로 살았던 사람이 항해사였다. 제저벨 일행은 항해사의 안내를 받아야만 토요일에 가서 의뢰받은 물품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 물품은 일종의 로봇이었다.

크루소는 편견 때문에 살기 힘든 곳은 아니었다. 1미터짜리 곰인형도 2미터짜리 고양이 인간도 특별히 꿀릴 것 없이 살 수 있는 곳이니 인종차별은 무의미했다. 양성의 경계가 붕괴되고 있었으니 지배적인 성차별이랄 것도 없었다. 다양한 종류이 편견과 차별이 존재했지만 그 수명은 대부분 길어도 한 세대를 넘기지 못했다. 편견이 그 이상 유지될 수 있을 만큼 특정 무리가 오래 유지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지금은 블랙 지하드 때문에 목요일의 평판이 안 좋고, 교회 마피아 역시 그렇게 인기가 있는 무리가 아니었지만 이들 역시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생물학적 후손을 남기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이 별에서 종교는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베들레헴들은 예외였다. 베들레헴들은 단순한 정신병자들이 아니었다. (중략) 그들은 단지 평범한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 정신 구조를 갖고 있었다. 링커들의 장난에 놀아난 두뇌가 어느 단계부터 인간 두뇌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p. 113)

항해사는 2미터 고양이인간이었고 엔지니어는 베들레햄이었다. 곰인형 선장에 할리우드 배우의 얼굴을 지닌 회색인간 프레드 까지 제저벨의 구성원은 하나같이 독특하다. 마지막 구성원 요리사 아주머니에 대한 정보는 없다. 이 각양각색의 구성원들이 한 팀을 유지하고 있는 데에는 요리사 아주머니의 출중한 요리실력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말이다. 다른 책에서 저자가 링커 우주 관련 작품을 썼다면 이 요리사 아주머니 에피소드도 있을 것 같은데... 이 책에선 더이상 알수가 없다. 여하튼, 베들레햄이라는 명칭이나 그 존재성에서는 여러모로 기시감이 느껴진다. 이 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배경과 사용하는 낯선 단어들 외에는 SF라고 여길만한 것들이 별로 없다. 그냥 현실세계를 외계어로 바꿔 풍자하고 있는 우화처럼 읽히는 사건들.

토요일에서의 작전?!은 나름 성공적으로 끝나고 이제 장소는 레벤튼으로 넘어간다. 항해사의 고향이었던 섬 레벤튼, 과거 그 섬에서 잔혹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은 그저 한 미치광이가 벌인 일이 아니었다.

레벤튼 섬의 다른 사람들처럼 나는 열두 살 무렵부터 잠을 잃었다. 잠을 잃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앞으로 각성된 상태에서 스스로의 꿈을 통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외부 우주와 내부 우주가 충돌하며 발생하는 혼란 속에서 스스로를 지킬 힘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p. 155) 여전히 수정 같은 각성이 유지되는 동안 나는 의식적으로 모든 사고를 중지하고 정신에 빈 공간을 만들었다. (중략) 그곳은 온갖 종류의 꿈으로 채워졌고 그것을 현실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중략) 이것은 병이다. 외부의 물리적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생명체는 살아남지 못한다. (중략) 두 세계를 의식적으로 갈라놓을 수 있는 자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레벤튼의 아이들은 그 방법을 배워야 했다. 온전히 의지력으로 이 테스트를 통고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뇌수술이나 칩 이식, 화학 요법이 따라주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도 뇌를 망치지 않고 잠을 되찾는 아이들은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꿈과 함께 살아야 했다. 나에게 그 해결책은 전쟁이었다. (p. 156)

항해사는 레벤튼의 아이였다. 스스로의 의지로 전쟁터로 갔다. 그리고 뇌수술이나 칩 이식, 화학 요법 없이 크루소에서 살아남았고 계속 살아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베들레헴 엔지니어가 있다. 레벤튼에는 더이상 주민이 없다. 연구소에 연구원 한명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섬에 제저벨과 다른 배 하나가 도착하게 된 것이다. 레벤튼 섬이 과거와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사람 대신 나비떼가 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생태계와 환경도 그 나비떼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크루소가 링커 우주에 편입된 것이 표준력으로 2000년 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목요일의 최근 발굴을 통해 크루소에서 5만년 전에도 잠시나마 링커 진화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음이 증명되었다. 그것은 정말 링커 진화였는가? 그랬다면 무엇이 링커 네트워크의 확장을 막았는가? (p. 161)

링커 생물학에 대한 전문가들의 지식이란 뻔하다. 입증된건 별로 없고 해석을 기다리는 정보는 너무나도 많다. 오로지 올리비에와 아자니들만이 모든 걸 알고 있다. (p. 169)

서기2천년, 5만년의 인간의 역사 는 지구의 역사와 시간배경이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구의 역사 역시 밝혀진 것보다 밝혀야 할 정보들이 훨씬 많다. 무엇보다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작가뿐이다. 올리비에와 아자니가 대체 뭔지 링커 가 대체 뭔지 읽어도 알수 없는 이 정보들에 대해서 말이다. 끝까지 알려주지 않을 거면 대체 독자들은 어떻게 그 정보에 접근해야 하나? 오로지 작가만이 알고 있는 그 정보들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링커 기계들을 신처럼 생각합니다. 적어도 올리비에는요. 올리비에는 지성을 가진 모든 존재가 수렴 진화해서 모일 수밖에 없는 유일한 종착역입니다. 신이고 플라톤적인 완전체지요. 웨인, 쿠퍼, 기네스는 그 신을 돕는 천사들이고요. 우린 아직도 이 정의와 구분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합니까. 우린 아직도 링커 기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p. 181) 은하계 전체가 링커 우주는 아닐 것이고 아직 남아 있는 다윈 우주 어딘가엔 링커 우주의 습격을 이겨낼 만큼 발전한 문명도 분명 있을 겁니다. (p. 182)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링커 기계들이 우리가 그 진상에 접근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것이죠. (p. 183)

앞서 이 책이 현실풍자처럼 우화처럼 읽힌다는 언급을 했었다. '삼위일체! 대속! 말씀의 순수성! 말씀의 완성! 말씀의 전파! 창조와 종말! 유일신!" (p. 209) 그리고 정신병자 취급을 받던 베들레햄들은 뭉치고 전쟁을 벌이고 이기고 자신들의 나라를 세운 이야기 등 어떤 현실을 풍자했는지 거의 직설에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가? 또한 약탈하고 무의미한 전쟁을 하고 광신도가 넘쳐나는 사회는 굳이 sf일 필요도 없이 그냥 현실이었기에 아무리 외계어를 남발해도 우화로 읽힐뿐 sf로 다가오지 않는 사건들이었다. 게다가 플라톤적인 완전체라니... 작가는 소설의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영화지식 뿐만이 아니라 인문학적 문화적 지식을 뽐내느라 열심이다.

'인문학 지식은 어떨까? (p. 62)' '지금 베수비오 지하족 이야기를 하는 거야? (p. 69)' '그들에게 전쟁이란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폭력적인 수단이었지. 클라우제비츠가 정의한 진짜 전쟁이었던 거야. (p. 119)' '하여간 이것으로 우리의 성배 찾기는 일단 종결된 셈이지 (p. 133)' '연구 대상은 언제나 찰나의 일부이며 엠마 보바리나 플로리아 토스카처럼 짧은 시간 동안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다. (p. 160)' '세뇌 벌레(종교적 믿음을 숙주에게 강요하는 화학물질) p. 170) - '말씀'에 복종하고 있었습니다. (p. 172)' '자코메티들을 제외한다면 말이죠. (p. 201)' '당신들은 이 섬 안에서 데카당스한 사치를 누리는 귀족처럼 (p. 203)' 엘리너 파웰에 대한 에세이와 고대 로마 제국의 화장실 문화에 대한 농담 (p. 227)' '오메가라는 명칭은 테야르 드 샤르댕이 썼던 의미와는 달랐어. (p. 240)' '울릭세스 (p. 269)' '2245년,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연합제국이 쏘아 올린 마리아 테레지아 라는 우주선 (p. 258)'

역사와 문학과 문화에서 차용한 저 단어들을 포함한 문장들을 굳이 이 SF소설에 갖다 쓴 이유가 무엇일까? 꼭 그 단어를 그 역사를 빗대어 표현하지 않았어도 될 때 굳이 저 지식적 용어들을 쓴 것이 작가의 자랑질 말고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베수비오 지하족이 역사속 어느 집단을 의미하는지 클라우제비츠가 정의한 전쟁이 뭔지 성배와 말씀의 의미와 엠바 보바리나 플로리아 토스카가 누군지 등등등 작가가 굳이 자랑질한 저 지식적 용어들을 읽고 뭔지 알았음에도 이해의 기쁨보다는 오만의 불쾌함이 느껴지는 건 나만 그런것일수도 있지만, 굳이 저 인문학적 역사적 문학적 단어들을 들춰내지 않았어도 소설의 서사진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을 알기에 당췌 작가의 표현들에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sf와 멀어져가는 이 느낌....

(작가의 아는 척은 그냥 '연작소설'이라고 하면 다 알 것을 픽스업이라는 용어를 쓰며 구구절절 어렵게 쓴 '작가의 말'에서 다시한번 느껴진다. 끝까지 정말이지...에혀...)

내가 지금까지 눈으로 보았다고 믿었던 건 모두 '내 눈앞에 여러 명의 유령이 서 있다'와 같은 문장에 불과했어. 문장은 거기 유령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긴 하지만 아무리 형용사들을 많이 깔아도 그 유령이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보여주지는 못하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 나는 유령들에게 손을 흔들어대며 껑충껑충 뛰면서 노래를 불렀어. '우리는 마법사를 만나러 가네. 놀라운 오즈의 마법사를!' 그 순간 빛이 들어왔어. (p. 252)

'마리아 부츠 사람들이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게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제인 에어] 이고 다른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이라고. (p. 129)'

마찬가지로 저자가 확실히 좋아하는 건 [제인 에어]와 디킨스

눈으로 읽은 문장이 물체감은 없듯이 문장이 존재를 증명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저자의 세계관은 소설 속에서 증명되지 않고

'지금까지 지구인들은 그들이 저지르는 수많은 바보짓을 신비주의로 포장해 그럴듯하게 해석해왔던 게 아닐까. (p. 290)'

처럼 sf인지 아닌지 헤깔리는 세계를 sf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해 놓고 그럴듯하게 해석해 왔던 게 아닐까.

하지만

'앞으로 인간과 링커 기계 사잉서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떤 이야기를 만들게 될지 누가 알랴. 수많은 가능성을 담은 새로운 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p. 291)'

라는 마무리처럼 저자의 작품엔 수많은 가능성이 있을 테지...

나는 내 인생에서 허구의 재료가 될 만큼 재미있는 순간을 단 하나도 골라낼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보고 읽은 것에 대한 기억은 꽤 갖고 있다. 이들은 내 인생 대신 내가 쓰는 이야기의 재료가 된다. 이들 대부분은 번역서들이거나 자막이거나 더빙을 입힌 외국영화들이다. (중략) 아직도 나는 한국소설을 읽을 때 종종 낯선 사람의 나체를 보는 것과 같은 난처함을 느낀다. (p. 296) <제저벨>에 대한 내 알리바이는 내가 그리는 이 세계가 객관적인 우주가 아니라, 내 어린 시절 문화 경험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은 번역서들이거나 자막이나 더빙을 입힌 외국 영화들이다. 나에게 번역체의 문장을 통과한 이국의 환경은 가장 자연스러운 공간이었고... 여기서부터 이 글은 무한 순환한다. (p. 298)

저자의 소설은 sf소설이다. 하지만 sf 라고 해서 작가의 경험이 전혀 안 들어간다고 할 수는 없다. 내가 김초엽 작가나 천선란 작가의 sf를 좋아하는 것은 sf 소설작품에도 그들의 인생을 그들의 경험을 녹여놓기 때문이다. 하지만 듀나 작가의 소설에선 그런게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가 말했듯이 자신의 경험이 아닌 자신이 본 책과 영화들을 재료로 써서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작가의 어린 시절 문화 경험은 모두 외국작품 외국영화였나 보다. 그리고 작가가 여전히 한국 소설을 낯설게 느껴서인지 작가의 소설은 한국sf로 읽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외국sf로 읽히지도 않는다. 그저 낯설고 난처할 뿐이다.

검색을 해보니 1990년대 PC통신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듀나라는 필명으로 꾸준히 활동중인 '얼굴없는 작가' 다. 신상정보를 전혀 공개하지 않고 활동하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30여년을 그렇게 활동해왔다니 기묘하면서도 대단하다 싶다. 전부터 듀나 작가의 작품이 궁금했다. 한국SF 소설에 대한 평을 할때 빠지지 않는 작가였고 늘 분석되는 작품을 쓰고 있는 작가로 보여서였다. 하지만 내가 접한 듀나 작가의 작품은 생각보다 너무 마이너 했다. 아니 마니아 적이라고 해야 하나. 마블 시리즈 영화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마블 시리즈 영화는 한편 한편 그냥 봐도 재미있지만 마블 세계관을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 하지만 듀나의 SF 세계는 마블시리즈 처럼 대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듀나의 팬들이라면 그래서 이미 전작들을 통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면 재밌게 점점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겐 그저 여기저기서 짜깁기하고 모방에 모방을 거듭한 혼합물로 혼란스럽게 읽혔을 뿐이다.

마리아 부츠 선생의 서가와 마찬가지로 이 책은 내가 읽지 않은 책과 영화에 대한 모방으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제저벨이라는 배의 이름이나 몇몇 설정은 마커스 굿리치의 [딜라일라]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나는 제임스 미치너의 [작가는 왜 쓰는가]에 나오는 소개글을 읽었을 뿐, 이 책을 읽은 적이 없고 읽을 생각도 없다. (p. 300) 단지 부츠 선생과는 달리 나는 읽은 책과 영화도 꽤 있는 편이라, 그것들 역시 크루소 행성을 이루는 재료가 됐다. 그 상당수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나온 RKO사 제작 흑백 영화들이다. 우리나라엔 이 영화들의 팬이 별로 없는 편이라, 이 책은 종종 불친절하다는 말을 듣는다. 곽재식 작가는 듀나 소설을 <제저벨>같은 걸로 시작하면 이게 뭔가 하면서 헤멜 수 있다고 친절하게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독자들이 과연 작가가 숨겨놓은 모든 레퍼런스들을 다 이해해야 하는 걸까? 모르면 모르는 대로 즐거운 독서가 가능하지 않을까. (p. 301)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저벨>은 서구인과 서구세계를 흉내 내는 비서구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중략) 가짜 유럽 국가가 무대인 로맨스 판타지와 서양 배경의 뮤지컬이 한국에서 인기를 끄닌 지금, 이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여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p. 302)

'나는 한국적 SF에 대한 의무감은 없지만, 한국인이 아닌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늘 조금씩 민망함을 느낀다. (p. 298)' 면서 '가짜 유럽 국가가 무대인 로맨스판타지와 서양배경의 뮤지컬이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지금 이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여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라는 마무리는 내로남불 혹은 어불성설 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지. '한국어롤 쓰는 한국 사람들만이 모인 우주선이 안드로메다 은하계로 날아가는 미래는 상상하지 못하겠다. 아마 그런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다. (p. 298)' 라는 저자의 말을 보며 나는 왜 평소 갖고 있지도 않던 국뽕감이 차오르는 것일까. 듀나 작가가 한국적 SF에 대한 의무감도 갖고 민망없이 한국 캐릭터가 등장하는 아니 아예 주인공으로 하는 SF도 썼으면 어떨까 싶다.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아니 그게 왜 오지 않을 미래라고 단정하는지. 아니 듀나 작가가 그런 작품을 쓰지 않아도 된다. 이미 그런 한국적 SF 잘쓰는 작가들 많다. 또한 작가는 자신의 외국어 실력과 인문학적 지식을 다시 뽐낼때 알아둬야 할게 있다. 지금 이 시대는 작가가 PC통신 하던 그 시절과 같지 않다고, 지금 정보와 책이 넘쳐나는 이 시대는 그런 외국어 실력과 인문학적 지식을 알고도 잘난척 뽐내지 않는 사람들도 많으니 독자가 알아챌게 뭐람 하면서 무시하다간 나중에 큰코 다칠 거라고. (ps. 가장 최첨단 소설인 SF를 쓴다는 작가가 이런 구시대적 꼰대 마인드를 작품 곳곳에서 드러내다니 거참 당혹스럽기가 참...)

듀나 세계로 오는 자,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려라.

여하튼, <제저벨>은 듀나 작가의 작품에 열광하는 독자라면 또다시 열광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듀나 작가의 작품에 접한 적 없다면 곽재식 작가의 친절한 조언을 명심하길 바란다.

ps. Jegebel 을 구글번역기에 입력하니 노르웨이어로 '사랑해요' 라는 뜻이라고 나오는데... 아무래도 이 뜻으로 사용한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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