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존재다. 애당초 변화무쌍하고 복잡다단한 세상을 어찌할 방도가 나한테는 없다. 하지만 내 일신 파괴할 힘만은 아직 내 수중에 남아 있다. 만약 내 손으로 나를 무찌를 수만 있다면, 세상은 나를 더는 어쩌지 못할 것 아닌가. 내가 없어지고 난 자리에 남은 세상이란 실상 나한테 아무런 위협도 못 될뿐더러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죽음으로써 나하고 순번 바꾸어 이번에는 세상이란 놈이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존재로 전락할 차례가 되는 것이다. 내 의지로 의기양양한 세상 골탕 먹이고, 내 힘으로 건방지고 되바라진 세상에 치명타 가하고, 그럼으로써 견고하고 완악한 세상 응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선 나 자신부터 미련 없이 결딴내버리는 바로 그것이다.