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히브리스 - 인류, 그 거침없고 오만한 존재의 짧은 역사
요하네스 크라우제.토마스 트라페 지음, 강영옥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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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파괴적 욕망으로 질주하는 오만한 유전자, 인류에게 미래는 있는가?

한 권으로 살펴보는 인류 진화의 천만년사

이 책의 부제는 [인류, 그 거침없고 오만한 존재의 짧은 역사] 이다. 수천년 수만년에 이르는 인간의 역사를 두고 '짧은 역사' 라니 이상한가? 하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구의 역사에 비해 인간의 역사는 정말이지 아주 짧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46억살이라는 지구의 역사에 견줘보면 고작 몇만년 정도의 인류의 역사는 거의 찰나의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찰나의 존재인 인류가 더할나위 없이 오만해졌다. 휘브리스는 고대그리스어에서 '오만함'을 의미한다. 저자는 오만해진 인간을 '호모 히브리스'라 칭하며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


이 책은 끝없이 승승장구해온 인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몰락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은 숱한 우연의 상호작용을 통해 파괴적인 속도로 진화의 정점을 향해 내달리고, 궁극적으로는 지구의 오지까지 정복해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아주 특별한 동물 종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이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끝에 단 한 번뿐인 성공 가도에 진입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수많은 진화 경로는 인간의 계통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침팬지와 보노보로 분화된 이후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그중 하나는 이미 우리 앞에 있다. 이 책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 최초의 인간을 다루고 있다. (p. 12) 이후 이들에게 최대의 적은 가장 위험한 동반자이자 효과적인 무기가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역사의 흐름에 거듭 영향을 끼쳐왔던 치명적인 병원체였다. 21세기에 인간이 이 재앙을 극복했다는 확신을 얻을 때까지, 더 많은 것들을 깨달을 때까지 말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어떤 것도 주어진 대로 취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다. (p. 13) 지금 우리는 정상에 있지만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 무엇이 우리를 정상까지 인도했을까? 문명 창조의 주인공이 다른 유인원이 아니고 우리 인간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시작부터 특별했던 고고유전학 연구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p. 14) -서문 中-

독일의 고인류 DNA연구자 와 독일의 저널리스트가 공동으로 쓴 이 책은 앞서 이 둘이 펴낸 책 <호모 에렉투스의 유전자 여행>과도 닿아 있다. <호모 에렉투스의 여행>이란 책을 읽으며 고인류학을 통해 '난민'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신선하고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었더랬다. 그후 코로나팬데믹 시대를 거치며 이번엔 '호모 히브리스'라는 메세지로 책을 낸 것이다. 전작과 비슷하게 내용은 과학으로 가득하지만 핵심은 사회적으로 심플하다.

현생인류는 최소 5000년 동안 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과 함께 살다가, 현생 인류가 유럽 대륙을 차지한 것이다. (p. 50)

네안데르탈인에게는 시신을 눕히거나, 앉히거나, 함께 매장된 다른 사람 쪽을 향하게 하는 등 특정한 방식으로 시신을 매장한 무덤이 없지만, 크로마뇽인에게는 많다. 오늘날 고고유전학자와 고고학자가 연구하고 있는 네안데르탈인의 뼈는 대부분 뼈의 주인이 죽은 후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가 하이에나와 같은 청소부 동물들에게 뜯어 먹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발굴물이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주변 사람들을 매장함으로써 모면하려고 했던 광경이었다. (p. 60)

현생인류는 지금으로부터 4만 년 전에 세계를 정복하고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p. 62)

'인간은 아프리카에서 처음 직립보행을 배우고, 고성능 뇌를 개발하고, 문화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몇 년 전까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생각했던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거대한 대륙 전체에 흩어져 나타났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종의 용광로에서 다양한 인간의 계통이 혼합되어,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된 아프리카인으로 통합되었다. (p. 66)' 고유전학 관련 책을 읽을 때마다 놀라운 것이 내가 배웠던 과학지식이 잘못 증명된 지식이었었다는 점이다. 수십년 사이에 새로이 밝혀진 사실들이 너무나 많았다. 인류의 발달 관련해서 가장 널리 잘못 알려진 상식이 아마도 직립보행과 연결지은 한 그림일 것 같다. 인류는 단순하게 직선적으로 계단식으로 진화해오지 않았다. 인간의 계통도는 아주 다양한 가지를 갖는 복잡하고도 동시적인 공존의 시대를 알려준다. 진화의 상식적인 그림은 바뀌어야 한다.


약 200만 년 전에 드디어 호모 에렉투스가 나타났다. 그들의 등장은 인간을 처음 유라시아로 이끈 진화적 도약이었다. 이들의 직계 조상은 일반적으로 직립보행을 하지 않았던 반면, 호모 에렉투스는 두 다리로 멀리까지 갈 수 있었다. 식단의 대부분이 고기나 짐승의 사체였기 때문에 호모 에렉투스가 뛰어난 사냥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할 필요가 없다. 두 다리로 걷는 것만큼 효율적인 보행법은 없었고, 호모 에렉투스가 장거리 달리기에 적응하도록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몰이사냥 기술을 습득했기 때문이다. (p. 84) 오랜 시간이 흐르고 이들의 시대도 저물었다. 유라시아에는 현생인류처럼 아프리카의 호모 에렉투스의 계통에서 분화된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만 남았다. 이 시기에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현생인류, '이성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의 존재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몰랐다. (p. 85)

인간을 인간이게 한 것으로 '뇌'의 발달이니 '바늘'을 비롯한 도구의 사용이니 '언어'이니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어쩌면 '몰이사냥'기술 인 건 아닐까 싶다. 호모종이 '몰이사냥'을 시작하면서 호모종이 출몰한 지역에선 대형동물들이 멸종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호모종은 세력을 불려나갔다.

다양한 인류 종이 공존하던 시대에 왜 우리 조상들은 점점 북쪽으로 밀려났을까? 네안데르탈인들에게 남쪽 지역을 정복하겠다는 야망이 정말 없었을까? 진화의 잣대로 판단할 때 현생인류는 아주 짧은 기간에 힘들이지 않고 아프리카의 사바나에서 유라시아의 스텝 지대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반면 이 수십만 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네안데르탈인들이 자신들이 살던 곳과 다른 생활환경에 적응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p. 128) 현생인류는 더 온화한 기후와 생존 기회가 더 많았던 남쪽에서 더 많은 것을 채워 나갔다. 북쪽으로 이동해 네안데르탈인과 혼형을 했던 현생인류는 자연선택의 이점도 함께 물려받았다. (p. 130) 과거에 보장받았던 생존, 극한 환경적 조건에 대한 유전자 적응 하나만으로는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없었다. 인간의 문화가 생물학적 특성을 이긴 것이다. 현생인류가 유라시아 대륙 구석까지 진출하면서 주로 매머드 스텝 지대에 머물렀던 네안데르탈인에게 남은 선택지는 후퇴였다. (p. 131)

인류의 진화라고 해서 고고유전학적 연구만 들여다봐서는 곤란하다. 지구의 생태환경은 꾸준히 변화해 왔고 기후는 격변을 거듭해 왔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인 진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3만9000년 전에 찾아온 자연 재해는 오랜 방어전에 지친 네안데르탈인에게 결정타를 날린 사건이었다. (p. 131)' 대규모의 화산폭발은 긴 시간 광활한 지역의 기후를 변화시켰다. 환경에서 살아남고 환경을 이용하는 종이 살아남기 시작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숨 가쁜 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들은 다른 모든 동물들의 생물학적 특성을 무력화했기 때문이다. 이제 막 개발된 사냥과 살인 기술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더 이상 수많은 생물 가운데 하나가 아닌,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효율적으로 일하는 킬러로 등극했다. (p. 133)

하지만 이 때에도 호모종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단일종이었던 것은 아니다.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호모 사피엔스만 남게 된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호모종은 다양하게 공존해왔다. 하지만 '그들이 가는 곳마다 모든 거대 동물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동물권에서 절대 남획을 하지 않는 다른 인류 종들과 우리 조상들의 차이다. 매머드는 네안데르탈인과 공존하며 수십만 년 후에도 안정적인 개체 수를 꾸준히 유지했고, 네안데르탈인은 하이에나를 보며 한 번도 스스로가 먹이사슬에서 사라질 거라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 (p. 133)' 호모 사피엔스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네안데르탈인이 멸종됐고 매머드를 비롯한 대형동물들이 하나둘 멸종해갔다. 인류진화의 역사는 어쩌면 킬러본능의 발달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안데르탈인과 달리 힘든 시기를 버티기 위한 카니발리즘을 금기시했 (p. 136)'던 호모 사피엔스의 문화는 아이러니하다. 전쟁으로 수많은 목숨이 죽어나가는 걸 보면 이젠 뭐 그런 카니발리즘 금기도 사라진 것 같지만..

정글은 수렵·채집인에게 결코 좋은 장소가 아니다. 이것은 호모 에렉투스의 조상들이 우림에서 도망쳐 나와 고개를 쭉 빼고 아프리카 스텝 지대를 기웃거리며, 큰 뇌를 가진 열정적인 육식 동물이 되어야 했던 이유다. 원시림은 제아무리 민첩한 수렵인이라 해도 앞이 보이지 않는 데다 이동의 자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창·작살·활·화살로 원거리의 짐승을 찔러 죽이기에 이상적인 조건이 아니었다. 반면 원시림에서 잠재적인 먹잇감들은 몸을 숨길 기회가 많았다. 이곳에서 몰이사냥은 먹히지 않는 기술이었던 것이다. (p. 152)

호모 사피엔스는 몰이사냥 말고도 다른 기술을 익혔다. 이또한 다른 호모종이 멸종해 나갈때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였다. '수렵·채집 시대는 이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p. 179)' 농경의 시대가 열렸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했다는 초기 증거는 주로 약 1만1000년 전 아나톨리아의 괴베클리테페에서 발견되었다. (p. 185)' '아나톨리아에서 시작해 이곳에서 약 8000년 전 신석기인들이 확산되었다. (p. 190)' '이들의 세력이 팽창하면서 수렵·채집인의 어두운 피부색은 점점 이주민들의 밝은 피부색에 자리를 내주고 영원히 사라졌다. (p. 191)' 밝은 피부색은 여러 차례의 돌연변이로 인해 생겼다고 한다. 인류는 어차피 모두 다 호모사피엔종 이다. 단 하나의 유일한 종이면서 DNA로도 큰 차이가 없는 종이 단순히 피부색으로 차별을 한다는게 어찌보면 참 무식한 판단이 아닐까 싶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신석기 혁명의 특징은 우월한 농경민에게서 시작된 이주와 축출 움직임이었다. 아나톨리아인들은 이 방식으로 유럽, 근동지방, 남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유전적 특성을 형성했다. 이란의 신석기인들은 동쪽으로, 아마도 멀리는 인도까지, 그리고 아시아의 스텝지대로 전진했다. 오늘날 반투 유전자는 남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지역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농경민들은 거대한 제국의 모든 비옥한 평야로 퍼져나갔다. 빙하기 말부터 세계의 다른 지역과 고립되어 있던 아메리카의 신석기 혁명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곳의 신석기 혁명은 이주한 농경민의 우세를 암시하는 유전자 이동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살아 있는 후손들은 약 1만2000년 전 이곳에 살았던 이들과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p. 204)

유라시아에서 이주와 축출과 살상이 난무하며 횡적으로 퍼져나갈때 아메리카 대륙에선 종적으로 그런 이주와 축줄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좀저 친자연적이고 평등적이고 평화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상식은 참 변해야 할 게 많다. 여하튼 인간은 본격적으로 '욕망'을 분출하기 시작한다. 정복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식민화의 역사는 DNA에도 새겨져 있었다. 원주민 남성은 자식을 낳을 기회를 박탈당하며 사라져갔고 원주민 여성은 정복자들의 혼혈자식을 낳으면서 인류의 DNA풀은 더 줄어들기 시작한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다 다른 것 같지만 DNA적으로 봤을때 인류는 한뿌리다. 그래서 전염병에 취약한 것이다. 다른 종과의 결합으로 더이상 진화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팬데믹은 새삼스레 이것을 알려준 것이다.

지금까지 박테리아가 원인인 거의 모든 감염병은 고고유전학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엇다. 반면 바이러스는 재구성이 거의 불가능하다. 유전물질이 DNA가 아닌, 그보다 훨씬 불안정한 RNA 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p. 280) 현재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에피데믹과 팬데믹의 정점에 대해서만 확실히 알고 있다. 전염병은 덥고 습한 지역에서 많이 발생한다. 이런 곳은 병원체들이 활동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지만 쉽게 분해되기 때문에 고고유전학자들이 흔적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p. 281)

인류를 속절없이 무너뜨린 자연의 위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무지하게도 인간은 죽음을 가져오는 질병과 유행병들을 자신들이 창조하고 상상한 존재들, 즉 신의 형벌로 이해했다. 인간은 죽은 자를 매장하고 저세상으로 부장품을 보내는 인류 최초의 문화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깨달음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했다. 인간도 자연 순환의 일부이자, 환경의 혜택에 의존하는 동물 중 하나이며, 최악의 경우 보이지 않는 적들로 인해 죽을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깨달음 말이다. (p. 290)

그래서 저자는 '20세기는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히브리스로 만들었다. (p. 292)' 로 말한다. 하지만 '이제 지구의 한계가 인간의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진화의 특성으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팽창, 영원한 진보는 인간에게 더 이상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영원한 진보는 인간에게 더 이상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영리한 종이기 때문에 이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깨달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p. 292)' 코로나팬데믹으로 인류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인간의 자연적 진화는 오래전에 끝났다. 인류는 하나의 종이다. 그 하나의 종이 정말 호모 히브리스가 된다면 멸종의 길은 앞당겨질 것이다. 그러니 호모 사피엔스로서 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인간과 자연 나아가 지구와의 공존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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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사람들 - 신과 인간의 서사를 만든 첫째성경 인물 열전 EBS CLASS ⓔ
주원준 지음 / EBS BOOKS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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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고전이자 서양 예술의 원형

구약성경 속 인물과 서사에 대한 현대적 고찰

서양고전읽기를 순차적으로 하게 됐을때 수메르 신화에 대한 책들을 읽으며 새로운 역사를 배웠다. 고대그리스 나 고대이집트 이전에 수메르가 있었고 성경 이전에 신화가 있었다. 김산해님의 수메르 신화책은 정말 압권이었는데 함께 읽은 참고도서중 하나가 주원준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이었다. 학자입장에서는 중립적일수 있다쳐도 종교인의 입장에서 중립적으로 쓰려 노력한 책이 있다는게 놀라웠었고 인상적이었다. 이 드물고 귀한 관점에서의 책이 새로이 나왔다니 관심up 기대upup

요즘은 새것을 자랑한다. 시계든 구두든 오래 쓰지 않는다. 다들 흰머리를 염색하고 어려 보인다는 말에 반색한다. 그래서 '옛 약속(구약)'은 '새 약속(신약)'보다 열등하거나 심지어 대체되어야 한다는 느낌이 확산되었다. 옛 약속이 있어야 새 약속이 있는 것이고 옛 약속은 새 약속만큼 소중한 것이라는 '균형 잡힌 느낌'은 교회 안팎에서 무너져 내렸다. 구약성경이 '옛 약속의 경전'이기에 낡고 해진 약속의 책으로 다가온다면, 이 이름을 재고해야 마땅하다. (p. 5)

그래서 저자는 구약성경대신 '첫째성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렇다고 이 용어를 만든 사람이 저자인 것은 아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가톨릭 구약학계에서도 저자와 같은 생각으로 '첫째성경'이라는 용어를 제안한 학자가 있었고 일부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첫째성경은 고대근동 세계의 문학이었다. 한국의 대학과 교회에서 아직도 고대근동을 거의 가르치지 않는 사실은 무척 안타깝다. (p. 7)

우리나라에는 교회가 참 많다. 그에 비해 성당은 좀 적은 것도 같은데... 여튼 서양에서는 교회는 그냥 교회이지 성당과 교회를 구분짓지 않고 부른다. 저자가톨릭계이지만 구분없이 교회는 그냥 교회라고 부른다. 어느쪽 교회이든 간에 바탕은 성경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 말마따나 우리나라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그 배경이 된 역사를 어느정도나 공부했는지 아니 공부한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배경지식 없는채 글줄만 읽는 것이 과연 얼마나 성경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수 있는 것인지도.

EBS의 초대로 교회의 벽을 넘어 세상 사람들과 만날 기회를 얻었다. 2020년 겨울부터 방영된 EBS클래식e의 <구약의 사람들>은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이 책에는 방송에서 설명한 것 외에 다른 강연 내용도 많이 들어있다.

첫째성경이 전하는 전복의 서사는 내가 묵상하는 순교자의 영성이다. (p. 9)

이 책은 저자가 EBS방송에서 진행했던 강연을 바탕으로 관련한 다른 내용까지 첨부하여 묶은 책이다. 역사와 종교에 관심있는 사람이었다면 공부해야 했을 내용들이었으나 저자가 공부한 내용을 우리는 그저 쉽게 읽기만 하면 된다. 게다가 더 공부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 참고도서들도 여럿 알려주고 있다.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이 책의 서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전복의 서사' 라는 표현이다. 구약의 인물들을 현대적으로 해석해준 책인데 '전복'이라고?! 언뜻 어울리지 않아보일 법한 이 표현이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새삼 놀라게 된다. 구약이 이렇게 전복적이었나! 종교가 있든없든 성경을 알든모르든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인물들에 대해 새로운 해석이 펼쳐진다. 시작은 물론 아담부터다. 그리고 마지막은 욥 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이 이야기는 사실 성당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성경을 유심히 읽어보지 않았다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많다. (p. 16)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 이야기, 이 첫번째 이야기부터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니 흥미롭지 않은가?!

첫째성경의 첫머리는 철학책이나 과학책처럼 논리적으로 앞뒤가 딱 맞는 구성으로 짜여 있지 않다. 세부적인 항목에서는 충돌하는 서술도 꽤 많고 시각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등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의미의 긴장을 일으키는 곳이 많다. 논리적 비약이나 생략도 적지 않다. 이런 충돌과 생략과 비약은 성경의 약점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빈구석'이야말로 첫째성경이 지닌 가장 위대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p. 17)

성경의 빈구석은 약점도 아니고 실수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빈공간이야말로 신이 우리를 초대하는 자리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상상력과 성찰이 꽃피우기 때문이다. (p. 19)

'전복의 서사'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전복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때 가능한 것이다. 저자의 관점은 신선하고 학문적으로도 깊이가 있다. 뭐랄까... 성경을 제대로 읽은 아우라가 느껴진달까. 저자는 '신의 초대'를 기껍게 맞이했고 풍부하게 즐기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한다.

'고대근동 신화의 병행 요소'를 서로 비교하면서 연구하는 일은 흥미롭다. (중략) 이렇게 고대근동 신화와 비교해보면 창세기 이야기의 독특한 점이 드러나지 않을까? 우선 창세기 1~11장에는 다른 신화에 흔하게 등장하는 영웅, 반신적 영웅, 초인적 존재, 괴수 등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첫째성경은 전반적으로 그런 존재들에 대해 놀라우리만큼 무관심하다. 이 점이 가장 눈에 띄는 차이다. (p. 24)

사실 성경에는 그 이전에 있었던 신화들과 비슷한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다. 세상을 창조하는 이야기부터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들이 겪어내는 일들까지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거의 없다시피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저자는 과거의 신화들을 조금 변형하여 묶은 에피소드들 처럼 읽혀질 수도 있을 성경의 이야기들이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명확이 짚어낸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구약을 '전복의 서사'로 읽게 만들수 있었다.

인간은 신이 아니고 신은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조금 안심도 된다. 인간과 신이 다르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같다는 말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반신적 존재란 없다. 그래서 창세기는 보편과 평등에 대한 책이다. (p. 27)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를 증명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 오직 '지금 여기'에 관심을 둔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 조상이 노동하고 소통하며 그렇게 몸으로 부대끼며 살던 세상에는 그런 존재는 없다고 말한다. 창세기는 인간의 보편적 평등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간다. '모든 인간은 죄인의 자손이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기에 한계도 뚜렷이 같다.' 이러한 인식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끈다. (p. 28)

'인간은 신의 은총을 받아야 살 수 있다는 것 (p. 28)' 이 창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하면저 저자는 구약에 등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성 안에서 평안히 살던 사람들이 아니라 '성 밖의 가난한 백성 (p. 29)' 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첫째성경의 수많은 이야기에서 인간은 계속 도전하고 욕망하고 죄를 짓는다. 그리고 신은 인간의 죄를 꾸짖기도 타이르기도 분노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 (p. 32)

무슨 일을 하든 가난한 백성의 곁에 신이 등장하고 어쨌든 살길을 열어준다는 사실은 신을 의지하며 살았던 백성에게는 희망이자 축복이었을 것이다. (p. 33)

그렇다. '희망' 이었다. 구약에서의 약속은 '희망'이었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부터 카인과 아벨, 노아, 아브라함, 요셈, 모세, 삼손, 다윗, 유딧, 엘리야, 예레미야, 요나, 욥 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물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결국 어떤 일이 생겨도 인간이 살 수 있도록 마음을 먹게 해주는 그런 일화들이었다. '용서하는 신이 우리와 동반한다는 점은 큰 위로이고 희망이다. (p. 35)' 라는 저자의 말이 조금씩 이해가 되도록 해주는 책이었기에 종교가 없는 내가 읽어도 아무런 저항감 없이 저자의 문장이 와닿았다. 그랬구나...하면서.

창세기 원역사 이야기에는 '반복되는 구조'가 있다. 이야기의 처음은 늘 좋다. 신이 마련한 무대, 창조계 자체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발단이다. 아담과 하와가 금기의 열매를 따 먹고,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바벨탑을 쌓아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온 세상이 타락하는 등의 사건이 발생한다. 그때마다 신이 나타나서 가르침을 준다. 신의 반응은 다양하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훈계하고, 이따금 추방이나 홍수 같은 큰 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신이 용서함으로써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하느님은 한결같다. 죄인에게 다시 살길을 열어준다. 창세기의 시작은 이렇게 신의 자비와 용서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들로 빼곡히 채웠다. (p. 47)

죄의 사슬, 죄의 연쇄 작용을 끊는 것이 신의 뜻이고 용서의 본질이다. 복수는 인간적일지 모르지만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용서는 신적인 것이고 그만큼 어렵지만 훨씬 더 진보한 것이다. (p. 59)

나는 종교가 없지만 무신론자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불가지론자라고 해야하나... 신이든 무엇이든 영적인 무언가가 있다고는 생각한다. 인간과 다른 인간보다 대단한 어떤 존재가 있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아 믿지 못해 종교를 갖지 못하는 내게 일단 믿으면 다 이해된다는 그동안 만난 수없이 나를 전도하려 했던 이들의 말에선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저자의 문장은 달랐다. 쏙쏙 이해가 되고 종교가 새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내가 내일 당장 교회에 나갈 것 같진 않지만.

고대근동 문헌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고대근동의 많은 신화들을 원문으로 읽고 첫째성경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어떤 느낌이고 어떤 차이를 느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한두 가지를 꼽기는 힘들지만 히브리인들의 첫째성경이 유독 의로움을 강조한다는 점은 빼놓을 수 없다. 첫째성경과 신약성경은 의로움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의로움을 일관되게 강조하는 문헌은 찾아보기 힘들다. (p. 76)

첫째성경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는 그리스도교, 유다교, 이슬람교가 개인과 공동체의 도덕성과 정의를 중시하는 근원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의로움을 추구하는 열정은 오랫동안 유교 문화권에서 형성된 우리 민족의 심성과도 잘 통한다. (p. 81)

뭐든 원론적인 핵심이 나쁜 것이 오래 전해져올리는 없지... 원래 뜻이야 좋았겠지... 문제는 그것이 지켜졌는가 혹은 지켜지고 있는가 랄까... 그 '의로움'은 다 어디로 갔을까;;; 혹시 성경을 저자처럼 제대로 깊이있게 읽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게 아닐까...;;;

고대근동의 수많은 신들 가운데 성 밖의 작은 신이었던 야훼만이 현대로 전승되었고 다른 신들은 모두 잊혔다. 사실 고대근동 문명은 거의 망각되었다. (중략) 하지만 야훼는 성 밖을 떠돌던 신들은 물론이고 고대근동 전체 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후대로 전승된 신이고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을 통해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인류 종교사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거대한 신전에 정주하며 큰 백성을 거느리던 신들은 전부 잊혔지만 변방을 떠돌던 작은 백성을 선택한 신만이 후대에 크게 확산된 것이다. 작고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고 그들과 동행한 것이 야훼와 예수의 공통점이다. 이 점은 깊이 새겨볼 만하다. (p. 103)

왕이 섬기고 제국이 모시던 거대한 신들은 모두 사멸되었다. 하지만 성 밖에서 떠돌던 한 가정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은 신은 오래도록 전승되어 남았다. 게다가 그 가정의 이야기에서 장자의 권리는 박탈되고 힘없는 사람이 신에게 선택되곤 했다. '이런 면에서 첫째성경은 '전복의 시선'을 드러낸다. 세상의 시각을 뒤집어야 신앙의 논리가 이해되는 것이다. (p. 119)' 저자의 말을 읽으면 읽을수록 묘하게 성경이 새롭게 보인다.

성경은 밖과 아래로 시선을 향하라고 말한다. 위와 중앙만을 볼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소외된 변방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전복의 시선을 권한다. (p. 141) 사회에서 주류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써내려가는 역사가 있다. 지금은 보잘것없고 초라해 보이지만 신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실 것이다. 그건 인간이 아니라 신이 허락하는 것이다. (p. 142)

성경이 신을 믿고 신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라는 말만 하는 책인줄 알았더니 이토록 진보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었단 말인가.

'우리는 흔히 성경에서 전하고 있는 메시지를 신에게 의존하고 순종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이것이 종교가 매력을 잃어가는 원인 중 하나다. (p. 206)' 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했으면 눈길한번 주지도 않았을 텐데 저자의 문장을 읽다보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 진다. 종교가 없는 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다. 그러게... 다들 성경 좀 공부하지... 싶고.

사람들은 종교가 무슨 말을 하느냐보다 공동체와 이 사회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지를 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첫째성경에는 이런 전복적인 여성 영웅의 계보가 있다. 먼 옛날 창세기의 할머니들이 그러했고, 모세 곁에서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 미르얌도 그러했다. 예리고 성에 살았던 창녀 라합이나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혀가 왕비가 된 에스테르도 빠질 수 없다. (p. 230) 그런 독특한 방법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새롭게 만든 여성 전승의 총합이자 절정이 바로 '성모 마리아'라고 할 수 있다. (p. 232)

놀랍지 않은가? 고대엔 이스라엘 말고도 여성이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고 성경 속 여인들도 가부장의 권위에 눌리고 신의 선택에 늘 비껴나는 존재들인줄 알았는데 여성 영웅의 계보가 있고 그 절정이 '성모 마리아'라니. 이런 시각 정말 신선하다.

신선한 시각이지만 결코 저자의 주관적이라고 치부할 만한 그런 주장은 아니다. 저자의 고대근동에 대한 학문적 바탕은 책을 읽는 내내 탄탄하게 저자의 해석을 뒷받침해준다. 특히나 성경의 탄생에 있어 '일리말쿠' 에 대한 내용은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두었으면 싶은 부분이었다. 하지만 '고대근동 세계에 대한 문맹과 같은 한국 신학계의 처지가 안타깝다. (p. 248)' 라는 저자의 개탄이 비신자인 나조차 알 지경인데 누가 알겠나 그런 중요한 내용들을;;;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지닌 독특함은 저항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에 있다. (p. 289)

정권과 관련된 예언을 한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말라키서 같은 문서에 기록된 예언자들이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은 독특하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왕권을 정당화하려는 왕권 신학으로서 예언 관행이 문서로 남았다면, 이스라엘은 왕권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예언이 문서로 남았다. (p. 301)

그런데 왜 이스라엘에서는 정권에 순종한 예언자와 사제의 책은 없어지고 정권을 비판한 저항 세력의 책만 남았을까? 이스라엘에서 저항 예언자들의 기록이 살아남았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나라가 망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주류 세력이었던 왕권 신학자들의 기록이 밀려나거나 소실되었고, 그 반대편에 있던 비판자들과 저항했던 자들의 기록이 살아남을 여지가 생겼다. 게다가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p. 304) 다시말해 망국과 유배를 통해 인류사에서 거의 유일한 '기록의 역전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주류의 기록이 지워지고 비주류의 기록이 대접받게 되었다. (p. 305) 이런 면에서 첫째성경은 인류사에서 유일한 전복의 역사를 담고 있는 책이리라. (p. 307)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절묘한 역사가 일어났다. (p. 309)

저자의 말마따나 참으로 절묘한 역사였다. 성경이 탄생하고 전승되고 현대에 이토록 광범위하게 퍼진 배경이 그 '전복성'에 있었다니.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기묘하게 다가오면서도 너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wow 대단한대!

어찌보면 종교인의 삶이란 그런 예언자의 삶이다. 세상의 질서는 자본과 권력을 향해 짜여져 있다. 중심을 향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해 경쟁하는 것이 세속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종교인은 큰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세상의 어둡고 아픈 곳을 향해야 한다. 자본과 권력이 그늘을 드리운 곳, 소외된 곳, 주변부와 아래로 시선을 둬야 한다. 그런 곳에서 우리가 할 일을 숙고하고 나눠야 하는 사람들이다. 종교인들이 가치 있게 내세우는 나눔, 사랑, 자비, 정의는 결국 세상과 맞서는 일이다. (p. 324)

그런 종교인이 한 명만 내 곁에 있었더라도 나는 바로 따라갔을 텐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아무래도 죽기전까지 한 명도 못날것 같다. 단 한 명도.

욥기는 이런 면에서 종교인, 지식인, 지도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보여준다. (p. 341) 욥기를 읽으면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희생자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과정을 보는 것 같아 일종의 페이소스마저 느끼게 된다. (p. 343) 교회는 신의 무한한 은총을 베풀고 확산하는 곳으로서 '은총의 촉진자'역할을 해야 마땅하다. 공감하고 위로하고 치유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교회가 신의 사랑을 얻기 위한 통행세를 걷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특정 교파에 돈이나 서비스를 제공해야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p. 345) 세 친구는 욥에게 공감과 위로의 말을 전하려고 왔지만 평가하고 판단하려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 자신들의 목숨과도 같은 믿음이 조금이라도 훼손되는 일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신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판단과 단죄는 오로지 신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p. 346) 욥이 옳았고 세 친구는 틀렸다. 신은 그렇게 딱 도장을 찍어주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주신 하느님은 인간들에게 외면받던 의인을 보증해주었다. (p. 353)

성경의 다른 에피소드들에 비해 욥기에 대해선 잘 몰랐는데 저자의 설명을 읽고나니 이해가 된다. 성경을 읽은 적이 없는데 성경을 다 읽은 기분이랄까. ㅎㅎ

종교에 관심이 있고 성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마 새로운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참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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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반쪽사 - 과학은 어떻게 패권을 움직이고 불편한 역사를 만들었는가
제임스 포스켓 지음, 김아림 옮김 / 블랙피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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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를 전체역사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제목 그대로 반쪽짜리만 알던 진실에 대해 마저 배울 수 있어 좋았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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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반쪽사 - 과학은 어떻게 패권을 움직이고 불편한 역사를 만들었는가
제임스 포스켓 지음, 김아림 옮김 / 블랙피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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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어떻게 패권을 움직이고 불편한 역사를 만들었는가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쓴 세상에 없던 과학 세계사

예전에 학교에서 세계사를 배울 땐 유럽사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세계사가 당연한 건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이런저런 책을 읽으며 이제는 유럽사가 곧 세계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세상도 조금씩 변해와서 이제 세간의 인식 속에서도 조금씩 그런 깨달음이 꽤 많이 퍼지고 있는 것 같다. 문화도 역사도 과학도 그 기원을 전부 유럽에서 찾아왔었던 과거의 인식엔 문제가 있다고,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학문의 기원이 유럽에서만 있던 게 아니라는 것 말이다. 이 책도 그러한 종류의 책이다. 이 책은 말한다. 과학 천재는 유럽에만 있었냐고? 아니라고, 우리가 아는 과학의 역사는 반쪽짜리 였다고!

전통적으로 주장되어온 바에 따르면 근대과학의 역사는 자연도태에 의한 진화론을 발전시킨 19세기의 영국 박물학자 찰스 다윈과 특수상대성이론을 제안한 20세기 독일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같은 인물들에게만 초점을 맞춰 진행되는 이야기다. 여기에 따르면 19세기의 진화론에서 20세기의 우주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근대과학은 유럽에만 국한되어 발달한 산물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잘못되었다. 이 책에서 나는 근대과학의 기원에 대해 아주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고자 한다. 과학은 유럽만의 특별한 문화적 산물이 아니었다. (p. 13) -시작하는 글 中-

근대과학이 유럽에서 태동했다는 주장은 단순히 기원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바탕엔 착취와 왜곡의 역사가 깔려 있었고, 경제와 정치가 늘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 세계 모든 나라의 과학적 발견을 낱낱이 살피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사가 근대과학을 어떤 방식으로 형성했는지 보여줌으로써 그동안의 과학사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깨뜨리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몇 명의 천재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로 과학이 발달해 왔다는 것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유명한 천재들의 일화에 감춰진 진실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코페르니쿠스는 <알마게스트의 요약>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다. 알리 쿠시지의 결과를 인용해 레기오몬타누스는 모든 행성 궤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 다른 곳에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다른 지점'이 사실 태양이라고 주장하며 최종 단계에 들어섰다. (p. 90)

갈릴레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책도 사실은 그 이전 이슬람 학자들의 자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18세기까지의 대항해 시대에 천문학과 수학이 유럽에서만 발달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항해는 그야말로 지구상의 모든 바다를 휘젓고 다녔고 모든 교류는 상호적이지 일방적일 수 없었다. 유럽은 세계의 모든 자원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도 빨아들였다. 그들의 발견은 그들만의 발견이 아니었다는 점을 우리는 그동안 너무 쉽게 간과해왔던 것이다.

뉴턴은 잉글랜드은행을 비롯해 아시아와의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지닌 영국 동인도회사의 주식을 관리했다. 또 런던에서 왕립 조폐국장으로 일하면서 금과 은에 대한 해외 무역을 감독하며 생애 마지막 30년을 보냈다. 이렇듯 뉴턴이 금융업에 종사했다는 사실은 종종 간과되는 18세기 과학의 한 측면을 암시한다. (p. 134)

과학자로만 알려진 뉴턴은 외톨이 천재로 묘사되곤 하지만 사실 뉴턴은 돈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노예무역이 절정에 이르렀던 18세기 뉴턴의 투자는 그 핵심을 향해 있었다. 뉴턴은 순박하고 고립된 괴짜 과학자가 아니라 경제에 눈밝은 금융맨이기도 했다.

중요한 사실은 이 무역의 대부분이 자연 세계에서 가져온 상품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었다. 무역 회사는 그들이 취급하고 있는 상품을 분류하고 평가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사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p. 184)

린네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은 각 나라에서 특별히 유용한 것을 생산하도록 배열되어 있으며 경제학의 과제는 다른 곳에서 재배하려 하지 않는 작물을 경작하고 모으는 것이다" 린네는 이것이야말로 자연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단지 전 세계 동식물 목록을 만드는 데 지나지 않고 유럽에 유리한 방식으로 무역의 균형을 맞추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p. 185)

자연학의 발달이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새로운 발견으로 발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자연과학의 발달은 무역과 경제와 유럽이 벌어들일 수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전 세계 어디를 보더라도 이 시기에 발전한 자연사 지식은 제국의 무역 산업과 분리할 수 없다. (p. 194)' 어디 자연사만 그랬을까. 저자는 말한다. '근대과학의 역사를 이해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전 세계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p. 225)' 라고. 뉴턴의 발견도 린네의 분류도 모두 무역과 관련이 있었기에 과학사를 과학적 발견으로만 보는 것은 그야말로 반쪽만 아는 것이 될 것이다. 다른 시대의 과학들도 마찬가지다.

사실 다윈은 유럽에서조차 진화론을 주장한 최초의 사상가가 아니었다. (p. 235)

다른 많은 나라가 그랬듯 다윈주의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근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관념은 생물학자들뿐 아니라 정치 사상가들에게도 호소력이 있었다. 이 관념은 산업화와 군사적 확장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p. 264)

다윈이 처음 깨달은 것도 아닌 진화론이 시대의 사상으로 떠오르게 된 데에는 그 시대를 흐르는 역사적 흐름 때문이었다. 진화론은 생물학에서보다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 더 맹위를 떨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엔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심지어 과학에 있어서도 말이다. '19세기 후반에 유럽이 과학계의 중심이었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이는 앞에서 살폈다시피 제국주의의 확장으로 얻은 경제적 이득에 힘입은 결과가 대부분이었으며, 유럽 이외 지역 출신의 과학자들도 일정 부분 공헌을 했다. (p. 282)' 그런데 우리는 몇몇의 천재들에 가려진 다수의 공헌과 노력에 너무 무심해 왔다. 무엇보다 그 시대의 역사와 너무 떨어뜨려 생각해왔다. 하지만 과학은 시대의 정치경제와 너무나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던 것이다.

19세기 물리학과 화학의 역사는 고립된 유럽 출신 개척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민족주의, 전쟁, 산업의 전 세계적인 흐름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 (p. 286)

파시스트,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참정권 운동가, 반식민지 운동가는 모두 1900년 이후 수십 년 동안 정치를 변화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그리고 정치는 과학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p. 345)

20세기의 물리학과 국제정치의 연관성도 앞선 시대에서 과학과 정치경제와의 관계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인슈타인도 물리학만 연구하고 있던 학자는 아니었고.

과학에 한 획을 그었다면 그었다고 할 수 있을 코페르니쿠스, 뉴턴, 린네, 다윈, 아인슈타인등 그들의 과학적 업적은 유명해도 그들이 살던 시대와 역사를 연결지어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왜일까? 의도적으로 역사와 떼어놓고 생각하게끔 우리를 만들었던게 아닐까? 그렇다면 누가 왜 그랬을까?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유산을 단순히 무시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살펴야 한다. 과학의 미래는 결국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발전했던 과거에 대한 더 나은 이해에 달려 있다. (p. 472)'는 저자의 마지막 당부를 유념해야 할 것이다. 반쪽만 아는 것은 결코 전체를 다 안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라도 반쪽짜리 과학사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책이 그 시작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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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없는 세계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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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더없이 악독해질 때마다 거짓말처럼 '경우'가 있었다

누구나 한번쯤은 지독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우리에게 바치는 편지

<유원>이라는 작품을 통해 백온유 작가를 알았다. 청소년문학의 새로운 샛별 백온유 작가의 등단작은 앞으로의 활동이 궁금해지게 만드는 확실한 눈도장을 찍은 작품이었다. 그러니 이번에 새로 출간된 신작, <경우 없는 세계>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미리 스포?를 살짝 하자면 이번 작품도 상처를 가진 청소년 시절의 이야기이다.

정말 이번 겨울은 포근한가. 하기야 이번 겨울에는 수돗물이 얼까봐 싱크대와 세면대 물을 조금씩 틀어놓고 출근한 적이 없었다. 지난주에 눈이 오긴 했지만 옥탑에 쌓이지도 않았고, 모두가 따뜻하다고 하니 그런 거겠지. 그렇다면 내 살갗을 에는 듯한 이 한파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언제 긑나는 걸까. (p. 7)

인수는 서른을 넘긴 어른나이이고 착실하게 공장에 다니며 성실한 삶에 노력중인 청년이다. 하지만 인수에게는 남모르는 고통이 있었다. 사시사철 파고드는 추위, 겨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여름에도 곧잘 시퍼렇게 입술이 질릴 정도로 몸이 차갑게 얼어붙곤 했다. 히터를 틀고 전기장판을 켜고 온수에 몸을 녹이려해봐도 잦아들지 않는 추위...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집을 나와 가출팸을 떠돌던 열일곱 그때 그 일이 있고 난 후...

"일단 전화를... 보험사에, 아니면 병원부터 가는 게 나을지... 부모님을 불러야 될 텐데"

"아니요, 안 하셔도 된다고요"

나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귓속말로 말했다.

"저번에도 이랬잖아. 지금 신고할까, 아니면 그냥 조용히 따라올래"

그제야 눈치를 챈 운전자가 아이를 아래위로 훑은 후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노발대발했다.

"일부러 그런 거니? 설마 자해공갈 뭐 그런 거야?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사기를 치려고 해, 감히? 그냥 이렇게는 못 넘어가지" (p. 16)

여느날 처럼 옥탑방에서 나와 햇살에 몸을 쬐이던 어느날 이었다. 인수는 무심히 골목길을 보다가 한 아이의 행동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후 같은 행동을 하려는 아이 앞을 자신도 모르게 막아서게 된다.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면서까지 운전자를 달래고 양해를 구한뒤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렇게 열일곱 이호를 만났다.

사람 속이는게 쉬운 줄 알아? 특히 나 같은 애는 웬만해서는 안 믿어주거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 상대방이 납득할 만큼 내가 아파줘야겠지? 그쪽에서 의심할 수도 없고 반박할 수도 없게 내가 망가져야 되는 거야. 제대로 부러지고 제대로 찢기면 사람들은 '내가 사고를 냈구나' 겁먹고 내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거든. 그래서 솔직히 나는 죄책감 같은 거 별로 안 들어. 나는 사람 속이려고 아픈 척 연기하지 않거든. 그 순간에 나는 진짜로 아파. 존나 아파서 죽을 것 같아. (p. 25)

이호를 보며 인수는 열일곱때 만났던 A를 떠올렸다. 그때 그시절 자신의 모습도...

'제대로 부러지고 제대로 찢기면' 사람들은 미안해한다. 하지만 얼마나 부러지고 찢겨야 제대로 다친 것일까? 인수도 아픈 척 연기한 적 없이 진짜로 아팠는데 인수의 부모는 인수의 고통을 알지 못했다. 끝까지... 사고를 낸 사람들이 항상 미안해하는 건 아니었다. 뺑소니도 있었고 적반하장도 있었다...

인수는 이호에게 아무때나 편히 와서 자신의 옥탑방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잘곳이 없어 헤매는 거리의 아이들 상황을 인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가출을 하고서도 내가 한 게 가출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그저 아버지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 자리를 피하는 것,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깃든 경멸과 혐오를 참지 못해서 잠시 24시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불과했다. 가출이라는 단어에는 투쟁심이나 반항심 같은, 결연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것은 회피나 은신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p. 32)

인수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사업가였고 그런 자신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인수의 어머니에게 수시로 주먹을 휘둘렀고 인수의 아둔함에 화를 냈다. 인수의 어머니는 남편의 폭력을 묵묵히 견녀냈고 남편이 기분좋을 땐 사이좋은 부부처럼 지냈으며 인수가 그저 좀 느린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에겐 너무나 쉽게 하던 용서를 인수에겐 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겐 공포와 분노를 어머니에겐 서운함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며 인수는 코앞에 있는 집임에도 점점 더 들어갈 수 없게 되어갔다.

무료급식소에서 경우를 만났을 때, 경우는 중학생 남자아이 두 명과 함께였다. 나는 사실 경우가 자원봉사자인 줄 알았다. (p. 61)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조금 어려 보이는 아이들에게 반찬을 덜어주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한 건 경우에게서 배어 나오는 친절함과 여유가 부러워서였다. 경우는 거의 마지막 차례에 배식을 받았다. (p. 62)

문득 깨달은 것은 경우와 다니는 동안은 사람들이 나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성연과 함께 다닐 때 받는 대우와는 사뭇 달랐다. (p. 93)

인수는 조용하고 말귀가 어둡고 이해력이 떨어져서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이었기에 선생님들은 인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곤 했고 친구들은 인수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곤 했다. 왕따를 당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친구가 있던 적도 없었다. 가출을 한 후 알게 된 성연을 따라다니며 인수는 성연의 활발하고 당차며 거침없는 성격이 부러웠다. 하지만 성연을 따라하려던 인수의 '노력과 상관없이 아이들은 금방 나를 파악했다. 학교를 다닐 때처럼 투명인간 취급을 받은 건 아니지만 아이들은 나를 자신들보다 조금 급이 낮은 인간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p. 78)'

나는 이호에게 어떠한 간섭도 충고도 하지 않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꽤 오래 지켰다. 매일매일 잠자리를 찾아 헤매는 것이 얼마나 고역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이호가 머무르고 싶어할 때 잘 곳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호를 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호와 가까워질수록 (가까워진다고 느낄수록) 이호를 마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p. 82)

인수는 이호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수 있었지만 여지껏 자신의 처세를 생각해봤을때 이호를 집으로 데려온 것만 해도 대단한 용기였다. 그런 능동성은 여태 가져본 적 없던 인수였다. 하지만 인수는 점점 깨닫게 됐다. 자신이 이호를 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호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그럴수록 인수는 경우가 생각났다....

경우는 성연과 달랐다. 부지런했고 예의발랐으며 구김살없이 사람을 대했기에 알바를 하는 어른들로부터 존중받았다. 가출팸이었어도 함께 머무는 공간을 앞장서 청소했고 무리 사이에 불화가 생기지 않도록 나름의 규칙들을 준수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경우 곁에서 나쁜 짓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p. 94)' 하지만 동시에 경우의 성격이 이해되지 않았다.

특유의 신중함과 타인을 향한 예의를 과연 누구에게서 배운 것일까. 스스로 터득했다기에 그 태도는 너무도 복잡하고 정교한 기술이었다. 사랑을 받은 만큼 고결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나는 납득할 수 있었다. 내가 이 모양이 된 이유가 명백해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경우 같은 존재는 왜인지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경우는 자신이 일곱살 때부터 보육원에서 살았다는 것을 어느 날 내게 말해주었다. 함께 지내던 쌍둥이들도 그곳 출신이라고 했다. 경우는 살면서 단 한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했고,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는 어머니와도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p. 99)

인수는 가출팸 아이들을 통해 지금껏 알지 못했던 세상을 알아갔다. 다양한 아이들은 다양한 사연을 품고 있었지만 문득 이해가 되다가도 그렇다해도 그 아이들의 행동이 다 용납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인수는 여기서도 뒤쳐졌지만 그래도 여기선 적어도 쫓겨나진 않았다. 오히려 인수보다도 경우가 더 독특한 존재였다. 그 밝음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그런 경우게게 자신이 한 행동은... 지금의 이 추위는 어쩌면...

"우리는 안 미쳤는데, 사람들이 우리보고 미쳤다고 하잖아" (p. 176)

나는 절박했다. 그때는 무작정 경우의 행동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무서웠고, 너무 무서워서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았다. (p. 177)

"아무도 우리 안 믿어줄걸. 우리가 이렇게 만든 거라고 생각할 걸" (p. 178)

그게 최선인지, 그것만으로 충분한지 그 순간 아무도 판단하지 않았다. 깊게 생각하고 의문을 가지길 포기했다. '우리집'에 모여든 아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상식적이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 아이들의 불안에 불을 지핀 것은 나지만 그런 나조차 아이들을 경멸했다. 우리는 증오를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었다. 억울해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p. 188)

억울했다. 억울한 일을 당했고 억울해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아무짓도 하지 않았지만 증오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고 아무 피해도 주지 않았지만 경멸어린 태도를 견뎌야 했다. 불안했지만 주변에 안전하고 안정한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쉽게 보고 이용하고 버리고 의심하고 심지어 미쳤다고들 했다. 이 아이들이 목격한 생애 첫 죽음 앞에서 이 아이들이 한 선택을 과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나쁜 일을 하지 않고 다들 어떻게 사는 걸까. 반복되는 일상을 저버리지 않고 평화를 일구는 법은 누가 알려주는 걸까. 그런 게 체득이 되는 인간들은 다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는 걸까. 동이 틀 무렵 창가에 어른거리는 고양이 그림자를 눈으로 좇으며 우리는 망했다고 홀로 중얼거렸다. (p. 196)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때 꼭 쓸모를 따져야 할까.. 심지어 부모자식간에 말이다...

사람이 삶을 살아갈때 꼭 의미있고 가치있는 시간인지를 따져야 할까... 심지어 내삶이고 내시간인데 말이다...

태어남만으로 사랑받고 살아감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선가 따듯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의 심연에서 바람이 휘돌며 서서히 내 몸을 녹였다. 이런 온기를 오래전부터 꿈꿔왔지만 막상 따스함을 느끼니 내게는 이런 온기를 누릴 자격이 없는 것 같아 괴로워졌다. 하지만 익숙해지기를 바랐다. 부디 한번 더 기회가 주어지기를. 햇볕을 쬐면 정화되기를. 경우 없는 세상에서도. (p. 258)

다행히 이 소설은 해피엔딩이다. 대개의 청소년문학이 그러하듯이.

가제본으로 읽은 터라 '작가의 말'을 읽지 못해 아쉬웠지만, 이 시대 어른나이의 사람들이 꼭 읽어봐야 할 청소년문학이었다. 세상의 온기가 1도라도 올라가길 바라는 어른나이의 사람이라면 말이다.

ps. 소설의 제목을 보며 <허구의 삶>이라는 이금이 작가의 청소년소설이 생각났다. 그 작품에서도 '허구'라는 이름과 단어로서의 의미는 중첩되며 작가가 부러 그런 것 같았는데... <경우 없는 세계>에서의 '경우'도 작가가 부러 중첩적으로 이름을 지은 것일까. 그런 연장선에서 보자면 A라는 이름?!과 이호 라는 이름 또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수'라는 이름또한 그런 중의적 이름으로 이해되어 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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